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고 함축적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상은 늘 황량한 듯 습기를 가득 물고 있다. 그 속에서 헤매이다 암연에 잠겨들게 되는 괴작 [로프트]는 그야말로 안개숲과 늪의 영화라 할만하다. 아쿠타카와 문학상 수상 작가인 하투나 레이코(나카타니 미키)는 소속 출판사의 키지마 편집장(니시지마 히데토시) 요구대로 대중적인 연애소설을 집필 중이나 글에 진전이 없어 애를 먹던 중 계속 헛구역질과 마른 기침에 진흙을 토해내는 증상으로 시달린다. 키지마 편집장은 마감 내 탈고를 위해 외진 시골 인적 없는 별장에 레이코를 위한 작업실(제목 '로프트'의 불어 뜻)을 마련해 주고 그곳에 기거하며 글을 쓰던 레이코는 건너편 대학 부속 건물에서 천 년 묵은 미이라를 보관, 연구 중인 인류학자 요시오카(도요카와 에츠시)와 알게 된다.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레이코 주변을 맴도는 키지마 편집장이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가운데 미이라에 집착하던 요시오카와 레이코 사이엔 기이한 유대가 움튼다.

​두 주인공의 첫만남이랄까. 밖에선 보이지 않고 안에서만 보이는 유리를 통해 건물 속을

들여다보는 레이코. 안에선 미이라 옆 요시오카가 그 형체를 의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알 수 있듯 [로프트]는 장르 공식에 충실한 전격 호러라기보다 차라리 음산하고 유려한 한 편의 초현실적 괴담이다. ​집필 강박에 시달리던 레이코가 결국 작업실에서 발견한 실종된 소녀 작가의 원고를 그대로 카피하고 건실하게만 보이던 카지마 편집장이 그 내용을 읽자마자 레이코를 습격해 숲 속 나무에 매달면서 자신도 대칭으로 목을 맬 때, 젊고 아름답던 소녀의 육신을 남몰래 탐했던 요시오카의 욕정이 카지마 편집장의 광기와 겹쳐 혼선을 빚을 때, 물 속 시체를 못 보고 자신이 소녀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은 착각이었다며 안심하던 요시오카와 레이코 사이로 둔중한 리프트 기계음과 함께 소녀의 시신이 끌어 올려져 그 참담한 실체를 드러낼 때조차 자극적인 쇼크 효과는 철저히 배제되면서 강박적일 정도로 정제되고 압축된 미감의 화면 위로 추레한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절망이 번진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욕망하며 늪의 토사로 젊음을 유지했다는

천 년 전 미이라의 현신인가. 수시로 진흙을 토해내는 레이코.

​쳔 년 전 영원한 젊음을 꿈꾸며 진흙을 삼키던 여인은 늪에 가라앉아 미이라가 되었고 80년 전 고고학 탐사팀에 의해 끌어 올려졌다가 드러나지 않은 어떤 이유에서 다시 가라앉았으며 그 여인의 환생일지 모를 작가 레이코는 몸속 깊숙이서 진흙을 게워낸다. 소녀의 사체를 땅 속 깊이 묻었거나 늪에 유기했을 카지마 편집장은 레이코를 줄에 묶어 늘어뜨리면서 자기 목을 매달아 올리고 수장된 미이라를 다시 발굴, 자아올린 요시오카는 소녀의 시체가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지면서 대신 늪 속에 가라 앉는다. 결국 [로프트]는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얼개 속에 끊임없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영겁 순환되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퍼올려 그 허무한 뒤끝, 불가지한 파멸의 궁극을 다의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진짜 공포를 각인시킨다. 오랫동안 극심한 내상이 지속되던 [큐어]와 [강령]에 비해 비약이 심하고 뒷심이 부치는 인상이나 그들 못지 않게 치명적인 매혹으로 스며드는 수작이다. (올레 PLAYY 패키지 VOD.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로 2015-01-0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서쪽섬님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한 걸요!!^^

풀무 2015-01-05 18:13   좋아요 0 | URL
매끄러운 리뷰나 평론을 염두에 둔 글들이 아니라 1차적으로 제 기억을 위한 기록들인데.. 사실 문장이 장황하기도 하고 생뚱맞기도 하고 그러실 거예요. 그럼에도 늘 관심 갖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8 02:57   좋아요 0 | URL
서쪽섬 님 글에 담백하고 좋습니다.
일단 감정의 과잉과 결핍이 없습니다. 평형을 유지하니 담백한 맛이 난다고나 할까요.

풀무 2015-01-08 06:20   좋아요 0 | URL
음.. 곰곰발님 칭찬이야 너무도 영광이오만, 혹 술 자시고 취하신 거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구심이..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