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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을 때, 나는 읽는다
박준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2월
평점 :
<떠나고 싶을 때, 나는 읽는다>길래, 이 책을 읽고 나면, 떠나고픈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들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다 읽고 난 지금은 오히려 당장 떠나고픈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말았다.
20대를 돌아보면 후회되는 건, 왜 좀 더 멀리, 좀 더 오래 떠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래도 그나마 보름, 한달간의 여행은 해보았지만, 그 이상 긴 여행을 해보지 못한건 내내 아쉽다.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내가 가본 곳들에서는 아련한 향수에 젖어들었고, 미처 못 가본 곳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다짐했다.
"할머니, 제가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나요?"
할머니는 웃기만 한다. 그러고는 쌀을 한 줌 쥐더니 똑바로 세운 바늘 위로 떨어뜨린다. 펑펑 눈이 쏟아지듯 쌀알이 무수히 떨어져내린다. 쌀알들과 바늘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만나지 못한다.
"잘 만나지 못하는 구나."
할머니는 다시 쌀을 한 줌 집어 뿌리고 또 뿌린다. 하지만 쌀알은 바늘 끝에 머물지 못한다.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쌀알이 바늘 끝에 얹히는 것만큼이나 어렵단다, 얘야. 그래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이 그토록 소중한 거란다."
(p.48)
나는 과연 지금 사람으로 살고 있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나, 반성했다. 만약 다음 생에 새로 태어난다면(닭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멀리 멀리 떠돌아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생애 어떤 몸으로 태어나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므로, 지금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고 하루하루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챙이 넓은 모자, 배관용 테이프, 바셀린, 자외선 차단제. 카미노에 관한 모든 책은 카미노를 걸을 때 "배낭은 7킬로그램을 넘으면 안 된다."고 충고한다. 7킬로그램에 한 달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담는다. (p.64)
나도 20대때는 캐리어 따윈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진짜 '배낭'여행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배낭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는데. 그시절에 비하면 요즈음 나의 여행가방은 쓸데없는 물건이 너무나도 많다. 줄여야지. 여행짐뿐만아니라, 인생의 짐도.
"푸링 여자들 예쁘죠? 중국에서 예쁘기로 소문났어요. 이유가 뭔 줄 알아요? 강이랑 산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쁘긴 한데 가끔 성격이 너무 강할 때도 있어요. 이유가 뭔 줄 알아요? 강이랑 산을 끼고 있기 때문이래요."(p.112)
도쿄의 농림수산부 공무원이 쓴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봤다. 1989년 미국과 쿠바의 사회상을 비교한 통계다. 평균 수명 미국 75세, 쿠바 73세. 문맹률 미국 4.3퍼센트, 쿠바 2퍼센트. 연간 극장 입장 횟수 미국 4.5회, 쿠바 8.5회 등등(p.251)
최근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에 대한 글을 읽고, 무척 부러워했었는데, 쿠바도 덴마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실현되는 사회. 민주주의, 자유 경제주의가 꼭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내가 볼때 지금은 과거로 후퇴하고 있다. 다시 계급사회가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처럼. 돈에 의해, 권력에 의해 사는 집이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고, 어울리는 사람들이 다른데 지금이 계급사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풍요롭게' 살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고, 자식들 좋은 대학 보내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아무리 똑똑해도 등록금을 낼 수 없으면 의대나 약대에 갈 수 없다. 쿠바는 다르다. 돈이 없어도 공부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의대에 간다. 돈이 많지 않아도 쿠바에서는 '적당히' 살수 있다. 쿠바에서'풍요롭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나라의 '풍요롭다'와 다르다. (p.254)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호화로운 즐거움을 찾는 게 아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도 물론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일상 속에서 계속되는 즐거움이야말로 가장 좋다.
좋은 땔감을 때면 자연스레 불길도 좋다. 좋은 기분으로 불을 때면 저절로 좋은 불길이 생긴다. 그날은 손수 골라온 좋은 땔감으로, 그리고 좋은 기분으로 불을 지폈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없는 불길이 조용히 타올랐다. 겨우 목욕물을 데우는 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런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생은 완벽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듯 느껴지곤 한다. (p.334)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친구 한명은 올해 휴가 계획을 물으며, 함께 여행을 가자고 말해줬다. 여행을 함께 가자고 말해주는 친구가 곁에 있다니, 참 행복하구나 생각했다.
작년에는 여행을 퍽 많이 했는데, 올해는 아마도 작년만큼은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경제적인 형편이 그렇고,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 그런데 꼭 비싼 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긴 겨울 내내 기다렸던 봄이 눈 앞에 있는데. 어디든 떠나고 볼 일이다.
나는 늘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매번 어디로 가야 할지 재기만 한다. 그렇게 신중한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걸까? 딘의 말대로,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기분이 드는 게 두려운 걸까? 딘처럼 한 번이라도 미쳐보고 싶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다. 다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