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제도 혁명 - 학교혁신의 지름길 한국교육연구네크워크 총서 4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엮음 / 살림터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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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의 교육과정 동안 4명의 교장을 만났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학문의 이치가 높고 불치하문의 자세를 가진 존경할 만한 교육자였을까, 권력을 탐하고 남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였을까.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교장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당시 교사들은 교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처음은 자신이 존경받는 교육자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임용고시를 통과하고 드디어 선생님이 되었을 때의 감정을,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고 처음 불렸을 때의 느낌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교사가 왜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 권력 카르텔을 형성하고, 뇌물 수수를 관행으로 여기며, 학생들을 존중의 대상이 아닌 순응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폭언과 성추행을 일삼게 되는 것일까.

교장 승진 제도는 학교 내에 비정상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서열이 올라갈수록 교육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기간제, 시간제 등 비정규직 교원은 학생들을 제일 많이 만난다. 그 다음이 신입 교사이며, 중견 교사들이다. 교감이 되면 수업을 하지 않고 일부 학생만을 만나며, 교장이 되면 일체 만나지 않는다. 승진을 위해선 교육보다 다른 것에 신경써야한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교육자는 교장이 되는 길을 포기한다. 학생들을 만나기 싫은 교사들은 승진에 목을 맨다. 교육자임을 포기할수록 서열이 올라가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학생들이다.

학교와 본질적 공통점을 가진 곳은 감옥과 군대다. 세 곳 모두 공간을 제약하고, 서열화와 폐쇄성 속에서 인간을 '교육', '교화' 하는 곳이다. 통제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량품으로 규정하며, 복종하지 않는 살마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외면하고 배제한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곳이며, 인권은 지켜지지 않는다. 학생은 교사의 말에 복종해야 하며, 교사는 교감의 말에 복종해야 하고, 교감은 교장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교장은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절대 권력자이며, 절대적으로 부패할 수 있다. 권력자가 어떤 사람이던 민주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어야 민주제도라 할 수 있다. 학교 구조는 정 반대이다. 반민주적인 공간에서 반민주성을 가장 충실히 구현하는 사람을 교장으로 만드는 것이 현재의 관료주의적 교장 승진 제도이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상투어가 보여주듯, 교육의 핵심은 교사를 통해 구현된다. 그리고 교장제도의 폐해는 바로 이 가장 본질적인 교사들의 교육을 망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신랄한 지적이 어디 있겠는가? 교장제도는 교사들을 교육 이외의 일로 번거롭게 하며, 심지어는 교장이 되기 위한 행렬에 뛰어들게 만들어 결국 교육마저도 내려놓게 만든다. - p.61


책은 교장승진제 폐지를 이야기한다. 일정 기간 경력과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교사라면 누구나 교장 자격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교사가 일정 기간 교장 업무를 수행하면 다시 교사가 되는 것이다. 교장은 승진의 종착점이 아니고 보직의 하나로 바꾸자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민주적인 시민이 있어야 하며, 민주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일 교장이 될 교사가 내일 교사가 될 교장에게 명령을 받는 민주적 제도를 갖춘 학교를 만들어야만 민주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변화는 느리지만 이루어지고 있다. 내부형 교장공모제를 통해 혁신학교의 교장으로 임용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희망적이다.

교장이 학교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학교 개혁, 교육 개혁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핵심에 교장이 있음에는 틀림없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교육공약으로 교장 공모제 확대를 내걸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개방적 리더십과 교직사회 활성화를 위해 시범 운영되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신청학교의 15%만 가능하도록 시행령이 개정됬다. 현재 15%룰을 폐지해 내부형 교장 공모제 확대를 추진중에 있다. 자율학교나 자율형공립고에만 적용된다. 대부분의 교장과 교감이 회원으로 있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총은 반발하고 있다. 현재와 과거의 교장들은 대한민국 교육에 큰 흔적을 남겼다. 그것이 공로일지, 허물일지는 현재 교육을 바라보고 평가해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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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8-01-10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은 얘기, 참으로 공감합니다-!
잘 보고 가요-:-)
 
단체행동권 - 공익과 인권 10
이흥재 엮음 / 사람생각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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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3권은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헌법에서 정한 기본권이다. 많은 사람들은 노동 3권을 인식하지 않으며 살아가지만, 큰 사건들을 통해 대중들에게 주요하게 다가온다. 그 주요한 순간에는 노동3권의 단결권, 단체교섭권보단 단체행동권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단체행동권의 보장은 근로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하는 필수조건인 것이다. 단체행동권에 대한 해석은 대한민국 노동계 구조에 대한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단체행동권은 상위의 헌법해석학적 시각보단 하위법인 노조법의 관점에서 보는것이 주류적이다. 또한 독자적 자유권인지, 자유권적 성격과 사회권적 성격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혼합권적 성격을 가진 것인지의 차이에서 법원은 혼합권적 성격을 강조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흥재는 이 관점들이 올바른지 묻는다.

단체행동권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근로자가 조직적,경제적으로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누리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단체행동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어느정도 다중의 위력이나 협박적 요소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실력행사이다. 이런 행위는 반평화적, 반합법적으로 보이지만, 단체행동권에는 민,형사상 면책효과가 부여된다. 단체행동권에 민,형사상 면책효과가 있는 이유는, 행동권을 보장해줌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갈등의 조화 해결능력이 더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근로자의 적정한 실력행사를 국가나 사용자가 수인함으로써 계급적 대립의 완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단체행동권의 보장은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아닌, 대립의 중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체제의 유지에 이바지하고 있다. 물론 단체행동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 및 안전을 보호해야 할 내재적 한계를 가진다.

근로자의 단체행동을 혼합권적 성격으로 보는 시각의 문제는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를 명분으로 내세워 오히려 노동 3권을 제한하는 정당한 사유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법원, 정부, 기업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다수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더 나아가 쟁의행위의 민사상 책임을 묻기 시작했고, 단체행동권에 치명적 손상을 가져오고 있다. 통일중공업 사건 이후 쌍용차, KEC, 한진중공업, 보쉬전장, 유성기업, 상신브레이크, 현대차, 기아차, DKC, 아시아나항공, 완산교통, 문화방송, 대전일보, 속초의료원, 고려수요양병원, 동양시멘트, 생탁막걸리, 울산과학대 등 수많은 기업들이 파업 등 노조 쟁의행위에 수천억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며 관련 노동자가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영국은 1906년에 사용자의 불법행위 소송을 막는 법을 통과시켰으며, 현재는 책임상한액을 제한하고 있다.

단체행동권의 헌법적 보장이 자본주의체제유지를 위한 고도의 정책적 장치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회통적 사회구조를 지향하기 위하여 단체행동권의 적정한 행사를 가로막는 법풍토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 p.30


이흥재는 단체행동권을 독자적 자유권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노동 3권 중에 어떤 것을 핵심으로 해석하는지에 대해 단체행동권이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노동 3권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각은 중요하다. 노동 3권에서 단체행동권이 중심이 된다면, 독자성, 일상성, 보편성의 관점에서 많은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사용자와 국가의 억압에서 행동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최후수단원칙에서 벗어나 목적 실현을 위해 언제든지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만이 아닌 근로자 단체 또는 일시적 집단이나 개별근로자라도 단체행동을 인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더 이상 투쟁은 노동조합의 배타적 권리가 아니게 된다. 노조가 없더라도 근로자가 투쟁할 수 있게 된다면, 삼성전자 등의 무노조 원칙을 적용하는 기업들의 방어논리도 사라지게 된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한국 노동자들은 점차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아갔다. 단순한 먹고살기 위한 투쟁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단체행동권 또한 사실상 규범력을 획득했다. 지난 박근혜 퇴진운동 역시 국민의 단체행동이었다. 노동계에 긍정적 변화 역시 이루어지고 있다. 산업구조 개편에 따라 중공업 등 대규모 사업장 위주의 노동운동에서 중소규모 사무직을 위한 노동운동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아직 갈길은 멀다. 노조가입률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기업에서 노조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단결권, 단체교섭권 또한 지켜지지 않은 곳이 많다. 그 중 가장 먼 길은 단체행동권이다. 단체행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우리의 이웃나라, 공산주의 국가, 중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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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경제학 - F16은 세계를 어떻게 빈곤에 빠뜨리는가
비제이 메타 지음, 한상연 옮김 / 개마고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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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도시바 메모리 인수전에서 사람들이 주목한 부분은 금액이 아니었다. 중국이 도시바를 가져갈 것이냐는 초미의 관심사였고, 결국 중국은 가져가지 못했다. 내부 담당자가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중국은 더 많은 금액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 그리고 그 뒤에 미국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거라는게 일반적 견해다. 이런 모습은 과거 여러 차례 나타났다.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액이 1조 달러에 달했을 무렵 중국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것, 미국 제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 미국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이 구입하고자 원했던 재화와 서비스, 기업을 한사코 판매하지 않으려 했다. 중국이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미국은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2003년 미국은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저금리 덕분이었다. 저금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성장 덕분이었다. 중국은 미국의 기업을 사지 못하는 대신,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에 계속 투자했다. 미국은 국채를 언제 발행하던지 확실한 매입처가 존재하게 되자, 금리를 높여서 국채를 팔 이유가 사라졌다. 미국의 대중국 적자는 계속 늘어났다. 경제관계에 있어서 미국이 강점을 가지고 있던 것, 미국의 상품을 중국에 팔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를 비난했지만, 중국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결국 몇 년이 지난 후 저금리 덕에 형성된 서브프라임이라는 주택담보대출 시장이 폭발했다.

미국은 수출의 66%를 전체 수출기업의 3%가 책임지고 있다. 그 중 항공기, 전기기기, 범용산업기계, 발전기, 과학기기 등 하이테크 제품을 수출한다. 롤스로이스 항공엔진의 가치는 같은 무게의 은과 같다고 하니, 하이테크 제품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중요한 수출품목 중 하나는 무기다. 헬기와 미사일, 전투기 등을 판매한다.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연료전지, 레이저, 로봇 팔, 광학장비 등 하이테크 품목의 상당수는 무기와도 연관이 있는 이중용도 품목이다. 넓게 봤을 때 미국의 주요 수출품은 결국 무기, 전쟁과 연결된다. 미국은 전쟁을 수출하고, 생필품을 수입한다. 미국의 상대교역국들은 무기를 얻고, 생필품이 사라진다.

미국은 거리낌없이 무기를 전 세계에 판매한다. 중국만 제외하고. 중국이 원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 군산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전투기를 사고 싶다면, 중국은 보잉이나 록히드 마틴을 사고 싶다. 순수한 경제학적 논리라면, 보잉이나 록히드 마틴은 충분히 살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팔지 않으리라는 것은 어느 누구나 알고 있다. 전쟁상품이야말로 세계 경제구조에 중심이라는 것을 저자 비제이 메타는 말한다. 미국, 더 나아가 주요 선진국들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 결코 하이테크 제품 생산능력을 갖추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그 생산품만을 사가길 바랄 뿐이다. 그 댓가는 후진국의 자원, 식량, 후진국 사람들의 빈곤이다. 더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하이테크 무기들은, 그 말처럼 사람들을 죽인다. 무기가 사용되서 죽이는게 아닌, 사람들을 굶겨서 죽인다.

UN이 정한 새천년개발목표는 현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엇비슷한 수준의 인간안보를 누려야 한다는 게 그 근본 취지이지만, 일각에서는 달성 불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말 그런가? UN에 따르면 연간 3,000억 달러만 투자하면 극빈선인 하루 1달러의 생계비로 연명하는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 그 액수라고 해봐야 전 세계 연간 군사예산의 1/3이다. - p.254


파키스탄에 신형 무기를 살짝 제공하면 저절로 인도에 새 무기 시장이 열린다. 이른바 군사균형이란 명분 하에 사회적 부는 계속 순환된다. 한쪽엔 먹을 수 없는 무기가 제공되고, 한쪽엔 먹음직스러운 온갖 소비재가 제공될 뿐이다. 지배 엘리트들의 견해에 따라 민족주의와 군사주의는 신성시된다. 미국에서 군인의 위상이 대단한 이유도 그것에 있다. 전쟁의 경제학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글로벌 테러리스트들, 끊임없이 등장하는 후진국 독재자들과 로비스트들, 그리고 그들이 소비하는 우리의 세금이다. 비제이 메타는 전세계적인 군사비 축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끊임없이 군사적 대응론을 언급하는 이 시점에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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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증발 -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레나 모제 지음, 스테판 르멜 사진, 이주영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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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 매년 일본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의 숫자다. 범죄조직의 인신매매나 바다에서 수영하다 실종되는 경우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사라진다. 이름을 바꾸고, 고향을 숨기고, 가족들이나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는다. 평생을 함께해왔던 관계들을 끊고 혼자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대부분의 경우 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비참한 삶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증발할 것을 선택한다. 저자 레나 모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2년째 취업이 되지 않는다. 부모님은 금전적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더 이상 부모님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자신을 믿고 기대해왔던 부모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빚이 생겼다. 평생 벌어도 갚기 힘든 빚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지켜야 한다.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혼을 하자 주변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다. 가족에 병든 환자가 생겼다. 버티고 버텨봤지만 더 이상 돈이 없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실패한 것은 아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던 사람도, 잘나가는 금융맨도 있었다. 그들은 골인 전에 한 번 실패한 것이다. 원만한 가정에 태어나서 묵묵히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회사에 들어가서 결혼하고 병들지 않고 정년에 은퇴할때까지 금전적인 문제가 없는 삶. 이 모든 과정 중에 한 번 실패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패에 관대한 사회는 아니었다. 재도전을 불허하는 사회였다. 그들은 증발했다.

우리 일본 사회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개인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죠. - p.154


그들은 사라짐과 동시에 사람들 곁에 존재한다. 지방에서 작게 농사를 짓기도 하고, 새로운 회사에서 다시 정착하기도 한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슬럼가에서 살기도 하며, 노숙자가 되거나 야쿠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술, 피로, 우울함, 입에 풀칠할 수준의 수입, 절망, 압박감. 그들의 자조적인 말처럼, 천천히 자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를 지우고 지하경제를 지탱하는 사람들. 후쿠시마의 핵 폐기물을 치우는 사람들. 경제대국 일본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어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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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 우리가 배운 모든 악에 대하여
박민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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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청소년 범죄로 인해 소년법 개정이 논의되는 등 학생들의 폭력은 주요 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학생들이 옛날보다 잔혹해졌기 때문일까? 통계를 보면 2007년의 집중단속과 게임물 불법 업로드 등 저작권법위반사범 증가 등을 제외하면, 청소년 형사사건의 수는 계속적으로 감소세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이슈화로 크게 다뤄지는 것은, 강력범죄의 수가 증가세에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서울시 통계를 보면 지능범의 경우를 제외한 폭력, 강력범의 영역에서 청소년 범죄는 증가하고 있다. 왜 학생들은 폭력을 행사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소년법 이상의 영역을 들여다봐야 한다.

일본 이지메 연구의 권위자 나이토 아사오는 학생의 폭력은 옮은 행동이라고 말한다. 학교는 폭력을 용인하는 공간이며, 생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도소와 다르지 않다. 정해진 시간 외엔 공간 밖으로 나갈 자유도 없으며, 권위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닫힌 세계, 철저한 서열구조에서 학생들은 그들만의 질서를 따른다. 서열관계 속에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옳은 행동이다.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도 옳은 행동이다. 학생들의 서열은 부모의 돈, 자신의 힘, 학교의 성적, 외모 등의 형태로 결정된다. 때론 스스로 획득하고, 때론 권위자가 부여해준다. 학부모나 교사는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학교성적만 가져다준다면 학생이 어떤 행동을 하던 착한 행동이 된다. '착한' 일진은 존재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는 거의 없다. 그들은 부모와 교사에게 헤어스타일부터 옷, 시간, 결정권 등 대부분을 통제받는다. 또래집단내에서도 서열이 존재한다. 극도의 스트레스 환경은 학생들의 언어를 변화시켰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교사에게 욕을 배우고, 부모에게 욕을 배우고, 자신들끼리 욕을 한다. 모든 공간에서 그들은 아무 의미도 없이 패드립을 한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집단은 또 있다. 바로 군대다. 공간의 제약, 서열화와 폐쇄성, 만연한 폭력은 학교와 군대 모두에서 발견된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노예들은 욕을 통해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다.

집단 성폭력의 강한 유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청소년의 서열 문화와 그 서열 문화가 갖는 폭력성이다. 그리고 청소년의 서열 문화를 만든 것은 학교의 서열 문화다. 교장으로부터 순차적으로 내려오는 관료적 서열 체계, 상명하복 문화, 청소년에 대한 학교의 위계적 통제관리, 약자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과 하향 폭력, 청소년들을 한 줄로 세우는 입시체제가 청소년 서열 문화 형성의 주범이다. - p.245


같은 똥통이라도 더 심한 악취를 내는 곳은 있기 마련이다. 상문고, 충암고 등 사학비리가 운영하는 곳이나 에바다학교처럼 횡령과 강제노역 등이 만연한 곳, 학생들의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사학 등이 그것이다. 교장과 교감이 여교사를 성추행하고, 교사가 학생을 성희롱하는 공간에서 학생들은 사회의 폭력을 배운다. 학생 시절엔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수 있지만, 그 기억은 분명 내재화되어 남게 된다. 수시로 남자 반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키채로 남성의 고환을 가격하던 선생이 있었다. 반 아이중 누구도 그것에 반대를 표하기는 커녕, 그 당시에는 선생의 관심을 많이 받는다며 부러워하던 학생도 있었다. 폭력은 그렇게 일상화된다.

학교는 분명히 민주주의를 가르친다. 학교 교과서는 고대 그리스, 프랑스 대혁명, 4.19, 5.18 등 수많은 민주주의 사건들을 가르치며, 학교는 민주적인 학생을 육성하는 곳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것처럼, 대한민국 학교에 민주주의는 없다. 학생들은 인권을 빼앗기고, 발언권을 빼앗기고,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 인간이 자유를 빼앗길 때 그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비관과 폭력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현실을 비관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고, 폭력적이지만 약자에게만 폭력적인 사회인으로 육성할 때, 그것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권위에 순응하는 '착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한국 교육은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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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09-25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울하네요... 바꾸지 않는다면 점점 더하게 변해갈 거라 생각하니 암울함과 함께 분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