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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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로 시작하는 <모모>라는 노래가 있다. 내 나이 또래가 알기에는 철지난 노래지만, 난 어쩐지 책 <모모>를 볼 때마다 머리 한구석에서 이 노래가 울리곤 한다. 사실 노래 제목이 같을 뿐 <자기 앞의 생>이라는 다른 소설에 기반을 두고 있는 노래지만, 어렸을 적 내가 처음 책 <모모>를 읽었을 때 엄마가 불러주신 노래였기에 내게는 모모의 주제가와도 같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의 책장은 보물 상자 같았다. 책을 좋아하셨던 엄마가 학창시절 용돈을 모아 사셨다던 누런 종이의 책들이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구석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쉬면 낡아가는 종이의 냄새가 피어올랐고 나는 무작정 책을 꺼내 읽고는 했다.

<모모>는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얇은 문고판 책 사이에서 유난히 두꺼운 책이 있어 뽑았던 책은 누군가가 정성스레 표지를 싸놓아서 제목을 알 수 없었지만 내용만큼은 따뜻하고 꿈을 꾸는 것 같이 재미있었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꼬마 친구 모모는 어느 날부터인가 다정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예전의 여유와 정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친구들을 일일이 방문한다. 이런 모모의 행동은 사람들 사이에 몰래 숨어들어 시간을 훔치고 있던 회색 신사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모모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모를 처리하기로 하지만 이것을 미리 알아챈 시간 관리자, 호라 박사는 정확히 반시간 앞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거북이, 카시오페아를 보내 모모를 돕는다. 호라 박사의 도움과 모모의 용기로 결국 회색 신사들은 사라지고 모두에겐 훔친 시간이 돌아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나날을 맞는다.

<모모>는 재미있는 책이다. 내가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시간 꽃의 아름다움과 신비한 거북이 카시오페아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다시 읽었고, 지금은 이미 회색 신사들에게 넘어가버린 듯 바쁜 하루 속에서 모모에게 위안을 받고 있다. 예쁜 꼬마, 모모. 표지 속의 모모는 그녀의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어 통통해 보이지만, 내 상상 속의 모모는 까만 동그란 눈이 반짝거리고 부스스한 검은 고수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작고 사랑스런 아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작은 아이가 열심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선물을 받은 느낌이 들테니.

내가 모모를 동경해서 사랑했다면, 회색신사들은 미워서 가여운 존재였다. 남의 시간을 훔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 인간들의 권태와 죽은 시간이 어우러진 그들은 마지막까지 어리석었다. 하지만 역시 <모모>에서 최고로 어리석은 존재는 회색신사들에게 넘어간 어른들이 아닐까. 깔끔한 계산에 넋이 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그 모습은 안쓰럽기도 했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불행히도 나 역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 앞에 회색신사가 나타나 이것저것 시간에 대해 떠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부터 시간낭비를 하지 않겠노라 맹세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게 늘 날 괴롭히던 고민이었으니까.

문득 놀다가도 내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하고 한기가 들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 뒤쳐진 느낌이 들어서. 바로 이럴 때 모모가 나타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니야, 네 시간을 꽃을 아름답게 지키고 있는 거지, 라고 말해준다면 나는 안도감에 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난 잘하고 있다고 믿으며 나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 가겠지. 현실세계에 모모가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책만 펴면 모모를 만날 수 있으니까. 꼬마 모모를 만나 다시 한 번 마음에 여유를 찾는다면 바쁜 하루에 책 읽는 시간이 대수일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모모>를 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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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윌러비 가족 생각하는 책이 좋아 2
로이스 로리 지음, 김영선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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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웃고 시작해보자. ㅋㅋㅋ
리뷰할 때는 웬만해서는 인터넷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 동화책에 관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읽으면서 딱 저렇게 웃었으니까. 또다시 대학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중의 한 권인 '무자비한 윌러비 가족'은... 놀랍게도 동화였다. 불행히도 전공책 두권은 너무 무거웠고 레포트를 위해 산 A4뭉치는 검은 비닐봉투 안에서 무겁게 흔들거렸기 때문에, 난 어쨌거나 읽을 책을 랜덤하게 골라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무자비한 윌러비 가족'은 순전히 얇아서 골라든 책이었다. 겉표지가 어쩐지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아기자기하게 귀엽다기 보다는... 동화책스러운 귀여움이었다) 설마 진짜 동화일 줄이야.
윌러비 가족은 옛날 이야기의 요소를 하나씩 모아 교묘하게 조합해 놓은 이야기이다. 네 형제, 버려진 아기, 슬픔에 빠진 부자 아저씨, 요리를 잘하는 보모 등등. 식상하다 못해 요새는 잘 쓰이지 않는 설정이지만, 이 유쾌한 이야기는 고르고 고른 식상한 소재로 새롭고 사랑스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윌러비 집안의 아이들과 부모님은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아이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이들은 부모님께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게다가 서로를 없애려는 계획을 세운다. -여기서 우리는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는 부분에서는 마틸다가 떠올랐지만... 마틸다는 부모를 없앨 계획은 세우지 않았어! 이러나 저러나 굉장한 집안이다. 하지만 그런 무자비한 부모에 아이들인데도 전혀 밉지 않은 게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인 듯 싶다. 부모님들은 너무 무심해서 오히려 유쾌하고, 아이들은 창의적이라 웃음이 나온다.

이 책의 또다른 묘미는 이야기 안에서 언급되는 명작들이다. 친절하게도 책의 뒷쪽에 언급된 작품을 모아서 간추린 내용과 함게 소개하고 있다. 무자비한 윌러비 집안의 아이들은 그런 작품들을 자주 읽었는지 줄줄 꿰고 있다. 아이들이 무자비한 계획을 짠 것과는 무관하게 독서를 좋아하는 착한 아이들인 게 분명하다. (고백하자면 그 중 몇 권은 나도 아직 안 읽어봤다.)

마지막이 동화답고 흐뭇한 해피엔딩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윌러비 아이들은 좀 '무자비'했다. (그런 점도 밉지 않지만) 아, 이제 윌러비 형제들도 수많은 고아 명작의 하나가 되는 걸까. 괜히 흐뭇해지는 걸.

우리는 무자비한(영어로 하면 ruthless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ruth(슬픔)+less(없다)'로 쪼갤 수 있으며, 소리만 따지면 '슬픔이 없는'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윌러비 가족이니까. (20)

쇠약해져서 죽게 돼. 난 슬픔 때문에 죽은 사람을 적어도 열두 명은 알아. 정말 끔찍한 일이지. (113)

오랜 세월을 통해 저는 알게 되었답니다. 애처롭게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지만, 깔갈 웃는 소리를 듣고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는 것은 늘 좋은 일이라는 것을요. (113)

사실 그게 억만장자들이 사는 법이란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슬프지만 말이다. '매입자 위험부담'이라는 말이 있잖니.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통해 우리는 돈을 벌지.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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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 라울 따뷔랭
장 자끄 상뻬 지음, 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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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실 프랑스 문학에는 문외한이다. 내가 프랑스 문화를 접한 건, 고작 꼬마 니꼴라와 장 자끄 상뻬의 책들, 사랑해 파리 라는 영화 뿐이다. 결코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아직 기회는 많으니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겠지. 더군다나 내가 접한 프랑스 문화는 어쨌거나 최고니까.

장 자끄 상뻬를 처음 '만난' 건, 꼬마 니꼴라의 삽화를 통해서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무렵, 주말에 놀러간 외할머니댁의 오래된 책장을 뒤적였을 때 나온 먼지쌓인 붉은 책이, '꼬마 니꼴라'였다. 코가 얼굴만한, 그리고 얼굴은 몸만한 쬐그마한 아이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굴러다니는 듯(실제로 그런 적도 많고) 통통 뛰노는 아이들의 이야기도 귀여웠지만 삽화! 그 귀여운 아이들! 그 아이들을 그린 게, 장 자끄 상뻬 라는 다소 길고 발음이 웃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삽화'만'이 아니라 책도 썼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된 때였다. 저번에 (네이버에) 리뷰한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 이어,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까지. 다음번엔 '뉴욕'을 읽고 싶은데 과연 여건이 될까 모르겠다.

장 자끄 상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충 그은 듯한 펜 선이 친근한 삽화에 눈이 가는, 귀여운 이야기였다. 다른 무엇보다, 상뻬 책의 장점은 삽화이다. 옆은 색감이 선과 어우러진 삽화 덕분에 짧은 분량에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지금은 손을 놓은지 한참 되었지만 예전 끄적거리던 나로선 시원한 듯 섬세한 그의 펜선이 옛날에도 지금도 마냥 부럽다. 손으로 그려 구불거리는 선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 같기도 해서 아기자기한 이야기에 꼭 맞는다.

이야기 역시 한없이 귀엽다.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라는 직접적인 제목처럼 자전거 균형을 잡지 못하는 아이(그리고 어른이 되어서까지)의 이야기인데... 뭐랄까, 한 페이지의 대부분을 이룬 삽화에 몇줄 되지 않는 글에 피식피식 웃음을 짓게 된다.

(이제 고작 2권 읽었지만)상뻬의 책에서는 친구관계가 유난히 자주 부각되는 것 같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친구'라는 관계가 그에겐 큰 의미였던 모양이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도 그랬고 이 작품,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역시 '친구'관계가 나온다. 조금 불완전하지만, 모든 관계가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평생의 비밀을 감추다 못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진실'되어버린 것이 지긋지긋하고 불안해진 따뷔랭씨는 그걸 털어놓을 사람을 찾지 못한다. 좋아했던 여자는 농담이라 생각해 화를 냈고 상냥한 아내 역시 남편의 사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친구라 여긴 사람에게 털어놓으려 했지만 타이밍이 나빠 결국은 그 앞에서 자전거를 탈 일이 생기고 만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술주정. 하지만 어쨌든 그의 나머지 인생은 평온할 것이다. 상뻬의 마지막 삽화 안의 그가 친구와 마주보며 웃고 있었으니까.

"라울 따뷔랭 자신은 원심력과 만유 인력, 그리고 중력의 법칙과 같은 신비로운 힘들을 다루는 데 지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25

"왜냐하면, 따뷔랭은 자신의 실패의 비밀을 밝혀 내보려는 희망을 가지고 자전거의 모든 부분(안장에서부터 베어링에 이르기까지)들을 방법론적으로, 줄기차게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수리를 맡기기 시작했다."34

"사람들이 웃기는 사람들을 정말 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젓한 어스레함이 주는 무게를 갑자기 깨버릴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이 웃기는 사람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둔다. 자신에게도 가슴이 있으며 이 가슴에는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혼은 때로는 남과 함께 나누고픈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내놓고 말하고 싶어지는, 낭만이 과하게 들린 사람들이 자주 당하는 유혹을 따뷔랭도 느끼곤 했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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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의 비밀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백설자 옮김 / 현암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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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펄펄 살아있는 인형들이야." 18p

사실 읽은 지 꽤 되는 책이라 메모와 내 기억력만 가지고 리뷰를 쓰려니 굉장히 두렵다. 가뜩이나 온갖 비밀스런 의미들이 넘쳐나는 이 책이 올바르게 소개되지 않을까봐.

소피의 세계에서 나를 반쯤 기절시켰던(중학생? 고등학생? 아무튼 그 시절의 나에겐 너무나도 졸려운 책이었다)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이 책은, 소피의 세계를 읽기 전부터 날 매료시켰던 책들 중 하나였다. 불행히도 내 안타까운 기억력 덕에 한동안 제목도 작가도 모른 채 끙끙 앓았지만, 책을 찾을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그 때에도 책의 내용들은 내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아빠와 함께 아테네, 혹은 그리스 어딘가에 있을 엄마를 찾아 떠나는 소년, 한스 토마스가 여행을 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독특한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서인지 나름 침착하고 생각이 많은 한스 토마스를 찬찬히 따라간다. 책에서 한스 토마스의 아빠는 종종 "한스 토마스야,"라고 풀네임을 불르는데 어쩐지 그 느낌이 좋아서 입에 착 달라붙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아빠가 내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부르면 좀 무섭겠지만...(뭔가 찔리고 있음)

소피의 세계, 마법의 도서관에서도 날 미소짓게 했던 요슈타인 가아더 작품의 세심함은 여전하다. "카드의 비밀" 제목 답게 책에서는 카드가 실컷 나온다. 특히 조커가 제일 중요한 카드로 비춰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좀 아프지만 읽다보면 조커에 어쩐지 정이 가는게 또 묘하다.

이 책의 소제목은 글귀가 아니라 각 카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에이스, 다이아몬드 2 등등... 그 순서 또한 나름 의미가 있으니 책을 읽으며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엄마를 찾으러 아빠와 둘이 떠나는 여행이라 책의 반이상은 아빠와 한스 토마스의 대화나 마찬가지다. 한스 토마스 생각에 의하면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아도 될만큼 철학자같은 아버지와, 여행 중 겪는 신비한 일을 통해 점점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한스 토마스의 대화는 이게 과연 정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인가 싶을 정도로 철학적이다. 읽으며 잠깐, 이래서 엄마가 떠난 건가, 하고 실없는 생각도 해봤다.

한스 토마스의 아빠는, 소위 사생아라고 하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다. 적군과 사랑에 빠진 할머니는 그 군인이 떠난 후에 한스 토마스의 아빠를 낳아 길렀다. 아빠에게는 카드의 조커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한스 토마스는 이런 과거 덕에 아빠는 스스로를 '조커'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간 엄마를, 되찾아 오기 위해 아버지와 길을 떠나는 한스 토마스는 주유소에서 만난 난쟁이가 준 돋보기로, 어느 한적한 산골마을의 빵집 할아버지가 빵에 넣어 건네준 꼬마책을 읽으며 점점 이상한 일을 겪는다. 책속의 책,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진 꼬마책은, 동화스럽다못해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바다를 표류하던 남자가 내리게 된 섬에서 그는 '카드'들을 만나게 된다.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해대는 카드들의 틈바구니 속에 홀로 살아가던 한 할아버지와 만나게된 그는 그 할아버지가 실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카드'들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상상력이 낳은 산물이라는 것을 털어놓는다. 상상물의 산물인 카드들은 그 사실을 아는 것을 무의식중에 거부하고 있었지만, 오직 조커만이 그것을 눈치채고 카드들에게 폭로할 마음을 먹는다. 카드들의 축제에서 각자 준비한 글귀로 이야기를 만드는 '의식'에서 모든 진실이 꿰맞치고, 카드들은 자신들이 피조물이라는 걸 알고 동요한다. 그 와중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는 조커와 함께 섬을 급히 빠져나왔다. 꼬마책을 읽고 있던 한스 토마스는 꼬마책의 내용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과 맞물리는 '실제'이야기라는 걸 알고 꼬마책을 넘겨줬던 할아버지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테네에서 엄마와 만난 아빠와 한스 토마스는 사이좋게 가족으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역시나 요약에는 자신이 없는 나; 무슨 이야기인지 영 모를 정도로 써놓았지만, 실제로 읽으면 그 구성이 치밀하고 흥미진진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난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에 새삼 감탄했다. 꼬마책에 나오는 카드 달력은 정말로 기발했다! 정신없이 읽던 내게는 좀 복잡해 세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무 기발해서 나도 한 번 써먹어 봐야겠다,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꼬마책과 한스 토마스의 세계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여러 가지 힌트들을 뿌려놓아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서 조커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 처럼;; 한스 토마스의 집안은 대대로 '조커'였다. 어느 곳 한 곳에 가족과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던, 그리고 버려져야만, 아니 남겨져야만 했던.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 하나 잘못한 게 없는데도. 조커는 어디까지나 자유롭다. 카드에는 4가지 소속이 있지만 조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덕분에 자유를 얻었지만 소속감이 없다. 조커가 자유를 느끼기 위해선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한스 토마스는 집안의 가장 어린 조커였지만, 모든 조커의 대를 마무리 지었다. 직접 엄마를 찾으러 나가 되찾아왔고, 아빠마저 믿지 않았던 꼬마책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아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조커가 있을 것이다. 자유와 고독, 양면의 동전같은 존재가.

+철학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분
+소피의 세계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
+요슈타인 가아더가 좋으신 분
+세상을 독특하게 바라보고 싶으신 분

http://niarain.tistory.com2009-05-28T15:20:24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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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도서관 - 소설로 읽는 책의 역사
요슈타인 가아더.클라우스 하게루프 지음, 이용숙 옮김 / 현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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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피의 세계」의 저자로도 유명한 요슈타인 가아더의 다른 작품. 이 책은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프로젝트(?)가 한 번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맘에 들었다. 저자는 요슈타인 가아더 말고도 클라우스 하게루프라는 작가가 한 명 더 있다. 가아더와 하게루프는 각각 전화, 팩스 상으로 주고받으며 집필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두 명 나오는데 각자 한 명 씩 역할을 맡아 써내려 갔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릴레이 정도가 될까. 소설 커뮤니티나 비툴 커뮤니티 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지만 이렇게까지 흥미있는 건, 역시 작가들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표지는 크빈트 부흐홀츠라는 몽환적이면서 상상력이 넘치는, 그러면서도 잔잔한 그림풍을 지닌 화가의 작품으로 「마법의 도서관」에 꼭 맡는 표지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화가의 작품집이 한국에서도 출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검색해 보시길~ (그냥 네이버 검색만 해도 쏟아져 나옵니다...)

'소설로 읽는 책의 역사 마법의 도서관'이 이 책의 긴 제목인 만큼, 책을 읽다보면 '책'에 관한 역사, 정보를 얻게 된다. 그것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작가 두 분이 다 오슬로에 살고 있던 관계로 노르웨이의 지명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리에 약한 나로선 그게 무슨 판타지에 나오는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지명 이름이 (어찌보면)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으니 유심히 살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참고로 오슬로는 노르웨이의 수도로, 노벨 평화상이 수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밑의 사진이 오슬로의 풍경. (출처 : http://www.fjord-tours.com/oslo/)



다른 한 곳은 책에 따르면 피엘란, 현재의 표기법으로는 피어랜드라고 하는 곳으로 그렇게 도시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평화로워 보인다. (출처 : http://www.fjaerland.org/)

아까도 말했다싶이 이 책은 작가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설정해 주고받은 원고를 모아 만든 책이다. 가아더는 둘 중 1살 많은 야무진 사촌누나인 '베이체'를, 하게루프는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무모한 '닐스' 를 맡았다. 책 안에서도 서로 떨어진 지방에 사는 두 사촌은 방학을 함께 보내고 난 뒤 '편지책'을 쓰기로 결정한다. 편지를 편지지에 쓰는게 아니라 노트에 써서 보내고 다시 돌려받는 형식으로, 말하자면 교환일기쯤 되겠다. 물론 보통의 교환일기보다 스케일이 (일단 우표 값이!) 크지만서도. 각자의 글 앞에는 닐스와 베리체의 아이콘이 있어 누가 썼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정말로 우체국을 통해 주고받은 '편지책'이고 2부는 닐스가 베리체가 사는 피엘란에 간 관계로 직접 주고 받은 듯 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정말 웃음이 나는 게, 사촌지간이 주고받은 편지라 그런지 격의없으면서도 귀여운 표현이 자주 나온다. 서로를 정답게 비꼬는 표현이 나오는 건 당연한거고 "짱"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나와서 풋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용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사이좋은 두 사촌은 각자의 일상을 전하기 위해 편지책을 쓰기로 결정했지만 자꾸 주변에서, '이상한 여자', 비비 보켄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오슬로에서 봤던 그 여자는 베이체가 사는 피엘란에도 나타나고, 순식간에 어린이 탐정단으로 변모한 둘은 각자의 방법으로 그 여자의 비밀, "비밀의 도서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비비 보켄과 떨어진 곳에 사는 닐스에게는 그 여자와 관련된 듯한 사람이 자꾸 나타나 일상의 평화로움을 비틀지만 치기어린 닐스는 소심하게 겁을 먹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비록 덜덜 떨지라도.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선생님 부부와 자꾸 닐스의 곁을 맴도는 '스마일리' 때문에 닐스는 책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이 넘치는 추리(...)를 거듭하고 베이체는 그런 닐스를 '사실'에 근거한 추리를 하자며 타이르면서도 역시 상상력이 펼쳐지는 걸 막을 수 없다. 결국 밝혀진 비밀은 비비 보켄은 '책의 해'를 맡아 노르웨이 중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로 한 책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베이체와 닐스가 방학 때 쓴 시를 읽고 이 아이들에게 맡기자, 라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영감', 즉 여러가지 의심가는 상황을 만들어 줘 상상력과 박진감이 넘치는 '편지책'을 쓸 수 있게 한 거였다. 의심가는 선생님 부부는 비비와 대학 동창이었고, '스마일리'야 말로 비비와 아이들을 방해하는, 출판업계에 도전하는 '비디오' 업계의 관계자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몰랐던 책에 관한 지식들이 흥미진진하게 튀어나온다. 서지학자(bibliographer)의 기원이 그리스어로 책을 뜻하는 biblion에서 왔다는 것도, 고판본(incunabula)가 라틴어로 아기의 요람 또는 첫 출발기를 뜻하는 incunabula에서 왔다는 것도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현재도 도서관에서 쓰이고 있는 분류방식이 듀이의 십진분류표(DDC)라는 사실에 도서관을 떠올려보며 눈을 빛냈고, 37P의 곰돌이 푸 이야기는 선연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기 돼지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바지 멜빵을 태어나서 단 한 번 밖에 보지 못했지. 그런데 그 멜빵이 어찌나 새파란 색이었던지 한 번 보고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거야. 아기 돼지는 그 바지 멜빵을 다시 본다는 상상만 해도 엄청나게 흥분하곤 했지. 그러면서 끔찍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졌지. 만일 그 바지 멜빵이 진짜로 그렇게 눈에 시리도록 새파란 색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걱정이었어. 만일 그 멜빵이 아기 돼지가 이제까지 수없이 보아온 보통의 별볼일없느 파란 색이라면? 하지만 크리스토퍼 로빈이 재킷을 벗었을 때, 아기 돼지는 기뻐서 기절할 지경이 돼. 그 바지 멜빵이 정말 자기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 시리도록 새파란 색이었거든. 그래서 아기 돼지는 그날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그저 별것 아닌 멜빵 이야기 같지만, 사실 거기엔 그 이상의 뜻이 담겨 있어. 이 이야기를 읽으면 난 어떤 돛단배 그림이 떠올라. 언젠가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 묵었던 어느 시골집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야. 그건 분명 아주 평범한 배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로 보였지. 매일 저녁 엄마는 나한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난 그 돛단배를 타고 지구를 돌며 낯선 나라들로 배를 저어갔던 거야. ~(중략) ~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기분이 크리스토퍼 로빈의 바지 멜빵 이야기를 읽었을 때 느껴졌지. 그래서 난 책 읽는 걸 그처럼 좋아해. 책을 읽을 때면 어느 정도는 나 자신도 작가가 될 수 있거든. (38p)

표지부터 내용, 읽고 난 후의 여운까지 완벽한 한 권의 책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오랜만의 강력한 책이다(실제로 이모에게 권했지만 사촌 남동생이 어려 거절당했음)! 
+흥미진진한 어린이책을 좋아하시는 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책을 좋아하시는 분
+소피의 세계를 알고 계시는 분
http://niarain.tistory.com2009-05-28T15:22:01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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