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에 한잠 자고 일어나 다 늦은 시간에 빨래 널고 있자니 딸아이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힘들어 죽겠다는 딸에게 다짜고짜 아버지휴대폰으로 보낸 사진을 내 메일로 보내라고 재촉한다. 이 시간에 자지 않고 딸아이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나도 참 고약한 엄마다. 간식이나 좀 준비해주지...내일 모레가 수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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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9-17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수능 날짜가 다가오는군요.
2G폰으로 찍은 사진 같지 않아요. 정말 멋진 색과 구도인걸요.

nama 2015-09-17 07:17   좋아요 0 | URL
역시 하루를 일찍 시작하시는군요. 음, 제가 설거지할 시간에 들어오셨군요.
그러게요. 수능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네요. 그나마 자식이 하나라서 참을 만하지만...우리나라가 저출산 국가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 건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공부로 학을떼게 하네요. 그전이나 지금이나.
 

어떤 한 아이를 재촉한다.

 "연체된 책 빨리 반납해."

"쟤도 연체됐어요.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아이들은 물귀신과 친구 사이인지라 꼭 핑계를 대기 마련이다.

 

어디 애들 뿐이랴. 위염이 잘 낫지 않아서 처방전을 새로 받아왔는데 이 새 처방전에는 신경안정제 계통의 약이 두 알이나 들어 있었다. 열흘치였지만 띄엄띄엄 복용하다보니 한 보름 째 먹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잠이 쏟아진다. 물론 수업 중에야 졸지 않지만 혼자 도서실에 앉아 있거나 밤 9시만 넘으면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숙면을 취했건만 새벽에 일어나도 몸이 개운치 않다. 잠시 약에 의존해서 난 대체 무엇을 잊으려고 했을까. 별 고민없이 살고 있을 뿐인데. 아니 고민을 마음에 담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데. 치열한 삶과는 거리도 멀고.

 

지난 주 금요일자 신문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읽고 있다. 퇴근 후 신문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지기 때문이다. 다 흘려보내도 이성복의 이 한구절은 남겨야겠다 싶어 옮긴다.

 

풀냄새라고 있지요? 풀을 베었을 때 나는 냄새. 사람들은 그것을 상쾌하고 신선하다고 여기지만, 실은 베인 풀이 옆의 풀에게 경고하는 게 풀냄새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옆의 풀이 도망칠 수 있겠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그럼에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문학이요, 시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시를 쓰는 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사앞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을 위해 스크럼을 짜는 게 아닐까 해요...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올인'하는 것.

 

에이, 나는 시도 안 쓰고, 잘 읽지도 않는데 머리는 텅 빈 채 몸은 시를 쓰고 있네.

 

 

 

17세 이후로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경안정제로 삶을 겨우 버티고 있는 언니가 자꾸 생각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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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요일임에도 학교에 나와 6시간 동안 시험 출제하고, 한 시간 걸어서 집에 가니, 갑자기 우울해졌다. 뭐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시험 출제 기간이 넉넉해서 천천히 해도 되지만 해야 할 일을 그냥 두고 못보는 성질이라서, 이 성질 때문에 아무래도 수명이 단축될 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 따서 홀짝거리며 며칠 전 동료에게서 얻은 인도영화를 틀었다.

 

 

인도 배우, 아미르 칸은 무조건 좋다. 이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본 건 <세 얼간이>, <지상의 별처럼>, 그리고 이 <PK >가 전부지만 오랫동안 진한 감동을 남긴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신들의 나라에서 감히 신을 건드린 영화다. 아, 이게 또 인도니까 가능한 영화이리라.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시크교...이 모두를 더한 바하이교까지. 내 개인적인 종교역정도 만만찮은데, 침례교, 여호와의 증인, 카톨릭, 불교 까지 종교라면 나도 빠지지 않을 이력을 갖고 있다.

 

각설하고,

 

pk로 나오는 아미르 칸의 대사가 인상적이어서 이 바쁜 아침에 몇 자 옮겨본다.

 

pk: 두 종류의 신이 있는 것 같다구요.

    당신들을 만드신 신과 당신들이 만든 신이요.

   난 당신들을 만드신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들이 만든 신은 감사를 드리면 좋아하지만 작은 일에도 사람들을 겁먹게 만드시죠.

   모두를 만드신 신을 믿으세요.

   당신들이 만든 가짜 신은 내쫓아버리시구요.

 

힌두사제: 젊은이, 우리는 우리 신을 보호하는 법을 안다네.

 

pk: 신을 보호한다구요? 당신들이?

    이 별은 아주 작아요.

    수백만 개의 훨씬 거대한 별들이 우주 가운데 존재한다구요.

    그런데 당신이 이 작은 별의, 작은 도시의, 작은 방에 앉아서, 신을 보호하겠다고 이야기 하는  건가요? 이 모든 생명을 만드신 분을?

   그 분은 우리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아요. 스스로가 잘 보호하실 수 있다구요.

   오늘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 신을 보호한다고 하는 바람에 내 친구가 죽었어요.

 

 

외계인의 시각으로 지구를 바라보면, 그래 월요일도 영원한 건 아니니까 즐겁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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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 시청 근처의 모백화점에서 18만 원인가 주고 구입한 타자기이다. 거의 백수 주제에 부모님께 돈을 타내서 당당하게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난다. 글을 써보겠다고 폼 잡던 나의 뻔뻔함이 창피할 따름이다. 3학년 학사 편입으로 문창과에도 들어갔겠다 뭔가 될 줄 알았겠지. 당시 문창과 분위기가 그랬다. 자취하는 친구들의 자취방은 벽 하나쯤은 온통 책으로 가득했고 학교 과제물이나 습작품은 보통 저런 타자기로 써냈다. 저 타자기를 열심히 두드렸더라면, 파지로 휴지통을 가득 채우고 또 채웠더라면.....타자기가 없어 글을 못 쓰나, 만년필이 없어 글을 못 쓰나, 컴퓨터가 없어 글을 못 쓰나. 손목터널증후군, 너가 고맙구나. 핑계거리로는 완벽하잖아.

 

문창과에 대해서 문단의 어른이란 분이 한마디 하신 모양이다. 나는 문창과를 딱 한 학기만 다니고 나왔다. 졸업장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고, 별로 새롭게 배울 것도 없었기 때문인데 이것 하나만은 배우고 나왔다. '글이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고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다.'라는 것이다. 어린이가 글을 깨치듯 스스로 글 쓰는 것을 깨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 한 문장을 얻기 위해 대학을 다시 들어갔던 셈인데, 지나고보니 그 시절이 참 행복했었다. 문창과에서는 글 쓰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잘 쓴 글과 못 쓴 글 등 여러 글을 읽고 분석은 하지만 그게 글 쓰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글을 몇 편 쓴다고 해서 어떤 정형화된 틀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고민하고 고민할 따름이다. 그리고 학교 수업은 그냥 수업일 뿐 수업을 통해서 뭘 배우는 것도 별로 없다. 스폰지처럼 그대로 빨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짜 수업은 학교가 아닌 주로 술집에서 이루어진다. 선후배와의 폭 넓은 인간적인 교류가 수업이고 어쩌면 그게 문창과의 존재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인생의 고뇌를 통해 글 쓰기를 늘 고민해보는 시기, 자유로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삶의 한 시기를 보낼 수 있는 시기, 기성의 가치에 도전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시기, 모색에 모색을 거듭해보는 시기를 보내는 게 문창과 시절이다. 인생에서 이렇게 헐거우면서도 꽉 찬 시기를 보낼 수 있는 건 아마 우리나라 대학에서 문창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싶다. 그런데 궁금하다. 지금도 그런 분위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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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탁기를 신세계백화점에서 구입했다. 13년 전 쯤이다. 남자점원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에서 살다 온 어떤 분이 17년 간 이 세탁기를 사용했는데 AS를 받으러 왔단다. 이유는 단 하나, 빙그르르 돌리게 되어 있는 손잡이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잔고장 없이 17년 간 사용했다는 말에 난,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전에 사용하던 세탁기는 10년은 커녕 구입 몇 년만에 거금 들여 모터를 갈고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서 결국 새 것을 사야해서 무조건 오래 견디는 세탁기라는 말에 앞뒤 따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국산이면 좋겠지만 외제면 어떠랴. 세탁기 고장 때문에 마음 상한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외제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거기다가 85만 원 하는 이것을 구입하면 5만 원짜리 상품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 5만 원의 상품권이 뭘 의미하는 지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헤헤 웃었다. 옆에 있던 남편과 함께. 인기 있는 상품이라면 상품권을 주면서까지 이 상품을 팔지는 않을 터, 창고 어느 구석에 있었거나 매장 한 구석을 차지한 채 팔려나가지 않았던 것을 눈 먼 고객에게 팔아볼 요량으로 미끼를 던진 셈인데, 평소 사은품에 약한 내가 넘어갔던 것이다.

 

이 세탁기는 존재감 하나는 끝내준다. 특히 탈수과정에 들어가면 비행기 이착륙 소리를 낸다. 비행기는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제일 위험해서 그 순간만 되면 숨을 죽이면서 나도 모르게 기도가  새어나오는 버릇이 있다. 비행기 사고로 공중에서 산화되는 죽음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느님 아직은 아니옵니다. 딸도 아직 대학에 못 들어갔고 어머니도 살아계시고, 제가 여행을 자주 나가지만 아직 아프리카도 아메리카 대륙도 남극과 북극도 못가봤는데요...하면서 마음 속으로 얼마나 벌벌 떠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세탁기가 꼭 그 이착륙 소리를 내는 거다. 물론 비행기를 탄 건 아니지만 순간 삶이 겸허해진다고나 할까. 빨래를 하면서 삶을 경건하게 만드는 이 물건 대단하지 않은가?

 

이 세탁기는 기다림의 미학...진부하지만 멋진 표현을 자랑하기도 한다. 탈수과정까지 모두 끝났다고해서 세탁기의 둥근 문을 열고 세탁물을 바로 꺼내서는 절대 안 된다. 세탁기가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인 2분을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 예외 없는 '절대'와 '반드시'를 지키지 않는 자, 이 세탁기를 부릴 수 없다. 결국은 사람인 내가 얘를 부리는 게 아니라 이 세탁기라는 기계가 인간인 나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10년 넘게 지극 정성으로 매번 2분간의 명상에 빠질 수 있었다. 세탁기의 존엄성을 기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이 녀석도 수명을 다해 한 10분 후면 어디론가 실려나가고 새 세탁기가 들어온다. 주문한 지 일 주일 만이다. 그간 손빨래하느라고 입던 옷 또 입고, 어떤 날은 딸아이 브래지어도 남편이 빨아주고 그랬는데...손목터널증후군만 아니었어도 한 두어 달 견뎌보는 건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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