피노키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6
카를로 콜로디 지음, 김양미 옮김, 천은실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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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내가 인터파크에서 이 책의 서평단에 신청했을 때 가장 끌린 건 피노키오에 대한 기억보다는 책 표지서부터 보이는 "예쁜" 그림체였다. 부드러운 색감에 아기자기한 그림체...예쁜 걸 사랑하는 내가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삽화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깜박 잊고 배송지를 자취방이 아니라 집으로 해놔서 엄마에게 전화로 웬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른 책을 보고 싶어서 주말이 기다려졌다. 총 2시간 반이 걸려 도착한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찾았다. 버스 안에서 늘어져 자서 머리는 부스스했고 눈은 살짝 부어있었다. 이것저것 쑤셔넣은 짐가방이 발밑에 떨어져 있었다. 엄마는 TV를 보다가 일어나 나와서 내 모습이 웃긴지 으하하 웃으며 저기 있다고 손짓으로 내 책상을 가리켰다.

 

아...쓰레기장같은 내 책상 위에 저렇게 예쁜 책이 놓여 있었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앞으로도 2주간은 청소할 계획이 없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어쨌거나 엄마는 내 물건은 무조건 내 책상에, 라는 공식 하에 가져다 놓은 듯 하다.

 

처음 본 '피노키오'는 생각보다 작아서 큰 책장보다는 책상 앞 작은 책장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펴보면 좋을 사이즈였다. 대충 비교하자면 다이어리의 평균적인 크기...라고나 할까. 양장본이라 표지도 반들반들하고 그림은 너무 예쁘고... 이렇게 생긴 다이어리가 나와도 좋을 것 같다. (그럼 난 또 사느라 돈을 허비하겠지)

 

피노키오라... 난 동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어지간한 동화는 알고있다고 (몰래) 자부하고 있다. 피노키오, 인어공주, 신데렐라, 엄지공주... 삽화도 좋고 해피엔딩도 좋고 무엇보다 그 아기자기함이 좋다. 그래서 피노키오도 나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럴수가.

 

피노키오...... 때려주고 싶다.....어쩜 이렇게 꼬맹이인지. 어린시절 봤던 피노키오는 어리숙하지만 유쾌했는데 그럭저럭 어른 대열에 끼게 된 후 보니 이건 그야말로 매를 부르는 꼬꼬마가 아닌가...! 몇 번씩 타일러도 지 멋대로 하기 일쑤고, 고집은 센데 아는 게 없다. 덕분에 옆에서 살짝 꼬시기만 해도 팔랑팔랑 팔랑귀가 되어 나쁜 길로 룰루랄라 노래까지 부르며 달려나간다.

 

한참을 으으...때려주고 싶다...를 연발하며 책장을 넘기느라 그 예쁜 삽화에 위안도 못 받고 있을 무렵...옆에서 끙끙 거리는 내가 이상하고 성가셨는지 컴퓨터를 하던 엄마가 뭔데 강아지마냥 끙끙대? 하고 물었다. 나는 열변을 토하며 꼬꼬마 피노키오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자 엄마는 또 으하하하 웃더니 "너랑 뭐가 다르냐"하고는 또 막 웃었다.

 

과연. 같은 종(?)을 은연중 싫어하는 내가 유난히 과민반응을 보인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야 쿨하게 인정하겠지만 어렸을 적의 나는 내가 고집이 세다는 것도, 여러 가지 충고를 해주시는 주위 어른분들이 (당연히) 나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꼬꼬마였다. 특별히 나쁜 짓은 안 했다쳐도 고집만큼은 피노키오 못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웃고있는 엄마를 보니 그냥 조용히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노키오에게 더 화내봐야 내 얼굴에 침뱉기니까.

 

묵묵히 엄마를 의식하며 책을 다시 읽으려니 이제껏 무시했던 삽화가 보였다. 화려하기 보다는 부드럽고 고운 색채에 팔다리가 짧아서 더 아기자기해 보이는 그림체가 잘 어울리는 페이지가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는 듯 했다. 삽화 속 피노키오는 하는 짓(?)과 다르게 눈도 똥그랗고 작은 팔다리를 활기차게 놀리는 아이라 제페토 할아버지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작은 애가 앞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면 어느 부모가 예뻐하지 않을까.

 

피노키오를 개과천선 시킨 건 자신의 깨달음도 있겠지만, 끈기있게 옆에서 돌봐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준 존재들 덕분이다. 더없이 너그러운 아빠, 제페토 할아버지와 항상 자애롭게 돌봐주는 엄마, 요정님, 간간히 등장하는 말하는 귀뚜라미 같은 동물들 덕분에 피노키오는 (번번히 놓치지만) 다시 한 번 바른 길로 들어설 기회를 갖는다. 그런 피노키오가 부러웠던 건, 내게 이제는 그런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겠지. 내가 어렸을 적 본 피노키오는 이렇게 자세한 버전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만화로 보면 내용보다는 재미에 치중해 코가 늘어나는 피노키오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나나 동생에게는 좀 늦었지만, 내 사촌동생에게는 아직 늦지 않았겠지. 다음 번, 사촌동생을 만나면 큰 맘먹고 내 예쁜 피노키오 책을 빌려줘야겠다. 그림 예쁘지 하고 어깨도 으쓱거려보고, 그러니까 너도 엄마랑 아빠 말 잘 들어 하고 오랜만에 어른인 체도 해봐야지. 아마 내 고집쟁이 사촌동생은 콧방귀를 흥 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 더 시간이 지나면 그 누나가 왜 그렇게 잘난 척했나, 하고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생각할 날이 올지 모른다.

뭐, 그런 게 그림책의 미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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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모으는 소녀 기담문학 고딕총서 4
믹 잭슨 지음, 문은실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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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일은 보석을 발굴하는 것과 같다. 가끔은 맞지 않는 책을 찾아낼 때도 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책이 한순간에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기도 한다.

뼈 모으는 소녀는 오랜만에 잡아본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이 얼마 없는 학교 도서관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은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작가의 이름과, 범상치 않은 책표지 그림 덕택인지 독서욕구를 자극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단언컨데.... 난 이제부터 이 작가의 팬이다..!!

내가 영어만 좔좔좔 했어도 당장 홈페이지(www.mickjackson.com)에 접속할텐데, 불행히도 영어를 보면 내 섬약한 신경이 더이상의 스트레스를 견뎌낼 것 같지 않아 당분간 미뤄두기로 했다. 작가의 다른 책들이나 찾아봐야지.

 

이 책의 원제는 Ten Sorry Tales로, 난 사실 우리나라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임팩트도 강하고. 물론 열개의 미안한 이야기들, 이라는 원제가 동화를 뜻하는 Fairy tales와 겹쳐서 말장난스러운 것도 마음에 들지만서도.

10개의 이야기가 한 책안에 들어가 있다보니 다들 단편이 되었는데, 하나 하나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정말로 하나같이 '미안한' 이야기들인데도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강렬해서 읽고나면 어쩐지 후련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두려운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다.

 

지하실의 보트라는 단편으로 시작하는 열개의 이야기들은 각자 음울한 듯 잔잔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보이는 현실과 어두운 면이 교묘하게 얽힌 판타지다. 판타지라 말하기엔 조금 거창할지도 모르지만, 현실 세상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을 일을 판타지라 부른다고 정의하자면, 확실히 판타지이긴 하다. 어느 누가 돈을 주고 은둔자를 고용하고(물론, 나는 돈이 넘쳐나는 부자들의 사고방식을 잘 모르겠지만) 핀으로 고정된 나비들을 살릴 수 있겠냔 말이다.

 

정말 고르기 힘들지만, 가장 기억나는 단편을 고르자면 역시 제일 처음 읽은 지하실의 보트가 되겠다. 믹 잭슨의 세상을 처음으로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소 내가 궁금했던 '지하실의 보트 꺼내기'가 소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시 아실까 모르지만, NCIS에서 깁스는 항상 집 지하실에서 보트를 만드는데 아무리 봐도 쪼꼬만 문으로는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보트가 시즌 3 혹은 4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걸 볼 수 있다. 그 어떤 살인 미스테리보다 날 괴롭히던 문제였기에, 믹 잭슨이 이 단편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모리스 씨는 전쟁에서 왼쪽 다리를 잃은 꼼꼼한 성격의 할아버지이다. 오랫동안 일했던 철물점을 퇴직한 후, 무언가 할 일을 찾아 고민하던 모리스 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탔던 것 같은 보트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차근차근 보트를 만들어 나간다. 모리스 씨가 문제점을 깨달은 건 보트를 다 만들고 난 뒤였다. 모리스 씨의 작은 지하실 문으론, 보트가 지나갈 도리가 없었다! 상심한 모리스 씨가 몇 날 몇일이고 보트를 바라보며 소일하던 어느 날, 마을에 홍수가 나 모든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할 때, 모리스 씨는 지하실에서 불어난 물에 보트를 띄우고 즐거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이 빠져나가 처참해진 지하실을 보수하고 넓혀가며 다음 홍수를 기대하고 있던 모리스 씨에게 군인들이 홍수를 대비해 막아놓은 모래 주머니는 큰 골치덩이였다. 비가 오기 시작해 모리스 씨가 분한 맘에 모래 주머니를 한쪽 발로 쿡쿡 찌를 무렵,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 모래 주머니를 일사분란하게 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홍수가 마을을 덮쳤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터널에서 신나게 보스를 타던 모리스 씨는...

 

까지만 하도록 하자. 마지막 부분이 제일 즐거웠으니까, 다른 사람도 즐겨야 할 여지는 남겨둬야지...

 

보트 이야기도 재밌었지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같은 경우에는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기억에 남는다. 뭐랄까,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도 많고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느라 늘어난 생각 덕에 공감을 한 이야도 있지만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해피 엔딩을 생각하고 있다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는 과장이고 생각이 더 많아졌달까. 핀은 엄마와 말다툼을 한 뒤 가출을 해 숲에서 지내고 그 동안 핀의 사려깊음과 자기 주장은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마치 숲 속에 사는 동물처럼. 인간으로서의 기억도 사라진 핀이 어쩌다 우연히 기억을 하나씩 되찾고 집에 다가갔을 때. 나는 핀이 엄마에게 달려가 안길 줄 알았다.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제일 슬픈 건, 핀의 생각에 내가 공감한다는 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였으면 좋을텐데, 라고 문득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삽화도 그렇지만 분위기에서 팀 버튼이 생각난 게 혹시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다. 삽화의 덕이 크지만, 비슷한 '판타지'고 우울하고 어두운 면을 다루지만 재미있고 나름 경쾌하다는 면이 닮은 것 같다. 아니면 말구..

 

혹시 도서관 가실 일이 있는 분께 꼭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생애 처음으로 그는 늙은이가 된 심정을 느꼈다. 쓸모없고 닮아빠진 부품이 된 것 같았다. (20)

-우연이란 세상이 때때로 당신의 관심을 끌려 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또 다른 나비는 어찌나 검고 촉촉하게 윤이 나는지, 마치 방금 전까지도 잉크병에 빠져 있었던 것 처럼 보였다. (32)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일이란 누구에게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는 견고한 진실이 당신 앞에 버티고 서는 일은 거의 없다. (39)

-이것은 이른바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표현하려는 것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경의이다. (108)

-그러나 어떤 생각은 견디기 어려운 가려움증 같아서, 그냥 내뱉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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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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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표지만으로도 매혹적인 책 위의 띠지에 쓰여진 이 찬사에, 그리고 가고일이라는 제목에 그저 무심히 중세의 러브 스토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가고일이라는 우리 나라에서는 생소한 단어에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어느 영화에서 본 음울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돌석상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두 다 어둡고 쓸쓸한 것들이라, 중세라는 가만 두어도 우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런 이야기겠거니. 유난히 졸렵던 토요일 오후, 책 두권의 무게를 손으로 가늠하며 그저 표지에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책을 받아든 그 날, 시험기간을 공부보다는 스트레스로 지쳐 돌파한 나는 책을 읽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자기 전의 무료한 시간을 죽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졸음을 이겨내며 책을 읽기엔 내가 아직 진정한 독서가가 아닌가보다,  스스로를 비죽여 가며. 하지만 좋은 책은 사람을 독서가로 만드는 법이었다! 심봉사가 번쩍 눈 뜨는 것마냥 핏발 선 눈을 뜨고, 침대를 구르듯 내려와 책장을 넘겼다.

 

말도 안 돼. 데뷔작이라니. 정말이지 좌절했다. 뭐든지 많이 하면 늘게 되어 있다. 책을 한 권 두 권 읽다보면 취향에 상관없이 잘쓴 책이 존재한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되고, 어느 책이 그런 책인가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글도 쓰면 쓸수록 느는 법이고. 그런데 이게 데뷔작이란다. 이 톡톡 튀는 언어들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는 작품이 무려 첫번째 작품이란다. 물론 이 작품을 쓰기 전에 수많은 습작이 있었겠지만 그저 놀랍고 감탄하고 (비교되는 나로 인해) 우울했다.

 

[가고일]은 내 예상을 시원하게 깨부수는 일부터 시작했다. 중세시대를 상상하고 있던 내게 난데없이 눈에 들어오는 마약에, 버번(술)에 차까지. 어? 하는 것도 잠깐 아직 이름도 모르는 주인공의 차가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초장부터 마약이 등장하고 이어지는 화상 이야기에, 뒤따르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우울한 어린시절이 줄줄이 흘러나오는데도 독특한 표현력은 마약처럼 읽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다사다난한 어린시절 덕분인지 천성이 그런 것인지, 주인공은 사람을 끄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로 들으면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 말투지만 지면상에서는 블랙유머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하긴, 화상을 입고 누워있는 사람이 사랑스럽게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겠지.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거대한 계획이 아이의 폐를 태워 없애는 거라는 사실을 일곱 살짜리 여자 애에게 말하는 건 몹쓸 생각이라고 믿는다." (52 page)

 

아, 나름 재치있다고 생각한 구절을 옮겨 써보았는데 이야기 밖의 구절은 책 안에서보다는 싱싱함을 잃는구나. 그 재치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꼭 다른 분들께 권해 드려야겠는데?

 

이 작가의 역량이 어느 정도냐 묻는다면, 이 작품 곳곳에 단테의 신곡이 배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등학교 때 포기하고 또 포기한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고 대답하겠다. 거기다 공감되는 구절은 어찌나 많은지. 일본에 있었던 사람인 만큼, 일본에 대해서도 해박해서 그 친숙함에 순간 놀라고 웃어버렸다. 외국에 갔다와본 나로서는 일본인도 아닌 서양인(캐나다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아시아인의 사정이 어찌나 웃기던지.

 

"서양 나라에서 살면서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여자로서도 작은 편인 사유리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종종 아동복 가게에서 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137page)

 

 

사실 이 책은 1,2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다 각 권의 두께 또한 척 보기에는 만만치 않다. 긴 이야기를 꺼리는 사람이라면 잠시 얼굴을 찌푸릴만도 하다. 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도 책의 두께와 이야기의 길이가 책을 읽는데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거라 믿는다. 정말이지 손을 뗄 수가 없으니까.

 

주인공은 인간적으로 결코 완벽해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적이야 주인공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커서는 에로영화계에서 이름을 떨쳤고 술에 마약에 방탕함까지. 거기다 어찌나 말을 얄밉게 하는지. 마음 씀씀이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처음 등장하는 주인공은 화상을 입은 몸뚱이 속에 한없이 가벼운 영혼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수백년간 기다리고 사랑해주고 기억해준 인연이 있다는 것 만으로 한없이 부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단편적인 사랑 이야기들 역시 잊을 수 없을만큼, 전체적인 이야기에 견줄만큼 사랑스럽다. 그렇다, 700년의 사랑이야기가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하다면 그 이야기들은 애틋한만큼 사랑스럽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바이킹 시귀르드르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만이 짝사랑과 가장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꼈다. 사랑스럽고 그만큼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웠는가? 사실 모르겠다. 바이킹 시귀르드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울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까 참아야만 했다. 날 울릴 뻔한 이야기가 포함된 이 스토리가 아름다웠는가?

나는 모른다. 모른다고 말하기는 정말이지 쑥스럽지만, 모르겠다. 나중에 사랑을 하면 알게 되려는가. 나는 그저 부러웠다. 700년을 우직하게 그야말로 심장을 내줄만큼 사랑한 누구가가 있는 마리안네가 부러웠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운에도 기다려주는 이가 있어서, 자신이 가슴에 품고 살아갈 이가 생긴 주인공이 부러웠다. 내가 아직 진정한 사랑을 알기엔 어려서 이러는가.

이 가슴 저리도록 부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분명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일터다.

 

그래, [가고일]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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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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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접한 한국 전래동화를 기억한다. 연년생이라 개구졌던 우리는 머리맡의 동화책이 없어도 잘 잤고, 두 손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자 하셨던 할머니는 한국 전래동화보다는 일본 이야기와 동요가 편하셨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본 한국 전래동화는 놀러간 친구 집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반지르르 빛나던 그 표지와 토속적 향기가 물씬 나던 삽화가 정겨워 기어코 한 권을 빌려 품안에 꼭 안고 가던 그 하교길에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더랬다. 빳빳한 새 책의 책장을 즐거이 넘기며 한 권, 두 권, 놀자는 친구를 골나게 만들며 읽어내려가던 책들 중에 바리공주 이야기가 있었다.

7번째 공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려졌는데도 친부모를 위해 저승까지 다녀온 바리공주. 삽화 속의 바리공주는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이 영롱히 빛났다. 붓으로 그린 듯한 선이 그려내는 바리공주가 너무 작아서, 그녀가 겪는 일들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어린 맘에 눈썹을 찌푸렸던 기억이 난다. 어째서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거야, 어린애다운 질문으로 나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리곤 다음 권을 집어들었다.

 

그 때로부터 십년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도 어린애마냥 철부지인가보다. 바리데기, 라는 책 제목에 되새김질한 바리공주 이야기에 여전히 화가 난다. 왜 널 희생해, 나는 이렇게 어리다. 하지만 십년이란 세월은 내 생각보다 길어 어린아이다운 순진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린 시절의 내가 화냈던 이유가 바리공주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걱정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그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잣대 아래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다.

 

바리데기, 바리공주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 바리. 이름은 운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바리의 운명은 7번째 딸로 태어났을 때, 바리라는 이름을 받았을 때 정해진 걸까. 우매한 나는 영리한 바리가 자신의 이름 뜻을 알아차렸는데도 허부적 의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바리의 삶은 고달프다. 바리공주처럼 끊임없이 고난을 넘기고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 서 있는 삶. 아슬아슬 줄타기를 타듯 흘러가는 삶을,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가족을 잃고, 그녀를 지탱해주던 할머니를 잃고, 동생과도 같은 개 칠성이를 잃었다. 바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고 얻는다. 남한의 사투리도 헷갈리는 내게 완전히 낯선 이북 사투리 속에 배어있는 할머니의 따스한 배려를 영영 이승에서 잃고 저승에서도 걱정하는 영원한 마음을 얻고. 주인을 지키려 우직한 죽음을 맞이한 칠성이를 이승에서 잃고 저승길의 동반자를 얻고. 그 끊임없는 고리 속에서도 바리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의연하다.

 

무속적인 내용이 많이 담긴, 어른을 위한 동화같은 느낌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과 어울어져 그 시대의 처절함을 담담한 말투로 엮어내는 글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이 어째서 이렇게 마음을 끄는가. 바리의 할머니에게서 나를 그렇게 귀애 하시던, 이제는 너무 커버린 내게 작아보이는 할머니가 떠오르기 때문인가. 주인을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는 칠성이에게서 나만 바라보는 우리집 강아지의 동그란 눈망울이 떠오르기 때문인가. 누구보다도 넓은 시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리 때문인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엾다는 바리의 말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가엽다. 배곯아 죽은 사람도,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도, 돈이 없어 타락한 사람도, 미움에 스스로를 망치고 있는 사람도. 하나같이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솟아오르는 감정은 연민.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스러움이었다. 미숙한 인간인 나는 여전히 누구를 미워하고 멀리하겠지만, 바리가 눈물 흘릴 때만큼은 모든 가여운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랬다.

바리의 삶이 행복하게 끝나기를. 온갖 고생과 설움을 겪더라도 늘 그랬듯 맑게 살기를. 고생을 모르고 지낸 철없는 동포의 마음으로 기원했다. 이 세상에 폭력은 끊이지 않고 파생되는 미움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을테지만, 부디 태어나는 아이는 평온 속에서 자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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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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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설레던 금요일이었다. 비록 어제까지 따땃하던 날씨가 다시 추워지고 있다고 해도,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난 수업덕에 집에 일찍 내려갈 수 있다는 건 모든 안 좋은 일을 상회해버릴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룰루랄라 말 그래로 발걸음도 가볍게 짐을 챙겨들고 버스 정거장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집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며 일찍 가게 됐으니 도서관에라도 들려 책이나 빌릴까, 하고 한가로운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기분 좋았던 날이었더랬다.

오랜만의 집 냄새에 냉기도 아랑곳않고 헤집고 돌아다니기를 서너시간. 빈둥거리기에도 질려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에야 집어든 책은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 어떤 이야기일까 두근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아...가슴이 턱하니 막힌다. 내 즐거운 금요일 저녁은 어디로 갔나.

내가 병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한사코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데. 내가 그 재밌다는 사랑과 전쟁을 안 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데.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봐야 했던거지? 아아- 얼굴을 있는 힘껏 찡그려 가면서도 끝내 책을 놓지 못하고 읽어버렸다. 호러영화를 무서워 하면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다 읽고 나니 처음엔 그저 재미있게만 보였던 표지마저 철의 표면에 녹이 든 것같은 초록색이었고 군데 군데 줄지어 보이는 붉은 얼룩은 전에 없이 우울해 보였다. 이래서 인생, 관점이 중요하다고 한거구나,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멍하니 표지만 내려다 보았다.

 

단편도 좋아하고, 블랙 유머도 좋아하는데 어쩜 이렇게 날 괴롭힐 수가 있는지.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린다면 모를까 거울을 들여다보며 종일 자기의 나쁜 점만 곰곰히 뜯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없을 거다. 자신에 대해서 장점을 더 아는 게 당연 즐거울테고.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꼭 내가 그 끔찍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느껴진다. 안 좋은 면만 계속 바라보고 있는 그런 우울증.

신문이나 뉴스를 들여다 보아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음침하게 만들 수 없다. 신문과 뉴스는 - 몇몇 감정적인 인터넷 뉴스는 제외하고 - 어디까지나 사실을 전달해야 하니 가벼운, 사회적으로 훈련된 양심이 작게 울렁이긴 해도 다시 내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감정이입하기엔 신문의 기사란은 너무 작으니까. 이 책은 그런 나쁜 뉴스를 신문에서, 뉴스에서 끌어내려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간다. 너무 씁쓸해서 가급적이면 알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너무 적나라 하게 펼쳐 보이기에 내 자기중심적인 뇌세포마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으니, 그게 작가의 의도었다면 이 책은 훌륭히 본연의 목적을 완수한 셈이다. 지나치게 훌륭히.

 

따뜻한 날씨가 고마웠다. 전철역도 있고 지하도도 있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노인의 집은 여전히 많았다. (127)

세상 사는 일엔 좋고 나쁜 굴곡이 있다는데 이 글 속의 주인공은 나쁜 일의 언덕을 힘겹게 넘어 휴- 하고 나도 변한 것이 없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에게 차갑고 매정한 곳이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씁쓸함과 부조리함과  자조감, 그 속에서도 휴, 하고 어딘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보인다. 험하게 굴려진 순박한 사람들이 눈을 깜박거린다. 돈이 있어도 악에 받힌 사람들의 눈은 번들거리고. 묵직하고 어느 한구석 시원한 기색이 없는 엔딩에도 그래도 잘됐다, 어쨌든 끝났다, 라며 스스로 얘기하는 내가 있었다.

 

생생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고 아, 어차피 이건 다른 세계 이야기야, 하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명색이 애완견이라는 개와 생존을 놓고 싸워야 한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장애인이 된 후로 성인용 인형에 집착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사랑의 방식이 폭력이라 믿는 편집증 환자에게 묶여버린 두 여자의 이야기를 읽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냐 말이다. 사회라고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인 학교가 전부인 미숙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끝없이 우울해 하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것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전혀 모르는 백치와도 같은 상태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 모든 부조리를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작고 무능력하지만 이제 두번 다시는 외면할 수 없을 거라는 날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사실뿐이었다.

 

아, 어떻게 그냥 외면하고 살아가면 안 되는 거였나? 내 금요일 저녁은 정말 멋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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