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애를 말하다 -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사랑이 없는 무성애, 다시 쓰는 성의 심리학
앤서니 보개트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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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이것이 전부일까?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논쟁과 투쟁 덕분에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또한 남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조합론을 배운 사람이라면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여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랑한다. 또한 남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랑한다. 그리고 여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또한 남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사랑이 성욕에 기초한 것이라면 말이다.

무성애, 그리고 무성애자. 그들은 분명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냉정히 이야기해서 무성애자에 관한 논의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성애 논쟁의 최첨단, 최전선은 단연 동성애다. 일부 종교인들이나 이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자신들의 극단이자 선악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동성애가 아니고 무성애가 아닐까?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심지어 무성애적인 모습은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사랑의 ABC라는 말은 은연중에 사랑의 최종 목적이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암시한다. 온 세상에 이성애자만 존재했다면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매력적인 이성을 앞에 두고 성적인 매혹을 느끼지 않거나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 두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지기에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무성애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섹스를 해야만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무성애의 중요한 점이다. 무성애자들도 자위를, 연애를, 섹스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성에 관심이 없다. 무성애가 말해주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매혹과 행위는 구별된다는 점이다.

평생 우정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남녀가 있을까? 우정 관계라는 것이 남녀가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행위 없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이라면, 답은 YES다. 대부분의 남녀는 하기 힘들겠지만, 그런 가능성은 분명 있다. 이성을 성욕 없이 좋아하거나, 동성을 성적 끌림이 없이 순수히 마음만으로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 무성애자들이 있기에 우린 저 답을 알 수 있다. 만약 우정 관계가 가끔 성적인 관계를 맺더라도 서로 마음주는 일 없이 친하게 지내는 관계라면, 역시 YES다. 매혹과 행위는 다르다. 그들은 상대에게 성적으로 매혹되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다.

남녀가 사랑을 토대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자손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런 진화론적 관점에서 서로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동성애를 비난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무성애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비록 행위는 할 수 있지만 매혹되지 않기에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도 불량품으로 비춰질 수 있다. 동성애자들, 무성애자들은 과연 비정상이며 괴물들일까? 괴물들은 자연의 실수가 아니다. 그들의 조직에는 엄격하게 결정된 법칙과 규칙이 적용된다. 그리고 이는 동물계를 규정짓는 규칙, 법칙과 동일하다. 한마디로 괴물 역시 정상적인 존재다. 세상에 괴물이란 없다.

동성애와 무성애 성향이 정말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연도태적이라면, 도태되었어야 맞다. 하지만 그들은 도태되지 않았다. 오히려 잘 적응한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진화론의 선택 개념은 의견이 분분하나 분명한 것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에게서 동성애와 무성애 성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성애만이 자연스러운 질서는 아니다. 동성애와 무성애는 비정상이 아니라 비정형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 성,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에 맞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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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 우리 시대, 연애하지 않는 젊은이들에 대한 심층 보고서
우시쿠보 메구미 지음, 서라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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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젊은이들이 연애를 하지 않는다. 한 연구조사 결과 무려 20대 여성의 70퍼센트, 20대 남성의 80퍼센트가 연인이 없다고 답했다. 일본 젊은이들이 사람에, 성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갈망, 성에 대한 열망은 예전 못지 않다. 90퍼센트의 젊은이들은 연애나 결혼을 원한다고 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연애를 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과거 일본의 이상적 결혼상대는 고수입, 고학력, 고신장의 3고(高)라 불렸다. 지금의 이상형은 평균 수입, 평균 외모, 평온한 성격, 이른바 3평(平)이다. 이상형이 평균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연봉 2,000만 원 가량의 20~34세 독신 남성의 기혼율은 3퍼센트에 불과하다. 일본의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약 40%에 달하며, 이들은 정규직 임금의 50%를 받는다. 비정규직은 언제 일을 그만둬야 하는지 결정된 사람들이다. 설령 임금을 지금보다 많이 받게 된다 하더라도 비정규직이 연애나 결혼을 하는 것은 민폐행위이며 자살행위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것, 힘 빼고 사는 것도 불행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젊은이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장기 불황의 영향이다. 연애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별로 필요없다, 투자할 가치를 못 느낀다고 생각한다. - p.29


금전적 제약이 해결되어도 연애는 많은 리스크를 동반한다. 인권이 신장되며 과거 연애에 있어서 용납되었던 것들이 더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과거 연인간의 다툼은 오늘날 데이트폭력으로 인지되며, 좋아하는 상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과거엔 용기였지만 오늘날은 스토킹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지와 현실이 충돌한다는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상사의 성희롱 등을 멸시하고 범죄로 생각하지만, 현실엔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연애나 결혼을 해서 힘들게 사는 주변사람들을 보며 젊은이들은 더 연애나 결혼을 기피한다. 이것은 여성혐오, 남성혐오로 발전하기도 하며, 연애나 사람을 기피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진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연애 말고도 소중한 것들이 많아졌다.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 증가했지만, 연애나 결혼을 하면 자신의 취미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연애나 결혼의 실익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결혼한 파트너의 요구라고 해도 자신의 영역을 포기한다는건 힘든 일이다. 또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 가족을 연인보다 중요시하는 풍토도 늘어났다. 애인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것보다 부모와 쇼핑을 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과거엔 일정한 나이의 사람은 반드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당연시되었다. 당시의 고정관념은 연애, 섹스, 결혼이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연애, 섹스, 결혼은 모두 분리되었다.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고 섹스만 할 수도 있고, 섹스를 하지 않고 결혼만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현실과 달리 사회구성원 다수의 성역할,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인식이 전통적 단계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하는 남성은 여성이 집에서 내조를 해줬으면 하지만 혼자 가정을 부양할 능력이 없고, 남성이 가정주부를 하는 것은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다. 일하는 여성은 맞벌이를 하는 남성이 집안일을 잘 해주지 않아 이중고에 시달리며, 전업주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적 상황상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엘리트들은 결혼을 거부하는 행렬에 앞장서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결혼의 가치를 사들이느라 여념이 없다.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집단은 부모 세대보다도 더 높은 비율로 이혼이 더 어려워져야 한다고 믿으며 혼전 섹스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옳지 않다고 믿는다. 부모 세대에 여성은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결혼할 확률이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정반대다.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은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자식을 키울 확률이 다른 여성보다 높다. -《결혼 시장》p.44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의 사회적 가치는 오히려 올랐다. 젊은이의 다수는 연애생활을 부러워하고, 결혼을 동경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결혼에 실패하며 이혼율이 증가했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 평화롭고 행복한 가족은 이제 상위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개인주의의 증가, 피임의 발달, 성 해방과 여권 신장 등의 영향이 없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득이다. 상위계층의 결혼율만이 증가했다. 고소득 남성과 여성은 오히려 전통적 결혼의 가치를 숭상한다.

저자 우시쿠보 메구미는 적극적인 사회적 변화와 지원만이 많은 젊은이들이 연애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비정규직의 철폐, 사회적 빈부격차 해소, 새로운 결혼문화에 대한 제도적 지원 등이 그것이다. 젊은이들은 소득의 부재로 괴로워하고, 문화와 제도의 차이에서 고통받는다. 사회 연대의 관점에서의 결혼등록, 동성결혼, 동거에 대한 사실혼 인정 등 현실과 제도의 갭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 공동체가 새롭게 거듭나지 않고서는 가족 불안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가족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것은 더욱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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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 -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수퍼리치들의 두 얼굴
니콜라 귀요 지음, 김태수 옮김 / 마티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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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다. 유명 축구팀은 자선경기를 열고, 기업의 성금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낸다. 그러나 오늘날 자선의 아이콘이 된 것은 빌 게이츠,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로버트 데이 등 거액의 기부자들이다. 이윤 창출, 자본의 축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버는 자본가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부와 권력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인가, 아니면 도덕적 이타심인가.

과거 포드와 같은 대기업들은 재단을 만들고 자선사업을 했다. 이들의 자선은 단순히 부의 나눔 이상의 것으로, 자선활동을 통해 산업자본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했다. 학교와 연구소를 설립해 산업자본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서 얻어지는 소프트 파워는 자본과 노동의 대결에서 자본의 우위를 점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노동이 물러난 자리에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했다. 자본에 대항할 자는 바로 자본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저축한 자본, 축적된 힘. 이 힘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류사회와 자본시장에서 배제되고, 간혹 대학 졸업장도 없으며, 현장에서 고달픈 경력을 쌓으며 배운 신 금융인들은 종종 천민적인 모습을 보인다. 경제적 자본만큼이나 모든 사회적 자본도 결핍된 이들은 노동력,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타격 능력밖에 가진 것이 없는 금융계의 하층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런데 이들은 과거 격변기마다 하층 프롤레타리아가 흔히 실행했던 모호한 역사적 기능을 맡아 기관투자가라느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구조조정의 실행자가 되었고, 자본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게 된다. - p.64


산업자본과 금융계는 확고한 카르텔을 유지하고 있었다. 명문대 출신의 독일 유대계와 백인 개신교란 엘리트들은 금융업계에 확실한 계급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80년대 트레이드와 인수합병의 길이 열리며 엘리트 계급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명문대도 나오지 못한 사람, 은행의 한직에 있던 사람들이 급부상했다. 이들은 고객의 돈을 무기로 활용하며 기업사냥을 시작했다. 경영을 소유에 복속시키고 경영진에게 주식 가치의 창출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경영 규범을 강요했다. 기업의 성장 전략보다는 단 기간의 주식 수익률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자본과 자본의 대결은 새로운 자본, 금융자본이 승리했다.

이들의 행동은 산업자본과 극소수의 엘리트 금융인들을 무찌르는 일종의 계급투쟁이기도 했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승자들은 막대한 돈을 벌었고 신자유주의를 예찬했다.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 더 소수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챙겼다. 구조조정으로 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파탄났고 제조업은 몰락해갔다. 각종 배임행위와 사기 등으로 도덕적, 경제적으로 몰락한 승자들도 있었다. 부를 거머쥔 새 시대의 승리자들, 도적남작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새로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금융자본과 기업탈취자가 구현하는 경제 논리에 대한 이러한 광범위한 윤리적 세탁작업에는 두 가지 이득이 있었다. 우선 경제의 금융화 논리를 정당화시키면서 이 논리를 시장경제의 영역 너머로 확대한다. 정통적인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본의 실제적 포섭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또한 물리적 측면에서 자선사업은 외환 투기 혹은 대량 해고를 초래하는 적대적 매입으로 축적된 더러운 돈의 세탁을 용이하게 해준다. - p.104


자선사업의 개혁, 윤리경영, 기업의 사회적 책임, 도덕적 자본주의를 외쳤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는 바로 자신들같은 상위 0.1%의 부자들 때문이라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이 역설적 행태를 저자 니콜라 귀요는 금융이 지배하는 새로운 자본 축적 시스템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이들의 자선사업은 단순한 나눔이 아닌 수익성을 따지는 금융상품과 닮았다. 사회의 진보적 아젠다를 앞장서서 외침으로서 누구보다 많은 사회재산을 쌓았다. 자선에 대한 세금 공제라는 제도를 교묘하게 활용함으로써 국가권력과 행정의 통제를 피해 재분배의 본질까지 왜곡시켰다. 이들은 자선사업을 함으로서 부의 재분배에 기여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더 많은 부를 쌓는데 활용한다.

과격한 기업사냥꾼들은 이제 양심적이고 신사적인 얼굴의 자선사업가로 변신했다. 이제 자선사업은 단순히 한 부자의 취미 영역이 아니다. 국가의 시스템, 사회적 책임이 사기업 혹은 개인 재산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보편적인 사회복지는 줄어들고 자선사업가들의 입맛에 맞는 조건적이고 선별적인 복지가 대두되었다. 새로운 자선사업가들의 영향력은 국가의 시스템을 대신해가고 있다. 이들에게 자선사업은 영원히 자신에게 부를 가져다줄 금융제국 건설이란 새로운 통치 가능성에 대한 투자의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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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받지 못한 죽음 - 중증 외상, 또 다른 의료 사각지대에 관한 보고서
박철민 지음 / 이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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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가 동일한 환자가 두 사람 있다. 한 사람은 신속하게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최신식 치료를 받아 빠른 시일내에 퇴원해서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은 치료시설이 부족한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시기를 놓쳤고, 병원을 전전하다 치료받지 못하고 시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중증외상환자였다. 치료받을 권리는 기본적 인권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기본적 인권을 보장해주기엔 대한민국은 아직 미숙한 점을 보이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대두되면서 경제활동인구를 지키는 것은 더 소중해졌다. 중증외상은 경제활동이 활발한 40대 이하 젊은층의 주요 사망원인 중 하나이다. 아주대학교병원의 이국종 교수는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치료받지 못해 죽는 중증외상환자가 연간 1만 명에 달한다고 말한다. 서울대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중증외상센터를 설치할 경우 투자 대비 편익이 2배 이상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중증외상환자를 긴급히 이송해 치료할 인력과 시설 및 장비 등이 갖추어진 의료체계가 부족해 중증외상환자의 사망비율이 타 선진국보다 높은 약 32%에 이른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해마다 최소 1만 명 이상이 예방 가능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 전사자는 4,407명이다. 베트남전쟁 10년 동안 사망한 군인 수의 두 배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국 응급실에서 매년 '전사'했다는 것이다. - p.62 

한국의료체계가 중증외상환자에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먼저 중증외상분야에서 일하는 의사가 극히 적다는데 있다. 중증외상은 의학의 정식 과목도 아닌데다 3교대 24시간 근무를 해야하는 응급실 업무다 보니 의대생들의 선호도는 매우 낮다. 다른 어떤 곳보다 환자의 상태가 참혹한 중증외상분야는 더 힘들면서, 돈벌이도 안되는 곳이다. 의사들이 기피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다른 하나는 중증외상환자의 이송, 치료과정에서 의사와 병원의 책임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환자를 거부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현실은 언제든지 환자를 이 병원 저 병원 돌리다가 구급차 안에서 죽여도 된다. 무엇보다도 중증외상환자는 돈이 되지 않는다. 아주대병원의 경우 중증외상센터를 운영하는데 매년 10억 원 이상의 적자가 난다. 의사가 아무리 열의가 있어도 병원 경영진의 의지가 있지 않다면 환자는 죽을 뿐이다.


복수의 공무원에 따르면 '아덴만 여명'사건 이후 중증외상센터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내가 다쳐도 수원까지 가야 하나?" 하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보건복지부와 서울대병원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후속 조치를 취한 셈이다. - p.68 

이 책은 2013년에 씌여졌다. 당시 저자는 권역외상센터 설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타당성평가에 막혀 이뤄지지 않았다. 중증외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자살 항목이 빠졌고, 한국인의 목숨값을 2억 원도 안되게 책정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부처에 따라 다르지만 한 사람의 목숨값을 80~100억 원으로 책정하는 미국이었다면 타당성평가가 바로 통과됬을 것이다. 다행히 2016년 말 기준 권역외상센터는 전국적으로 7곳이 되었고,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해결이라 보긴 어렵다. 중증외상환자 문제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자본의 논리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만이 중증외상 치료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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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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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인적 기억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의 집단기억을 통해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경술국치와 삼일운동, 광복절을 기억한다. 군사쿠데타와 5월의 광주, 6월의 운동을 기억한다. 반대로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소수의 기억일 뿐, 집단기억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968년 퐁니 퐁넛 마을에서의 하루를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가?

저자 고경태는 1968년 2월 12일의 작은 마을을 통해 1968년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곳엔 한국군이 있었고, 민간인이 있었다.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있었고, 미군도 있었다. 린든 존슨 미 대통령도 있었고, 박정희도 있었다. 노인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수십개의 시체가 있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가 그곳에 있었고, 총성이 있었다. 1, 2, 3 소대 중 어느 소대의 누가 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에겐 배제된 기억이다.

주민-병사 라는 표현은 반드시 두 정체성이 완전히 융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으며, 하이픈으로 연결된 이 정체성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각도에서 다르게 보일 것으로 기대되었다. ‘벤 타’ 즉 ‘이편’이나 혁명세력의 이상적 관점에서 보면, 하이픈으로 연결된 사람은 병사였다. ‘벤 타’에서는 이 사람이 ‘벤 키아’, 즉 ‘저편’의 눈에는 단순한 주민으로 비치기를 기대했다. 때로는 ‘저편’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이편’의 관점을 받아들였으며, 이 관점을 왜곡하고 또한 왜곡을 과장했다. 따라서 마을의 모든 산사람과 물건을 군사적으로 정당한 파괴의 목표로 규정했다 - 《학살 그 이후》45~46


같은 생명체끼리 같은 종끼리 서로를 죽인다는 점에서, 수많은 노력을 들여가며 상대와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전쟁은 비극이다. 비극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랬던가. 비극적인 살육의 현장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풍요로운 미군의 PX가 있었다. 아이티와 쿠바에서 외친 절규는 은행을 웃게 했고, 도미니카의 피는 설탕 제조업자의 돈이 되었다. 한국 청년들의 목숨값은 그들의 고향에 풍요의 기반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쟁의 집단기억은 온전히 어둡고 잔인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집단기억의 형성에 비극의 당사자들은 고립되어 있다. 그들은 개인의 기억과 집단기억 사이에서 더 고통받는 것이다.

병사의 마음속에는 증오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전쟁의 이유,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단합된 힘으로 모두 함께 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고 사실 그들은 총알받이에 불과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개개인은 전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오는 오히려 후방에 자리잡고 있다. 병사들은 전투가 미친 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본다. 그래서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알게 된다.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퐁니 퐁넛 마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몸이 찢겨져 우물에 던져진 아이를 기억하는 것이고, 가슴 하나가 잘려져나간 젊은 여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파병군인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들을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민족의 용기와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민족의 열등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는다면, 또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비극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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