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김사과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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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나는 맹렬히 자유를 찾아 다니진 않았어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교실의 보헤미안이었다. 남들 다 다닌다는 학원도 마다하고 하고 싶은 게임이나 읽고 싶은 책만 찾아 헤맸고 죽어도 빠질 수 없다는 야자를 거짓말을 불사해가며 제끼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아마 학교에서 나를 보기란 꽤 어려웠을 거다.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쉬는 시간에 도통 제 자리에 앉아 있던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성적이 바닥을 기는 건 아니었으니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공부한 셈이라고나 할까.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이해를 하든 말든 결과가 수학방정식처럼 깨끗하고 완벽하게 나온다면 어른들은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걸. 그게 내가 자유를 찾아 헤매도 큰 제재를 받지 않는 비결이었다. 적당히 적당히. 자유를 위해 눈에 보이는 결과를 저당잡히는 거.

 

그로부터 몇 년, 그 때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은 그게 못내 우습다. 되돌아보는 일은 그게 멀지 않은 과거임에도 쑥스러움과 민망함으로 그저 입가에 미소만 남길 뿐이니까. 그 당시 몰랐던 걸 지금은 알고 있기도 하고, 그 때 가지고 있었던 걸 잃어 버렸기도 하고. 몇 년 더 앞섰다고 지금의 아이들이 그저 측은하기도, 부럽기도 하고.

 

과도기, 라고 부르면 그 시간을 어렵게 넘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귀엽게 되바라진 미나에게 미안하고, 오싹할 정도로 엇나가버린 수정이에게 미안하고. 어떻게든 넘기기만 하면 되지, 라는 결과론적 생각은, 불행히도 인생이 아닌 수능까지만 통하는 개념이었고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한 아이들은 어딘가 일그러진 채 두고두고 후회한다. 수정이는 좀 더 자유로웠어야 했다. 규격화된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점수로만 평가되어선 안 되는 거였다. 점수가 인격을 표상화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체제를 쓰레기라고 비웃으면서도 그것을 얌전히 따라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 사이에 감정을 잃어버렸으니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던 옛 어르신의 말씀처럼 그 나이 때에는 좀 더 활기차게 살아야 했다. 신나게 놀다가 숨을 헐떡이고 격한 감정에 휘말려서 눈물도 뚝둑 흘리고. 친구와 투닥거리고 싸우며 입을 삐죽이고. 늘상 새로워 일기를 꽉 채우진 못해도 소소한 행복을 느꼈어야 했다. 물론 내가 학교 점수나 사회적인 결과에 신경쓰는 걸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그 사람의 미래에 관련된 일이고, 어쩌면 어떤 삶의 수준을 유지할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감정이 메말라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냔 말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거북함은, 배워야 할 것의 부재로 망가져버린 아이들이 불쌍하고 또 불쌍해서 한기가 되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읽기에도 불편한 아이들의 이야기와 나름의 생각을 착실하게 따라가는 소설은 어찌보면 곳곳에 광기에 차 있기도 하다. 수정이가 작고 작은 검은 고양이를 감정에 못 이겨 죽여버렸듯이, 무언가의 부재는 수정이를 이리저리 비틀어댄다. 소설 속에서 몇 번 나오지도 않는 부모님들의 존재는 수정이의 가슴 속에 자신을 깎아 내리게 되는 요소 중의 하나지만 그 덕에 수정이는 가족이 줄 수 있는 안락함 역시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감정을 자연스레 풀어내는 방법을, 수정이는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아는 거라곤 완벽해 지는 것 뿐이었다. 완벽한 수식, 완벽한 문장구조. 그렇게 완벽하게 가꾸어지며 감정을 표출할 입구는 점점 좁아지고 본능과도 같은 방법은 완벽함 속에 묻히고 만다.

그렇게 답답한 수정이에게 미나는 단 하나 남은 표출구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진 아이. 곁에 있음으로 해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친구 아닌 친구. 미나는 수정이만큼 완벽하지도, 그 반대로 아주 자유롭지도 않았지만 그 중간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을 조율할 줄 알았다. 그 것이 친구의 자살로 치우쳐버리고 말았지만. 수정이에게 그 과정은 단 하나 남은 감정을 자신으로부터 잡아 뜯기는 일과도 같았을 것이다. 미나가 '진짜' 감정을 느끼고 마음껏 표출하게 되면 자신의 감정은 가짜가 되어 버리고 마니까. 자신이 완벽하다 믿은 수정이에게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수정이가 가지는 감정은 보통의 친구들이 가질 수 있는 질투와 시기, 가벼운 독점욕이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서는 백치와도 같은 수정이 때문에 점점 상황은 꼬여만 간다. 수정이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깜짝놀랄만큼 어리고 무지해 갓난아이처럼 자신이 최우선이라 다른 이들의 감정을 살필 여력이 없다. 잃어버릴까봐 조급해 할수록 멀어져만 간다. 그 상실감.

 

왜 아이들이 그렇게 혹독한 일을 겪어야만 했나. 가엾이 죽어버린 미나가 불쌍하다. 미쳐버린 수정을 당해낼 수는 없었을 거다. 억울해서 어이할꼬. 하나뿐인 친구를 죽이고도 홀가분해 보이는 수정이가 측은하다. 언젠가 크게 후회할텐데. 무난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을 부재의 두려움에 크게 만들어 버린 아이가 한없이 작아보인다. 왜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는가. 조금만 다독이고 관심 기울여 주면 될 것을. 몸만 멀뚱히 커버린다고 정신마저 다 자란 건 아닌데. 살기가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아이들인데. 자신의 감정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선택한 아이가, 분명 어딘가 존재할 세상이기에 슬프다. 그것을 알면서도 무심히 지나치는 어른이 다수 존재할 세상이기에 불편하다. 그걸 여태 무관심히 방치했던 내가 생각나 기분이 나쁘다.

 

불편한 소설이다, 미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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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여신님 2020-06-27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0년에 이 리뷰를 읽어요. 감동적인 리뷰입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