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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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013년작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는 1990년대 월가에서 투기적 저가주 판매와 기업 공개 주가 조작으로 떼돈을 벌며 억만장자에 등극, '월가의 늑대'란 별칭을 얻고 여색과 마약에 빠져 환락에 중독된 '5년천하'를 누리다가 불법 자금 세탁 및 은닉죄로 일순간에 몰락한 주식 브로커 조던 벨포트의 자서전이 원작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만들어온 일련의 걸작들은 현대 미국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영락을 거듭하는 개인을 늘 그 중심에 둬왔다. 도시 뒷골목 범죄조직원들의 추례한 욕망을 다룬 [비열한 거리]와 [좋은 친구들], 편집증에 걸린 출세지향 배우 지망생 루퍼트 펍킨의 난장 해프닝 [코미디의 왕], 다혈질 복서 제이크 라 모타의 흥망성쇠를 유려한 흑백영상에 담은 [성난 황소], 괴짜 대부호의 강박과 기행을 그린 [에비에이터]... 모두 소위 아메리칸 드림, '탐욕이 곧 선(善)'이 되는 미국식 성공의 이면을 들추면서 인간의 삶과 그를 에워싼 세상 간 마찰, 그 명암과 허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거나 거꾸로 뒤집어 보는 작품들이었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 일번지라는 월가 한복판에 비상한 머리와 화려한 언변, 비뚤어진 야심의 양아치 사기꾼 조던 벨포트를 던져 넣고 그의 비행과 추락을 지켜 본다. 다만, 예전 대표작들에서 선뵌 '시네마' 내지 '필름'으로서의 무게감은 덜어내면서 블랙코믹 터치를 강화, 철저히 '만화경' 혹은 '요지경'에 가까운 난장판을 보여 준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난잡 파티 장면들, 나르시즘과 테스토스테론, 헤로인으로 들끓는 변태 행각들... 온통 '호갱님'들 후려낸 빚잔치로 마련한 돈다발과 섹스와 마약으로 점철된 역겨운 카니발 묘사 수위가 거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역작 [살로, 소돔의 120일]에 맞먹는다. 20세기 중엽 유럽 부르주아들 자리에 현대 금융자본가들만 대입해 놓은 격. 그 효과는 금융자본의 욕망 과잉과 도덕적 해이, 그 비정상·비인간적인 메커니즘의 기형성과 야만성에 대한 통렬한 독설, 체제 비판과 인간 풍자를 아우른 조롱으로까지 와닿는다.

 

70대 노장 감독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지경으로 영화적 활력과 에너지로 넘치는 작품이다. 20세기 로버트 드니로와 마찬가지로 어느덧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1세기 페르소나로 자리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출중한 연기가 한 몫 단단히 거듦은 물론이다(특히 마약으로 인한 유사 뇌성마비 시퀸스가 압권). 마지막, 3년(겨우?) 형량을 마치고 자기계발 전도사로 거듭난 조던 벨포트가 뉴질랜드 세일즈 세미나에서 수강생들을 상대로 '내게 이 펜을 팔아봐'(추신 참조)를 거듭 되뇌이던 엔딩의 페이소스는 [성난 황소]에서 결국 밤무대 코미디언으로 연명하게 된 제이크 라 모타가 거울을 보고 반복하던 독백 '자, 이제 무대로 나가는 거야 챔피온'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에비에이터]의 하워드 휴즈가 뇌깔이던 'That's the way of the future, the way of the future...'도.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는 한마디로 웃픈 영화다. 권선징악 교훈극도 아니고 한시절 풍미한 주식 야바위꾼을 미화한 회개록은 더더욱 아니다. 금융자본이 금본위제를 이탈한 이래로 촉발된 모순된 욕망과 가치 전도의 거대한 환영을 반영한 풍속도, 화끈하고 신랄한 블랙 희비극이라 하면 그나마 적합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세 시간에 육박하는 기나긴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수작이었다.

 

P.S. 영화 중간, 조던 벨포트가 페니 스톡 투자회사 '스트래튼 오크먼트'를 차리기 위해 소집한 죽마고우들에게 '내게 이 펜을 팔아봐'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수급이 재료나 실체에 앞선다'는 주식 세일즈 교훈을 주입시키는 장면이 있다. 화두의 답은 펜의 장점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싸인을 해달라며 억지로라도 수요를 창출하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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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1-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본 영화라 반갑네요~~~^^. 그런데 연기에 대한 얘기는 안 하시네?? 저는 영화보면 주로 연기 얘기만 하거든요~~~ 역시 서쪽섬님같은 전문가적인 분과 멋도 모르는 저와의 차이점!!ㅋ

풀무 2015-01-11 19:50   좋아요 0 | URL
전문가적이어서가 아니라 지면 부족 및 성의 부족으로.. ^^; 이 영화야 말로 배우들 연기 얘길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만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물론이고 초반에 잠깐 나와서도 엄청난 화면 장악력을 선뵌 매튜 맥커너히까지..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 작품들이 늘 그래왔듯이 여성 캐릭터들 묘사에 대한 아쉬움도요.
 
탐 엣 더 팜
자비에 돌란 감독, 피에르 이브 카디날 외 출연 / 올라잇픽쳐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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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탐엣더팜]은 애상적이고도 잔혹한 작품이다. 불친절하면서 탐미적인 괴작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탐이 하얀 휴지 위에 적는 글귀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제시된다. '오늘 나의 일부와도 같은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슬픔이라는 단어의 동의어가 뭐였는지조차 잊어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너 없이 살려면 널 대신할 사람이 필요할 거야.' 잠시 후 관객 입장에선 탐이 친구이자 동성연인이었던 기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욤의 가족들이 있는 농장을 방문, 장례식 이후에도 계속 머물게 되며 오프닝 글귀는 탐이 써내려간 기욤의 장례식 추도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후론 마치 예언이었던 양 추도문 마지막 문장이 그대로 시연된다. '우리가 너 없이 살려면 널 대신할 사람이 필요할 거야...' 탐을 죽은 기욤의 분신마냥 계속 농장에 붙잡아 두는 기욤의 어머니와 폭력 성향이 다분한 기욤의 형 프랑시스, 그리고 불가항력의 덫에 걸려든 후 그들에게서 죽은 기욤을 느끼며 자신 스스로 기욤을 대체하려는 듯 보이는 탐의 갈등과 혼돈... 이 세 인물의 도착적인 관계에서 파생되는 이상 심리 드라마가 스산한 가을 외딴 마을 고립된 농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왼쪽부터 죽은 기욤의 친형 프랑시스(피에르 이브 카디날),

어머니 아가테(리즈 로이) 그리고 주인공 탐(자비에 돌란)

 

 

미셀 마크 부샤르 원작의 회곡을 각색했다더니 과연 영화 전반에 부조리극의 기조와 특성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인물들 모두가 자기기만으로 형성된 내면의 카오스에서 허우적댄다. 자신 역시 어릴 적 동생 기욤과 동성애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정되는 형 프랑시스는 죽은 동생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겐 끝까지 숨기려 하고, 동생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탐에게 때론 연적으로서의 질투를, 때론 기욤을 향했던 감정을 투사하고 대체하는 연정을 느끼며 갈팡질팡 광기어린 육체적·감정적 폭행을 가한다. 기욤의 어머니는 모든 진실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고 있음에도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신까지 기망하며 과거의 그림자에 매달린다. 탐은 그들에게서 기욤과 함께 했던 추억의 흔적을 찾고 스스로를 기욤과 동일시하면서까지 사랑과 기억의 암연에 침잠한다. 탐이 미처 몰랐던 기욤의 살아 생전 실체를 전해듣고 프랑시스의 극에 달한 악마성을 묵도하면서 뒤틀린 관계의 지옥에서 탈출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세 사람의 욕망이 불안하게 삐걱대나마 맞물려 돌아간다. 이러한 캐릭터 각자의 내면과 그들간 관계에서 감지되는 파장, 그 낙폭이 워낙 이례적이고 파격적이어서 감정선에 집중하여 잘 쫓아가지 않으면 금세 극의 흐름에서 튕겨나게 된다.

 

 

 
'도망치려거든 콩밭을 택해. 시월의 옥수수밭은 잎이 칼날처럼 날카롭지.'

첫 번째 탈출이 좌절된 탐에게 상해까지 입힌 프랑시스의 섬뜩했던 대사

 

 

잔혹하리만치 섬세하고 치밀하게 사람들과 그들을 에워싼 풍광을 담아낸 자비에 놀란의 시선에 그만의 개성이 느껴지고 음악 선곡에서 전해지는 감수성은 더할 나위없이 탁월하다. 때론 모호하게, 때론 현란하게 이미지와 사운드의 향연을 펼치면서 단선적인 인과관계에 기대지 않고 감정의 흐름과 분위기 위주로 내러티브를 구축해가는 화술도 인상적이다. 다만 영화 종반부, 두 번째이자 마지막 농장 탈출을 감행하는 탐과 성조기 점퍼를 입고 필사적으로 탐을 쫓는 프랑시스, 차를 몰고 농장을 떠나 몬티리올 밤거리에 접어든 탐의 허망한 표정 위로 루퍼스 웨인라이트가 부른 'Going to a Town'을 겹쳐 가면서까지 길들여진 맹목적인 사랑에서 촉발된 지배-종속 관계 알레고리로 반미정서를 들이댄 시도는 글쎄. 일견 수긍 못할 바는 아니나 다소 생뚱맞았달까. 어찌 보면 자의식 과잉 내지 치기로까지 여겨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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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08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서쪽섬님 자비에 돌란`에게 꽂힌 듯 싶습니다. 제 취향의 영화인 것 같아서 보아야겠습니다.

풀무 2015-01-09 11:53   좋아요 0 | URL
아직 한 편 밖에 못봐서.. 꽂혔다고까지 하기엔 조금 무리이고 간을 보는 중입니다. ^^; 나중에 다른 작품들도 더 챙겨 봐야겠어요.

AgalmA 2015-01-08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려고 했던 영환데 루퍼스 웨인라이트 ˝going to a town`(가사가 성조기 점퍼 입은 형과 정말 딱 맞죠!)이 흐른다니 더욱 봐야 할 의지가 솟네요. 마미도 곧 올리시겠군요~

풀무 2015-01-09 11:54   좋아요 0 | URL
예. Going to a town이 흐르는 엔딩이 넘 좋습니다. 이 영화가 처음 접한 자비에 돌란 작품이라.. 기회 닿을 때 [로렌스 애니웨이]를 먼저 보고 [마미]도 챙겨볼까 합니다. :)

AgalmA 2015-01-09 13:04   좋아요 0 | URL
로렌스 애니웨이 매그놀리아 같은 환상적인 장면이 있어 저도 찜했던 작품예요. 저도 자비에 돌란 작품과 어서 만나보고 싶네요

풀무 2015-01-11 02:46   좋아요 0 | URL
[매그놀리아].. 본지 십 년도 넘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여러 장면이 인상깊게 남아있는 영화입니다. 말씀 들으니 더 기대가 됩니다.
 

잊을 수 없는 사회물 [포스트맨 블루스]​ 이후 다소 의외였던 감성물 [버니드롭]을 거쳐 이번 [미스 좀비]를 통해 다시 한 번 아리고 얼얼했던 예전 사부(다나카 히로유키) 감독의 세계를 접견할 수 있었다. 위험하다고 여겨질 경우 죽이라는 권총과 함께 테라모토 집안에 맡겨진 좀비 사라(고마쓰 아야카)는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헛간에 기거하며 마당 닦는 일을 하게 된다. 동네 아이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장난 삼아 그녀의 등에 칼을 꽂는 불량배들 뿐 아니라 집안 남자 하인들, 주인 테라모토에게까지 육체적으로 유린 당하면서도 사람을 해칠 수 없도록 상품화된 그녀는 무표정 무반응이다. 그러던 어느날 집밖에서 놀던 테라모토의 아들 겐이치가 연못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테라모토의 부인 시즈코는 사라에게 아들 목을 물어 좀비로 만들어서라도 살려달라 간청하고, 요구대로 좀비로 되살아난 겐이치는 생모 시즈코가 아닌 좀비 사라를 어머니로 여긴다. 이에 사라는 겐이치를 통해서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과 감정을 점차 되찾는 반면 시즈코는 점점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사라에게 질투와 증오를 느끼면서 모든 이들을 비극적인 파국으로 내몬다.

 

 

플라로이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겐이치를 위해 싫어하던 사진도 마다 않게 되는 사라

[미스 좀비]는 한 가정에 배달된 좀비 하녀 사라가 겪게 되는 수난극 형식으로 소위 정상적이라는 인간들의 욕망과 야만을 들추며 과연 어느 쪽이 진짜 괴물인지 넌즈시 캐묻는 작품이다. 주인공 사라의 쓸쓸한 표정에서 드러나듯 좀비물 장르 특유의 기이함보다 섬뜩하고도 애잔한 슬픔이 주조를 이루는데, 인간다움에 대해 회의하고 고민하는 내용 만큼이나 협소한 공간, 한정된 인물들을 느릿느릿 촘촘히 담아가는 표현주의 양식의 흑백영상과 적막한 사운드가 인상깊다. 건조하고 독특한 풍자극으로 보였던 영화가 중반 이후 인간과 좀비 두 여인의 모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진부한 멜로 내지 휴먼드라마로 급선회하는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차가운 시선의 사부 감독은 인간을, 그들이 이룬 세상의 비정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흑백에서 색채로, 다시 흑백으로 전환되면서 사라의 애석한 과거 사연에 그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에 되는 비극적인 선택이 맞물리는 결말은 충격적이면서도 먹먹한 여운으로 남는다. (2014년 4월, 올레 PLAYY 패키지 V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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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1-05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북플허시는 거에요???ㅋ

풀무 2015-01-05 18:11   좋아요 0 | URL
전 아직 2G폰 유저에요.. 북플,이 뭔지 몰라서 검색해봤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8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영화 좋겠는데요. 올레 그거 신청하면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겁니까 ? 저는 왜 올레가 안 될까요 ?

풀무 2015-01-08 06:19   좋아요 0 | URL
오, 이 영화 괜춘합니다. 아무래도 곰곰발님 댁 케이블이 KT 올레가 아니라 C&M인 것 같습니다. KT 올레 중에서도 프라임 무비팩이라고.. 월정액 서비스에 가입하셔야 무제한 공짜..! ^^;
 

애매하고 함축적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상은 늘 황량한 듯 습기를 가득 물고 있다. 그 속에서 헤매이다 암연에 잠겨들게 되는 괴작 [로프트]는 그야말로 안개숲과 늪의 영화라 할만하다. 아쿠타카와 문학상 수상 작가인 하투나 레이코(나카타니 미키)는 소속 출판사의 키지마 편집장(니시지마 히데토시) 요구대로 대중적인 연애소설을 집필 중이나 글에 진전이 없어 애를 먹던 중 계속 헛구역질과 마른 기침에 진흙을 토해내는 증상으로 시달린다. 키지마 편집장은 마감 내 탈고를 위해 외진 시골 인적 없는 별장에 레이코를 위한 작업실(제목 '로프트'의 불어 뜻)을 마련해 주고 그곳에 기거하며 글을 쓰던 레이코는 건너편 대학 부속 건물에서 천 년 묵은 미이라를 보관, 연구 중인 인류학자 요시오카(도요카와 에츠시)와 알게 된다.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레이코 주변을 맴도는 키지마 편집장이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가운데 미이라에 집착하던 요시오카와 레이코 사이엔 기이한 유대가 움튼다.

​두 주인공의 첫만남이랄까. 밖에선 보이지 않고 안에서만 보이는 유리를 통해 건물 속을

들여다보는 레이코. 안에선 미이라 옆 요시오카가 그 형체를 의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알 수 있듯 [로프트]는 장르 공식에 충실한 전격 호러라기보다 차라리 음산하고 유려한 한 편의 초현실적 괴담이다. ​집필 강박에 시달리던 레이코가 결국 작업실에서 발견한 실종된 소녀 작가의 원고를 그대로 카피하고 건실하게만 보이던 카지마 편집장이 그 내용을 읽자마자 레이코를 습격해 숲 속 나무에 매달면서 자신도 대칭으로 목을 맬 때, 젊고 아름답던 소녀의 육신을 남몰래 탐했던 요시오카의 욕정이 카지마 편집장의 광기와 겹쳐 혼선을 빚을 때, 물 속 시체를 못 보고 자신이 소녀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은 착각이었다며 안심하던 요시오카와 레이코 사이로 둔중한 리프트 기계음과 함께 소녀의 시신이 끌어 올려져 그 참담한 실체를 드러낼 때조차 자극적인 쇼크 효과는 철저히 배제되면서 강박적일 정도로 정제되고 압축된 미감의 화면 위로 추레한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절망이 번진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욕망하며 늪의 토사로 젊음을 유지했다는

천 년 전 미이라의 현신인가. 수시로 진흙을 토해내는 레이코.

​쳔 년 전 영원한 젊음을 꿈꾸며 진흙을 삼키던 여인은 늪에 가라앉아 미이라가 되었고 80년 전 고고학 탐사팀에 의해 끌어 올려졌다가 드러나지 않은 어떤 이유에서 다시 가라앉았으며 그 여인의 환생일지 모를 작가 레이코는 몸속 깊숙이서 진흙을 게워낸다. 소녀의 사체를 땅 속 깊이 묻었거나 늪에 유기했을 카지마 편집장은 레이코를 줄에 묶어 늘어뜨리면서 자기 목을 매달아 올리고 수장된 미이라를 다시 발굴, 자아올린 요시오카는 소녀의 시체가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지면서 대신 늪 속에 가라 앉는다. 결국 [로프트]는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얼개 속에 끊임없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영겁 순환되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퍼올려 그 허무한 뒤끝, 불가지한 파멸의 궁극을 다의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진짜 공포를 각인시킨다. 오랫동안 극심한 내상이 지속되던 [큐어]와 [강령]에 비해 비약이 심하고 뒷심이 부치는 인상이나 그들 못지 않게 치명적인 매혹으로 스며드는 수작이다. (올레 PLAYY 패키지 V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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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1-0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서쪽섬님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한 걸요!!^^

풀무 2015-01-05 18:13   좋아요 0 | URL
매끄러운 리뷰나 평론을 염두에 둔 글들이 아니라 1차적으로 제 기억을 위한 기록들인데.. 사실 문장이 장황하기도 하고 생뚱맞기도 하고 그러실 거예요. 그럼에도 늘 관심 갖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8 02:57   좋아요 0 | URL
서쪽섬 님 글에 담백하고 좋습니다.
일단 감정의 과잉과 결핍이 없습니다. 평형을 유지하니 담백한 맛이 난다고나 할까요.

풀무 2015-01-08 06:20   좋아요 0 | URL
음.. 곰곰발님 칭찬이야 너무도 영광이오만, 혹 술 자시고 취하신 거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구심이.. 하하 ;;
 
데칼로그 십계 세트 (6disc)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 엘라이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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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십계, Dekalog)  / 감독,각본: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공동각본: 크쥐시토프 피에셰비치, 촬영: 슬로보미르 이지악, 음악: 즈비그니예프 프라이즈너, 1988년, 10부작 557분, 폴란드

 

 

 

 

#1. 어느 운명에 관한 이야기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어느 선택에 관한 이야기 -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3.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관한 이야기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하라

#4. 어느 아버지와 딸에 관한 이야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5.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 - 살인하지 말라

#6.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 - 간음하지 말라

#7.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 - 도적질하지 말라

#8.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9.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10.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기독교나 카톨릭에서는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율로서 하나님을 걸며 맹세하는 것을 금한다고 한다. 비록 자신은 참된 것으로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모르는 거짓과 위험이 개입되어 있을 수 있으니 함부로 남에게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을 확언하는 것을 금한다는 취지이다.

 

 

 

 

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 도로타 겔러는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늙은 의사에게 집요하게 케묻는다. 지금 당신 병원에서 투병중인 내 남편이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그녀는 현재 정부(情夫)의 아기를 임신 중이고, 남편이 살아난다면 아이를 낙태할 것이며, 남편이 죽는다면 출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의사의 말 한마디에 한 여인의 인생이, 한 생명체의 생사가 달려있다.

 

 

 

 

노(老)의사는 현 상황에서 환자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며 극구 대답을 회피한다. 결국 도로타는 아기를 낙태하기로 결정하고, 의사는 그녀를 만류하며 남편은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의사의 말을 믿고 도로타가 순회 공연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남편 안제이는 건강을 회복하고 의사의 진료실로 걸어 들어와 말한다. 고맙다고. 이제 새로운 삶의 의욕이 생기노라고. 그리고 곧 우리 부부 사이에 아기도 생길거라고. 아기가 생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않느냐고. 의사는 말 없이 촉촉한 눈길을 떨군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가 얽히고 섥혀 있는 가변적인 세상이기에 개인의 말과 선택 하나 하나가 그 자신은 물론 타인들의 인생에 일파만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삶의 연쇄적이고 비결정적인 파장들을 신비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극단적인 딜레마에 봉착한 인물들의 첨예한 갈등 구조와 내면 묘사를 통해서 완벽하게 포착한다.  섬세한 영상으로 풍부한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동시에 카메라의 시선은 냉혹하리만치 차갑고 가치중립적이기에 더욱 깊이가 느껴진다.

 

도로타가 절박한 한계상황에서 내린 선택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의사가 도로타에게 한 말이 진실이었는지 태아를 살리기 위한 거짓이었는지, 안제이는 아내의 부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극적으로는 이 작품이 묘사한 삶의 아이러니가 제2계명을 옹호하는 취지인지 논박하는 취지인지. 그 모든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내 입장에서는 고색창연한 계율과 어긋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인간들을 보게 된다. 불안한 존재의 불확정성 앞에서, 그것이 독선이건 진리이건 간에 십계명 역시 나약한 인간만큼이나 무기력하고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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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1-03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디비디로 판매하고 있네요!! 하지만 디비디로 볼 수 있을까요? 국가마다 수작을 부려놔서~~.사도 걱정이네요~~~.ㅠㅠ

풀무 2015-01-04 05:05   좋아요 0 | URL
그래도.. 현재로선 DVD 감상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10부 중에 5부 살인하지 말라, 6부 간음하지 말라는 각각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으로 극영화 편집 버전이 극장 상영된 적 있거든요. 그 작품들을 먼저 찾아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