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그먼트 -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
워렌 페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난 어릴 적부터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였다. 그와 반대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예를 들자면 시험?)들에는 좀 둔감했다. 괴물영화라도 볼라치면 옆에서 동생이 새근새근 자든말든 그게 집에 쳐들어올까봐 잠이 오지 않았다. 영화 <불가사리>를 본 날밤, 난 1층인 우리 집 바닥에서부터 그 지렁이를 백만배쯤 확대한 것 같은 괴물이 갑자기 튀어올라 우리 가족을 다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근거없는 걱정에 휩싸였고 엄마에게 이 아파트 밑으로는 20m도 넘는 시멘트가 있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왜 납득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하지 않아도 좋을 걱정을 사서 하는 나에게 점점 쏟아지는 재난물은 현실과 다른 세계 사이의 어중간한 걱정을 피부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매우 피곤한' 장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좀 어른이 됐으니 재난물에 도전해볼까-'하는 봄철의 호기로운 시도는 '아...난 아직 멀었어...' 하는 자괴감으로 끝이 났다. <프래그먼트(Fragment)>는 괴물영화를 무서워 하는 내게는 너무도 높은 벽이었다...

 

프래그먼트(Fragment)는 영어단어로는 조각,파편 이라는 뜻이 있다. 뭐, 영어 단어 외우기라면 질색하는 나지만 책을 다 읽고보니 도대체 이 제목의 뜻이 뭔지 궁금해 견딜수가 없었다. 조각, 파편이라니 우리 생태계와 동떨어진 파편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멋진 뜻이 숨어있는지 아직 '헨더스 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머리로는 가려내질 못하겠다.

 

<프래그먼트>는 다소 두꺼운 책으로 표지의 붉은 제목과 기상천외한 생물들의 (지나치게) 섬세한 그림에 사전처럼 늘어선 그 생물들의 영어 설명,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이라는 글귀 하나로 독자를 압도한다. 그렇다. 허무맹랑하며 때로는 아침부터 날 오싹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잔뜩 나오는데도 호기심은 무럭무럭 자라나 괴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야할 사명감마저 든다.

 

<프래그먼트>는 경쟁에서 밀려난 피디가 과학쇼로 기획한 버라이어티 쇼로 과학자와 연예인들을 실고 바다를 여행하다 인간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인류 역사의 사각지대에 있던 한 섬에 내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섬은 피디가 기대했던 것처럼 신선한 특종이긴 했지만 배에 타고 있던 식물학자 넬이 기대했던 것처럼 '완벽한 생태계'를 보여주진 못했다. 반대로 섬은 출연자들의 대부분을 한순간에 삼켜버렸고 그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던 시청자들은 얼어붙었다. '헨더스 섬'이라고 불리는 그 섬은 '우리'의 생태계와 한참전에 뿌리가 갈린 외계라면 외계인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좁은 섬 안에서 살아남게 된 생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술렁이고 최고의 과학자들과 군이 나서서 섬을 탐색, 연구하지만 수수께끼가 풀릴 수록 피해는 늘어나고 절망만 깊어질 뿐이었다. 미지의 생태계, 헨더스 섬. 생태계의 뿌리에서 떨어져나온 파편인 그 곳에서 학자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

 

우선, 고백하자면 난 고등학교와 대학의 교육에도 불구하고 생물을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매우 취약하며 날아다니는 모든 것 - 심지어 나비라도 - 을 싫어한다. 난 아직까지도 인간의 몸의 메카니즘에 감탄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배우고 배워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한다. 진화란 훌륭한 것이다! 무섭기도 하지만.

 

이런 짧은 지식을 가지고 이 책의 생물학적 이론들을 보고 있으면 졸음이 가득하던 생물시간에 좀 더 잘 들어볼걸, 하는 생각이 든다. 제프리나 넬이 하는 말을 척척 알아들으면 '헨더스 섬'의 생물들을 좀 더 알 수 있을까. 저자 소개란을 보니 저자인 워렌 페이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아티스트들에 둘러싸여 '우리' 생태계와 동떨어진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냈다고 하니 얼핏 읽기엔 절대 세상 어디에고 없을 것 같은 그 '생물'들의 바탕엔 실재할 수 있는 생물로서의 가능성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외래종이 토종을 말살할 가능성이 높다, 는 것을 역설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 나라의 사래만 봐도 그렇다. 황소개구리는 우리나라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며 참개구리를 먹기 시작했고 키가 큰 외래종 식물에 밀려 우리나라 토종 식물들이 햇빛과 영양을 못 받아 말라죽는 일도 다반수라고 한다.

 

인간 세계도 치열하지만 생태계의 경쟁은 더욱 더 치열하다. <프래그먼트>를 보자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치열한 (물론 픽션이지만) 경쟁에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책 속 '대처'라는 과학자를 보자니 생태계 어느 동식물보다 인간이 가장 위험한 것 같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생물이라도 그것들은 '생존'을 지상명제로 삼고 살아간다. 살아남는 것, 후손을 남기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 중에서는 정치/사회적인 목적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헨더스 섬'의 생물체들은 끔찍하다. 삽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이 생물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먹이를 먹는지 상상만 해봐도 어지간한 괴물영화와 맞먹는다. 이게 실제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게 더욱 끔찍한 이유겠지만. 하지만 그런 생태계 속에서도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는 지성체가 있었다. 인간과 전혀 다르지만 인간과 달라서 더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생물이.

 

생태계 안에서 먹지도 않을 거면서 생명을 죽이는 생물은 인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대처'의 인간이 생태계를 망치고 있다는 이론은 맞다. 인간은 오만하다. 난 그런 오만한 인간이기에 이 책이 무섭고 또 무서웠다.

두껍고 어려운 생물이론이 곳곳에 있어도 <프래그먼트>는 흥미진진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책이다. 외계생물체, 괴물, 그리고 생태계 파괴에 관심 많으신 분이라면 더더욱 좋아하실 책이 아닐까 싶다.

 

 

- 실제로 지구 상에서 인류가 활용하지 못할 것이 없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개량하지' 않을 것도 없을 것이네. 그리고 무엇이 나오든 간에 신경 쓰지 않고 쉽게 버리지. 공해와 지구 온난화는 다가올 환경적 재앙의 예고일 뿐일세. 만약 인류가 스스로를 멸망시키지 않는다면, 아니 스스로를 멸망시켰다고 하더라도, 금세기가 다 가기 이전에 어머니 지구가 들어 있는 관에 최후의 못을 박아 넣을 걸세. (300)

 

- 장교들과 민간인들, 그리고 과학자들은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지구 상의 괴물들이 손쉽게 살육당하는 모습을 보고 동요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그것들이 치명적이고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치명적인 종이었다. 그것들이 순식간에 몰살당하는 광경을 보니 어떤 충성심이 공격받는 느낌이었다. (333)

 

- 넬의 심장은 마구 쿵쾅거리며 두방망이질을 했다. 인류보다 수백만 년이나 앞선 종족일지도 모르는 지구인들의 앞에 있으려니 넬 자신이 오히려 외계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특이한 감동이었다. "지적인 종임에 틀림없어." 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416)

 

- 헨더는 물결치는 듯한 눈부신 색상을 뿜어내며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헬로, 여러분!" 그는 플루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릴 구해줘서 고마워요!"
다른 헨드로들도 모두 선명한 색상을 밝게 빛내며 헨더의 옆에 모습을 드러내고 피치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플루트 같은 목소리로 일제히 합창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4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고백하자면, 난 이미 원작을 읽은 영화는 보지 않는 편이다. 아무래도 내가 읽으며 상상했던 목소리와 모습이 맞지 않으면 원작을 영상으로 본다는 기쁨보다는 실망감이 더 큰 편이기 때문이다. 영화 퇴마록이 그랬고 다빈치 코드 역시 일년이 지나서야 DVD를 빌려봤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원작을 찾아보는 편인데...애니나 영화에는 시간 제약이 있어서 다 표현하지 못했던 디테일을 원작에서 확인하며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원작인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내 예상에서 약간 빗나간 작품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현재 책을 읽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곳은 우리 학교 도서관으로, 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책도 어느 착하신 분이 신청해서 들어온 걸 게시판에서 보고 집어왔던 경우다. 물론 전에 봤던 애니메이션이 생각나 신나게 집어오긴 했지만 스토리도 어렴풋한데 이름이 기억날리가 없었다. (이게 바로 리뷰가 늦어진 이유...)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책이 예쁜 삽화와 표지로 새로 나온 모양이지만 난 아무래도 화려한 만화 그림체보다는 일러스트같은 삽화가 맘에 든다. 소재 자체가 타임 리프 같은 복잡한 이론을 다루고 있어서 원작 소설이 조금 더 길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 한 권의 책에 단편소설이 3편이나 들어있었다. 하나같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같이 조금은 가벼운 SF 이야기로 주인공이 다 여자아이라 더더욱 소재가 어렵다기 보다는 읽기 편한 감이 있다.

우선, 표제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의 이모 되시는 가즈코의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애니메이션의 기초가 된 듯 설정 자체는 비슷한 편이다. 여주인공인 가즈코는 친구인 가즈오, 고로와 함께 과학실 청소를 한 뒤 문단속을 하다 실험실에서 인기척을 듣고 들어갔다 난데없는 라벤더 향에 정신을 잃는다. 양호실에서 깨어난 가즈코는 자신에게 이상한 힘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비슷한 설정(3명의 친한 친구, 과학실, 타임리프 등)에서 시작했지만 소소한 설정은 확실히 시대(이모와 조카)가 다른만큼 약간씩 다르다.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캐릭터성으로 남자 주인공인 가즈오의 나이는 정말 반전 중의 반전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봤기에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것 같지만. 타임 리프 힘을 얻었다고 신나게 썼던 조카와 달리 이모는 갑자기 생긴 힘에 당황해 하고 현실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단편이기에 전개가 빨라 애니메이션같은 오밀조밀한 재미는 없지만 워낙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소설인만큼 갑자기 타임리프를 얻은 평범한 여자아이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

두번째 작품인 <악몽>은 세 단편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으로, 아무래도 이야기를 슬쩍 알고있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참신하지만 너무 짧은 보다는 소설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악몽이 개인적으로 훨씬 재미있었다. 마사코는 친구인 분이치의 집에 수학숙제를 하러 갔다가 전통 가면을 보고 까무라칠 듯이 놀라고 만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 마사코는 스스로 그 이유를 자문하기 시작하고, 결국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줄거리 추리기에는 약해서 재미가 반도 못 살았지만, 주인공 아가씨가 매우 박력있게 놀라기는 하지만 어찌나 논리적으로 생각을 하는지 당장에 심리학자의 길을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야기 자체도 귀엽지만 가장 귀여웠던 건 마사코의 동생인 겁쟁이 요시오였다. 엄마, 아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렇게나 영향을 받다니 심약한 게 너무 귀엽지 않은가! 비록 요시오 자신한테는 하나 하나가 큰 일이었겠지만...

The other world는 타임리프, 타임머신 등 시/공간을 뛰어넘는 츠츠이 야스타카의 이론이 집약된 작품인 것 같다. 내 성격이 워낙 대강대강인지라 읽으면서 시/공간 뛰어넘기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내 머리 안에서의 시/공간 뛰어넘기는 씨실과 날실같은 구조로 연상될 것 같다. 세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짧지만 내겐 임팩트가 무척 커서 책을 덮고나서 생각난 건 였다. 뭐랄까... 처음에는 굉장히 부러웠지만, 뒷쪽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호러틱한 무서움보다는, 그런 식으로 내가 이기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않은가! 거기다 한 순간의 생각에 따라 휙휙 바뀌는 세계라니. 어린 시절 현실감없이 생각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뒷골이 오싹한 단편이었다.

전체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다 나이대가 중고등학생이다보니 그 나이대의 풋풋함이 전반적으로 배어있는 것 같다. 실제 이 작품이 나온 시기가 60년대라고 하던데 그 시절에 SF적인 소재를 맛깔나게 살린 작가의 역량이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역시 애니로 나온 <파프리카>도 츠츠이 야스타카의 작품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들도 차근차근 찾아 읽어봐야겠다.

-보통 사람이 이런 희한한.....다시 말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당황해서 잘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고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있지. 본능적으로 이런 현상을 싫어하는 거야. 고로 군도 그런 게 아닐까? (72)

-과학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하는, 그 과정의 학문이야. 따라서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가사의한 현상이 없으면 안 되지. (72)

-미래에서 기다릴게, 꼭 기다릴게.....(135)

-'언젠가, 누군가 멋진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사람은 나를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알고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일지, 언제 나타날지,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멋진 사람과.....언젠가.....어디선가....(140)

- 우리 작은아버지가 심리학자인데 무서운 게 왜 무서운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어. (159)

-무서움을 꾹 참고 아득히 먼 아래의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난간 너머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혹은 갑자기 죽고 싶어져서 그대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가슴속에 가득 퍼져서 왁! 하고 소리 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워진다. (166)

-무섭다고 느끼는 것은 '죄의식'이 있어서래. (174)

-인간의 마음이란 어쩜 이리 복잡할까. 정말 이상하고도 재미있어....(185)

-노부코는 분명 시로에게 싸우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면서까지 잠자코 있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시로가 그 원수 같은 불량학생들을 혼내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노부코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시로가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33)

-다원우주, 그리고 동시존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연속된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역사를 가진 세계를 한 가닥의 날실로 본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그 날실을 무수히 가로지르는 수없이 많은 씨실이라 할 수 있다. (239)

-노부코는 이렇게 잔혹하고 인정사정없는 시로를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적어도 그녀 스스로는.....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2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사실 공포 장르는 좋아하기는 커녕 피하는 편이다. 어렸을 적 우연찮게 읽게된 공포 소설 한권 덕에 그 책이 있는 서재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 큰 지금도 <장화, 홍련> 한 편 보고 일주일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런 내가 '흡혈귀'가 나오는 <나는 전설이다>를 보고자 마음 먹은 건, 미신적 존재인 흡혈귀를 과학적 시각으로 풀이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나는 전설이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건, 내 어학연수 시절의 막바지였다. 윌 스미스가 주연이라더라, 라는 소식과 함께 3번째로 영화화 되는 <나는 전설이다>라는 작품이 한참 인터넷을 뒤지던 내 눈에 들어왔다. 정보를 접하기에 인터넷보다 빠른 곳이 또 있을까. 당장 신나게 정보검색에 나섰다. 미국 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작가라 자료는 무궁무진했다. 판독능력은 바닥을 쳤지만, 기대감은 부풀어만 갔다. 영화보다 원작 책 쪽에.

 

원작의 팬이었던 사람들은 이번의 영화가 전작 못지않게 실망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나는 전설이다"라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에서 느낄 수 있는 전설의 이중적 의미가 영화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원작 팬들은 다들 '헐리우드식 전설의 영웅'을 만들어놨다며 흥분하고 있는 듯 하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든 생각은, 책이 참 두껍다...였다. 그치만 두꺼우면서도 두께에 비해 가벼워 들고다니며 읽길 좋아하는 내 기호에 딱 맞아 흡족하기도 했다. <나는 전설이다>가 책의 절반밖에 오지 않는 길이였다는 건 좀 충격적이었지만. 뒤의 단편들의 기괴한 분위기도 나름 마음에 들어 즐겁게 읽어내렸다. 흡입력이 강해 읽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세시간여. 확실히 영화화할 만큼 비주얼이 강할 소설이었다. 내가 무슨 감독도 아닌데 읽어내려가면서 이미지가 떠올라 옛날에 유행하던 만화소설이라도 읽는 기분이었달까.

 

내용은 분량만큼 간단하지만 담긴 의미는 분량도 내용도 뛰어넘는다. 새로운 시각의(50년대였으니까) 흡혈귀와 "나는 전설이다" 고작 2마디에 압축된 모든 의미. 거기다 일상과 비일상을 절묘하게 버무린 묘사력까지. 왜 이 작품이 아직도 인기가 있는지 알만했다.

사람에게는 생존욕구가 가장 큰 본능이라고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먹고, 자고, 움직인다. 하지만 주인공 네빌에게 가장 큰 욕구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핵전쟁이후 모래폭풍으로 퍼진 '흡혈 박테리아' 덕분에 사람들은 죽거나 살아있거나 흡혈귀가 되지만, 네빌은 홀로 면역이 되어 있어 '인간'으로 남는다. 그는 흡혈귀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을 수리하고 무장하였으며 낮에는 잠을 자는 흡혈귀들을 '사냥'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생존본능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살아가기 위해 적을 죽인다, 는 건 가장 오래된 야생의 법칙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네빌은 영사기를 틀고, 레코드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외로워 했다. 그를 괴롭히는 건, 집 밖의 적들의 고함소리에 자신이 '홀로' 남았다는 걸 상기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욕구를 풀 존재가 곁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고,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추억이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네빌은 아마 뼈저리게 깨달았을 듯 하다. 그는 몇 년만에 자신옆의 다른 존재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에게 엔딩은 오히려 후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순순히 마지막을 수용한 그는 분명 사무치게 외로웠을거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전설이다"라는 대사로 끝을 맺는다. 분명 그는 전설이 되겠지. 정상과 비정상,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리뷰라고 해도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으니 직접적으로 말은 않겠지만, 흡혈귀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 매우 놀랐다. 가물가물한 학창시절의 생물시간을 떠올리며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정말 재밌으면서도 생각이 깊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한 번 보고 비교해 보고 싶다.

 

+공포소설 좋아하시는 분

+흡혈귀 좋아하시는 분

+미국의 쟁쟁한 공포소설 작가들의 정신적 스승이 누군지 궁금하신 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