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제1편 형성 제3장 성 입문 & 제4장 레즈비언


5주차 부분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자주 생각했다.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든 (아직도) 금기로 여겨져 입밖에 꺼내어놓을 수 없는 뜨거운 감자 뭐 이런 것. 뜨거운 건 맞나? 아무튼. 생각을 하면서 생각했다. 역시 바닥까지 솔직하기는 힘들겠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불특정다수에게 그대로 공개되어 어떻게 날아다닐지 모르는 글로는, 어렵겠다. 나는 소심쟁이다, 아직은. 옆지기와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서로에게 솔직하기도 어렵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도 아직 어려운데 말이다. 남는 것은... 허공에 뜬구름 잡는 소리거나, 보부아르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이거나. (언제쯤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듣고 의견을 나누는 날이 올까?)




"정상적인 성행위는 사실상 여성을 남성과 종()에 예속시킨다. 공격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거의 모든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성 쪽이다. 이에 반해서 여성은 남성의 포옹에 따를 뿐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정복될 수 있지만, 그는 페니스의 발기상태가 유지되지 않는 한 그녀를 정복할 수 없다. 처녀막 이상으로 확실하게 문을 닫는 질 경련과 같은 강한 반항만 아니라면, 여성의 거부는 극복될 수 있다. 질 경련의 경우라도 아직 남성에게는 완력에 좌우되는 육체를 상대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다. 여자는 객체이기 때문에, 그녀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 본디 역할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성이 성교를 원하는지 또는 그저 거기에 따를 뿐인지 애써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성은 죽은 여성과도 동침할 수 있다. 성교는 남성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자연적인 결말은 남성의 만족이다. 또한 여성은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해도 임신이 된다. 게다가 임신은 그녀에겐 결코 성적 과정의 완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종()이 요구하는 봉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임신·분만·포유(哺乳)의 과정을 통해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실현된다." 469~470


자, "정상적인 성행위"는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세상에 '정상'이라고 규정지은 것들은 진정 정상인 것들인가. 우리가 그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삶의 기준, 잣대, 가치관 들이 정녕 옳은 것이었나. 그런 생각들 위에서 과연 우리의 '성행위는 정상'인가. "남성은 죽은 여성과도 동침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장에 대한 증거를 실제의 사건들에서 충분히 보고 듣는다. 충격적으로 들린다면 수많은 강간살인사건을 다시 잘 살펴보자. "성교는 남성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새롭게 내 머리를 두드린다. !!! "종이 요구하는 봉사" "그것은 ...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실현된다."





"원시문명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자에게는 침대가 '헌신'의 장소인 듯이 인식해 왔다. 남성은 선물로 또는 그녀의 부양을 책임지는 것으로 그 헌신에 대한 감사를 대신해 왔다. 그러나 헌신한다는 것은 주인을 갖는 것이며, 그 관계에는 아무런 대등성도 없다. 결혼의 구조 자체가 매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즉 여자는 '자기 몸을 주고', 남자는 그 대가를 지불한 뒤 여자를 소유한다. 남성이 여성이라는 약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는 일을 금하는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다." 470 


남자들은 흔히 착각하곤 한다. 여자에게 '잘하'는 것이, 아니 '잘해주'는 것이 곧 선물(혹은 돈) 공세라고.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선물을 하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가끔 무엇인가를 사주겠다는 옆지기의 말이 그리 반갑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알 수 없는 감정들, 기분 나쁨, 내가 벌지 않는 돈, 내가 관리하지 않는 통장... "결혼의 구조 자체가 매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 문장에 반박하지 못하겠다. 이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반박할 수 없다.ㅠㅠ





"남성의 섹스 용어는 군대 용어에서 유래했다. 사랑하는 남자는 병사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그의 성기는 활( )처럼 팽팽하며, 사정할 때는 '발사한다'. 그것은 기관총이며 대포이다. 남성은 공격이니, 습격이니, 승리니 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 그의 성적 흥분 속에는 어떤 영웅주의적 취미가 있다." 471


"여성의 욕망에 섞여 있는 혐오 속에는 단지 남성의 공격성에 대한 공포뿐만이 아니라, 깊은 실망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좀더 강조할 만하다. 여성의 육체적 기쁨은 성욕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남성의 경우에는 촉각과 시각을 통한 즐거움이 이른바 성적 쾌락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또한 수동적인 에로티시즘 자체의 모든 요소들이 모호하다. '접촉'만큼 애매한 것은 없다." 475


이것 또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여성의 욕망에 섞여 있는 혐오". 엄청난 사회화와 세뇌. 그리고 모호함. 진짜 모호하다. 나는 모호하다. 탐구해야 할 모호함이다. 




"남자는 여자를 상대로 쾌락을 '얻고', 그것을 여자에게 '준다'. 이런 말 자체가 불평등하다." 485


옳소! '얻는다'라는 표현도 거시기하지만. 행위로 차별하고 언어로 다시 차별하다.




"정신적 저항은 쾌락의 표출을 방해한다." 495


"여자는 자기 자신의 만족만을 생각하는 남자들의 이기주의에도 시달리지만, 또한 그녀에게 쾌감을 주려는 남자들의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의지에도 감정을 상한다. '타인을 즐겁게 하는 것은 상대를 지배한다는 의미이며, 남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는 행위이다'라고 슈테켈은 말한다." 495


"성공적인 성교에 필요한 것은, 소심하면서도 단순하고 우직한 많은 남성들이 생각하듯이 쾌락의 수학적 동시성이 아니라, 성욕의 복잡한 형태를 낳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시간과 기교, 즉 '격렬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남자들은 여자의 성욕이 여자의 상황 전체에 얼마나 좌우되는지를 모르고 있다." 501


"여자의 성생활이 전개되는 여러 가지 조건은, 단지 이제까지 설명한 사실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회적·경제적 상황 전체에 달려 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이 이상으로 여자의 성생활을 연구하는 것은 모호한 추상적 이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검토에서 몇 가지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성적 경험이란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존재 조건의 모호성을 발견하게 하는 인생 체험의 하나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육체로서, 정신으로서, 타자로서, 주체로서 스스로를 경험한다. 이 충돌이 특히 극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여성의 경우이다. 여자는 먼저 자기를 객체로서 파악할 뿐, 처음에는 쾌락 속에서 확실한 자주성을 발견하지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육체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로운 초월자인 주체로서의 권위를 회복해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험으로 가득 찬, 종종 실패로 돌아가게 될 계획이다. 그러나 여자가 처한 상황 자체의 괴로움과 어려움이, 남자가 고지식하게 속아 넘어가는 그 속임수들로부터 그녀를 지켜 준다. 남자는 공격적인 역할과 오르가슴의 충족된 고독에 내포된 거짓 특권에 속고 있다. 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정한 체험을 쌓는다.

여자는 그 수동적 역할에는 다소 정확하게 적응하더라도, 능동적 개인으로서는 언제나 손해를 보고 있다. 여자가 남자를 선망하는 것은 그가 소유한 기관이 아니라 그 먹이 때문이다. 남자는 상냥하고 애정이 충만한 부드러운 감각 세계, 즉 여성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 데 반하여, 여자는 거칠고 살벌한 남성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아이러니이다." 508


"여자의 성욕이 여자의 상황 전체에 얼마나 좌우되는지를 모르고 있다." 옆지기와 대화할 때 누누이 말하는 바인데 이걸 남자들이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친밀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섹스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듣고 해체하고 다시 맞추는 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레즈비언을 '남자를 모방하려는' 그녀의 욕망 때문에 '남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녀를 잘못 규정짓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이 현 사회가 규정하는 그대로 남녀 성별의 구별을 받아들임으로써 얼마나 많은 모호성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사실 남자는 오늘날 '적극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 즉 남성과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한편 여자는 단지 소극적인 것, 즉 여성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여자가 인간적인 존재로서 행동할 때마다, 세상은 여자가 남성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여자의 스포츠·정치·지적 활동과, 다른 여자에게 갖는 여자의 욕망은 '남성적 저항'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자가 고려하는 자기 초월적 가치들을 거부한다. 그래서 주체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자는 비본질적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대한 오해는, 인간 여성은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세상이 인정한다는 데 있다. 이 여자다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거나 어머니인 것으로 아직 충분치 않다. '참다운 여자'란 전에 카스트라토(거세된 남자 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 낸 인공적 산물이다. 교태와 순종 같은 이른바 여자의 '본능'은, 남자에게 남근적 자존심이 불어넣어지는 것처럼 여자에게 불어넣어진다.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성적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여자 역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그렇게 순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충분한 까닭들이 있다." 513


'제4장 레즈비언' 부분은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 513쪽 구절을 인용한다. 아직 잘 모르기도 해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더 공부가 필요하다. 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점차 문제가 복잡해지는 걸 느낀다.


***

이렇게 1권 읽기가 끝났다. 2권이 기대되면서 동시에 겁난다. (라고 써놓고 오늘 화요일이라 2권 앞부분 읽는데 재미있으면서 쑥쑥 읽히면서 역시 뼈때리고 그런다. '성'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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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10-0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리뷰 쓰기가 참 어렵더라구요. 뼈 때리는 글. 너무좋죠?!! 1권 클리어 수고하셨습니다ㅎㅎ👍👍

난티나무 2021-10-05 23:5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왤케 뭘 쓰기가 어렵죠?!^^;;;;;; 뼈 아파요.ㅎㅎㅎ ㅠㅠ 😍😍😍😅😅😅

막시무스 2021-10-0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으셨습니다! 아직 읽지않은 부분이지만 덕분에 예습 잘 했습니다! 2권도 화이팅 하십시요!ㅎ

난티나무 2021-10-06 17:46   좋아요 1 | URL
넵 막시무스님도 화이팅!!!! ㅎㅎㅎ 👏👏👏👏👏

얄라알라 2021-10-09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용어..찾아보면 더 많겠네요. 함께읽기 으쌰으쌰 응원드립니다.

난티나무 2021-10-09 01:07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북사랑님, 응원 고맙습니다~^^
 














동서문화사 2권을 시작했다. 프랑스어 원서가 있지만 읽어낼 실력이 안 되기에 한글판으로 읽으면서 아주 간혹 궁금한 문장을 찾아 비교해보곤 한다. 그런데 간혹의 그 찾기에서 좀 걸리는 번역이 눈에 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행위는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헌신‘이라고 여겨진다. 남자는 자기의 쾌락을 '받고', 그 대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여자의 육체는 파는 물건이다. 여자에게 자기 육체는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다." 539


이 문장들에서 눈에 띈 단어는 '헌신'과 '파는'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On admet comme jadis que l‘acte amoureux est, de la part de la femme, un service qu‘elle rend à l‘homme; il prend son plaisir et il doit en échange une compensation. Le corps de la femme est un objet qui s‘achète " 


헌신의 경우, 넓은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치자. 서비스와 헌신. 

"여자의 육체는 파는 물건이다"라는 문장의 원문에서 사용한 동사는 se vendre 가 아니고 s'acheter 이다. 그렇다면 '팔다'의 의미보다는 '사다' 혹은 '제공하다' '거래하다' 등의 의미가 더 강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물론 문장의 주어가 여자가 아니고 여자의 몸이긴 하지만, 어쨌든 파는 물건,이라는 말에는 파는 행위의 주체가 여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해석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여자의 육체는 파는 물건이다"라는 문장은 남성&세간의 시선에서 바라본 문장이다. 이런 생각. 이렇게 생각하니 "남자는 자기의 쾌락을 '받고' " 도 거슬리네. 쾌락을 '취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 

을유 개정판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궁금하다. (갖고 계신 분들 안 귀찮으시면 한번 찾아봐 주세요. 2부 2편 상황 제1장 기혼 여성 앞부분입니다. 동서판 2권 539쪽.)


번역은 참 어렵다. 몇 문장이라도 우리말로 바꿔보는 일을 해보면 느낄 수 있다.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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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4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04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한한 일이다. 아니 진즉 눈치챘어야 했다. 시행착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어쩌겠는가, 사람은 완벽할 수 없는 법. 모든 것을 알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그렇지. 무슨 말이냐 하면, 옆지기가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를 들고 갔다는 말이다. <가부장제의 창조>라니, 그 어려운 책을?(나만 어렵나 ㅠㅠ) 페미니즘 책이 대체로 처음인 지금?


처음 책상에 책들을 쌓아놓았던 작년 봄을 기억한다. 책을 오랫동안 사지 못했던 터라 그 책들이 무엇이든 한꺼번에 사서, 돈과 시간을 들여 받아서, 책상에 쌓아놓을 수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쌓은 채로 두고 즐겼다. 읽기도 전에 뿌듯한 마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나는 그랬지만 옆지기는 책탑을 보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목이 모두 후덜덜한 페미니즘 책이었다.(사실 지금 보면 그리 '쎈'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예를 들면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같은 책 제목들. 여기서 괴물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남편'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쉽게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ㅎㅎ 아무튼 책들을 본 옆지기는 페미니즘이다! 와 함께 겁나는데! 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나중에 내가 이혼하자고 하는 거 아닐까 했다고 털어놓았다. (아니 그러면 뭔가 켕기는 게 있기는 한가 보지?!)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불확실한 생각과 감정들이 무엇인지 알아나가면서 괴로워졌다. 이미 괴로웠는데 더 괴로워! 나만 괴로울 수 없어!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불만이 쌓이고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를 갉아먹는 짓이니까. 내가 깨어나는 만큼 그도 깨어나야 했다. 공동체를 유지하든 하지 않든 지금 중요한 건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게 된 것을 너도 알아야 겠어. 그래야 그동안의 삶이 너에게도 보일 테니까. 세상이 보일 테니까. 각성. 만약 그게 되지 않는다면, 그 땐 어쩔 수 없겠지.


사모으는 책들 중 쉬워 보이는 혹은 부담스럽지 않은 책들을 골라 건넸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책도 공감이 비교적 쉽지 않을까 했다. 의외. 내가 건네는 족족 책들은 다시 돌아왔다. 평소 매사에 비판적이며 어느 정도 냉소를 장착하고 있는 옆지기에게 책들은 거부당했다. 거부. 그는 '남성'이라는 존재를 거부당한다고 느낀 것이다. 너희는 큰 잘못을 저질렀어, 오래전부터 너희는 사악하게 여자들을 짓밟았지, 그런 적 없다고? 그럴 리가, 너의 존재 자체가 이미 특권인 거야, 이미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깊이 가담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자신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듯한 책들을 견디지 못했다. 오케이. 접수. 검색하다 알게 된 책을 주문해달라길래 얼씨구나 하고 샀다. 그 두 권 중 한 권 역시 거부를 당했고 한 권은 아직 읽기 전이다. 스스로 읽어보겠다고 그 나름 노력해 고른 책이었는데 아쉬웠다. 한동안 책을 권하지 않았다. 초기에 <악어 프로젝트> 같은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때에 느꼈던 '가까운 거리'는 평소의 거리로 혹은 더 멀리 벌어졌다. 나는 계속 읽었고 어찌됐든 앞으로 나아갔으나 그는 제자리에서 고민만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사이 그가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옹호 발언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 가끔 처절하게 밑으로 가라앉았고 싸움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토론을 나와 격하게 했으며 그 나름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잘' 유지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다만 철저히 '혼자서' 고민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함께 읽자고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과정에서 말하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껏 그것을 외면하고 살았던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꼭 말로 해야 알아? 응, 꼭 말로 해야 알아.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이 한 문장이 다양한 사람들의 상황에 전부 적용되지는 않을 수 있겠으나 가족 공동체 안에서만 생각해 볼 때는 확실히 그렇다. 말이 없어지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동안의 습관을 부수고 싶었다.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 구성원의 기분을 살피는 오래된 나의 습성은 아무리 의식적으로 떨쳐내려고 해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말이 필요하다. 대화, 일방적이지 않은. 그러기 위해 매개체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책이었으면 했다. 함께 보는 미디어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것들도 물론 매개체가 된다. 이 매개체를 통한 대화가 실전이라면 책을 매개체로 한 대화는 이론에 대한 것이다.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토론을 통해 생활로 나아갈 수 있다. 옆지기에게 필요한 책은 그런 이론서가 아니었을까. 이유를 찾아가는, 역사를 되짚어보는, 혼란 속에서 잣대를 세워줄 탄탄한 이론서. 솔직히 뭔가 증거와 숫자를 엄청나게 들이대야만 그제야 믿을까 말까 하는 남자들의 속성 때문이라고 후려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얼마간 사실이기도 하고. 어쨌든지간에 <제2의 성> 부분을 읽을 때도 그랬고 <가부장제의 창조> 앞부분을 읽고 읽을 의지가 생긴다는 것도 그렇고, 그의 취향(?) 혹은 선호도(?)를 존중하기로 한다. 어려운 책들을 함께 읽을 동지가 한 명 더 생겼다. 나는 지금 <제2의 성> 2권을 들어갈 참인데, 같이 읽는 건 어떠냐고 제안할 참이다. '현대 여성의 삶'이야. 기혼여성에서부터 매춘부와 첩을 거쳐 노년기 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흥미롭지 않겠니? 그 다음에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어 역사를 다진 후에 우에노 지즈코나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으면 좋겠구나. 마리아 미즈 책 아직 없는데. 책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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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03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저는 부딪치는걸 싫어해서 혼자 읽는 편이예요
이 책 왜 읽어?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그냥‘이라고 대답하고 노코멘트,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서로 교집합이 없는 부분은 토론 안해요^^
공감하는 얘기 하는것도 시간이 없는데,,, 그렇다고 그런 책을 읽는 제 생각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
둘다 감정소모를 싫어하는 편 ^^

난티나무 2021-10-04 05:03   좋아요 2 | URL
그러시군요. 저는 교집합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생각해보면 대화같은 대화, 솔직한 대화를 못(안)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오리지널 마인드> 


목차를 보고 글로리아 스타이넘부터 읽었다. 밑줄긋기. 


***

책소개
가즈오 이시구로로부터 "전세계에서 작가 인터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엘리너 와크텔의 또 다른 인터뷰집. 세계적인 사상가, 작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수전 손택, 놈 촘스키, 조너선 밀러, 조지 스타이너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고 자기 분야를 확장하며 한 시대의 획을 그은 혁신가들의 ‘독창적인 정신’을 만날 수 있다.
목차

머리말・ 6
들어가며・ 12
조너선 밀러・ 21
제인 구달・ 83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31
조지 스타이너・ 165
데즈먼드 투투・ 217
수전 손택・ 241
아마르티아 센・ 285
글로리아 스타이넘・ 331
재레드 다이아몬드・ 373
올리버 색스・ 415
제인 제이콥스・ 449
움베르토 에코・ 491
메리 더글러스・ 533
놈 촘스키・ 581
아서 C. 클라크・ 613
해럴드 블룸・ 651
참고문헌 ・ 711



와크텔 : 남자보다 여자들이 베트남 전쟁에 더 반대했다는 건 저도 몰랐습니다.

스타이넘 : 네, 훨씬 더 반대했습니다. 더 일찍부터, 더 많이 반대했지요. 사실 특이한 일은 아니에요. 여자들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에 훨씬 더 회의적인데, 부분적으로는 남성성을 증명하도록 키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여성이 더 똑똑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폭력과 공격의 가치를 믿도록 세뇌당하지 않았고, 또 여자가 폭력의 주요 대상이며 폭력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와크텔 : 페미니즘은 왜 1세대, 2세대와 같이 세대별로 올까요? 그런 면에서 다른 운동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스타이넘 : 저는 운동에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매일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하지만 운동은 격렬하게 일어났다가 동화, 또는 분산의 시기를 거친 다음 다시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뛰어난 역사학자 게르다 러너는 어떤 운동이든 백 년 동안 계속되어야 지속적인 효과가 있다고 항상 말합니다. 저는 그런 장기적인 시각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단계를 인식할 수 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저는 인도의 여성 운동이 많은 면에서 간디에게 본보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종종 그렇듯이, 그 사실은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았지요. 인도의 여성 운동보다 데이비드 소로가 간디의 모델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저는 70년대 후반에 친구와 동지들을 만나러 다시 인도에 갔는데, 우리는 간디가 전 세계 여성들에게 아주 좋은 전술적 모범이라고, 그의 편지를 살펴보고 여성 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출판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간디와 함께 일했던 어느 나이 많은 여성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우리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간디가 준 교훈이 여성 운동에 유용한 것은 사실이지요. 간디가 아는 것은 전부 우리가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도에서도 대대적인 여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여성들은

조혼과 사티 (미망인을 죽은 남편의 시체와 함께 화장하는 풍습이지요) 등 여러 가지 병폐에 맞서 싸우면서 비폭력적인 방법을 지지했는데, 여성에게는 비폭력이 편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간디가 그 전술을 배웠지요.


와크텔 :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요, 아름답다는 것이 짐이 되기도 합니까?
스타이넘 :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경험은 남자들에 비해 외모가 우리 정체성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다 같이 그러한 관행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사회가 규정하는 대로 생긴 여성이 뭔가를 성취하면 외모 덕분에 남자들을 통해서 그런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하지요. 또 사회가 규정하는 대로 생기지 않은 여성이 뭔가를 성취하면 남자를 얻을 수 없어서 그러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기가 꺾이는 일이에요. 저는 가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제가 이룬 것이 외모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기가 꺾입니다. 참 불쾌한 기분이지요. 정말 가슴이 아파요. 저는 이제 예순일곱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런 것도 사라질 줄 알았어요.

와크텔 : 쉰 살, 예순 살 이후의 삶은 "다른 나라" 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고, 또 늙었기 때문에 우울하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노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더 급진적으로 변했다고 하셨지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스타이넘 : 네, 그렇습니다. 저는 여자들이 보통 그런 경험을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대부분은 일반적인 패턴 남성의 패턴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역전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반항적이고 나이가 들면 더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패턴 말이에요. 여자들은 젊을 때 보수적이다가 나이가 들면서 반항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확실히 그래요.

와크텔 : 여성이 나이가 들면서 더 반항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스타이넘 : 문제를 더 많이 겪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여자라서 채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지는 않지만, 12년에서 15년 정도 지나면 유리 천장에 부딪치거나 핑크칼라의 밑바닥 일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남자들이 당신을 추월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니 급진적으로 변하게 되지요. 30년 동안이나 법을 바꾸기 위해 애쓴 끝에 요즘은 평등한 결혼을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다시 불평등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수록 여성을 급진화시키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이 자체도 물론 그렇지요. 아직까지도 나이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불이익을 줍니다.

와크텔 : 그렇다면 페미니즘 때문에 오히려 결혼이 독립적인 여성에게 더욱 현실성 있는 선택지가 되었군요.
스타이넘 : 저는 그렇게 될 거라고 항상 말했습니다. 60년대 후반에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이혼의 원인이라고 말하면 저는 이렇게 말했죠.
"아니, 이혼의 원인은 불평등한 결혼이에요." 페미니즘 덕분에 사상 최초로 사랑이 가능해졌을지도 모릅니다.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사랑처럼 보이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닌 경우, 의존이거나 선택지의 부족인 경우가 많아요. 그러므로 평등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서로가 만족스러운 관계라는 의미의 사랑은 페미니즘에 의해서 가능해졌습니다.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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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피곤하다는 의식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그동안 살아오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내뱉고 행동했던 것들, 툭 하면 살 뺴야지 다이어트해야지 말하던 주위의 여자들 이 떠오른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나도 죽을 때까지 어이구 이 똥배 좀 봐, 이거 먹으면 살찌는데, 오늘부턴 저녁을 좀 줄여야 겠어,를 입에 달고 살았을 수도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내 몸을 미워하고 부정하고 낙인찍었을 수도 있었다. 70이 넘은 나의 엄마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렇다. 어쩌면 엄마는 모르고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알면 무척 억울할 테니까. 


<욕구들>을 함께 읽으며 옆지기와 대화를 나눈다. 여자의 일상, 끝도 없이 머릿속을 울려대는 세상의 잣대들을 자신에게 들이대며 사는 일상에 대해. '자기 비난의 목소리'. 여자들의 머리 속에서 매일을 지배하는 목소리. 일상이 되어버린 목소리.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지도 모르는, 결정을 할 수 없는 사람들. 나는 설명과 표현에 애를 먹는다. 모르기 때문에,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커다란 구멍을 메우기에 나의 말은 너무 성기다. 여자들의 말하기는 아직 멀었다. 훨씬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구석구석 핵심과 맥락을 콕콕 짚어내야 한다. 


거식증 환자였던 캐롤라인 냅의 글에서 옆지기는 거식증을 염두에 두고 읽는 듯했지만 나는 거식증이라는 행위보다 딸과 엄마(부모)의 관계, 통제할 수 없는 불안, 인정과 사랑에의 욕구, 여자들을 '조종'하는 세상의 모든 것 들에 더 무게를 두고 생각한다. 거식증은 결과로 나타난 행동 혹은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행동일 뿐이다. 누군가는 손목을 긋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매일 남자를 찾아나서기도 한다고 냅이 말했듯이 이런 행동들은 분명 스스로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용기와 타인의 시선을 거리낌없이 받아칠 수 있는 배짱이 생겨야 없어지지 않을까. (힘이 되어주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옆에 있다면 사정은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한 여정이 너무 길고도 힘들다. <배움의 발견>의 타라가 떠오른다. 현실을 부정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라가 선택했던 행동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벗어나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직시하기 위해 그 역시 긴 세월이 필요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다른 사람도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가 어째서 지독한 괴로움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욕구들>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책이었다.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읽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다. 한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 역시 종이책으로 사야 할. 그래 첫번째 읽기라 생각하고 좀은 설렁설렁 읽은 감도 있다. 옆지기는 행간 사이 의미의 간극이 크다며,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고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어려운 철학책을 읽을 때의 기분. 그 기분 이해한다. (나는 냅의 그런 글쓰기 방식이 좋았다. 문장 하나에 멈춰서 오래 생각해야 하는 일이 잦았는데 옆지기도 아마 그런 의미에서 간극이라고 말한 듯하다.) 

나중에 알라딘 어느 책 리뷰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는 공부의 주제로 삼을 만한 것이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납득이 가지 않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문제를 파고들어야 '내 삶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고 전한다."(<세미나책> 리뷰 중 https://blog.aladin.co.kr/712851116/12724109) 딱 들어맞는 말인 듯해 톡으로 보내주었다. 


다음으로 옆지기와 함께 읽은 책은 <탈코르셋 선언 : 일상의 혁명>이다. <욕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레 여성의 외모, 꾸밈, 다이어트 등의 이야기가 함께 나온 터라. 평소에도 조금씩 의견을 나누던 소재니 이참에 이런 책도 읽어보자 싶었다. 


* 가벼운 혹은 얇은 책이라면 일주일에 한 권씩 읽자고 옆지기가 말했다. 나야 물론 콜. 둘이 읽는 이 모임의 이름을 생각해본다. 뭐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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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3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간을 같이 나누는 이와 책까지 나눌 수 있다면, <욕구들> 읽으신 시간이 더욱 오래 기억나실 것 같네요. 계속 진행형이 될 거라고 하시니 부러운 맘 살짝 감추고 응원 합니다^^

난티나무 2021-10-01 00:27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북사랑님 감사합니다~^^
토론이 막 불붙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은 <욕구들>로 그럴 만하지 못했나 봐요, 둘 다. 함께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다음에 더 불붙는 토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봅니다.ㅎㅎㅎ 그래도 같이 읽고 책으로 이야기나누니 그건 정말 좋아요.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