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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ㅣ 아시아 문학선 10
쿠쉬완트 싱 지음, 황보석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11월
평점 :
쿠쉬완트 싱 의 델리.
스무 살 무렵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는 듯한 자아찾기의 목적으로 인도로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던 적이 있다. 이후 일본수필가와 건축가의 여행기를 통해 접하게 된 인도는 그야말로 '알면 알 수록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곳'으로 인식되다가 근래들어 유럽이나 다른 관광지와 비교했을 때 다소 청결치 못한 환경이라던가 여성여행자를 노리는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인도는 한번 쯤 가봐야 할 여행지에서 결코 가고 싶지 않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후에 어떤 여행서를 읽어도,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주는 영화를 접해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책, [델리]를 며칠 씩 손에 놓지 않고 읽으면서 내가 아는 인도는 그야말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극히 일부만을 그것도 직접이 아닌 간접적으로만 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지금 인도로 훌쩍 떠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면 더 공부하고 알아두고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델리의 주인공 '나'와 같은 가이드를 만난다면 과연 그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고민도 하면서.
그것이 델리다.
삶이 너무 힘겨워질 때면 니감보드 가트 화장터로 가서 죽은 자가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지켜보고 그 가족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와 위스키를 두어 잔 털어 넣는다.
델리에서는 죽음과 술이 인생을 살 만하게 해준다. p.30
델리에서 자유기고가 이자 관광안내원으로 활동하는 '나'는 여행객들 혹은 남녀추니 바그마티와 있었던 이야기를 과거에서 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그들이 방문하는 유적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 액자식 구성이다. 바그마티를 만나게 된 계기나 현재 가이드를 하면서 자신의 생활과 성격등의 기록은 '바그마티 편'에 해당되고 그 외에 바그마티 편과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영적 지도자들과 술탄의 일화, 델리를 침략한 정복자의 일화, 델리가 현재의 종교적 혹은 지리적 모습을 갖추게 된 역사속의 술탄 그리고 근대 영국을 비롯한 침략받은 폐허의 델리 모습등이 각각 등장한다. 화자인 '나'는 영국유학을 다녀온 나름 유식한 지식층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상대에게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경우 가장 큰 자신의 무기인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면서 대접받기를 바라고 이성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또한 매회 바그마티의 상스러움과 못난 외모를 지적하면서도 그녀를 잊지못하고 기다리는 순애보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가이드 혹은 동업자가 된 여성들의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주는 호색한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야기 구성은 작품의 핵심 주제이자 델리의 모습이기도 한 양면성은 바그마티의 신체가 양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화자가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완벽하게 집착하지 않는 면에서 델리를 바라보는 작가 혹은 독자의 시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더불어 화자인 '나'의 모습 또한 델리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구한 역사성과 여러 술탄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 보여지는 신의 위대한 능력등을 가진 델리와 유학파의 화술과 상대방의 마음을 잘 아는 '나'가 가지고 있는 '학식 있는 모습'은 델리의 긍정적인 측면이 된다면 이와 반대로 힌두파와 이슬람파로 나뉘어져 이교도 들에게 행해졌던 술탄들의 악행이나 이들 전체를 몰락시킨 외부의 적들로 인해 상처받은 델리의 유약한 면은 남녀추니인 까닭으로 부모에게 버림받고 말투나 행동은 거칠고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단한번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없는 바그마티가 처한 현실은 델리가 현재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보여진다. 등장인물과 델리의 모습을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도 있지만 더 흥미로웠던 건 '나'와 바그마티의 관계만 보면 뒤라스의 '연인'의 주인공들이 떠올랐다가 영적 스승들이 등장했던 초반에는 코엘료의 아크라 문서와 비교되었고 술탄과 티아무르 비망록을 읽을 때 쯤에는 근래 가장 인기있는 미드 왕좌의 게임의 장면이 겹쳐보였다. 물론 전체적인 느낌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가 생각났는데 마치 이야기를 멈추기라도 하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기라도 할 것 같은 '메르따끼'를 볼 때 그랬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토해내는 '나'와 작가의 모습이기도 했다.
내가 금요일 기도에 반드시 참석하기로 했던 것은 기도가 끝난 뒤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송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델리 사람들은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들과 그 도시를 사랑했다. p.337
정복자들의 이야기로 치닫는 후반부는 참혹한 델리의 모습이 묘사되어 읽으면서 표정이 내내 어두어졌다. 여전히 작가 특유의 위트가 '나'와 '바그마티'를 통해 종종 등장했지만 마치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하는 노랫말이 떠올라 글을 읽는 내표정은 애처로움 그자체였다. 역자의 말처럼 그런 역사적 사항은 그야말로 꼭 우리나라와 닮아 더 맘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자면 전쟁이 끝나고 자주권을 되찾고 나면 마치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인도와 한국 모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도, 외부에서 그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여전히 평화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는 점이 그랬다. 무엇보다 지난 해 강상중 교수의 강연회에서 교수가 말했던 자살률이 높은 국가에서는 오히려 젊은 층이 전쟁을 기다리고 전쟁이 자신들의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줄 계기가 되어줄거란 기대가 크다는 내용이 떠올라서 슬펐다. 인도의 일부사람들도 지금보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지배받던 그 때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는건 아닐까 섣부른 오해를 하게 되었다.
4년간의 전쟁이 끝났어도 인도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전쟁 중에 더 평화로웠고 전쟁이 끝나자 더 혼란스러웠다. p.502
기회가 된다면 델리,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진 것은 물론 안타깝게도 아시아에서 출판된 이 책, 개정판 델리 외에 전부 절판상태라 작가의 다른 책을 구해서 읽고 싶어졌다. 문화적 사대주의 여부를 떠나서 인도의 멋진 작품들이 묻히고 있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올 겨울 성년이 안된 아이들이 마법의 힘을 얻어 먼길을 떠나는 여정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에로틱하며 그야말로 실재했던 이야기가 담긴 쿠쉬완트 싱의 델리로 정말 멋진 밤을 함께 해보길 추천한다. 아마 한 챕터라도 읽게 된다면 이 리뷰가 엄청 고마워질 것 이다. 작품과 델리에 대한 애정은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