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 라이프 (보급판 문고본)
앨리스 카이퍼즈 지음, 신현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어제 저녁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 참을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책장을 넘겼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가가 시큰하다.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고 가슴이 울려서 펑펑 울어봤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상큼하게 가라앉는 하늘빛 바탕에 아기자기 귀여운 노란빛 그림들이 늘어선 표지는 자세히 보면 하늘빛 포스트잇이 붙어 있기에, 책을 다 읽은 지금 어쩐지 또 새롭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 들은 건 좀 됐지만 별 생각은 없었다. 내용이 뭐다, 라고 들은 건 아니었고 새로나온 책을 체크할 때 독특하다는 사람들의 평을 본 것 뿐이었으니까. 거기다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면 어쩐지 하기 싫어지는 이놈의 청개구리 기질 덕에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 이 책을 보게된 건, 아마 우연이었을 테지만, 필연이라 생각하고 싶다. 처음에는 흥미였다. 어, 나 이 책 어디서 들어봤어, 라는 아주 가벼운 흥미. 책도 가볍고 작아 책장에서 쏙 빼들어 대뜸 중간을 펼쳤다. 독특하다는 사람들의 평대로 속 안은 보통의 문단 형식이 아니라 노란 포스트잇 위에 적어놓은 짤막한 문장들로 되어 있었다. 한 장 두장,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넘겼다. 너무 일상적이고, 공간에 비해 글이 너무 적었으니까. 그런데.

 

쿠궁. 그냥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눈물이 나오기 전 급격하게 몰리는 열기에 정신이 없었다.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에서 울 수는 없어, 라는 쓰잘데기 없는 오기로 책을 가까스로 덮고 제 자리로 밀어넣었다. (*다 읽은 책은 북카트에 놓아주세요, 라는 말은 무시한 채)원래 목적이었던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에 싱숭생숭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뜬금없이 엄마가 보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엉엉 울고 싶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내 머리 속을 제일 크게 차지하고 있던 생각은, 다음엔 꼭 빌려서 엄마랑 같이 읽어야 겠다, 였다.

 

그래서 빌려온 그 책을, 단숨에 다 읽고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귀엽지만 인간마음을 (당연히) 모르는 우리집 강아지는 주인이 울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내 발가락을 물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코가 다 헐었다. 나쁜 것, 날 울리다니.

 

내용은 아주아주 간단하다. 주의할 것은 절대 픽션이라는 것. 실화라고 생각하면 더 슬프다. 물론 실화일 수도 있다. 상황이 그만큼 일상적이니까.

부모가 이혼해 산부인과 의사인 엄마와 함께 사는 클레어는 겨우 15살 소녀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제대로 얼굴 맞대고 이야기 할 시간도 없기에 그 둘은 냉장고 위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서로에게 말을 전한다. 심부름, 친구 이야기, 아빠 이야기, 토끼 이야기 등등. 바쁜 엄마에게 클레어가 조금 불만이 있던 것 빼고는 아무 이상이 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덜컥 유방암에 걸렸다. 혼자 사는 엄마로서 딸에게 힘든 짐을 지우고 싶지 않던 엄마는 일상처럼 딸을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클레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엄마가 정말 아픈건지 실감을 하지 못해 자신의 남자친구니 휴가니 하는 불만을 얼굴 보기 힘든 엄마에게 쏟아붓고 만다. 그런 와중에 엄마의 유방암이 특이해 계속 진행되고 클레어는 더이상 현실을 피할 수가 없다. 엄마 또한. 클레어는 엄마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엄마의 일생을 좀 더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는 더이상 딸이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죽음 앞에서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딸이라 아들과 엄마, 아들과 아빠 사이는 잘 모른다. 그래도 딸과 엄마 사이는 좀 안다. 내가 겪고 있으니까. 나는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는 딸은 단연코 아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아빠와는 공통화제가 별로 없어 가끔( 아주 가끔은) 사랑하는 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지내기가 불편할 때가 있다. (특히나 아빠와 내가 거의 혼자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지만 엄마와는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다. 큰 딸이라 예전에는 해주지 않던 엄마의 힘들었던 시절, 친가, 외가 쪽 이야기, 우리 어렸을 적 이야기, 등등 민감한 이야기부터 가볍게는 연예인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등. 불행히도 내 성격의 80%는 아빠쪽이라 엄마와 자주 싸우기도 하지만, 그만큼 엄마가 더 가까운 건 사실이다.

이 책에서 아무리 엄마가 바빴어도, 클레어가 엄마에게 느끼는 유대감은 아빠 사이의 유대감과는 또 다를거다. 엄마와 딸 사이니까. 같이 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더 슬펐겠지.

 

어쩜 이렇게 이 책은 날 울리는지 모르겠다. 그냥 생각만 해도 찡해져서 뒤죽박죽이 된 채 울상이 되어 버린다. 우리 엄마가 낮잠 자고 있는 이 시간에도.

 

중학교 시절,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길렀던 강아지 하늘이가 죽었을 때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처음 죽어있는 고 작은 털복숭이 강아지를 봤을 때는 충격으로 울었고, 그 차가워진 몸을 수건에 싸서 묻을 때도 울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울었다. 저녁 밥상에서도, 방 안에서도, 그 녀석의 물건들이 어느 순간에 튀어나올 때도 울었다. 저녁 밥상 앞에서 울고 있는 내가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하늘이를 좋아했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누군가가 죽은 뒤 우는 사람은, 그 사람 살아 생전에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해서 우는 거다."라고. 근데 사실이 그랬다. 처음엔 더이상 그 조그만 녀석이 왕왕 대며 짖는 소리도, 부드러운 털뭉치도, 따뜻했던 몸도 더이상 없다고 생각해 눈물이 나왔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내가 녀석을 예뻐 할 줄만 알고 씻겨주지도 배설물을 치워주지도 않은 그 미안함에, 냄새난다고 놀아주지도 않았던 그 미안함에 울게 되었다.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고작 1년 지낸 개가 죽어도 그런데, 우리 엄마가 죽는다면... 클레어는 강한거다. 나 같으면 만날 울면서 지낼거야.

 

이 세상의 모든 딸들과 엄마들의 일상에 꼭꼭 필요한 책. 아들들도 보면 좋구요. 단지 남들이 우는 거 보기 싫으면 집에서 혼자 읽을 것!

 

*기억하고 싶은 글귀 (옮겨 쓰며 또 울고....)

-피터와 함께 창밖을 보고 있었어, 클레어. 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면서. 따사로운 햇볕에 눈이 녹기 시작하고 피터의 부드러운 털이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네. 모든 게 잘될 것 같아. (55)

-엄마, 지난밤에 피곤해 보이더라. 잠잘 가다 느꼈어. 지금보다 더 걱정해야 되나? 이런 건 글로 묻는 게 더 쉽고 편해. 엄마 기분이 어떤지, 치료를 어찌 되는지 물어볼 땐 말야. (84)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지. 엄마가 아픈데도 이러다니. 엄마 방사선 치료도 같이 못 가고,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요. (103)

-엄마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말 안 하면서 왜 나는 엄마한테 다 얘기해야 해? (107)

-엄마, 집에 없네. 엄마는 늘 밖에 있는 사람이잖아. 전혀 이상할 건 없지. 안 그래? 냉장고에 붙은 엄마 메모 봤어. 만약 엄마가 있음 직접 말할 텐데. 없으니까 여기다 쓸 수밖에 없잖아!

마이클은 최고야. 재미있고, 똑똑하고, 귀엽고 내가 원할 때 내 곁에 있어 줘. 이건 엄마보다 더 나은 점이야. 아빠보다도. 그리고 엄마도 아빠랑 헤어졌으면서 마이클과의 일에 대해 충고할 입장은 아니라고 봐! (115)

-아빠는 우리가 너무 오래 싸우는 것 같대. 대화가 부족해서 그렇대. 난 엄마를 걱정해야 할지 그냥 내 인생이나 신경 써야 할지 모르겠어. (123)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런 일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책은 없구나. 그런 책이 있음 좋겠어.

넌 학교도 다녀야 하고 좋은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그 외에 보통의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할 일들을 해야잖니. 이런 것들이 각각 잘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어. (124)

-그동안 엄마한테 화내서 미안해.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미안해. (125)

-말할 수가 없어, 클레어. 미안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127)

-병은 나을 수 있어. 엄마를 위해 내가 강해지도록 노력할게. 엄마도 나을 거라는 거 잊지 마. 꼭 그래야 해. 엄만 좋아질 거야. (129)

-네가 몹시 필요할 만큼 엄만 너무 약해졌어. 하지만 나 때문에 네 생활이 흐트러지고 네가 고생하는 건 싫어. 그냥 엄마의 어린 딸로 남길 바란단다. 그래서 알리지 않았어. (132)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땐 어땠을지 궁금해. 학교에서 우린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우린 틀림없이 친구가 됐을 거야. (135)

-공원을 함께 걷자.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색 꽃들도 보고. 그 꽃 이름이 무였더라? 강가에 서서 해가 지는 풍경도 보고. 내가 산책하는 내내 엄마 손을 잡고 있을 거야. 4시에 만날까? (143)

-나는 여자인 엄마를 상상하는 게 어려웠어. 엄마를 여자가 아니라 엄마로만 알았던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여자로서의 엄마 얘기를 해 줄래요? (153)

-엄마를 바라볼 때/ 내가 꿈꾸는 여인을 본다/ 강인하고 용기있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엄마, 사랑해 (160)

-의사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다 있네?"라고 한 말이 기억나. 농담이었는데 엄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어. 내겐 기적이었어. (166)

-선물 몽땅 맘에 들어. 그중에 최고의 선물은 엄마야. 바깥에서 보다니. (167)

-때때로 인생이 어렵고, 세상이 힘든 곳이며, 우리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걸 네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클레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가끔 누구 책임도 아닌 일이 일어나기도 해. (171)

-클레어, 오늘 아침 부엌에서 춤추던 네 모습이 떠올라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풀잎 끝이 갈색으로 물들어 가고 불쌍한 피터는 아직도 더위에 헐떡거리는데, 춤추는 너만이 맑고 신선했단다. 사랑해. (183)

-나도 엄마의 아픔을 함께하고 싶어. (187)

-길이 구부러지고 휘어져도

  우리는 함께 있을 거야

  구부러진 인생을 껴안고

  우리는 기댈 거야

  서로에게

  엄마는 나에게

  나는 엄마에게 (196)

-넌 나에게 큰 힘이 되고 있어. 나도 너한테 이렇게 잘해 준 적이 있었던가 싶다.

  나는 좋은 엄마였니? 이건 모든 엄마들이 묻고 싶어도 감히 묻기 힘든 질문이지. 물론 엄마들에겐 물을 기회도 잘 없겠지. (200)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는 내 엄마잖아. (201)

-엄마는 네가 정말 필요해, 아가.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던 싱글맘인 내가 너한테 기대는 건 익숙치 않아서 그랬어. 자신을 돌봐 줄 딸이 절실히 필요한 반쪽 여자가 되는 게 쉽지가 않네. (206)

-나는 널 어리고, 맑고, 빛으로 가득 찬 존재로만 끌어안고 있었지. 내가 너에게 몹쓸 짓을 했더구나. 내가 널 어른이 되도록 해 주면 넌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난 그렇게 해야 하고. (2007)

-내가 가질 시간이 이제 없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시간들을 낭비하고 중요한 걸 놓친 것만 같구나. 그래도 나에겐 네가 있지.

사랑하는 딸이. 너는 내 삶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와 기쁨을 주었어. (207)

-문득 내가 엄마 인생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 나이에는 어땠어? 아빠와 주로 무엇을 얘기했지?

(중략) 이런 모든 질문들이 날 울려요, 엄마. 왠지 모르겠어. 아마도 이런 질문들이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어른들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같기 때문인가 봐. 나 무섭고 싫어. (209)

-부엌에 앉아 사진 자르는 네 모습 영원토록 봤음 좋겠다. (212)

-엄마는 내게 미래와 당당히 맞설 힘을 줬어요.

최악을 준비하며 최선을 희망한다. 엄마, 좋은 생각이죠? (213)

-그리고 난 '더 좋은 엄마'를 바라지 않아요. 나에겐 엄마는 최고의 엄마야. (215)

-미래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넌 괜찮을 거야. 그렇지?

더 이상 멋진 딸은 없단다. (222)

-나에게도 더 멋진 엄마는 없어. (223)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엄마,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야. 엄마랑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어서 기뻐. (229)

 

+세상의 모든 딸과 어머니께

+펑펑 울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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