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2015년 7월 22일 ~ 7월 27일(5박6일)

항공편: 진에어

숙박: sora house(게스트하우스)

동행: 중학교 때 내 짝꿍

 

"5박 6일이나? 오키나와를 다 밟고 올 작정인가..." 했던 남편의 말대로 오키나와를 다 훑고 온 기분이 든다. 숱하게 흩어져 있는 섬 하나를 못 가봤으니 사실 제대로 본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섬에 가려고 떼어둔 하루는 하필 태풍 때문에 항구에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고스란히 남은 하루는 가본 데를 또 가보는 반복 학습의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여행객이 모여드는 국제거리는 저녁마다 출근했고 나중에는 중국 정원, 왕궁의 별장...이런 데까지 가보았으니 미련없이 오키나와를 보고 온 기분이 드는 것이다. 오키나와인과 대화다운 대화 한마디 못해본 게 무슨 여행?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역시 '관광'에 머물고 말았다.

 

생각나는 대로, 기억나는 대로,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려고 한다. 여행도 그렇게 했으니까.

 

 

여행 전, 나는 오키나와가 이런 풍경의 연속일 줄로 예상했다. 오키나와를 소개하는 여행 가이드북이나 여행기에는 어김없이 이런 예쁜 지붕이 등장해서 나를 설레게 했다. 이 주황색 지붕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남국의 태양, 눈이 시원한 들판, 예쁜 집들,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오키나와를 머릿 속에 그리면서 제주도를 연상하기도 했다.

 

 

이곳의 바다는 가슴과 눈을 시원하게 한다. 뜨거운 태양에 반쯤 익어가는 고통을 감내하며 즐기는 풍경이다. 38번 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가면 된다. 남부 지역에 있다.

 

 

누가 보아도 알아맞힐 수 있는 저 자태. 코끼리 바위. 오키나와 북부에 위치한 만좌모라는 곳인데 이곳은 교통이 여의치 않아 9시간짜리 투어를 신청해서 다녀왔다. 단체투어라는 게 늘 그렇듯, 이런 멋진 곳에 우리를 내려 놓고는 달랑 20분만 준다. 결국 증명 사진만 찍고 왔다는.....

 

 

이런 바다에 누가 나를 밀쳐 넣어도, 절벽에서 떨어뜨려도 괜찮을 성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20분안에 이런 곳을 봐야한다는 건 고통이다. 찰나의 덧없음.

 

 

 

 

 

 

해양박 공원 츄라우미 수족관. 오키나와 여행의 필수 코스라서 사람들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다. 저기 보이는 고래상어는 이런 인간들이 혹시 자신을 경배하기 위해서 모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데 유감이다. 이 커다란 수족관과 이 수족관을 둘러싼 넓은 해양박 공원을 보면서 '돈만 쳐바른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돈을 끌어모으기 위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가본 수족관은 몇 개 안 된다. 국내 수족관은 갔었는지 가지 않았었는지 기억에 없고(분명 갔었는데), 해외에 있는 곳으로는 모나코와 뉴질랜드 수족관을 가봤다. 모나코는 20여 년 전에, 뉴질랜드는 12년 전에 갔었다. 모나코 수족관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양한 해양 생물을 볼 수 있어서 감동이 컸다. 비싼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고 각양각색의 해양 생물에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뉴질랜드는 수족관을 만들기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였던 건물을 재활용한 곳이어서 나름 의도가 좋아보였다. 남극의 펭귄을 몇 마리 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 모나코에서 봤던 수족관이 내게는 수족관의 원형으로 비쳐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츄라우미 수족관은 규모만 크고 대표적인 동물이 고래상어라는 것뿐이지 그외 다른 것은 별로 없다. 물론 고래상어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작은 오키나와 섬에 이런 큰 수족관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꼭 고래상어를 잡아다 놓고 녀석에게 밥주는 모습을 시간을 기다려 지켜봐야하는지 모르겠다. 돈도 좋지만.

 

 

 

왼쪽의 상어의 두뇌, 오른쪽은 돌고래의 두뇌. 두뇌가 큰 돌고래의 머리가 좋을 수밖에. 그렇다면 저 위의 고래상어는 지능지수가 얼마나 되려나.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데 궁금하네.

 

 

 

오키나와의 수호신, 시사(사자).

 

 

 

 시사

 

 

 

 오키나와의 전통가옥. 집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돌가림막이 세워져 있는데 운치가 있다.

 

 

 

 수족관에나 있음직한 물고기들. 맛이 궁금했으나...

 

 

 

역시 수족관에나 있을법한 소라를 시장에서 팔고 있다.

 

 

 

류큐왕국 시대의 슈리성(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음) 입구에 있는 나무. 나무는 뿌리가 깊어 살아남았으나 인간의 왕국은 덧없는 것인지...

 

 

슈리성 밑자락의 돌담길. 일본의 예쁜 길 100선에 든다나 어쩐다나. 이 길을 두 번 걸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다. 서울의 북촌이나 서촌같이 번잡하지 않아서 좋다. 두어 개의 찻집으로 만족하길...

 

 

 역시 돌담길. 친구가 옆에 있어 좋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류큐 왕가의 무덤, 타마우돈.

 

 

 

 

타마우돈 클로즈업. 저 빗장걸린 문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의 문이다. 납골당스럽다.

 

 

 

류큐 왕가의 별장, 시키나엔.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록은 국력에 좌우되기도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국식 정원, 후쿠슈엔. 그림엽서 사진이 되고 말았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이동하거나 시내 이동할 때 매우 유용한 유이 레일(모노 레일).

 

 

 

사키마 미술관. 가이드북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고, 나하시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기노완시에 자리잡고 있어 말 그대로 '아는 사람'만 가는 곳이다. 후텐마 미군기지와 붙어 있다.

http://sakima.jp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0552.html

 

미술관에서 나눠준 팜플렛에는 다음과 같은 사키마 미치오 관장의 말이 적혀 있다.

 

'철의 폭풍이라고 불리는 치열한 전쟁이었던 오키나와전쟁 이후의 변화는 너무 급격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농락당하고 있는 오키나와의 상황 속에서 나는 아무래도 마음을 진정시켜 조용히 "사유하는 장소"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콜렉션을 관철하는 테마는 "삶과 죽음" "고뇌와 구제" "인간과 전쟁"입니다......"

 

우리가 미술관에 갔을 때는 '기억과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오키나와와 한국의 사진 교류전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이용남, 정주하, 한금선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동영상으로 제작한, 한 위안부 할머니의 "일본이 야비하긴 좀 야비하지요."의 말씀을 일본에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사키마 미술관은 특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했다던 서경식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오키나와에 간다면 한번쯤 들러봐야 할 곳이리라. 저들이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어쩌구하는 것에 지면을 할애하고 이 미술관 소개를 쏙 빼먹은 가이드북 저자들에게도 이 미술관을 추천하고 싶다. 여행자들이 맨날 먹고, 자고, 쇼핑만 하는소비자들인가....생각도 좀 해야지.

 

 

전시된 사진과 글 중에서 하나.

 

'파주에 주둔하던 미군부대는 2006년 철수했지만 훈련장은 오히려 확대되었다. 일본의 오키나와, 괌, 하와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파주의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파주에는 215만 평의 '스토리사격장', 175만 평의 '다그마노스 전차훈련장'과 '트윈브릿지'로 불리는 500만 평 규모의 '무건리종합훈련장'이 있다. 한국과 미국은 무건리종합훈련장을 500만 평에서 1,000만 평으로 확장하는 사업을 계획했다. 주민 600여 명은 훈련장 확장 사업에 반대했다. 이 마을은 조상대대로 400년이나 살아온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저항했지만 400년 된 마을은 분단 70년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또 다른 분단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 와서 우리나라의 이런 현실을 알게 되다니....

 

 

 

방명록에 남긴 글을 읽다. 나도 한마디 남기고 싶었으나 대절한 택시가 도착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누군가 이곳에 가시거든 제 대신 좋은 글 많이 남기고 오소서.

 

 

 

오른쪽 아래의 사각형이 미술관, 저 푸른 숲이 후텐마 미군기지. 내 친구네 가는 길에 미군부대가 있는데 만약 카메라를 들이댔다가는 당장 간첩으로 몰리는 그런 분위기를 풍겼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게 신기했다.

 

 

 

 

 

 

 

 

 

 

 

 

 

 

한금선이라는 작가의 사진과 함께 전시된 이 책. 읽어봐야겠다.

 

 

 

아메리칸 빌리지. 놀이공원에서 봤음직한 예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곳에 불과하지만.

 

 

 

돈을 쳐들인 곳이라는.

 

 

 

대관람차 가는 길에는 일정한 거리마다 오른쪽에 보이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대피소가 그려져 있다. 바로 옆이 바닷가이다.

 

 

 

쓰보야 도자기 마을의 한 찻집. 이런 소소한 카페만을 전문적으로 소개한 가이드북이 인기를 끌고 있고, 그 책을 읽고 카페순례를 떠난 어떤 여배우의 책이 또 나왔다. 그런 책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흉내를 내게 된다. 이런...근데 예쁘긴 하다.

 

 

슈리성 가는 길에 있는 초등학교. 이곳의 학교 건물은 초등학교건 고등학교건 하나같이 건물들이 우중충하다. 학교라기 보다는 무슨 교도소같은 인상을 준다. 감옥 같은 학교건물들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찍었다. 예쁘게 꾸며도 시원찮을 학교 건물인데...

 

 

 

세이화 우타키

 

 

 

세이화 우타키(세계문화유산)

 

우타키....그냥 밋밋한 바위 같은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오키나와인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곳이라고 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2>에 우타키 얘기가 나온다. 리조트 개발로 우타키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주인공 이치로가 행동에 나선다는 내용인데 오키나와에 다녀오니 우타키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이해된다.

 

 

 

 

 

 

 

 

 

 

 

 

 

 

 

(301쪽) 선장과 그 일행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광장이 있었고 돌담을 둘러싼 한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한 아가씨가 정성을 다하여 기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섬의 신을 모신 우타키였고 기원을 올리던 아가씨는 신을 모시는 여사제였습니다.

   그해는 초봄부터 가뭄이 계속되어 모든 농작물이 타들어가는 바람에 섬사람들은 먹고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 섬의 사제는 우타키에 들어가 하루 빨리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신께 기원을 올리는 것이 임무입니다. 우타키 숲은 제사가 있는 날을 빼고는 여사제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남자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하고 싶었으나 게을러서 못다한 얘기

1. 사키마 미술관의 친절한 아가씨: 본의 아니게 일찍 도착한 우리를 위해 20여 분을 앞당겨 문을 열어주고 친절하게도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었다.

2. 소라하우스(게스트하우스): 미에바시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50m나 될까?) 깨끗, 깔끔하다. 가격대비 매우 만족스런 곳.

3. 여주라고 불리는 열매로 만든 요리: 고바찬푸르. 여주, 계란, 두부 등을 넣고 적당히 볶는데 먹을 만하다.

4. 가죽공예품 쇼핑: 가죽으로 된 카메라끈 구입. 딸아이에게 평생을 쓰라고 이름을 넣어주었다.

                           anshareproject.com

5. iced beer: 맥주를 슬러시통에 넣어 일단 얼린다. 맥주를 따르고 그 위에 맥주 슬러시를 얹힌다. 마시는 내내 시원하다.

6. 여행객 중에 눈에 띄는 커플이 많았다. 특히 모녀가 함께 여행온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오키나와가 모녀, 혹은 친구끼리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고, 안전하고, 조용하다.

 

 

으흠, 결론이다. 오키나와를 가기 전에 제주도를 떠올렸다고 했는데, 제주도와 오키나와의 풍경은 비교할 게 못된다. 단연 제주도가 낫다. 경치, 다양한 볼거리, 올레 길 등 제주도가 사뭇 풍부하다. 헌데 오키나와는 장수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거기까지 확인하기에는 이번 여행이 너무나 짧았고 정신 없었다. 어휴,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었다,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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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2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키나와 수족관 멋지군요....저게 아마 세계에서 몇 번째하는 그곳이죠 아마?? ^^

nama 2015-07-28 18:49   좋아요 0 | URL
그렇다네요. 저 수족관이 터지면 어디로 피해야하나 생각하면서 보느라고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지요 ㅎ ㅎ
 

돌아오는 월요일 방학식만 남겨놓고 한 학기가 끝났다. 끝남이 있고 그 끝남을 형식화해서 마무리를 짓는 일이 방학식, 졸업식, 송별식..뭐 이런 것이 되는데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잡지를 나도 샀다. 대충 읽어봐도 소설가 천명관과의 대담 기사 하나만으로도 책 값은 확실히 빠진다 싶어 8권을 더 주문했다. 그간 도서관 학부모봉사단의 어머니들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2년 함께 근무한 기간제교사들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으로 한 권씩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교장샘에게도 한 권. 여기서 순서를 잘 봐야 한다. 학부모-기간제교사-교장, 이런 순이다. 그러니까 교장을 위해 먼저 생각해낸 게 아니라는 얘기다.

 

도서관을 담당하면서 학부모봉사단 어머니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몇년간 쌓아둔 도서 폐기부터 크고 작은 환경정리까지 지금 이 순간도 봉사단 회장 어머니는 도서관에 뭔가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고 계실 것이다. 어쩌면 방학 내내 이런저런 고민을 하실지도 모른다. 그 살뜰한 마음이 내내 불편하면서도 실은 굉장히 고마웠다. 이런 고마움에 대한 작은 성의로 이 잡지를 드리긴 했는데 글쎄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재밌는 책이 아니어서.

 

어제는 기간제교사을 위한 송별회식이 있었다. 전별금 전달 등이 있은 후 교장샘의 짧은 말씀이 이어졌다. 그간 교장연수를 받느라 고생하고 계신 교감샘도 모처럼 회식에 참석했는데 교감샘에 대한 노고를 언급하면서 이런 표현을 썼다. "학교의 꽃인 교감선생님을 위해..." 속이 뒤집힐 뻔했다. '학교의 꽃"이 나오는 찰나 다음 말이 뭐가 나올까 기대되었는데 어이없이 교감이라니...결국 학교의 꽃은 교장/교감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아, 이런 분에게 이 책을 드렸다니....이 잡지를 만든 분들께 사죄하는 마음이 뭉클뭉클 솟기 시작했다.

 

바로 내 옆에는 한 학기 동안 도서관에서 근무한 실무원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어제도 이 아가씨는 이런저런 일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혼자 훌쩍거렸는데 나는 살갑게 달래주지 못했다. 이 아가씨는 약간의 장애를 겪고 있는데, 지난 한 학기 동안이 내게는 하루하루가 고정관념을 수정하고 더불어 사는 연습을 하는 나날들이었다. 그간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는지 어제는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무시당하고, 사정을 잘 모르는 교사에게 빈정거림을 당하고...사정을 모르는 동료에게 슬쩍 한마디 해주면 금방 이해하고 도와주기는 하는데, 솔직히 내가 왜 이 역할을 맡아야 하지,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교장에 대한 실망, 불쾌함과 실무원아가씨에 대한 안쓰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 아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학기 동안 어리석고 부족한 자기를 위해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그간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너도 나 때문에 긴장하고 마음 상하는 일이 많았을 텐데, 나는 네게 용서를 구하지도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네 마음이 참 살갑고 착하구나.) 마음이 먹먹해졌다. 낮은 것이 마음을 울린다.

 

 

16~17년만에 학급 담임을 맡지 않으니 한 학기가 짧게 느껴지고, 학생들이 예쁘게 보이고, 세상이 넓게 보인다. 대학교수에게는 일정기간 근무하면 안식년이라는 게 주어지는데 초중고 교사들에게도 그 안식년을 허하라. 최소한 담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딱 그 정도 의미의 안식년 정도라도. 그리고 학교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학생이며 그 학생들과 매일 싸우고 지지고 볶는 담임이다. 교장이나 교감이 되려고 온갖 치사함과 역겨움을 참는 것도 결국은 담임이라는 고된 업무에서 해방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방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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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결국 완독하지 못한 상태로 돌려주게 되었다. 손으로 만져봤다는 증거를 남긴다.

 

높은 1인당 에너지 소비와 극도의 전문 서비스를 바탕으로 하는 개발이 서양의 전도가 끼치는 가장 큰 해악입니다. 개발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태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개념과, 출생과 사망이 일어나는 문화적 장소를 전문 서비스를 위한 무균 병동으로 대치하려는  인류학적으로 사악한 시도를 길잡이 삼아 벌이는 사업입니다. 한바탕 개발이 할퀴고 간 그 짧은 기간에, 신생아를 토해내고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빨아들이는 병원, 취업 전/간/후의 무직자가 바삐 지내도록 운영되는 학교, 슈퍼마켓으로 오가지 않는 동안 사람들을 보관하는 고층 아파트, 차고와 차고를 이어주는 고속도로 등이 풍경 속에 문신처럼 새겨졌습니다. 분유세대가 의료원으로부터 학교로, 사무실로, 경기장으로 일평생 내몰려 다니도록 설계된 이런 시설은 이제 대성당만큼이나-대성당처럼 심미적 매력을 덧입히지는 않았지만-이상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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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내 짝꿍 때문에 괴로웠다. 허구헌날 연필이나 지우개 등을 빌려달라고 하는 통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반대로 어떨 때는 엄지만한 그림책을 가지고와서 온통 그 그림책에 마음을 빼앗기게 만들기도 했다. 영어로 된 그 작디작은 그림책은 돼지 세 마리와 늑대가 등장하는 내용이었는데 지금도 돼지들이 만든 붉은 벽돌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림책 구경으로 잠시 황홀하기도 했지만 문구류를 빌려달라는 청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연필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한가지 꾀가 떠올랐다. 그 친구의 시선의 방향을 잠시 확인한 후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연필을 주워서 슬쩍 다른 곳에 감추었다. 그런 후 짝에게 좀전에 빌려간 내 연필을 달라고 했다. 짝은 빌려가지 않았다며 당황해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시는 짝이 연필 따위로 나를 괴롭히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그 짝꿍과 같은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깊은 산 속에 있던 학교는 등교길이 만만치 않았는데 별다른 교통수단도 없어서 왕복 1시간 30분 정도를 걸어다녀야 했다. 밭길, 산길, 과수원길, 공동묘지길 등을 두루 거쳐야 하는 등하교길은 자연 이런저런 친구들이 함께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딱히 친하지 않아도 그냥 함께 걷는 사람이 그날의 친구가 되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종종 그 짝꿍과도 함께 걷곤 했다. 헌데 이 친구는 좀 남달랐다. 다른 아이들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세상의 비밀 한 조각씩을 물어다주는 것이었다. 내 생애 최초의 성교육을 이 친구로부터 귀동냥으로 배운 것이다. 한편으로는 친구의 조숙함이 놀랍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부럽진 않았다. 이 친구는 언니, 여동생과 함께 보육원(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안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이 친구와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에 없다. 학교성적에 일희일비하던 내가 이 친구의 어려움을 살피거나 마음을 주었을 리는 없었다. 나는 매우 이기적인 인간으로 되어 갔으니까.

 

가끔 이 친구가 떠오른다. 부모와는 재회했는지, 언제 보육원에서 나왔는지, 얼굴이 곱던 이 세 자매는 그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부디 무탈하게 살고 있기를.

 

미안하다 친구야. 연필 따위로 째째하게 굴던 친구를 용서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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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따분하여 모처럼 강화도 전등사에 갔다. 15년 운행을 자랑하는 승용차는 이따금씩 시동이 멈추어 드라이브에 긴장감을 보태는데, 운전은 남편 몫, 나는 그래도 단잠을 즐긴다. 내가 깨어서 눈 똑바로 뜨고 앞을 주시한들 낡은 자동차가 내 말을 듣지는 않을 터.

 

다 좋았다, 는 아니었다.

 

경내에 찻집이 있어 '연꽃꿀빵'을 사려고 들어갔는데, 물건값을 치르려고 보니, 신용카드나 현금영수증이 안 되는 가게였다. 오로지 현금만 내야 하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넓은 방 두 개로 이루어진 실내에 테이블도 많고 발코니에도 테이블이 있는 걸로 봐서 결코 작은 가게는 아니었다. 분명 세금관계가 투명한 곳이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만약 이 정도의 개인사업이라면 신용카드나 현금영수증을 발행하지 않고 영업할 수 있을까?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종교는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양심은 있어야지 싶다. 좀 더 떳떳하게 영업하시구려!

 

마침 점심 때가 되어서 전등사 동문 바로 밑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 들고 가세요. 산채비빔밥, 많이 드릴게요." 를 외치며 호객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마주 본 순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어 산채비빔밥을 주문했다. 많이 준다더니 각종 나물은 딱 한 젓가락만큼만 담겨져 나왔다. 비빔밥은 나물에 치여 비빌 수 없어야 제 맛이 나는데 이건 비비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8,000원짜리지만 실제는 3,0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면 입소문이라도 내주련만 이런 글을 쓰면서도 씁쓰레한 뒷맛을 떨치지 못하겠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 순진한 얼굴을 주인아주머니가 감지했는지 아주머니가 한마디 던진다.

 

"뒤통수가 굉장히 예쁘셔요. 주위에서 뒤통수 예쁘다는 말 많이 들으시지요?"

 

웬 뒤통수? 하면서도 내 입에서는 의도치 않은 말이 새어나온다.

 

"네, 많이 들어요....안녕히 계세요."

 

많이 듣긴. 삼십여 년 전 미장원에서 딱 한 번 들었을 뿐인데....

 

 

 

"흠, 파마하지 않고 생머리로 견딜 수 있는 뒤통수를 가지고 있으니 예쁘긴 한 거지, 영감?"

 

어이없는지 남편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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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7-1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마님 웃픈이야기로 월요일 아침 조금 심난한 마음에 한번 웃습니다. 강화도 전등사는 저도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한 곳인데 그런 곳에서 마음 상하셨으니 에구ㅠ 퍼머 안 해도 예쁜 뒷통수 가지신 건 부럽구요ㅎㅎ

nama 2015-07-14 07:25   좋아요 0 | URL
부럽다니요. 뒤통수만 예쁜 슬픔을 아시는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