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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른 차일드
키스 도나휴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읽기는 꽤 됐는데 시험을 핑계로 리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스톨른 차일드.

 

언젠가, 아는 언니가 요즘 책 뭐 읽냐고 묻기에 막 읽기를 끝낸 스톨른 차일드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적이 있다. '요정과 뒤바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직도 그런 판타지물을 읽고 있냐'는 장난기 어린 타박이 돌아왔다. 길고 나름 심오한 내용을 단순히 '요정과 뒤바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서두로 시작한 게 문제였을까. 따지고 보면, 요정(페어리)라는 존재가 '판타지(공상)'에 가까우니 판타지물도 맞는 말인데 어쩐지 울컥해서 아니라고 정색하고 말았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길거리에서 정색해버렸지만, 스톨른 차일드의 이야기를 '그런 판타지물'로 취급하는 건 너무하잖아. 다음부터는 처지가 뒤바뀐 아이들의 자아정체성 찾기, 라고 소개해야 할까.

 

요정, 이라고 하면 대부분 디즈니 만화에서 나오는 팅커벨같이 귀엽고 깜찍한 소녀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코난 도일이 좋아했다는 꽃의 요정들이라든가. (어렸을 적 내가 숭배하던 코난 도일이 좋아했다기에 믿거나 말거나 식의 요정 책을 사보고 이런 합성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하고 코난 도일에게 실망했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스톨른 차일드>에서 나오는 요정이란 그렇게 귀여운 존재가 아니다. 디즈니가 판타지 소설에서 미화된 존재라기보다 먼 옛날 서양 사람들이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해 놓았던 정령에 가깝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을 주시하고 장난치고, 악의라기보다 그 존재 자체가 그런 자연의 파생물들.

 

실제 서양에서는 아이를 창가에 홀로 두면 요정이 다가와 아이를 훔쳐가고 요정의 아이를 대신 놓고 간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아이가 없어지면 신이 데려갔다고 생각한 카미카쿠시와 비슷한 전설일까.) 이 <스톨른 차일드>는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다. 요정(파에리)에게 삶을 빼앗긴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다른 아이의 삶을 빼앗을 아이들.

 

이 책의 요정, 즉 파에리는 군락을 이루며 살지도, 체계가 잡혀있지도 않은 오직 어린 아이들만의 모임이다. 천진난만해서 더욱 무서운 나이의 어린 아이들. 파에리들은 숲 속을 이동하며 살고 아이가 있는 집 하나를 물색해 목표로 한 아이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말투, 외모, 성격 등등. 때를 기다려 외모를 바꾸는 힘든 과정을 거쳐 그 아이 대신 그 집에 들어가 다시 인간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뒤바뀐 아이는 없어진 파에리 대신 모임의 일원이 되어 숲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렇게 몇 십년, 몇 백년을 지냈을까. 세상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렇게 때문일까, '이번' 뒤바꾸기는 심상치가 않다.

 

<스톨른 차일드>는 '헨리 데이'로 바뀐 파에리와, '헨리 데이'였던 '애니 데이'의 이야기다. 두 아이는 서로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한 번 교차점을 지났으니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는 평행한 반대편에.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애쓴다.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헨리 데이'와 잊혀져 가는 과거를 기억하려고 노력하되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애니 데이는 각각 음악과 글이라는 분출구를 통해 과거에도 현재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을 찾아가고, 또한 거울마냥 반대편을 비춘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고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난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이 참 흥미롭다. 물론 다양한 로맨스 소설/드라마/영화 등에서 사랑이 무르익을만 하면 (혹은 연인이 기다림에 지쳐 다른 사랑을 찾을까 하면) 등장하는 병 중 하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건 기억상실 후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기억들이 사라졌다면 과연 나는 '나'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불행히도 흥미는 있지만 심리학이나 뇌과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지라 아직도 답을 모르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아라는 것은 경험이라고 하는 기억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면 사실상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기억 상실이라는 병에 대해서 그리 아는 게 많은 건 아니지만 그 나름에도 종류가 있다고 하니 사례마다 다르겠지만서도.

 

그렇다면, 기억이란 '나'인가? 어휴, 헷갈린다. 자아를 확립하는 시기는 분명 사춘기일진데, 사춘기를 훌쩍 뛰어넘고서도 어쩜 이렇게 말로 풀어놓기가 힘든건지. 헨리 데이였던 애니 데이는 헨리 데이로서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나보낸다. 그렇게 '헨리 데이'는 '애니 데이'가 되어 파에리로 살아가고, 파에리의 존재를 믿기는 커녕 알고 있지도 않은 인간 세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간다. '바꿔치기'를 도와줄 파에리들이 모두 뿔뿔히 흩어진 이상, 애니 데이는 아마 평생 작고 어린 파에리로 남아 있겠지. 그런 애니 데이는 "이야기는 글로 적혀 있었고, 책에 나온 말이 충분한 증거였으니까. 변하는 세상보다는 시간과 어휘에 영원히 고정된 말이 사람과 장소를 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내게는 파에리들과의 삶이 헨리 데이로서의 삶보다 생생하다. (385)"라고 말한다.

 

반대로 뒤바뀐 '헨리 데이'는 먼 옛날 잊고있던 자신을 하나하나 기억해낸다. 구깃구깃 구석에 처박아둔 종이를 살그머니 펴보듯이. '자신을 아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헨리 데이는 한동안 늦깍이 '자신 찾기'에 돌입해 현재의 삶을 잠시 외면한다. 헨리 데이의 자아 찾기는 과거를 완전히 인정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이제와 돌이켜봐야 가까스로 손안에 남을 기억을 찾으려고 애쓰는 헨리 데이를 보면 안쓰럽다. 마침내 과거와 대면한, 아니 자신이 바꿔치기한 아이와 마주한 헨리 데이는 비로서 과거를 놓아준다. "그 아이와 대면하자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어. 내가 과거를 놓아버리자 과거도 나를 놓아주었지. (407)"

 

이제 헨리 데이는 현재의 삶에, '헨리 데이'에 충실해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작은 파에리인 애니 데이는 자신만의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어느 삶이 행복한지, 누가 불행한지 나로서는 알 수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 두 사람은 힘겨운 숲 속을 어렵게 통과했고 각자의 길에 들어섰으니까.

 

- 내 인생 전부가 고작 기억을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189)

-그 순간 나는 우리 모두 안에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누워서 모두 영원히 매몰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각자의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289)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떠나가면 남아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오로지 추억뿐이다. 친구들은 자의 또는 타의로 가버렸고, 그들의 흔적이 우리의 허전한 마음에 남아서 사랑의 빈자리를 메웠다. 오늘까지도 잃어버린 이들이 가슴속을 맴돈다. (307)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내적인 삶과 외부 세계가 대위선율로 흘렀다. 나는 각 화음을 중복해서 병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니까. 가끔 생각과 꿈이 우리의 실제 경험보다 현실적일 때도 있고, 우리가 겪은 일이 상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머릿 속에서 소리가 나는 대로 미처 다 받아 적지 못했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음표가 넘쳐났다. (389)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것 하나.

도대체 파에리들은 왜 생겨난거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지금까지도 도통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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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 지구상에 단 한 명뿐인 죽음대역배우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놈에게서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공포와 연민으로 몰아넣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11p)

처음 책을 펴들었을 때, 놈, 이라는 다소 비속어적인 호칭에 순간 움찔했다. 무엇보다 '모리'라는 단어에서 내가 연상했던 부드러운 스토리가 아닌데? 놈. 이름이 없어 불렀던 그 호칭이 소름끼친다. 시작부터 깔끔하고도 음습한 내음이 났다. 이름은 운명이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라더라. 이름이 없으면 존재할지언정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남에게 불려야 쓸모 있는 그것이 없으면,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 로서의 제구실을 못한다. 처음, 모리라고도 불리지 못했던 '놈'이 서로 의사소통하는 '사람'이 아닌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짐승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예상이 파격적으로 깨져버린 뒤 내가 처음의 모리에게서 느꼈던 것은 책 속의 인물들같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오싹함도 혐오도, 심지어는 연민도 아니었다. 물론 죽음의 존재를 종이 너머로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나 그게 모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면. 내가 느꼈던 것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실험쥐를 바라보는 과학자 같은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죽음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형상화된 죽음이 가져올 결과가 궁금했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이 소설이 '한국 소설'이었기에 더 했다.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의 예를 한국 영화들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아 한국 소설이구나, 하고 느꼈다. 새삼스럽게. 거기에 네티즌이 반응하는 그 생생한 반응. 다른 어느 나라에 가도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한다. 장점보다 부작용이 부각되는 우리 사회의 연예계 최대 이슈인 악성 댓글에 의한 자살이 이어지고 있는 현재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그걸 고스란히, 한 인간이 인터넷상에서 왜곡되어 가는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긴 소설이라 그 현실감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르브낭이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조차 없는 소재를 끌어와도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책이었다. 방송계 쪽의 일은 모르지만, 돈과 시간, 건강,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생한 공포가.

현실감 하니 르브낭이 실제로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진다. <모리>의 독자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궁금해 할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이 소설이 그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라 모리가 부활한 죽은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모리가 '죽음'에서 벗어났는지는 끝내 나오지 않지만 도처에 숨어 있는 현실의 트랩 덕에 '르브낭'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설령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르브낭이 대표하는 죽음은 어쨌거나 그 어딘가에 존재하니까. 죽음은 영리하다. 그보다 영리하고 약삭빠른 게 있을까. 피어오르는 어둠 속에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는 그것에 사람들은 굴복하고 만다. 매력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간에.

그런 의미에서 모리, 라는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은 그를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섬뜩하고 동시에 가여우며 매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대표하면서도 인간인 그를 위한 그 어떤 특별한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을 지닌 그를,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를 그런 부드러운 이름으로 부르다니. 불평 많은 독자인 내가 일단 의구심을 품게 되니 많은 사람이 죽음에 중독되어 갈수록 불만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모리가 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토록 동경하던 삶을 되찾게 된 순간 생각했다. 성 감독은 그 이름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 보고자 했고, 작가는 그 이름을 통해 죽음에 삶의 이름을 주었다는 걸.

모리가 준수한 청년이 되는 것은 상당히 예상 외였다. ‘준수’하다니 말이다. 예전의 그를 편안하게 여긴 건 죽음을 갈망하고 시도했던 연주뿐이었다. 그녀는 모리에게 삶의 상징이 되었고, 모리는 그녀를 무작정 끌어안고 독차지하고 싶어 했다. 사진촬영 장면에서 보듯이 연주는 모리에게 ‘삶’ 그 자체였다. 삶을 동경한 죽음이라고나 할까. 그런 연주가 죽은 뒤에야 모리가 준수해 지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녀가 모리에게 끌렸다면 그저 그런 연애 이야기가 되었을 테지만, 살아있는 자의 당연한 공포에 직면하게 된 그녀는 죽음을 동경하는 나약함에서 삶의 공포로 돌아왔다. 끝내 모리를 거부하다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아이러니한 삶 속에서 죽음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게 모리의 아이러니, 삶을 향해 다가갈수록 죽음의 본연에 다가가는 걸 더더욱 부각시키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성 감독과 종필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순수하리만치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군들 자신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달콤한 기회의 끈을 망설이지 않고 도덕심으로 내칠 수 있겠냔 말이다. 물론 성 감독은 애초에 모리를 끌어들인 인간으로 일찍 죽어버리는 벌 아닌 벌을 받는다. 모리는, 죽음은 세상에 그런 식으로 보여져서는 안 되었다. 그가 쓴 마지막 시나리오가 앞날을 예견하면서 예언자의 성격을 띠지만 그래서 남는 것이 무어란 말인가.

종필은, 파멸했다. 욕심에 의해 죽음에 끌려들어 가면서. 그게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TV에서 보여지는 죽음이 가짜라고 해서, 그 섬뜩한 죽음을 끌어와야 했는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살아가며 묵묵히 치러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죽음을 상품처럼 포장해서 내놓는 것은, 그 우울한 아름다움을 들이대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완벽한 살인. 죽음의 공포는 한순간 숨이 막히게 하지만 중독되듯 사람을 끌어당긴다. 인생의 마지막, 그 너머로 결코 다시 넘어올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하는 본능과 인간의 호기심이 양립하는 그 경계에서 많은 사람이 죽음에 탐닉했다.

그렇다면 모리를 동경하는 아이들은 순수한 피해자일까. 인간의 무의식적인, 죽음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그들은 TV 속의 유행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현 사태마저 풍자한다. 아이들이 죽음을 영웅처럼 떠받들어도 책을 읽는 내내 객관적인 관찰자이길 자처한 나는 그 아이들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 뿐이었다. 군중심리에 떠밀리지만 알아채질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딱히 그 아이들만을 탓할 수는 없을 거다. 모리의 사진촬영 장면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가의 주문에 광기를 띤다. 줄줄이 이어지는 신화와 문학작품을 넘나드는 죽음의 화면이 이어진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했던가. 먼 옛날부터 인간은 죽음에 탐닉했고, 그것은 삶의 가장 극적인 일부분이었다. 비참함과 아름다움, 그 상반된 미를 동시에 풍기는. 죽음 앞에서 누가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될 수 있을까. 그 앞에 우리는 평등한 것을.

나 역시 죽음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각종 매체들을 통해 보여진 죽음은 가련하고 슬펐으며 아름답기까지 했으니.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죽음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죽음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것은 그 이면에 깔린 슬픔과 아픔 때문이라는 것을. 모리, 그는 내게 읽는 내내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그가 어쩐지 측은하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인 죽음이 그렇다는 게 특히나 그랬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공감하고 웃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보통 인간. 그래서 기뻤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라도 그가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어서. 죽음이 삶을 가질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본다. 모리, 지구상에 단 한 명 뿐‘이었던’ 죽음 대역배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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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와 나 - 세계 최악의 말썽꾸러기 개와 함께한 삶 그리고 사랑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집은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다. 우리집 개답게 (어째서인지 우리 집에 오는 강아지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먹을 걸 무척이나 좋아하고 산만하며 더불어 시츄라 덩치가 약간 있다. 먹을 걸 좋아하는 점 이외에는 우리 가족 탓임이 분명했다. 냄새에 민감한 엄마는 개를 '좋아하는' 우리가 모든 뒤치닥거리를 한다는 조건하에 개 기르는 걸 허락했고 아빠는 너무 바쁘셔서 걸핏하면 달려들어 장난치는 녀석과 느긋하게 놀아줄 수 없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내 방조차 청소하기 싫어하고 매사가 느슨한 주인라 제대로 혼내는 것조차 잘 못했다.

 

동생과 배변 치우기/뒷정리 하기/목욕시키기 등으로 싸우기는 해도 녀석은 우리집의 귀염둥이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작은' 개들과는 덩치가 다르긴 해도 손바닥만할 때부터 키워와서 이제는 그 덩치조차 귀여워 보이고, 엄마가 '저 바보'라고 말하는, 자기 꼬리를 잡기 위해 빙글빙글 도는 모습조차 흐뭇하게 바라본다. 다른 집 개들은 주인이 우울하면 위로도 해준다는데 이 녀석은 내가 울 때조차 자기 좀 편하게 자겠다고 날 두고 총총거리며 방을 나가 순간 어이없어 날 웃게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저렇게 귀여운데!

 

아마 내가 말리를 만났다면 일단 겁에 질려 백리밖으로 도망갔을거다. 저멀리서 눈을 빛내며 달려오는 덩치 큰 리트리버 개라니! 하지만 말리라면 우헤헤 웃음이라도 흘릴 표정으로 내 뒤를 쫓아와 장난을 쳤을거란 생각이 든다.

우하하. 생각만 해도 웃긴 장면이다. 비록 말리 밑에 깔려있는 게 바로 나고 내가 개 침으로 세수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염두에 둔다쳐도 남들보기에 흐뭇할 장면임은 틀림이 없다. 게다가 그 큰 개가 날 싫어해서 쫓아오지 않은 게 어딘가!

 

말리보다 덩치는 작지만 말썽으로는 빠지지 않을 개를 기르는 입장에서 책을 읽으며 난 단박에 말리가 좋아졌다. 강아지들이 너무 얌전해도 재미없다는 건 말썽많은 개를 겪어본 사람만이 (씁쓸하게 웃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일일거다. 그리곤 포기한 듯 웃으며 '그래도 착해요'라고 말하겠지.

 

개를 기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몇 년이 지나면 말도 알아듣고 제 앞가림을 하는 아이들과 달리 개는 평생이 지나도 못 알아듣는 말이 있고 뒷정리를 스스로 할 수도 없다. 배변 습관을 잘 들이지 않으면 집안은 지린내로 진동을 하고 벽지를 물어뜯는 일도 다반사며 어째서 휴지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다 물어뜯어놓아 집 안을 온통 하얗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물을 싫어해 목욕 때마다 주인에게 달려들어 결국 주인도 목욕을 하게 만들고 뭔가에 집착하며 물어뜯어 놓기도 한다.

 

그렇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돌보지 못 하면...' 하고 엄포를 주는 게 장난이나 협박이 아닌 것이다. 집안의 개를 제대로 돌보지 못 하면 집안의 사람들도, 그 당사자인 개도 불행해진다.

 

하지만 그 처음의 미칠 것 같은 과도기를 겪고난 뒤 슬슬 이 작은 존재가 내 삶의 한 구석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면 어쩐지 내가 손해보는 것 같은 공존생활을 즐기게 된다. 축축한 콧등이 손바닥을 문질러올 때, 동그랗고 까만 눈이 난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현관 앞에서 날 반기며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고 있을 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퍼지는 걸 막을 수 있는 '귀찮은 일'이란 없다.

 

그 순간 귀찮던 '개'가 '가족'이 된다. 아무리 내가 화를 내도 내게 화내지 않을 사랑스러운 가족이.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개, 말리를 만난 존 그로건은 행운아인 셈이다. 사람을 붕 날아올라 환영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 남의 얼굴에 침 범벅을 만들어놓고 신나하는 개, 다른 사람들에게 "얘는 사는 게 즐거운가 보군요"라는 말을 예사로 듣는 개. 그런 개 옆에 있으면 피곤한 날조차 얼굴에 웃음꽃이 피지 않을까?

 

하지만 슬프게도 개의 수명은 짧고 강아지로 있는 기간은 더 짧다. 늘 곁에 있던 '존재'가 사라진다는 건 그 존재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쓸쓸하고 슬픈 일이다. 내가 기르던 첫 강아지가 죽었을 때 나는 꼬박 일주일을 울었다. 마지막을 보지 못했기에 실감은 나지 않은데 집 안 어디에도 그 조그만 녀석이 없다는 것, 더이상 컹컹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 자꾸 날 괴롭혀댔다. 모르겠다, 그 때의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리 성실한 주인은 아니었지만 그 동그랗고 까만 눈에 홀라당 빠져있었다. 그 눈이 사라진 게 슬펐고 잘 대해주지 못해서 괴로웠다. 이런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며 100% 사랑해준 그 작은 존재가 뒤늦게 안쓰러웠다.

 

그렇다. 자신의 100%로 주인을 사랑하는 존재가 없어진다는 건, 상상 외로 쓸쓸한 일이다.

 

그래도, 그런 슬픔도 감수할 정도로, 반려동물이란 존재가 인생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풍부해진다. 말리와의 추억이 가득한 <말리와 나>를 보라. 인생이 초콜릿 상자와 같다면 반려동물이 있는 인생은 또 다른 초콜릿팩이 딸려오는 스페셜 초콜릿 상자일 것이다.

 

<말리와 나>. 고맙다, 새삼 우리집 강아지의 사랑스러움을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 내 인생이 작은 존재로 인해 얼마나 풍요로운지 깨닫게 해줘서.

 

 

-말리는 그저 덩치 크고 사랑스러운 멋진 개로, 침입자를 공격한다고 해봐야 죽도록 핥아주기만 할 녀석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 집을 노릴 수도 있는 좀도둑이나 공격자들이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이들에게 말리는 덩치 크고 힘이 세며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개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69)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멈춰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항상 날뛰는 말리가 어깨를 제니 다리 사이에 끼고는 큼직하고 뭉툭한 머리를 제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꼬리는 축 늘어져 있었는데 이 꼬리가 우리 두 사람 중 하나 아니면 무엇인가를 치지 않는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눈을 제니 쪽으로 향한 말리는 작은 소리로 낑낑대고 있었다. 제니는 말리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갑자기 얼굴을 말리 목의 두툼한 털가죽에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창자를 끊어내듯 격렬하고 멈출 수 없는 흐느낌이었다. (76)

 

-거칠 것 없는 야생마 같은 말리도 패트릭이 옆에 있을 때는 달라졌다. 말리는 아마 패트릭이 연약하고 힘없고 조그만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고, 그래서 아기가 옆에 있을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며 아기의 얼굴과 귀를 부드럽게 핥아주곤 했다. ~ 말리는 패트릭 주변을 맴도는 마음 착한 거인이었으며 이제 2등으로 밀려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155)

 

-말리가 그렇게 믿음직하고 단호한 태도로 우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개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너무 맞는 말이다. (169)

 

-하지만 손바닥으로 살짝만 쳐도 분노가 담겨있거나 아니면 엄한 목소리로 야단이라도 치면 즉시 깊은 상처를 받는 것이었다. 덩치는 태산만한 녀석이 엄청나게 예민하다는 얘기다. 제니에게 맞았다고 다친 것은 아니었고 다친 것 긑처에도 못 미쳤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제니가 말리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 것이 분명했다. 제니는 말리의 모든 것이었고, 세상에 둘뿐인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는데 이제 제니가 말리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제니는 말리의 여주인이었고 말리는 충실한 종이었다. 제니가 때릴 만해서 때렸다면 말리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고 맞고 있었을 것이다. 개 치고도 말리는 영리한 편이 못된다. 그러나 충성심 하나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5)

 

-말리는 용기만 있다면 내가 갖고 싶었던 특징, 그러니까 거칠 것 없고 반항적이고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고, 나는 녀석의 이런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얻었다. 그리고 말리는 삶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삶 속에 단순한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무리 많은 지시를 받아도 말리는 항상 의도적 불복종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상전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말리는 자기 자신의 상전이었다. (196)

 

-2년 전 우리가 집으로 데려온 것은 살아 숨쉬는 생물이었지 구석에 세워놓는 액세서리가 아니었다. 좋든 나쁘든 말리는 우리 개였다. 우리 가족의 일부였고,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말리는 우리에게 받은 사랑을 수백배로 불려 갚아주었다. 말리가 우리에게 보인 정도의 충성심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9)

 

-말리가 어떤 식으로든 삶의 모범이 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발코니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생각해보니 녀석이 '잘 사는 것'의 비결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며, 마치 사춘기 소년 같은 활력, 용기, 호기심, 장난기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내라.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달력이 몇 장이 넘어가건 여전히 젊은 것이다. 괜찮은 인생 철학이었다. 물론 소파를 찢어 놓거나 세탁실을 난장판을 만드는 부분은 제외하고 싶지만. (259)

 

-말리를 보면 인생이 짧다는 것, 그리고 순간의 기쁨과 놓쳐 버린 기회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의 전성기는 한 번뿐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은 꼭 갈매기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차서 바다 한 가운데를 향해 끊없이 헤엄쳐 가는 날이 지나면 물그릇의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기조차 힘든 날도 온다. 패트릭 헨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인생은 한 번뿐이다. (328)

 

-말리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이제까지 말리에게 한 번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말이다. 나는 말리가 죽기 전에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말리, 넌 훌륭한 개야."(365)

 

-말리는 우리를 실망시키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소중한 선물을 공짜로 주었다. 조건 없는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어떻게 주는지, 어떻게 받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조건 없는 사랑만 있으면 다른 것들은 대부분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간다.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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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 나뭇꾼 옮김 / 내일을여는책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하기 전에. 전 옛날 책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리뷰는 위의 책으로 합니다만...검색해 보니 2008년에 새로운 책이 나왔네요. 표지도 귀엽고 상큼합니다~


나는선생님이좋아요-3판

하이타니겐지로 |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 2008.03.14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새로 전학간 초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전집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이미 집에는 엄마 취향이 적극 반영된 셜록 홈즈 전집과 뤼팽 전집이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책 욕심이 많은 난 다다익선의 정신에 입각해 모처럼만에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얻은 전집이,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 중고시장 어딘가는 있겠지만 가격도 비싸고...) 에이브 전집이었다. 전 88권이지만 엄마 역시 중고시장에서 사온거라 중간중간 책이 빠져있었다. 그때는 당연히 몰랐지만 지금 새삼 검색해 보니 에이브 전집은 소위 해적판이라 부르는 책으로 작가의 허락없이 번역한 책들이었다. 그래도 훌륭한 책들이라는 것만은 변함없어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 80여권의 책들 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던 책이 있었다. <어른학교 아이학교>, <부엌의 마리아님>, <일곱 개구장이>.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고 심지어는 찡-한 감정이 밀려드는 책들이었다. 정식 번역판이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변변찮은 검색 실력 탓에 찾지를 못하다 요 근래 겨우 <어른학교 아이학교>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심지어는 예전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이미 <어른학교 아이학교>가 집에 있긴 하지만 번역본은 과연 어떨까 궁금해서 도서관에 달려가 빌려와봤다.

 

책 제목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바뀌어서 잠시 헷갈렸지만 원제는 또 토끼의 눈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번역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왜 원제가 토끼의 눈,일까 했지만 본문 중 동자 조각상의 아름다운 눈을 '토끼의 눈'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기도하는 듯, 생각에 잠긴 듯 그윽한 빛을 띠고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하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어릴적에 읽었던 <어른학교 아이학교>가 제일 맘에 든다.

 

도서관 책을 보다보면 가끔 누군가 낙서해 놓은 페이지가 있거나 아주 가끔 없는 페이지가 있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낙서는 흥미롭게 읽고 넘어가고 없는 페이지에는 속상해 하지만, 이 책은 곳곳에 어린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글귀에 밑줄이 그어져 있어서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한없이 공감하며 책을 읽었다.

 

이 이야기는 학교 옆 쓰레기장에서 사는 아이들과 젊은 여선생의 이야기다. 흔히들 더럽고 제멋대로라고 학교에서 싫어하는 아이들을 젊고 경험없는, 그야말로 곱게 자란 여선생이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성장해 나아가는지를 -그렇다, 단순히 아이들만의 성장기가 아니라 어른들의 성장기다 - 섬세하고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귀엽고 착하지만 그만큼 잔인하다. 계산이 없는 대신 너무 솔직하고 어른들의 나쁜 점을 가감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데쯔조와 친구들은 쓰레기장에서 살고있는만큼 다른 아이들보다 더럽고, 부모님들도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 일상 생활도 아슬아슬하다보니 '다름'에 민감한 아이들에게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은 결국 아이들일 뿐이다. 단순히 환경의 문제일 뿐, 아이들 자체는 착한 것이다. 겉만 보고 무서워하던 여선생님이 점차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공감하면서 자신의 환경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어른도 아이도 함께 성장해간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데쯔조와 심지어는 애완곤충(?)인 파리까지 귀여워지니 책이란 신기한 매체다. 나온지 꽤 되는 책에 나름 유명한 책이지만 꼭 더 많은 분들이 읽고 나처럼 데쯔조를 귀여워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

 

 

-데쓰조한테 보물이 잔뜩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 보물이란 무엇일까? 데쓰조는 글씨도 쓸 줄 모르고, 말도 하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에 보물인지 뭔지가 숨겨져 있는 걸까. (15)

 

-바다로 돌려보내니까 거북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네 발을 휘적거리며 헤엄쳐 갔다. 이 넓은 바다에서 왠지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기에 그 거북의 진지함이 더욱 가슴을 쳤다. (24)

 

-파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한테 버려진 채 평생 친구도 가족도 집도 없이 혼자 산다. 항상 벌, 거미, 참새 등의 위협을 받지만 남을 위협하는 일은 없고 먹이라고는 사회의 폐기물에 지나지 않는다. 파리의 생태는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잔인하지도 않고, 극히 조촐한, 말하자면 서민의 생활과 같다. (70)

 

-난 미나코가 공책을 찢어도 화 안 내구요. 책을 찢어도 화 안 내요. 필통이랑 지우개를 빼앗아도 화 안 내고 기차놀이를 하고 놀았어요. 화 안 내니까 미나코가 좋아졌어요. 미나코가 좋아지니까 귀찮게 해도 귀엽기만 해요. (126)

 

-그게 눈앞의 욕심이 아니고 뭡니까. 우린 교육이 뭔지는 모르지만 자기 아이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건 그럴싸한 소리죠. 하지만 이런 듣기 좋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가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세상이니까 학교에서는 더욱 서로 돕는 마음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서로 돕는 마음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처럼 들립니다만, 우리 장사치들은 그런 것으로 신용을 얻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사는 보람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128)

 

-효과가 있으면 하고 효과가 없으면 안 한다는 생각을 합리주의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인간의 생활 방식에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아이들은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인생인 겁니다. 그 인생을 이 아이들 나름대로 기쁨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목표도 여기에 있습니다. (148)

 

-하지만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는 꼭 잘했구나 생각하게 돼요. 고생이란 좋은 거죠. 좀더 고생해서 사토루의 머리를 좋게 만드세요. 글을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이죠. 선생님도 하룻밤 글을 쓰고나면 이가 와들와들 떨립니다. 밥을 먹으면 이가 아프죠. 사투루는 글을 다 쓰고 나면 이가 아파요? 안 그렇죠? 아직도 더 노력할 수 있다고 선생님은 생각해요. (213)

 

-약한 자, 힘이 없는 자를 소외시키면 소외시킨 자가 인간적으로 못쓰게 됩니다.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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銀耀夜 2009-10-0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1 막 입학사고 4월 되던 때, 우여곡절 끝에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음, 파리 이야기가 정말 뇌리에 쏙 박혀있네요.
그래서 더럽게 뭐람, 싶었는데 읽다보니 감동적이고 그래서 여러 친구에게 권했지만, 제일 인기 없는 책이 되었답니다. 허허허.
영화 감상 보러 왔는데, 흠흠흠, 리뷰 잘 감사하고 갑니다!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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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낭패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생각한 단어는, 슬프다거나 가슴이 먹먹하다는 말보다 낭패, 라는 조금은 현실적인 단어였다. 크지 않은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그 눈물이 떨어져 아슬아슬하게 책을 비켜나가 책상에 떨어지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 어느 차가운 부분은 계속해서 어쩌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울면 안 되는데. 내가 왜 이 시간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까.

 
내 평소 습관대로라면 난 이 책을 적어도 5년 이후에나 읽게 될 거였다. 아니, 어쩌면 영영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어려서부터 청개구리였던 나는 책을 고를 때도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은 무의식중에 리스트에서 빼버리곤 한다. 불특정 다수의 뒤를 이어 읽는다는 생각에 불쾌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기저기서 들리는 칭찬에도 난 이 책을 살 생각도, 읽을 생각도 없었다. 아마 엄마의 요청이 없었다면 영원히 인연이 없었을 테지.

 

난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굶고 살진 않아도 원하는 걸 다 사 줄만큼 넉넉하진 않았던 형편에 내가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책을 읽을 때, 엄마는 내 앞에서 말한 적은 없지만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걸 자랑스러워하시는 눈치였다. 책을 읽느라 숙제를 안 할 때는 매를 들면서도 내가 책을 사달라고 조를 때면 동네 책방에 같이 나가 책을 함께 고르곤 했다. 집안에 책이 쌓여가는 요즘에도 청소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해도 엄마는 여전히 엄마의 큰 딸이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좋으신 모양이다. 내가 주문한 책이 집에 배달되어 올 때면 엄마는 책 제목을 하나하나 살피시곤 전화를 걸어 택배가 왔다는 걸 알린다. 책 정리는 언제 할 거냐는 잔소리와 함께.

 

엄마도 어렸을 적 책을 좋아하셨다 했다. 가죽공장 하시던 할아버지가 엄마 손에 몰래 쥐어준 용돈으로 책을 하나하나 모으셨다고. 외할머니 댁 오래된 책장에서 먼지가 쌓인 옛날 책들을 내가 찾아낼 때마다 이게 아직도 있었네! 하고 즐거운 듯이 웃었다. 누렇고 바삭바삭 마른 책장을 넘기면 먼지가 피어올라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연신 코를 문질렀다. <모모>, <꼬마 니꼴라>, <오성과 한음>...그 많던 책들이 어디가고 이것만 남았네, 엄마는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책장을 넘기느라 그 말을 흘려들었다. 우리가 자라면서 엄마는 점점 책에서 멀어져갔다. 내가 어렸을 적엔 나와 함께 책을 보던 날도 있었지만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며 엄마는 책을 읽는 것조차 사치라는 듯이 내가 내민 책을 식탁 한 구석에 모셔두기만 했다.

 

그런 엄마가 오랜만에 내게 책 얘기를 꺼냈다. 요새 <엄마를 부탁해>라는 책, 유명하더라. 한 번 읽고 싶은데. 일주일에 한 번, 자취하다 들린 집에서 엄마와 오랜만에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그럼 내가 책 주문 넣을까. 아마 다음 주면 받을 수 있을걸. 엄마는 그럼 고맙구, 라고 말하곤 다시 걷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다음 주, 집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은 터라 엄마의 반응이 궁금했다. 오랜만의 독서에 그 유명한 <엄마를 부탁해>. 거의 매일 꼬박꼬박 통화해 실없는 일상을 늘어놓는 전화에 새 주제가 끼어들었다. 엄마 책 받았어? 어쩐지 자랑스러운 마음에 들떠서 묻자 엄마는 받았지 그럼. 뜯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읽었어. 하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얘기했다.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책을 한 번 들면 끝까지 놓지 않는 내 평소 독서 습관이었다. 어땠어? 그냥, 별로 슬프진 않던데. 그래? 사람들이 되게 슬프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가 보지. 하긴, 아이가 있는 엄마가 보는 거랑 자식이 보는 거랑은 좀 틀리겠지 역시? 담담한 엄마의 반응에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그리고 그 주말, 집에서 책을 가지고 학교로 돌아왔다.

 

엄마와 나는, 내 또래 여자애들이 엄마와 나누는 얘기보다 더 많은 얘기를 나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렸을 적에는 오히려 별로 대화가 없는 편이었다. 나는 방구석에서 책 읽기를 더 선호했고 엄마는 늘 다치고 돌아오는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사교성이 떨어지는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엄마와 동생의 뒤를 따라다니며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듣다 적절한 대답을 해주던 엄마가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로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내가 큰 딸이라 그런 것일까. 엄마는 종종 동생이 없을 때 우리가 어렸을 적 고생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야기의 끝은 항상 엄마의 눈물과 빨개진 코다. 한 맺힌 울음에 헐떡이는 엄마에게 물을 따라주는 건 유일한 청자인 내 몫이다. 우리는 일상의 이야기도, 푸념도, 심지어 가끔은 철학, 종교의 이야기도 나누곤 한다. 이런 대화에서 내가 느끼는 건, 결국 난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거다. 드러나는 성격은 다른데 생각하는 방식은 묘하게 닮아있다. 그 사실이 가끔은 웃기고 가끔은 애틋하다.

 

엄마가 <엄마를 부탁해>를 보고 울었다, 혹은 슬펐다고 한다면 난 절대 책을 펴들지 않았을 거다. 울면 지는 거라고 절대 나가서 울지 말라는 엄마의 가르침 덕분인지 잘 울지 않는 날 울리는 주제가 바로 ‘가족 간의 정 혹은 부재’니까. 엄마를 믿고 펴든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난 후회했다. 내일 학교에 부은 눈으로 가겠구나.



엄마는 힘이 세다고, 엄마는 무엇이든 거칠 게 없으며 엄마는 이 도시에서 네가 무언가에 좌절을 겪을 때마다 수화기 저편에 있는 존재라고.

 


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어학연수를 권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싫어하는 건 죽어도 하지 않는 황소고집 덕에 하기 싫어하는 영어는 성적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엄마는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곧잘 하던 딸애가 점수를 그렇게 받아온 것에 놀랐는지 평생 나와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어학연수를 입에 담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그저 대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가 원했던 영어 공부에 대한 열정과 의지보다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학교생활에서 좀 멀찍이 떨어져 자유를 느껴보고 싶었다. 난 속내를 감추고 어학연수에 가겠노라 말했고 엄마는 그때부터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가며 내 어학연수 준비를 했다.

 

내가 비행기로 16시간 떨어진 시애틀에 도착해 산더미 같은 짐을 안고 기숙사 방에 들어섰을 때 제일 처음 한 일은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거였다. 엄마? 응, 나 도착했어. 이제 짐 푸려고. 응응, 다시 전화할게. 새벽까지 내 전화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운 엄마는 피곤한 목소리로 입맛에 안 맞아도 끼니는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엄마의 지친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낯선 침대 위에 짐을 풀러놓으며 나는 한없이 들떴다. 시차를 느낄 새도 없을 만큼 들떠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교 공부에서 벗어나 낯선 동네를 산책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나는 그 새로운 생활 속에서 종종 엄마에게 전화하는 걸 잊었다. 오랜만에 전화해 왜 전화 안 했어? 라는 엄마의 채근에 돈 많이 들잖아. 어차피 별 일도 없는데 뭐. 무심하게 답하며 밥 먹었냐는 질문에 대충 먹었다고 대꾸했다. 엄마는 내가 미국에서 핸드폰을 산 이후로 종종 전화를 걸어 내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시차 때문도 있었지만, 핸드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성격 탓에 나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매우 화를 내며 나를 탓했다. 나는 나대로 엄마가 너무 자주 전화한다고 화가 나 얼굴을 찌푸리고 엄마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시애틀에서 중부인 켄터키로 옮기자 상황이 달라졌다. 계절은 겨울에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상황에 나는 우울해했고 그 감정을 누군가에게 발산하고 싶었다. 평소라면 가방 한구석에 잠자고 있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한국시간을 확인하는 게 내 일과였다. 엄마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면 지희니? 라고 묻는 엄마의 잠이 덜 깬 목소리에 나는 응...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나는 엄마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아이였다.

 


엄마는 내가 전화 할 때마다 늘 밥 먹었어? 하고 확인한다. 아직 안 먹었어, 라고 답하면 왜 아직 안 먹었어! 라고 화를 내고 밥 먹었지, 하면 반찬 뭐 먹었어? 하고 재차 물어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어느 면으로 보나 사근사근 착한 딸은 결코 아니다. 전화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 전화가 와도 놓치기 일쑤다. 그래도, 내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전화하는 상대는 엄마다. 심지어 손가락이 다쳤다고 전화해 징징댈 때도 있으니까. 지방에서 자취하는 딸을 걱정하는 엄마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전화로 안심시켜 드리기는커녕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걱정스런 목소리에 기뻐한다. 이 얼마나 어린 딸인지.

 


세상 사람들이 다 잊어도 딸은 기억할 것이다. 아내가 이 세상을 무척 사랑했다는 것을, 당신이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을.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울었다. 눈물이 너무 나 다음날 학교가 걱정되어 3번에 나눠 읽을 정도였다. 내가 눈물이 많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난 너무 울어 눈가가 따갑고 머리가 멍해질 때에야 내가 왜 이 책을 멀리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단순히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엄마가 그냥 그랬어, 했을 때 집어 들지 않았겠지. 나는 엄마가 우는 게 무서웠다. 처음 엄마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 때 나는 휴지를 가져다 닦아줄 생각도, 울어서 목이 아픈 엄마에게 물을 가져다 줄 생각도 못했다. 우리 자매가 어렸을 적 엄마는 남들 앞에서 우는 건, 지는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는 가끔 운다는 이유만으로 혼이 날 때도 있었다. 억울함에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씨근대는 건 고역이었지만 엄한 얼굴의 엄마 앞에서 나는 억지로 울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 엄마가, 내 앞에서.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아는 게 무서웠던 거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저 아직도 어린 아이마냥 어리광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고 엄마에게 기대고 싶었던 거다. 책장을 펴는 순간 나는 등장인물을 “너”라고 칭하는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다. “너.” 엄마를 잃어버린, 그 전부터 잊어왔던 인물들은 나였고 우리 가족이었다. 그래서 울었다. 잘못을 들킨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우리 엄마는 시골에서 태어나지도, 글을 못 읽지도, 무조건 참고 살지도 않는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수도권에서 사셨고 나만큼 문화생활을 좋아하며, 화가 나시거나 아프실 때는 버럭 소리도 지르신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가 우리 엄마 같았다. 어쩌다 택배를 부쳐줄 때면 구석구석까지 먹을거리를 꾹꾹 눌러 담는 엄마. 여행을 좋아해서 한나절을 여행상품 사이트를 뒤지는 엄마. TV에서 외국 풍경을 보여주면 어머- 어쩜 저렇게 예쁘니 하고 한숨 섞인 감상을 하는 엄마. 가게 나가느라 피곤한 몸으로 꼬박꼬박 저녁 반찬을 매일 만드시는 엄마. 똥오줌 못 가리는 강아지가 밉다 하시면서 살찐다 주지 말라했던 육포를 몰래 챙겨주는 엄마. 주말에 집에 가면 배가 터지도록 먹을 걸 내미는 우리 엄마.

 

그래, 나도 우리 엄마를 잘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우리가 대학생이 된 뒤 유난히 옛날 얘기를 자주 했다. 엄마가 국민학교 시절 셋째 이모 손을 잡고 둘이서 버스를 타고 고개를 건너 친척집에 놀러갔던 일, 유난히 엄마를 예뻐하셨다던 외할아버지가 가방을 주셨던 일. 그래서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엄마 역시 어린 시절이 있었고 엄마 안에서 그 시절은 늘 아련한 추억이라는 걸. 그래, 엄마도 어린아이였던 적이 있겠지.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우리 엄마였다. 어느 때라도 우리를 최선으로 아는 우리 엄마. 과연 나는 얼마만큼 엄마를 알고 있을까. “엄마”로서의 엄마가 아니라, 꿈 많았던 소녀 시절의 엄마를, 과연 나는 알고 있을까. 엄마는 내가 엄마를 “엄마”로만 기억해도 좋아할까. 우리를 낳았다고 어린 시절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기억되어도 엄마는 기뻐하실까.

 



나는 모르겠다. 아직 어린아이는 빽빽 울어대서 싫고 말 안 듣는다고 피해 다니는 내가 엄마를 이해하려면 아직도 많은 날을 보내야 하겠지. 어쩌면 먼 훗날 잠든 내 아이를 내려다보며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고 혼자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엄마가 그때까지 내 곁에 계실까. 나는 또 책을 덮고 울었다. 이 밤, 엄마가 나를 울린다.

 



발개진 눈가를 손으로 덮으며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밤은 어느새 이렇게 깊었다. 나는 불쑥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침대로 파고든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이 되더라도 엄마가 이 말을 내게 해주길 바라며.

 




얘야, 너는 그렇게 내게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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