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소설
장 미셸 코엔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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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내 눈에 띄인 건 작년이었다. 오색찬란한 하드커버도 눈에 확 들어왔지만 사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바로 제목. 다이어트 소설! 다이어트라니 이 세상 여자 반이상이 반응할 그 단어가 당당히 소설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 책을 뽑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났다. 하지만 소심하고 컴플렉스 투성이인 난 쓸데없는 자격지심에 몇번이고 책을 들었다 놨다 하며 소심의 극치를 (도서관 CCTV에게) 보여줬고 결국 사람이 한적했던 어느 날 조심스럽게 뽑아 후다닥 대출해 집으로 뛰어왔다.

책은 두껍고 하드커버지만 생각보다 가벼웠고 무엇보다, 진부한 말이지만, 손에서 놓을 수 없을만큼 재밌었다. 아주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날신해진다'는 일에 나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비록 게으름과 넘치는 식욕으로 제대로 시도해 본적은 없지만서도. 의식할 필요도 없는 제목에 굳이 과민반응했던 것도 실은 내가 스스로 날씬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을 들고 집까지 종종걸음을 치며 책장을 넘기고 싶은걸 꾹 참고 있었다.

나는 다이어트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재기넘치는 이야기를 읽고 자기위안을 삼고 싶었다. '다이어트 소설'은 '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소설의 주 무대는 살을 빼는 클리닉이며 주인공들 모두 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살'이라는 외면보다 '사랑'이라는 내면에 집중한다. 왜 사람들은 살이 찔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몸매/몸무게에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을까?

작가는 '파리 클리닉'의 의사, 닥터 마튜 소랭을 통해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말한다. 닥터 마튜는 모든 의사의 귀감이 될만큼 환자를 위해 애쓰고 환자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의사다. 그의 클리닉은 단순히 살을 빼거나 섭식장애를 고치기 위한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마음의 결핍 또한 치료해 나간다. 닥터 마튜가 있기에 사람들이 변할 수 있었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각자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안고 클리닉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부모님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 없어 먹기를 거부한 거식증 환자 사라, 쓸모가 없어졌다고 고용주에게 버림받은 유명 디자이너 랄프, 엄마의 바람을 알고 한없이 실망한 치대생 에밀리, 품위와 자존심으로 가족간의 사소한 비밀을 몇년이고 오해한 델핀, 남편의 바람에 상처받은 유쾌한 릴리안. 사람들은 낙원과도 같은 클리닉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지탱해가며 상처를 치료하고 마주볼 용기를 얻는다. 그 사람들은 '먹는 것'을 자신의 탈출구로 삼았고 그 결과로 더욱 스트레스를 받고있는 섬세한 사람들이었고 악순환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믿음뿐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 또한 필요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시각은 새벽 1시였다. 사실 자기 전 가볍게 프롤로그만 읽으려고 집어든 거였는데 끝내 끝까지 다 읽고 늦게 자고 말았다. 나는 비록 클리닉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스스로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긴 그 사람들이 부러웠고 존경스러웠고 사랑스러웠다. 스스로 어쩔 수 없다면 도움을 구하는 것 또한 한 방법일 것이다. 그 결과로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순간의 자존심이 문제일까. 그렇게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기특한(내가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지만) 사람들 중에서 랄프는 독보적인 존재다. 사실상 닥터 마튜가 영양학적인 면에서 균형을 잡아주었다면 랄프는 정신적인 면에서 사람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준다. 랄프의 경험과 굳은 의지는 사람들을 한 팀으로 묶어주었고 랄프에 비해서 어린 사람들에게는 든든한 보호자를 만들어 주었다.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길에 자신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나이를 떠나서 대단한 사람이다. 사랑이 분명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사랑'은 사람에게 살아갈 힘과 희망,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클리닉의 환자들이 사랑을 회복하고 나서야 살이 빠지고 삶의 목표를 잡게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까.

비록 원하고 예상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유쾌하고 내 컴플렉스를 간접적으로나마 해소시켜준 유익한 책이었다. (책 속의 식단은 챙겨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이 책을 읽기만 해도 행복해져서 살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환자들은 자기가 겪는 고통만큼 그대로 표현을 하곤 하지요. 사라는 사랑이 넘치는 아이예요. 자기가 아직 주지 못한 사랑, 아직 받아보지 못한 사랑...(28)

-랄프는, 인생이란 수많은 관문을 헤쳐나가야 할 문제들의 연속임을 알고 있었다. (67)

-사라는 자신에게서 욕구라는 감정이 샘솟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차갑기만 하던 몸이 서서히 따뜻하게 풀리는 현상을 느꼈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이토록 감미롭다는 것조차 그녀는 잊고 있었다. (73)

-더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마튜의 말이 옳았다. 지금이야말로 에밀리가 스스로를 지켜야 할 때인 것이다. (148)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견딜 수 없는 고통까지 감내해야 하는 에밀리의 온몸이 부를 떨렸다. 이런 내부의 학대는 망가진 위장에서 전해지는 그 고통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158)
-대신 그 질문들을 내부에 감춰두고 침묵이라는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그리고 수많은 양의 칼로리로 그 질문을 덮어버렸다. 그것은 고통의 주머니와도 같았다. 몇 년 동안이나 꾸역꾸역 먹어치운 음식물로 가득한 고통의 주머니. (179)

-뚜렷하고 새로운 목표 없이 보낸 요 몇 년이 자신을 살찌게 한 원인은 아닐까? 매일매일 같은 일만 반복하는 지겨운 일상이 그의 육체에 반영되어 예전과는 다른 육중한 몸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 (195)

-접히고 또 접힌 살, 둥뚱하게 나온 배, 팽창할 대로 팽창한 피부는 곧 자신의 엄청나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들이 건넨 몇마디의 말로 곧 사라져버렸다. 이런 말의 힘, 특히 침묵하고 있었던 말의 힘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299)

-그렇게 꽁꽁 묶어놓고 참기만 할 게 아니라, 제 안에 있는 눈물을 다 쏟아놨어야 했지 않나 하고 말입니다. 그 눈물이 쌓여 몸이 이렇게 부은 것 아니겠어요! (401)

-살을 빼고 싶다는 욕구 속에는 몸을 바꾸고 싶은 욕망이 들어 있다네요. 번데기가 나비로 변태하듯이요. 결국 살을 빼서 우리가 닮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새롭게 출발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겠죠. (403)

-환자를 만나면 만날수록 느끼는 건데, 그들은 흔히 고통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경우가 많아. 물론 나도 그래. 얼마든지 다른 곳을 향해 문을 열고, 좀더 즐겁고 나은 것을 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렇게 마음을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것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발판이야.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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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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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난히 고유명사에 약한 편이다. 사람 이름부터 시작해서 지명, 나라 이름 등등 그저 고유명사기만 하면 내 머리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느 순간 까맣게 잊혀지곤 한다. 익숙(해야)할 우리나라 지명도 그런데, 다른 나라 지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후쿠오카, 사가, 세후리 등등 지명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집중력이 떨어져 버렸다. 불행히도 지명에만 약한 게 아니리 지리에도 약한 나는 지명으로 점철된 설명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그 곳이 어떤 장소인지 파악하길 포기했다. 사실 장소가 아무렴 어떠냐,는 얄팍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만.

후아, 다 읽었더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이 갑갑했다. 도대체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깜깜했다. 이게 동정인지 누군가를 향한 경멸인지. 그것도 아니면 동질감인지. 내가 어렸을 적의 악당은 별다른 이유없이 그냥 나쁜 놈이었다. 사람을 업신여기고 미워하고 죽이는 '순수'한 나쁜 놈. 그런 악당들을 미워하는 데에는 아무런 고민도 이견도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악당들이 점차 '인간적'으로 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애초에 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할만큼 뻔뻔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는 악당 쪽에 호감을 주고 있었는데 '악당'들이 이유와 생활을 갖기 시작하자 선과 악의 이분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렴풋이 이 세상에 사실은 선과 악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론으로 알기 시작했지만,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경험이 모자란 듯 싶다. 난 아직도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곤 하니까.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이 소설은 도통 '구분'할 수 없는 책이다. 착한 사람인 듯 하면 아닌 것 같고, 나쁜 놈인가 하면 그저 어리석을 뿐이고. 난 딱히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사람은 알고보면 다 착한 면이 있는 건 확실하다. 다만 그게 겉으로 드러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성격에 묻혀있는지가 다를 뿐. 이 책은 그걸 노골적으로 펼쳐보여준다.

난 사실 처음 책을 읽을 때 '요시노'라는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퉁명스럽게 구는 거야 남말할 처지가 아니지만 친구들에게 부리는 허세나 만남 싸이트 같은 일들을 보면 아무래도 난 요시노를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으면, 요시노가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감정이 누그러지는 걸 느낀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요시노에게서 발견한 작은 동질감 한 조각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거다.

요시노의 허세는 자신의 말을 액면 그대로, 즉 순수하게 믿어주는 마코 앞에서 빛이 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허세를 부리는 사리 앞에서의 요시노는 어딘가 초조해 보인다. 그건 아마도 사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순진한 마코 앞에서보다 더 확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정도야 다르지만 좀 더 잘나보이고 싶어서 작은 허세를 부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요시노. 요시노는 좀 더 나이가 들어 자신의 어린 날을 부끄러워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가 요시노에게 이런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는 건, 요시노의 아버지, 요시오의 행동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책의 인물 중에서 마스오가 제일 '악당'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가 저지른 '범죄'는 없지만 그는 여자를 한 밤의 산 중턱에 버리고 와도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단지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남들에게 우쭐해서 자랑하고 가볍게 떠벌리는 멍청이 이기도 하다. 그런 마스오의 앞에서 요시오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지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기껏해야 내가 느끼는 감정에서 퍼올린 단면이라 난 실제 그런 상황에서 겪을 가슴의 고통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의 앞에서 충동적으로라도 아무 일을 저지르지 않은 요시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런 놈 때문에 아저씨 인생까지 망칠 것 없어요, 라는 심정이었달까.

이 책의 인물 중 철저히 '피해자'인 요시노의 부모들과 달리 유이치라는 존재는 독특하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물론 실제 삶 속에서 어느 누구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유이치는 다른 사람을 극단적으로 배려하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버림받았던 그에게 자신의 욕구는 극히 미미하며 한정된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그런 그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타오르는 분노와 사랑이. 어찌보면 유이치는 늘 사랑을 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직도 버림받았던 어린아이처럼 우물쭈물 누군가를 기다리는 유이치를 보며 동정심이 일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요시노는 어떡해. 이미 죽어버린 요시노와 자식을 먼저 보낸 요시오는 어떡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진실을 굴곡없이 알린다는 게 이렇게 힘들까. 사람을 100% 있는 그대로 대하면 진심이 전해질까. 자문해봐도 아니라는 답을 내놓는 내 자신이 슬프다.

끝내 유이치의 진심을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난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서글프고 가여워서 끝내 마음이 무겁다.

-이제는 시간이 흘렀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것은 배신한 쪽의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걸 미호는 새삼 깨달았다. (157)

-그러나 진실을 진실로 전달하는 게 이렇게도 힘든 일인지는 몰랐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거짓말을 지어내는 게 훨씬 편할 것 같다고 하야시는 생각했다. (165)

-세상에서 하는 말이 맞는 거죠? 그 사람은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악인을, 저 혼자 들떠서 좋아했던 것뿐이죠. 네? 그런 거죠? (475)

-그랬더니 그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라고 하더라고요. (466)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비웃는 마스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스오의 이야기를 듣고 웃는 두 젊은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요시노를 비방 중상하는 편지를 보내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시노를 행실이 나쁜 여자로 치부해버리는 와이드쇼의 해설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450)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448)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439)

-그렇지만, 그래도 아버님이 어떻게든 마스오에게 항변해주길 바랐습니다. 침묵한 채 지지 않길 바랐습니다.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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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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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블로그를 잘 둘러보신 분이라면 아실테지만 평소 독서량의 90%를 학교 도서관에서 해결하는 입장에서는... 여느 도서관과 조금 다르게 전공 서적들로 가득 찬 도서관이 조금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요즘같이 날이 더웠다가 비가 왔다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는 (어째서인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내 기분이 오락가락 정신없어지곤해서 나란히 꽂힌 책등을 열심히 들여다 보아도 어느 책 하나 뽑아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상당히 간단한 듯 복잡하다. 호불호가 은근히 뚜렷해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무조건 신뢰하며, 추리소설류는 무의식중에 손이 나간다. 그 어느 쪽에도 해당이 되지 않을 때면 다른 사람이 추천했던 책을 우선 골라 한 번 훑어보고 맘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일단 리스트에 추가한다. 그렇지도 않을 때에면, 표지가 예쁘거나 제목이 독특한 책들을 무작위로 뽑아 책을 훑어보고, 역자후기를 읽어본다. 뭐, 이렇게 써놓으니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빌리는 책의 80%는 추리소설, 나머지는 그냥 표지가 예쁘고 제목이 독특한 책이니 상당히 치우쳤다면 치우친 기준이랄까.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는 조건 중 당연, 독특한 제목에 속했다. 우리 학교 도서관에 일본 소설이 유난히 많아서 (영문모를) 오기로 이번엔 외국소설에 집중해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소설 책장을 지나 옆으로 눈을 돌려 제목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물론 아니고 말고! 나야 언제나 금요일 저녁이길 원하지만, 세상일이 다 내 맘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가방에도 쏙 들어오는 책의 크기에 더더욱 만족하며 대출하고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금요일 저녁 같았다.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금요일 저녁에 비할바가 아니다.

이 유쾌하고 슬프도록 웃긴 책은 소극장 무대에서 매달 발표되었던 글을 모은 책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약간 낯선 방식의 '발표 형식'이라 처음에는 짧은 연극을 했던 대본인가? 했지만 아무래도 내 이해가 맞다면 소극장에서 자신이 쓴 글을 읽는 모임이 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어야만 하는 방식 답게 글은 시종일관 톡톡 튀는 매력을 보여준다.

요일이 등장하는 제목을 가진 책 답게,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로 나뉜 목차지만 사실상 이야기들은 (일련의 순서가 있긴 해도) 옴니버스라서 요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을 한없이 게으르고 어딘가 엉뚱하면서도 나름의 진지함을 가진 사람으로 설정해 놓았다. ...실제로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불행히도 독일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 전에 독일에 갈 여비도 없지만.

호어스트(주인공)는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미루고 미뤄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심지어 도둑이 들어도 화를 내고 가는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게으른 남자다. 쓸데없이 자신에게 관대하고 하루종일 혼자 놀아도 절대 지치지 않을 그런 남자이기도 하다. 그런 호어스트의 일상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며 어이없어 웃음이 나온다. 책의 처음 단편은 '티롤행 표 두 장'인데 이 짧은 글에서 나는, 호어스트라는 사람에게 무한한 동질감과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느꼈다. 어쩜 저렇게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내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기에 나는 좀 더 크고 시원하게 웃을 수 있다. 아무래도 우리는 같은 '게으르지만 자신에게 관대한 과'니까! 아니 뭐...부지런한 분들이 보시기에는 '시간낭비'겟지만 당장 코앞에 (나에게는) 산더미같은 일들이 쌓여있다면 이정도 현실 도피는 귀여운 수준 아닐까 싶다. 어리숙해서 귀엽고 웃긴 호어스트, 게으름을 떠나 이렇게 웃음을 주는 남자를 미워할 사람이 있을까.

처음부터 이게 순서와 그리 상관없다는 작가의 말을 읽어서 인지 작품과 작품 사이에 전에 등장한 사람이 다시 등장할 때마다, 그리고 그 전편의 이야기가 슬쩍 비칠 때마다 반가워서 또 웃고 말았다. 이 작가는 독자(혹은 청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각 편마다 2~3장의 짧은 작품들이라 뭐라 설명하고 싶어도 그저 어이없는 개그의 일인자를 차지할만한 남자가 나온다, 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아... 이렇게 글재간이 없어서 어디 다른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싶어 하실까...이 리뷰를 읽으시는 분들도 이래서 어디 이게 무슨 책인지 알 길이 없잖아...하고 불안하시더라도 속는 셈 치고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음에 들어하신다면 더더욱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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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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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기질이 98%인 나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같이 사람들이 너무 본 책은 어쩐지 손이 가질 않는 편이다. 이 책도 내가 애용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열심히 광고가 뜨기에 읽기도 전에 눈에 익기는 했지만 읽어볼 마음은 거의 없었다. (광고가 많이 뜰수록 마음이 멀어지는 이 비뚤어진 기질이란!)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 신간이라며 정면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자 어쩐지 표지의 개가 나를 유혹했다. 거기다 사실 제목도 독특하고 제목 폰트도 귀여우니 내가 좋아하는 표지 스타일이기도 했고.

이게 무슨 중대한 고민이라고 난 한참을 신간 책장 앞에서 고민했고 마침내 누군가가 그 책을 빌려가고 난 후에 결심했다. 저 사람 뒤에 빌려봐야겠다, 라고. 그렇게 빌려온 책은 귀여웠다. 무엇보다 내가 귀여워 하고 한편으론 싫어하기도 하는 '어린아이'가 이 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어리고 미숙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충분히 성숙하다고 믿는 어린아이만큼 귀엽고 또 사랑스런 존재가 있을까. 물론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책은 그런 어린아이가 현실과 맞닥트렸을 때의 (약간은) 극단적인 반응을 차근차근 집어가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어린아이는 잔혹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면 나는 어렸으니까. 너무해, 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잔인해,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루앤이라는 친구는 딱 그런 어린아이다. 엄마가 말하는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 할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급작스런 친구의 변화에 거리를 두고 냄새나는 친구를 더이상 친구라고 여기지 않는. 읽으며 화를 내긴 했지만 그 나이대로 돌아가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게 어린 아이라는 거겠지.

덕분에 주인공 조지나가 급격한 환경 변화에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 아닌 수치심이며 분노다. 집에서 쫓겨나 차에서 자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조그마한 소녀.

-그러고는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엉엉 울었다. 그 애가 나를 감싸 안으며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13)

어린아이 였던 내가 조지나와 루앤에게 감정이입을 했다면 어른티를 내는 나는 조지나의 엄마에게 감정이입했다. 사이가 좋지 않던 남편이 '푼돈'을 남기고 증발해 버렸고, 아직 어린 두 아이들은 고스란히 엄마의 책임이었다. 세탁소에서 일하는데다 집에서는 쫓겨났다. 이보다 더 짜증나는 상황이 있을까. 어린 아이들은 엄마에게 불평하고 하루에 두번 알바를 뛰어도 돈은 쉽사리 모이지 않는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돈'이 얽히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그건 조지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리한 꼬마 아가씨는 '돈'이 있어야 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 정확히는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알게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개 납치'. 맹랑한 생각이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너무 무서운 생각이기도 하고! 하지만 납치를 했어도 마냥 귀여운 강아지에게 조지나는 어쩔수없는 정을 느끼고 그로 인한 죄책감과 돈을 벌고 싶다는 현실적인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서서히 어린아이의 유치함에서 벗어난다.

처음의 조지나가 물질적인 부재에 부끄러워 했다면 후반의 조지나는 착한 사람을 속이고 있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맑은 눈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만하면 훌륭히 어른스럽지 않을까.

무티 아저씨는 등장인물 중 가장 호감 가면서도 또한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언제 조지나에게 야단을 칠까...하고 조마조마하게 읽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인생의 조언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지만 실상 말은 별로 없는 독특한 존재다. 어린 조지나에게 그는 거지 아저씨였지만 스스로는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풍족하진 않지만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강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강한 사람이기에 죄책감에 흔들리던 조지나를 자연스레 옳은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진정한 교육법이 아닐까.

조지나의 발상이 귀엽고 웃음이 나게 하는 이 책, 어린 친구들도 어른분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때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독이 되기도 한다. (19)

-나는 두 눈을 세차게 끔뻑인 다음 발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비참해도 남들에게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52)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건 멋진 계획이야. 결국은 모두 다 행복해질 거야.'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다 진실이 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134)

-나는 윌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녀석의 두 눈을 바라보며 "슬퍼하지 마, 작은 친구야" 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윌리가 눈썹을 살풋 들어 올렸다. 녀석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그토록 참으려고 애썼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153)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한 법이다 (200)

-때로는 말이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라고- (203)

-노트에 적어놓은 대로 조목조목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옳은 결정을 했다. 결국 내 마음이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한 짓에 대한 죄책감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시간을 한참 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애초에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던 때로. 그러나 나는, 적어도 '제 8단계'에서는 옳은 결정을 내렸다. (254)

-창밖을 가득 채운 까만 밤을 구경하면서 밤공기를 깊이깊이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가 났다. 인동초와 갓 손질한 잔디처럼 싱그러운 향내였다. 그 냄새는, 조금도 고약하지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만큼이나 상쾌하고도 풋풋했다. 살면서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그런 향기였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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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고백하자면, 난 이미 원작을 읽은 영화는 보지 않는 편이다. 아무래도 내가 읽으며 상상했던 목소리와 모습이 맞지 않으면 원작을 영상으로 본다는 기쁨보다는 실망감이 더 큰 편이기 때문이다. 영화 퇴마록이 그랬고 다빈치 코드 역시 일년이 지나서야 DVD를 빌려봤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원작을 찾아보는 편인데...애니나 영화에는 시간 제약이 있어서 다 표현하지 못했던 디테일을 원작에서 확인하며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원작인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내 예상에서 약간 빗나간 작품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현재 책을 읽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곳은 우리 학교 도서관으로, 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책도 어느 착하신 분이 신청해서 들어온 걸 게시판에서 보고 집어왔던 경우다. 물론 전에 봤던 애니메이션이 생각나 신나게 집어오긴 했지만 스토리도 어렴풋한데 이름이 기억날리가 없었다. (이게 바로 리뷰가 늦어진 이유...)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책이 예쁜 삽화와 표지로 새로 나온 모양이지만 난 아무래도 화려한 만화 그림체보다는 일러스트같은 삽화가 맘에 든다. 소재 자체가 타임 리프 같은 복잡한 이론을 다루고 있어서 원작 소설이 조금 더 길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 한 권의 책에 단편소설이 3편이나 들어있었다. 하나같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같이 조금은 가벼운 SF 이야기로 주인공이 다 여자아이라 더더욱 소재가 어렵다기 보다는 읽기 편한 감이 있다.

우선, 표제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의 이모 되시는 가즈코의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애니메이션의 기초가 된 듯 설정 자체는 비슷한 편이다. 여주인공인 가즈코는 친구인 가즈오, 고로와 함께 과학실 청소를 한 뒤 문단속을 하다 실험실에서 인기척을 듣고 들어갔다 난데없는 라벤더 향에 정신을 잃는다. 양호실에서 깨어난 가즈코는 자신에게 이상한 힘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비슷한 설정(3명의 친한 친구, 과학실, 타임리프 등)에서 시작했지만 소소한 설정은 확실히 시대(이모와 조카)가 다른만큼 약간씩 다르다.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캐릭터성으로 남자 주인공인 가즈오의 나이는 정말 반전 중의 반전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봤기에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것 같지만. 타임 리프 힘을 얻었다고 신나게 썼던 조카와 달리 이모는 갑자기 생긴 힘에 당황해 하고 현실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단편이기에 전개가 빨라 애니메이션같은 오밀조밀한 재미는 없지만 워낙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소설인만큼 갑자기 타임리프를 얻은 평범한 여자아이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

두번째 작품인 <악몽>은 세 단편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으로, 아무래도 이야기를 슬쩍 알고있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참신하지만 너무 짧은 보다는 소설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악몽이 개인적으로 훨씬 재미있었다. 마사코는 친구인 분이치의 집에 수학숙제를 하러 갔다가 전통 가면을 보고 까무라칠 듯이 놀라고 만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 마사코는 스스로 그 이유를 자문하기 시작하고, 결국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줄거리 추리기에는 약해서 재미가 반도 못 살았지만, 주인공 아가씨가 매우 박력있게 놀라기는 하지만 어찌나 논리적으로 생각을 하는지 당장에 심리학자의 길을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야기 자체도 귀엽지만 가장 귀여웠던 건 마사코의 동생인 겁쟁이 요시오였다. 엄마, 아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렇게나 영향을 받다니 심약한 게 너무 귀엽지 않은가! 비록 요시오 자신한테는 하나 하나가 큰 일이었겠지만...

The other world는 타임리프, 타임머신 등 시/공간을 뛰어넘는 츠츠이 야스타카의 이론이 집약된 작품인 것 같다. 내 성격이 워낙 대강대강인지라 읽으면서 시/공간 뛰어넘기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내 머리 안에서의 시/공간 뛰어넘기는 씨실과 날실같은 구조로 연상될 것 같다. 세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짧지만 내겐 임팩트가 무척 커서 책을 덮고나서 생각난 건 였다. 뭐랄까... 처음에는 굉장히 부러웠지만, 뒷쪽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호러틱한 무서움보다는, 그런 식으로 내가 이기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않은가! 거기다 한 순간의 생각에 따라 휙휙 바뀌는 세계라니. 어린 시절 현실감없이 생각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뒷골이 오싹한 단편이었다.

전체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다 나이대가 중고등학생이다보니 그 나이대의 풋풋함이 전반적으로 배어있는 것 같다. 실제 이 작품이 나온 시기가 60년대라고 하던데 그 시절에 SF적인 소재를 맛깔나게 살린 작가의 역량이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역시 애니로 나온 <파프리카>도 츠츠이 야스타카의 작품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들도 차근차근 찾아 읽어봐야겠다.

-보통 사람이 이런 희한한.....다시 말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당황해서 잘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고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있지. 본능적으로 이런 현상을 싫어하는 거야. 고로 군도 그런 게 아닐까? (72)

-과학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하는, 그 과정의 학문이야. 따라서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가사의한 현상이 없으면 안 되지. (72)

-미래에서 기다릴게, 꼭 기다릴게.....(135)

-'언젠가, 누군가 멋진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사람은 나를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알고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일지, 언제 나타날지,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멋진 사람과.....언젠가.....어디선가....(140)

- 우리 작은아버지가 심리학자인데 무서운 게 왜 무서운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어. (159)

-무서움을 꾹 참고 아득히 먼 아래의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난간 너머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혹은 갑자기 죽고 싶어져서 그대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가슴속에 가득 퍼져서 왁! 하고 소리 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워진다. (166)

-무섭다고 느끼는 것은 '죄의식'이 있어서래. (174)

-인간의 마음이란 어쩜 이리 복잡할까. 정말 이상하고도 재미있어....(185)

-노부코는 분명 시로에게 싸우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면서까지 잠자코 있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시로가 그 원수 같은 불량학생들을 혼내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노부코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시로가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33)

-다원우주, 그리고 동시존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연속된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역사를 가진 세계를 한 가닥의 날실로 본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그 날실을 무수히 가로지르는 수없이 많은 씨실이라 할 수 있다. (239)

-노부코는 이렇게 잔혹하고 인정사정없는 시로를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적어도 그녀 스스로는.....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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