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사냥 -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환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거대 제약회사의 인체 시험
소니아 샤 지음, 정해영 옮김 / 마티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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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최근엔 계급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수저의 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 색의 수저들 중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금수저의 대표적인 경우라면, 뉴스에 간혹 등장하곤 하는 어린이 주식부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7살, 8살, 10살 정도의 나이에 이미 100억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어린이 주식부자들의 뉴스기사를 보면, 눈에 띄는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한미약품입니다. 100억원대 어린이 주식 부자 8명 중 7명이 한미약품 회장의 손주들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미약품의 주식이 큰 폭으로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IT업계 못지않게 소위 대박을 낼 수 있는 업계가 바로 제약회사들입니다.

제약회사가 대박을 내기 위해선 신약을 판매해야 하고, 신약을 판매하기 위해선 정부의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정부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선 약의 효능을 입증해야 합니다. 효능을 입증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은 임상시험입니다. 그러나 제약회사가 있는 나라들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기엔 대부분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들에겐 인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의 부작용을 전부 설명해줘야 하고, 장기적으로 관리해줘야 하고, 시험비를 지불해야 합니다. 임상시험에서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은, 제약회사의 이윤이 떨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때문에 제약회사들은 세계 곳곳에 있는 더 싼 목숨을 찾아 나섰습니다. 전 세계 인구 5명 중 1명이 1달러 이하의 삶을 사는 현실 속에서, 제약회사들은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아주 쉽게 피험자들을 찾았습니다.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기업들은 재정적, 의학적 서열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으며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동안 환자와 접촉하는 일은 전혀 없다. 피험자는 데이터를 얻기 위한 실험 대상일 뿐이다. 이 데이터는 의료 제품과 의약품 판매 허가를 받는 데 쓰인다. 환자와 피험자의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임상시험의 관심사가 의학적 발견이나 환자 치료가 아니라 돈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좇는 의료풍경, 임상시험》p.64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제약회사의 임상시험이 약을 구할 형편이 안되는 빈곤한 나라의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 말대로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중 일부는 약의 혜택을 받는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실험에 참가한 사람 중 일부는 위약 처방을 받고 상태가 더 악화됩니다. 임상시험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대조군과의 인상적인 차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자 소니아 샤는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임상시험들을 말합니다. 그곳엔 약과 의사가 있지만, 환자를 위한 약과 의사는 아니었습니다.

뉴욕 대학의 소아과의사 사울 크루그먼의 팀은 멀쩡한 아이들에게 분변을 통해 전파되어 간에 감염을 일으키는 간염 바이러스를 주사했다. 정신지체아와 다른 장애아들의 수용기관인 윌로우브룩 주립학교에서 일하는 크루그먼의 팀은 간염균이 가득한 분변을 구해서, 그것을 초콜릿 우유와 1대 5 비율로 섞었다. - p.113


인간과 질병의 투쟁이라는 역사 속에서 현재 빈곤한 나라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한 물과 안전한 식품이 부족한 사회보건의 개선이지, 결코 브랜드 신약은 해답이 아닙니다. 설령 신약이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브랜드 의약품 판매는 빈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불평등 자체가 못 가진 자들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브랜드 신약이 빈자들의 몸으로 실험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더욱 빈자들을 만드는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제약회사의 최신 제품들, 값비싸고 효능이 좋다고 선전하는 신약들이 정말로 효과가 좋다면, 의학의 역사를 썼던 페니실린의 반 만큼의 효능만이라도 있었다면, 비인간적인 임상시험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던 환자들, 가난한자들,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약들의 성능은 기본적인, 오래된, 그리고 무엇보다 값싼 약들에 비해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약회사들은 결핵에 찌든 빈민구역이나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구매력이 낮은 시장을 감수하는 대신, 더 돈이 되는 접근법을 선호합니다. 오늘날 의약품으로서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치사율이 높고, 전염성이 많은 무서운 질병을 해결할 의약품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질병이 선진국에 만연한다면 무엇보다 큰 돈을 벌 수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질병은 빈곤한 나라에서 발생하며, 제약회사들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한미약품이 최근 높은 이익을 올린 분야도 비만 치료 바이오 신약이었습니다. 제약회사들은 이런 사소한 문제거리들을 약으로 해결하길 원합니다. 그들이 돈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선 신약의 효과보다 마케팅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상위12개 제약 회사는 매출의 12.4%를 연구개발비로 사용했는데, 마케팅과 관리 비용으로는 34.3%의 비용을 투자했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흡연자, 비만인 사람 또는 앉아서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금연이나 체중 감량을 하지 않고, 또는 거의 운동을 하지 않고도 그들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기 위해 약물 치료만 하면 된다는 암시를 준다. -《질병판매학》p.42


매년 등장하는 신약들, 큰 돈을 벌며 승승장구하는 제약회사의 이면에는, 그 약을 자신의 몸으로 실험하게 해주는 빈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빈곤한 사람들을 지구 저 멀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이른바 흙수저 청년들이 생활비, 등록금이 없어 임상시험에 몰린다고 합니다. 약의 부작용을 다 알지도 못하고, 최악의 경우 죽을 수 있는 이른바 '마루타 알바'마저도 수대 일의 경쟁 끝에 할 수 있다는 뉴스는 계층간 부의 간극을 느끼게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쉽게 임상시험 참가자를 모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비위생적인,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습니다. 의학의 발전에 있어서 임상시험은 필요합니다. 저자는 의학이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 위해선, 그리고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선, 임상시험 시스템이 더 건전하고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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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는 문학
김성곤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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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수십만 년 전 인간이 대지에 섰을 때와 현대의 인간은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며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불과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시대를 살았고, 여성의 참정권이 없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변화는 많은 진통을 동반하지만, 결국 우리는 변화합니다. 그 과정이 부정의 변증법이던, 패러다임의 전환이던 간에 우리는 언제나 경계를 넘어왔습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현재 영역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고대, 중세, 근세를 넘어 근대가 도래했을 때, 세계는 근대적 합리성과 과학성이라는 새 가치를 받아들였고, 모더니즘이라는 영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가 전세계적인 전쟁의 광풍을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자 우리는 다시 변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근대적 가치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느끼며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이나 포스트콜리니얼리즘(탈식민주의) 등이 등장했고, 새로운 경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시민들 스스로 감시하는 규율권력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처벌 역시 공개되지 않고, 이데올로기는 재생산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야만성을 일정부분 제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맹점은 여전합니다. 여전히 무수한 인종학살이 자행되고, 난민들은 국가를 떠나고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립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처럼, 국가폭력, 자발적 복종, 합리성은 여전히 현대성의 핵심에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지 모더니즘 시대의 홀로코스트를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이런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또한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력입니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이 동력이 될 때도 있고, 사소해보였던 한 사건이 동력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인터넷의 등장 등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많이 있습니다. 문학 또한 그런 동력 중에 하나입니다.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기반에 반동적이었고, 반신앙적이었고, 음란했던 책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계몽사상가 테레즈》라는 음란소설은, 남녀관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귀족이건 평민이건, 남자건 여자건 모든 몸은 궁극적으로 평등하다고 말합니다.《2440년》은 2440년의 파리를 배경으로 먼 미래에 이뤄질 이상향을 공상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했습니다.《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는 왕은 보통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의 경계를 넘어섬으로서 문학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저자 김성곤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들입니다. 그 시대의 정신은 그 시대의 문학에 깃들며, 문학은 그 시대를 대변함과 동시에 새 시대의 문을 살짝 열어줍니다. 종이책과 전자책이라는 형태의 경계, 순수문학과 서브컬처,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의 경계는 문학에 있어서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과 컴퓨터게임에 대한 이야기, 인간과 기계를 다룬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문학은 시대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과감히 경계를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타자를 포용하는 것이 현재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라고 말합니다. 다문화사회, 국제화사회, 인터넷사회는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으로 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 새로운 시대를 문학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학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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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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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을 밝힌다는 웅대한 꿈을 가진 과학자들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만 하더라도 학명 플리오바테스 카탈로니에, 별명 라이아로 명명된 1160만 년 전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화석을 통해 유인원의 시조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긴팔원숭이에 좀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발견이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가 되지는 않지만, 과학자들은 언제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화론은 명실상부하게 현대의 패러다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 과학, 지적 설계, 성경직역주의 등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특히 과학적 근거와 무관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창조론과 달리, 성경에 쓰인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며, 이것이 창조주의 존재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은, 진화와 관련된 과학전쟁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떤 면에선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진화론과 창조과학의 대립 덕분인지 많은 과학자들이 대중을 위한 저술을 하고 있고, 그만큼 좋은 진화론 책들을 만날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그중엔 숙달된 독자들을 위한 무거운 책도 있을 수 있으며, 부담없고 가벼운 책들도 있습니다.《인류의 기원》은 후자의 책입니다.

진화론에 관해서 많은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현재 우리의 행동들이 어떤 기원을 가지는지, 신체가 어떤 방식을 통해 구성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과학자들은 사회생물학, 인간행동생태학, 고인류학, 진화심리학, 문화진화론, 유전자-문화 공진화론 등을 통해 인류가 어떻게 진화하면서 지금 하는 행동들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농업을 시작하면서 왜 영양적으로 더 안좋은 결과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할 수 있었는지, 인간은 언제부터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현재 어른이 되면 왜 마실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동력은 더 커진 두뇌가 아니라 두 다리였다던지와 같은 이야기들은 진화론과 고생물학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흥미로운 지식들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진화되어왔다는 이야기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진화론의 호소력있는 메시지들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기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화론은 나치와 우생학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필트다운인의 이야기처럼 잘못된 애국심을 발휘해 과학의 눈이 멀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진화론은 인간이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은 협력과 이타심을 가지는 것이 진화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사회학자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진화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원적이지만 엄격하고, 다산적이지만 자기비판적인 과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센스 앤 넌센스》p.414

저자가 말해주는 다양한 고인류학적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협동, 양육투자, 여성의 성적 행동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문화, 의사결정, 언어, 임신, 낙인찍기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습니다. 과학은 유전자관점, 혈연선택, 진화적 게임이론 등 인간행동을 탐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해줍니다. 이런 방법론은 근엄한 장소에서 학문적 토론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와의 가벼운 술자리에서 이야기거리로 나올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익힌 고기를 너무 좋아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리처드 랭엄의 말을 빌어 화식이 진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에서 진화한 우리들은, 과거의 우리를 알기 위해 끝임없이 노력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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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세계사 - 새로 쓴 제3세계 인민의 역사
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박소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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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역사를 배움에 있어서 사실로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는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왜 반포하였느냐이지 몇년 몇월 몇일에 반포했나가 아닙니다. 몇년에 반포했다는 역사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역사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차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한가지의 역사의 의미를 동일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단순한 사실이 아닌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다른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며,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경향이 현재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때문에 역사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이 수많은 의견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웁니다.

가장 흔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 혹은 위에서부터의 역사입니다. 과거에 중요했던 것은 왕이나 신관들이었고, 정치는 관료들의 역사였으며, 전쟁은 장군의 역사임과 동시에 승리국가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다른 역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겐 패도의 역사가 누군가에겐 저주스러운 학살의 역사이며, 누군가에겐 성공신화가 누군가에겐 반민주적인 독재이기도 합니다. 김시덕이《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실의 역사를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갈색의 세계사》역시 다른 이면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무슨 역사였는가? 냉전시대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포함되어있었던 제1세계와 제2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더 많은,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역사는 제3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사를 미국과 소련의 대립,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군비경쟁과 같은 냉전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식민주의의 철폐와 새로운 평등, 군비축소, 공정한 경제질서, 반인종주의 등을 외치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제3세계에서 일어났던 투쟁의 역사는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 청년들의 혁명적 이상주의, 신흥 계급의 숨 막힐 듯한 열망에 힘입어 열렬히 불타올랐습니다. 제1세계나 제2세계 시민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우리들은 제3세계를 실패한 국가, 기근, 빈곤, 절망의 동의어로 바라보지만, 그곳엔 가치있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제3세계의 변화를 국가적, 세계적 프로젝트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떤 성과와 한계가 있는지를 말합니다.

제3세계의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 참호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병사들만큼이나 식민주의 이후의 대안을 열망했고, 제3세계 정치인들은 이에 화답했습니다. 그들은 반제국주의연맹, 아시아아프리카회의, 비동맹운동회의, 삼대륙회의 등을 통해 기존의 권력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새로운 경제질서를 추구했습니다. 그곳엔 독재나 군부가 들어서기도 했고, 석유의 이권이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했으며, 사회주의가 대두되었다가 몰락하기도 했습니다.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대안과 의견들이 다양한 경제, 정치 프로젝트로 시행되었고 일부는 성공을, 일부는 실패를 거두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과거 동아시아의 기적이라 평가되며 아시아의 4용 중 하나였던 우리의 역사 또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 한국은 모두 일당독재나 군부독재 체제에서 시민들의 희생아래 발전이 이루어졌고, 제3세계에 지원되던 서구의 지원금보다 더 많은 지원금이 동아시아에 집중되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성공은 제3세계에 있어서 지배층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자 시민들에겐 억압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세계질서를 바꿔보려는 제3세계의 요구는 네 마리 용이라는 실적 앞에 거부당했고, 이들의 성공은 아시아적 가치란 이름하에 포장되어 IMF식 세계화를 선전하는 멋진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재체제 아래에서 다수의 희생과 서구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성공은, 70년대에 제3세계를 강타했던 금융위기처럼 90년대의 금융위기를 맞이하며 맨얼굴을 드러내게 됩니다.

요란 테르보른이 말한 것처럼 냉전은 근본적으로 비대등한 분쟁이었지만, 양 진영이 서로 대등한 분쟁인 것처럼 상정하고 경험한 분쟁이었던 만큼, 제2세계라 불리웠던 소련의 몰락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던 제3세계 프로젝트 또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서구가 제3세계 급진운동을 치밀하게 견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제3세계 내부의 모순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말합니다. 제3세계는 제1세계에게 굴복했고, 지금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프로젝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에 대항할 제도적 기구도, 사상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IS같은 잔혹한 종교적 근본주의, 혹은 구호밖에 남지 않은 대중운동 뿐입니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이 세계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거에 멸시당하고 착취당해온 제3세계 시민들이 만들어낸 제3세계 프로젝트라는 역사를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적 프로젝트라는 역사를 상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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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재발견
에리카 아리엘 폭스 지음, 임현경 옮김 / 청림출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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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그때 이렇게 말했으면 더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조별과제를 하면서 경험했을 수도 있고, 연애를 했을 때 경험했을 수도 있으며, 면접장에서 면접을 볼 때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후회는 "이렇게 말했으면 더 주변을 웃겼을 텐데"의 수준일 수도 있고, "이렇게 말했으면 더 말이 깔끔했을텐데" 정도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했으면 다투지 않았을 텐데"처럼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와 의견충돌이 생긴다는 것은 때에 따라선 인생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일 수 있습니다. 대형 계약의 체결 과정일 수도 있고, 평생을 함께했을지도 모르는 연인과의 대화가 잘 성사되느냐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순간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무척 중요합니다. 얻을 수 있는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에 대한 주도적인 담론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성을 일깨워라, 스토리가 필요하다, 데이터를 제시해라,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라 등 다양한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핵심은 다른 사람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라는 메시지들이었습니다. 그 성공의 메시지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수없이 합니다. 고객을 설득하고, 친구를 설득하고, 직장 동료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한 설득기술만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상대를 움직여야 할 때도 있지만, 자기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혹은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합니다. 회식자리를 얼어붙게 만드는건 부장님의 유머고, 반민주적인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은 회장님의 독단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이 투덜댑니다. 그들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성과는 자신의 덕으로 돌립니다. 저자는 만약 다른 사람보다도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힘든 문제에 대해 털어놓았다. "50년 동안 매일 아침 아내가 넥타이를 골라줍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싫습니다. 제 아내는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대법관은 영리하고 솔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의사소통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천하지는 못했다. - pp.26~27


저자는 자신을 설득하는 것은 자신의 잊혀진 모습들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들, 자신이 꿈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순간들,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절들, 전사처럼 일에 몰입하던 모습들을 통해 자신을 설득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상적인 자신과 현재 자신의 괴리를 줄여줄 수 있으며,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마음과 의지가 자신의 세계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 모습대로 자아를 실현하라, 상상한 그대로 삶을 창조하라는 메시지는 다소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서 문제를 찾는 것보단, 가끔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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