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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른 차일드
키스 도나휴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읽기는 꽤 됐는데 시험을 핑계로 리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스톨른 차일드.
언젠가, 아는 언니가 요즘 책 뭐 읽냐고 묻기에 막 읽기를 끝낸 스톨른 차일드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적이 있다. '요정과 뒤바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직도 그런 판타지물을 읽고 있냐'는 장난기 어린 타박이 돌아왔다. 길고 나름 심오한 내용을 단순히 '요정과 뒤바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서두로 시작한 게 문제였을까. 따지고 보면, 요정(페어리)라는 존재가 '판타지(공상)'에 가까우니 판타지물도 맞는 말인데 어쩐지 울컥해서 아니라고 정색하고 말았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길거리에서 정색해버렸지만, 스톨른 차일드의 이야기를 '그런 판타지물'로 취급하는 건 너무하잖아. 다음부터는 처지가 뒤바뀐 아이들의 자아정체성 찾기, 라고 소개해야 할까.
요정, 이라고 하면 대부분 디즈니 만화에서 나오는 팅커벨같이 귀엽고 깜찍한 소녀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코난 도일이 좋아했다는 꽃의 요정들이라든가. (어렸을 적 내가 숭배하던 코난 도일이 좋아했다기에 믿거나 말거나 식의 요정 책을 사보고 이런 합성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하고 코난 도일에게 실망했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스톨른 차일드>에서 나오는 요정이란 그렇게 귀여운 존재가 아니다. 디즈니가 판타지 소설에서 미화된 존재라기보다 먼 옛날 서양 사람들이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해 놓았던 정령에 가깝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을 주시하고 장난치고, 악의라기보다 그 존재 자체가 그런 자연의 파생물들.
실제 서양에서는 아이를 창가에 홀로 두면 요정이 다가와 아이를 훔쳐가고 요정의 아이를 대신 놓고 간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아이가 없어지면 신이 데려갔다고 생각한 카미카쿠시와 비슷한 전설일까.) 이 <스톨른 차일드>는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다. 요정(파에리)에게 삶을 빼앗긴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다른 아이의 삶을 빼앗을 아이들.
이 책의 요정, 즉 파에리는 군락을 이루며 살지도, 체계가 잡혀있지도 않은 오직 어린 아이들만의 모임이다. 천진난만해서 더욱 무서운 나이의 어린 아이들. 파에리들은 숲 속을 이동하며 살고 아이가 있는 집 하나를 물색해 목표로 한 아이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말투, 외모, 성격 등등. 때를 기다려 외모를 바꾸는 힘든 과정을 거쳐 그 아이 대신 그 집에 들어가 다시 인간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뒤바뀐 아이는 없어진 파에리 대신 모임의 일원이 되어 숲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렇게 몇 십년, 몇 백년을 지냈을까. 세상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렇게 때문일까, '이번' 뒤바꾸기는 심상치가 않다.
<스톨른 차일드>는 '헨리 데이'로 바뀐 파에리와, '헨리 데이'였던 '애니 데이'의 이야기다. 두 아이는 서로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한 번 교차점을 지났으니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는 평행한 반대편에.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애쓴다.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헨리 데이'와 잊혀져 가는 과거를 기억하려고 노력하되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애니 데이는 각각 음악과 글이라는 분출구를 통해 과거에도 현재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을 찾아가고, 또한 거울마냥 반대편을 비춘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고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난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이 참 흥미롭다. 물론 다양한 로맨스 소설/드라마/영화 등에서 사랑이 무르익을만 하면 (혹은 연인이 기다림에 지쳐 다른 사랑을 찾을까 하면) 등장하는 병 중 하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건 기억상실 후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기억들이 사라졌다면 과연 나는 '나'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불행히도 흥미는 있지만 심리학이나 뇌과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지라 아직도 답을 모르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아라는 것은 경험이라고 하는 기억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면 사실상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기억 상실이라는 병에 대해서 그리 아는 게 많은 건 아니지만 그 나름에도 종류가 있다고 하니 사례마다 다르겠지만서도.
그렇다면, 기억이란 '나'인가? 어휴, 헷갈린다. 자아를 확립하는 시기는 분명 사춘기일진데, 사춘기를 훌쩍 뛰어넘고서도 어쩜 이렇게 말로 풀어놓기가 힘든건지. 헨리 데이였던 애니 데이는 헨리 데이로서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나보낸다. 그렇게 '헨리 데이'는 '애니 데이'가 되어 파에리로 살아가고, 파에리의 존재를 믿기는 커녕 알고 있지도 않은 인간 세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간다. '바꿔치기'를 도와줄 파에리들이 모두 뿔뿔히 흩어진 이상, 애니 데이는 아마 평생 작고 어린 파에리로 남아 있겠지. 그런 애니 데이는 "이야기는 글로 적혀 있었고, 책에 나온 말이 충분한 증거였으니까. 변하는 세상보다는 시간과 어휘에 영원히 고정된 말이 사람과 장소를 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내게는 파에리들과의 삶이 헨리 데이로서의 삶보다 생생하다. (385)"라고 말한다.
반대로 뒤바뀐 '헨리 데이'는 먼 옛날 잊고있던 자신을 하나하나 기억해낸다. 구깃구깃 구석에 처박아둔 종이를 살그머니 펴보듯이. '자신을 아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헨리 데이는 한동안 늦깍이 '자신 찾기'에 돌입해 현재의 삶을 잠시 외면한다. 헨리 데이의 자아 찾기는 과거를 완전히 인정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이제와 돌이켜봐야 가까스로 손안에 남을 기억을 찾으려고 애쓰는 헨리 데이를 보면 안쓰럽다. 마침내 과거와 대면한, 아니 자신이 바꿔치기한 아이와 마주한 헨리 데이는 비로서 과거를 놓아준다. "그 아이와 대면하자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어. 내가 과거를 놓아버리자 과거도 나를 놓아주었지. (407)"
이제 헨리 데이는 현재의 삶에, '헨리 데이'에 충실해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작은 파에리인 애니 데이는 자신만의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어느 삶이 행복한지, 누가 불행한지 나로서는 알 수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 두 사람은 힘겨운 숲 속을 어렵게 통과했고 각자의 길에 들어섰으니까.
- 내 인생 전부가 고작 기억을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189)
-그 순간 나는 우리 모두 안에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누워서 모두 영원히 매몰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각자의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289)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떠나가면 남아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오로지 추억뿐이다. 친구들은 자의 또는 타의로 가버렸고, 그들의 흔적이 우리의 허전한 마음에 남아서 사랑의 빈자리를 메웠다. 오늘까지도 잃어버린 이들이 가슴속을 맴돈다. (307)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내적인 삶과 외부 세계가 대위선율로 흘렀다. 나는 각 화음을 중복해서 병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니까. 가끔 생각과 꿈이 우리의 실제 경험보다 현실적일 때도 있고, 우리가 겪은 일이 상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머릿 속에서 소리가 나는 대로 미처 다 받아 적지 못했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음표가 넘쳐났다. (389)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것 하나.
도대체 파에리들은 왜 생겨난거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지금까지도 도통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