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불평등 - 왜 재난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가혹할까
존 C. 머터 지음, 장상미 옮김 / 동녘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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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가 흔들렸다. 자연재해라곤 태풍만을 걱정하고, 걱정해도 충분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경주지진은 진도 5.8 이상의 충격을 남겼다. 정부는 건축물의 내진설계 기준을 2017년부터 현행 3층 이상의 건축물에서 2층 이상의 건축물까지 확대하는 등 건축물의 구조 안전 강화를 위해 다방면의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상당수의 건물이 지진에 취약한 것은 변함이 없다. 올해 발생한 경주지진은 부상자와 재산피해를 가져왔지만, 다행히 사망자까지 발생하진 않았다. 경주지진은 자연재해에 그쳤지만, 미래에 찾아올 다른 자연재해는 언제든 재난이 될 수 있다.

지진학자인 저자 존 C. 머터는 자연재해가 어떻게 재난이 되는지를 말한다. 자연재해는 자연적으로 언제든 일어나는 일이지만, 재난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모든 자연재해가 재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재해가 위력이 적어서, 혹은 운이 좋아서, 사회가 대비를 잘해서 재난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재해를 재난으로 만드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재난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고, 사회이다. 존 C. 머터는 자연과학의 관점에선 재난을 이해할 수 없고, 사회과학의 관점에선 재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경계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동시에 바라본다.

두 나라에 거대한 지진이 찾아왔다. 칠레에서 발생한 지진은 진도 8.8로 기록되었다. 아이티 공화국에서 발생한 지진은 진도 7.0로 기록되었다. 칠레에서 발생한 지진은 아이티의 지진보다 1,000배 강한 지진이었다.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칠레에서 발생한 지진이 더 심각한 자연재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재앙은 아이티 공화국에 내렸다. 1,000배 약한 지진을 겪은 아이티 공화국에서 1,000배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이티와 칠레의 차이는 부실한 건물들, 무력한 정부, 심각한 빈부격차였다. 아이티 공화국 안에서도 부자들이 사는 지역과 가난한 자들이 사는 지역의 피해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아이티 공화국의 지진은 재난이었고, 분명히 사회적인 재난이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덮쳤다.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은 유독 뉴올리언스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뉴올리언스는 미국 내에서 흑인차별이 심한 지역 중 하나이고, 빈부격차 역시 심한 지역 중 하나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미국인에게, 더 자세히 말하면 흑인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가난한 흑인들이 사는 지역과 부유한 백인이 사는 지역의 차이는 칼로 자른 것 같았다. 정부는 대응하지 못했고, 언론은 편견을 심화시켰다. 관동 대지진에서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것처럼, 언론은 뉴올리언스에서의 무정부적 파괴의 책임을 흑인에게만 전가시켰다. 카트리나 이후 가난한 흑인들 대부분은 원래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마크 모리얼은 뉴올리언스 되살리기의 초안이 "토지 약탈을 두고 벌인 대대적인 붉은 선 긋기"였다고 말했다. 일부 지역은 재건에서 아예 제외됐다. 재건을 하지 않는 지역은 물으나 마나 "골칫덩이 인간들"이 살던 주거지였다. 오직 지배층의 사업을 위한 기본 계획이었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 계획을 "공화당식 인종 청소"라고 불렀다. - p.242


존 C. 머터는 건전한 사회에서 자연재해는 창조적 파괴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사회는 자연재해를 극복할 더 나은 설비와 제도를 만들어내고, 시민들은 재해를 딛고 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든다. 그러나 사회 구조와 격차, 기존에 있던 부조리, 불평등이 심한 사회는 재난을 가져온다. 사회의 불평등이 클 수록 재난의 규모는 커진다. 불평등이 재난을 만든다. 그리고 재난은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재난이 발생한 곳에서 가진 자는 재난을 이용해 더욱 돈을 번다. 복구 비용이란 명목 하에 집행되는 예산들은 직접 피해를 받은 가난한 자들이 아닌, 멀리 피신해 있던 부자들에게 돌아간다. 아이티에 지원된 국제기금 중 90%가 넘는 금액이 미국 기업에 돌아갔다. 뉴올리언스의 재건사업을 맡은 기업들은 부시와 연관이 있었다.

자연재해는 자연이 처음 타격을 가하는 무시무시한 몇 분 또는 몇 시간 동안에만 자연적이다. 재해 이전과 이후의 상황과 결과는 순전히 사회적이다. 만약 우리나라에 더 큰 지진이 온다면 우리 사회는 얼만큼의 피해를 받을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재해로 그칠지, 재난이 될지는 바로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말해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자연재해를 대비해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으면서 이후 창조적 파괴의 단계로 이끌 수 있을수도 있다. 또한 대한민국은 가난한 자,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희생되고 난 뒤에도 사회적 불평등이 개선되지 못한 채 계속 재난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연재해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던 그림자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재해는 재해 이전의, 그리고 이후의 대한민국이 헤븐조선인지, 헬조선인지 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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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 없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붉은 재앙
조나단 월드먼 지음, 박병철 옮김 / 반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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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철기시대에 살고 있다. 알루미늄, 플라스틱, 티타늄 등 다양한 소재들이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소재는 여전히 철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막대한 수요량을 철 외엔 만족시킬 수 없다. 현대 문명은 철의 기둥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철은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 역시 가지고 있다. 바로, ‘녹’ 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미국 뉴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하나의 클리셰로 사용된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거대한 금속 조형물의 파괴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만한 위기를 의미한다. 그런데 영화가 아닌, 실제로 자유의 여신상이 파괴될 뻔한 적이 있다. 범인은 거대한 해일도, 지진이나 태풍도 아닌 ‘녹’ 이었다. 그 당시엔 부식은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만약 자유의 여신상이 녹으로 인해 파괴되었다면, 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자유의 여신상의 부식은 미국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철의 역사에 있어서 부식방지의 역사는 매우 짧지만, 혁신적인 변화는 모두 부식방지에서 비롯되었다. 철에서 강으로 변화했고, 아연을 도금했으며, 니켈과 크롬을 이용해 스테인리스스틸이 탄생했다. 페인트의 성능은 더욱 좋아졌고, 코팅기술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느냐고 자문할 정도가 되었다. 현대과학이 제공하는 부식기술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녹슨 철을 상상하기 힘들게 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아직 철의 부식을 정복하지 못했다. 스테인리스는 부식이 혁신적으로 느리게 생길 뿐이다. 음료가 든 캔을 먹을 때 걱정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여전히 극소수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


현대문명을 유지시켜주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지만, 부식에 관해 방만한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나단 월드먼은 묻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유지 보수보다 교체하는 쪽을 선호한다. 부식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만한 교육 시스템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철을 많이 사용하는 나라다. 1인당 철강 사용량은 1,109.5kg로, 3위 일본의 497.3kg에 비교해 압도적 1위를 자랑한다. 과연 그 위상만큼 부식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부식방지관리와 비용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녹과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하면서, 환경과 문명에 이로운 쪽으로 개선해 나간다면 우리는 매끄럽게 빛나는 철기시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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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 세력 난동사
이광수.한형식 지음 / 나름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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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한민국 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지역구 253석 중 2석을 차지했습니다. 만약 20년 뒤, 정의당이 두자리수 의석도 아닌, 제1야당도 아닌, 집권당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군소 정당이 거대 정당을 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인도의 집권당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부터 존재해온 회의당이었습니다.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부터 시작된 회의당의 지배는 인디라 간디, 라지브 간디 등으로 이어지며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며, '네루 왕조' 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에 반해 인도의 인도국민당은 1984년에 545석 가운데 2석밖에 얻지 못한 군소정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국민당은 그로부터 15년만에 집권당의 자리에 오릅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는 동안 수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어찌보면 더 큰 피해는 식민통치 이후에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식민통치를 하기 위해 종교갈등을 이용했고, 힌두와 이슬람간에 생긴 불화는 점점 커졌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았고, 왜 상대를 증오하게 되었는지도 잊은 채 증오를 거듭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엄청난 폭력과 범죄는 힌두와 이슬람 사이에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벽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정치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부추겼습니다. 타자에 대한 맹목적 적의는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며, 이를 이용한 것은 회의당이었고, 다른 정당들이었으며, 인도국민당이었습니다.

회의당의 장기 집권을 이끈 인디라 간디는 빅부격차가 심해지는 등 경제위기를 불러왔으며, 헌정을 중단시켰습니다. 야당 정치인을 구속하고 산아제한을 한다는 명분하에 빈민 남성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불임수술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종교적 적대국가인 파키스탄을 활용한다는 전형적인 보수 세력의 전략을 구사하여 지지 기반을 유지했습니다. 자신의 국정 실패에 대한 비판의 물꼬를 돌리기 위해 종교 근본주의 세력을 암암리에 지원했고, 군대를 시크교 성지인 황금사원에 투입해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학살한 인디라 간디는 결국 시크교도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사람들은 인디라 간디를 추모한다는 명목 하에 수천 명의 시크교도를 학살했습니다.

아드와니를 비롯한 인도국민당 정치인이 잇달아 행동 참가를 선언했고, 이어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행동 대원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군과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슬림의 성소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232명이 살해되었고, 그 후로도 유혈 사태가 전국적으로 계속되어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러면서 더 큰 비극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무슬림이 연쇄적으로 복수를 감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연쇄 테러를 일으켰고, 그러면 다시 힌두 세력이 집단 학살이라는 또 다른 복수를 자행했다. - p.125


회의당이 종교적 갈등을 뒤에서 활용한 반면, 인도국민당은 전면적으로 종교 공동체주의를 부추기며 세를 키웠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힌두교도들을 지원하며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힌두교를 믿는 사람만이 인도 민족이라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집회를 통해 대규모 폭력을 선동했고,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의 폭력, 성폭행,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인도국민당은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고 천여명의 사람이 죽은 아요디야 사건을 통해 2석의 정당에서 제1당이 되었고, 천여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구자라뜨 사건 이후 총리를 배출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무슬림에 대한 적의를 자극한 덕분에 인도국민당은 집권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부터인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종북 이데올로기처럼, 인도의 힌두 근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내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 권력이며, 절대로 부패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을 빌린 폭력은 그 기반에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문제와 경제문제가 있습니다. 하층 카스트들은 카스트 제도로 인한 불평등과 불합리를 무슬림을 향해 발산합니다. 정치는 그 행위가 상대가 무슬림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종용합니다. 저자들은 지배 계급이 만들어놓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가난한 피지배 민중끼리의 증오와 폭력으로 분출하도록 부추기는 정치가 계급 사회에서 항상 있어왔다고 말합니다. 정치권은 자본가와 중산층에게는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주고, 가난한 시민들에겐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는 적을 제공함으로서 지지를 유지합니다. 식민지 경험, 분단과 전쟁, 과도한 민족주의, 그것을 활용하는 정치권 등 인도의 모습은 비단 인도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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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종의 탄생 - 인종적 사유의 역사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8
마이클 키벅 지음, 이효석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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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색상의 크레파스를 놓고 "모두 살색입니다." 라고 말하는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살 색이라고 인정되는 색만이 살색으로 명명되던 기존의 사회적 차별을 잘 보여주는 좋은 광고였습니다. 그 광고에서 당연하다는듯이 말하고 있는 전제 중 하나는, 살 색이 세 가지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사람들에게 세 가지의 살색 크레파스 중 어느 것이 자신을 의미하는지 골라보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은 흰색도, 검정색도 아닌 색의 크레파스를 고를 것입니다. 하지만 300년 전, 혹은 500년 전의 유럽 사람들에게 동아시아인들의 살색 크레파스를 골라보라고 한다면, 흰색 크레파스를 골랐을 것입니다.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수많은 탐험가들, 상인들, 대항해시대의 여러 초기 기록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을 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기록들, 그리고 과학자들이 말하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피부색은 점점 변했습니다. 동아시아인들은 이제 황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가, 갈색, 올리브색, 짙은 색, 흑색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 만들어졌습니다. 동아시아 사람의 피부색은 황색이란 개념입니다. 저자 마이클 키벅은 황인종이란 개념은 정말로 동아시아인들의 피부색이 황색이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 아닌, 유럽인들의 인종차별적 경계짓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세계를 체계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린네를 비롯해 많은 과학자들은 동물이나 식물 뿐 아니라 인종의 구분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종을 구분짓는 과정에서 백색성, 흑색성이 등장했습니다. 백색성에는 서구의 지적, 문화적, 종교적 우월성의 상징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유럽 모험가들이 처음 만난 중국인과 오키나와 사람들을 백인으로 표현한 것은 그들의 물질적 풍요, 국력, 높은 수준의 세련된 문화를 반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에게 백색은 문명화될 수 있는 색,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는 색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힘들어지고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동아시아인의 피부색은 변화했습니다. 동아시아인들을 구별짓기 위해 수많은 색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 유럽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색은 황색, 그리고 몽고인종이라는 개념입니다. 마이너스와 블루멘바흐가 모든 동아시아인을 몽고인종으로 지칭함에 따라 동아시아인들은 백색 유럽인들과 구별되어졌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 다수의 동아시아인들이 서양으로 이민을 가면서 서구 사회와 충돌했고, 러일전쟁에서 서양국가인 러시아가 동양국가인 일본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런 동양에서 불어오는 위협을 서구는 몽고, 황화란 이름으로 이해했습니다. 훈족의 왕 아틸라, 칭기즈칸, 티무르와 같은 동양에서 온 침략자들의 역사는 이런 유럽인들의 개념을 뒷받침해줬습니다. 동아시아인들은 다시 돌아온 침략자들이었고, 자신들과 다른 색이어야 했습니다. 동아시아인, 몽고인종은 백색이 아닌 흉물스럽고 추함의 보편적 상징으로 인지되었고, 몽고눈, 몽고반점, 몽고증(다운증후군) 등의 실체적 현상을 통해 이런 차별적 편견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대상자가 '실제로' 황색이냐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측정 사례의 초점은 결국 '다른' 인종들은 '정상' 인종과 정말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물론 이 '정상' 인종이 인류학자 자신이 소속된 인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p.166


고고학의 최대 사기 사건 중 하나인 필트다운 사건도 이런 유럽인들의 욕망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동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태고의 백색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퇴화된 지역이며, 당연히 유럽에서 최초의 인간 화석이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백색성과 아름다움, 문명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오늘날 혈액형 분류법처럼 아무 근거도 없는 사이비 과학이지만, 그것은 인종주의의 악독한 한 가지 형태로 이후 나치의 사상에 이어졌습니다.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적 편견이 색으로 구현화되고, 다른 피부색은 잠재적으로 위험하고 위협적인 인종이라는 개념은, 백인종, 흑인종 그리고 황인종이라는 도식화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색의 구분을 당연하듯이 받아들이며, 다른 피부색에 대한 두려움 혹은 공포심을 가지고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은 우리 자신 역시 적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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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위대한 역설 - 프랑스 여성참정권 투쟁이 던진 세 가지 쟁점 여성.개인.시민
조앤 W. 스콧 지음, 공임순.이화진.최영석 옮김 / 앨피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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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를 휘날리며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은 1789년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니콜라 드 콩도르세와 올랭프 드 구주 등의 여성들은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것은 150여년이나 지난 1944년이었습니다. 1902년 호주, 1906년 핀란드, 1913년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덴마크, 캐나다, 러시아, 독일, 영국, 미국 등의 나라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지만, 민주주의의 상징과 같은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는 오히려 여성의 참정권을 주는 것에 강한 반발이 있었고, 다른 나라보다 늦었습니다. 북한이 1946년, 한국이 1948년인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받게 된 역사는 역설적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순간에 여성은 없었습니다.

저자 조앤 W. 스콧은 프랑스 혁명기에 페미니즘을 외친 다섯 명의 여성의 삶을 되짚어보며 그녀들의 삶이, 주장이, 그리고 페미니즘이 왜 역설적이었는지를 말합니다. 올랭프 드 구즈, 잔 드로앵, 위베르틴 오클레르, 마들렌 펠티에, 루이제 바이스, 그리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구즈의 말처럼 '해결하기 쉬운 문제는 주지 않고 오로지 역설만을 던지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역설은 부정하기 힘든 추론 과정을 거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녀들의 목소리,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것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그녀들, 그리고 페미니즘은 '개인'에게 당혹을, 때로는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도 있다."고 말한 구즈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페미니즘의 역설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여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페미니즘의 최대 화두는 여성의 정치참여권이었으며, 여성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담론으로서 정치에서 '성적 차이를 제거'하려는 페미니즘이 여성의 편에 서서 '성적 차이를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페미니즘은 남녀평등을 외치지만, 남녀평등을 위해 여성주의가 됩니다. 스콧은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여성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데서 그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곳은 더 광범위한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왜 역설만을 던지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페미니즘을 넘어서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사상의 영역을 들여다봐야한다고 말합니다.

과거 왕과 귀족이 지배하던 시절에 인간은 같은 존재가 아니였습니다. 부자와 거지, 귀족과 농노, 인간의 가치는 엄연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그리고 혁명은 이러한 구도를 제거해야 했고, 타자의 다양성을 버리고 만인이 동등하다는 추상성을 지닌 '개인'을 탄생시킵니다. 모든 개인은 존중받아야 하며, 같은 한 표의 권리를 가지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추상적 개인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선 공통점이 필요했고, 신체에 주목했습니다. 권리를 가질 주체를 만들기 위해선 가지지 못할 주체 또한 만들어야 했습니다. 신체적 차이는 피부색, 성적 차이로 구별되었습니다. 흑인이 배제되었고, 여성이 배제되었습니다. 동등한 개인들, 그들은 백인들, 그리고 남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 개인은 동등해졌지만, 그곳에 여자는 없었습니다. 현대사회를 만든 사상의 역설은 사회의 역설을 만들었고, 페미니즘의 주장은 역설이 되었습니다.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만국의 여성들이여, 단결하라" 를 외쳐야 했고, 여성의 강조라는 역설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정치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역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또는 이용해가며 투쟁해왔습니다. 그 결과 여성의 참정권은 점차 확대되었고, 지금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스콧은 여성 배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왔던 성적차이는 여성 배제의 효과였으며, 여성성이나 남성성이란 개념은 보편적인 사회적 성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성이 참정권을 가지게 된지도 수십년이 흘렀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역설을 던지는 존재들이며, 동시에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콧의 분석대로라면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가 지닌 역설을, 불합리함을, 바꿔야 하지만 귀찮은 무언가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정치의 영역에서 남녀가 완전히 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에서 남녀동수법이 제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비례대표 여성할당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각 정당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비례대표 1번의 자리를 여성에게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아직도 불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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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7-2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서프러제트] 읽었는데, 서프러제트가 영국의 참정권 이야기라면 소개해주신 책은 프랑스의 것이군요. 덕분에 알지 못했던 좋은 책 담아갑니다.

착선 2016-07-28 12:44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영화도 있네요. 서프러제트 한번 봐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