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허은실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허은실 지음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비단 빨간책방 뿐 아니라 수많은 방송의 오프닝은 전체적인 방송 분위기를 결정지을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은 이들이라면 한번 쯤 '오프닝 멘트'를 끄적여봤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책의 구절부터 훈훈한 뉴스거리나 재밌게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등을 가져와 자신만의 느낌을 적어 공감을 끌어내는 그런 이야기들. 그렇게 기대를 부풀리고서 읽었는데도 이 책은 참 좋았다. 마음이 열렸다고나 할까.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사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책에서 읽었던 건지 기억은 안나는데 인간관계라는 게 늘 벅차게 느껴지는 내게 '사이'라는 건 큰 위로가 된다. 너무 급하게, 버겁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나는 두렵다. 뒤에 나오는 것처럼 나를 번역도 하지 않고 마치 나를 다 안다는 것처럼, 나의 눈물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가오는 그들이 늘 부담스러워 요즘 말로 '철벽'이 되어버린 내게 사이가 필요하다는 말은 위로다. 완전한 타인 뿐 아니라 가족구성원끼리도 분명 사이는 필요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고, 혼자있고 싶을 때,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있도록 이끌어줄 때 바로 그런 둘 사이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비틀즈의 노래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한 동사가 '사랑'이라는데 비단 비틀즈 뿐이 아닐 것이다. 사랑을 빼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사랑없이 누군가의 마음을 어찌 열 수 있을까. 당신과 나라는 단어도 많이 등장한다는데 그와 그녀가 아닌 '우리'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한 것 같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손가락에 생기는 상처. 그 상처를 이겨내야 굳은 살이 오르고 계속 기타를 연주할 수 있게 되는데 몇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로맨스가 더 필요해'에서 이런 내용을 다뤘었다. 늘 무언가를 배울 때 초반에 생기는 적잖은 상처에 그만두길 반복하는 남자가 어느 날 기타마저 그만두려 할 때 굳은살이 생기고 나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포기하지말고 이겨내보라는 여자의 응원을 받고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자신이 그런말을 했다는 것 조차 잊고 살지만 남자에게는, 모든 일을 쉽게 그만두었던 그에게 그녀의 조언은 사랑을 느끼게 할 정도의 큰 힘이 되었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누군가와 부딪히고 상처받는다면
어떤 일에서 자꾸 실수하고 실패한다면
그 관계도, 일도,
아직은 2월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는 지금이 인생의 'F코드'를 익히는 시기라고요.
- part 1 44쪽-
우리말에는 정해진 길보다 앞질러가는 지름길 보다 돌아서 가거나, 다소 험난하고 좁은 길이란 의미의 단어가 더 많다고 한다. 에움길, 엔겔, 돌길...그리고 뒤안길, 오솔길, 고샅길.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을 좀 둘러가면, 시간이 더 걸려 가게 되면 그에게 들려주고 픈 풍경이 많고 가는 길 내내 그 사람을 더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는 말에 미소가 번졌다. 굳이 몇 시간씩 일찍 나가지는 않더라도 천천히 약속장소 주변을 맴돌며 그에게 작은 선물을 줄것이 없는지 고민해봤던 때가 떠올랐다. 연인이 아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늘 고마운 지인들과의 만남에 난 늘 그랬던 것 같다. 값이 비싼 무언가가 아닌 작은 초콜릿, 머리삔 혹은 귀여운 장난감. 둘러가는 그 길 동무가 나뿐이 아닌 것 같아 기운난다. 오프닝 뿐 아니라 에세이나 자기개발서에 자주 등장하는 영화, 일 포스티노. 영화를 봤다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줄거리나 몇몇 장면 등 영화를 안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게 바로 이런 책에서 그 영화를 자주 언급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 책에서는 마리오가 사랑하는 이에게 들려주고픈 일상의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을 예로 들었다. 자신만의 사운드 트랙을 가져보라고. 내용보다 옆에 함께 실린 사진속 바다소라를 보고 메모를 적었다.
어릴 적 방학숙제로 바다소라를 학교에 가져오면 친구들끼리 바꿔가며 소라를 귀에 대고 소리를 듣곤 했어.
쉬이~쉬이~ 들려오는 파도소리. 비릿한 바다내음 그리고 꺼끌거리는 모래 알갱이. 다 비슷한 그 소리들이 왜 다 다르게만 느껴졌을까.
창조라는 단어의 '창'자를 유심히 본 적이 없는데 '다치다, 상처입다,슬프다'라는 의미도 가진다고 한다. 소설을 쓰는 일이 산고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화가들이 작업을 하다가 슬럼프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멸하는 경우가 떠오른다. 무언가 창조하기 위해 수없이 다치고, 상처입고 슬픔에 잠겨야 하는 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 앞서 읽었던 기타를 배울 때 생기는 상처를 견뎌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결국 상처없이는 그 무엇도 이룰 수가 없는가보다.
누군가는 새벽에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누군가는 여름내 신었던 샌들에 발을 넣다가 느끼겠지요.
하나의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
한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part2 100쪽-
책의 내용 중 위의 문단에 애착이 많이 간다. 새벽이란 단어도 좋고 이불이란 단어도 좋지만 무엇보다 계절이 오고감을 느끼는 순간은 어쩌면 하늘을 보거나 길가에 핀 꽃들, 산의 색변화가 아니라 일상 그자체에서 체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가을의 문턱에서 쓰여진 듯 보이는데 만약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두터운 이불을 발로 걷어차는 순간? 외출해서 들어오자마자 보일러 전원을 키지 않게 되는 것? 등이 되려나. 계절이 변할 때를 직감할 때마다 메모해두면 해마다 어떤 때인지 비교해보는 재미, 그런 소소한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밀. 반드시 필요한 것, 간직해야 하는 것. 반드시 필자가 들어간다는 비밀. 저자는 한자를 볼 때 한자 한자 유심히 들여다 보는 것 같다. 아님 내가 너무 무감각하게 활자를 보았던건가. 부수의 획만 따져가면서. 읽다보니 나를 되돌아 볼 기회를 계속 주는게 고맙다.
좋았던 문장, 글귀 그리고 감상을 나열하다보니 글이 지나치게 길어진다. 이보다 더 좋은 문장도 참 많지만 아직 읽지않은 독자들을 위해 책의 문을 슬며시 닫아야겠다. 이만큼 나를 흔들어 놓은 책, 흔들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읽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행위가 된 것 같습니다.
-중략-
그리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세심하게 읽히기를 기다리는
한 권의 책입니다.
- part4 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