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탁기를 신세계백화점에서 구입했다. 13년 전 쯤이다. 남자점원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에서 살다 온 어떤 분이 17년 간 이 세탁기를 사용했는데 AS를 받으러 왔단다. 이유는 단 하나, 빙그르르 돌리게 되어 있는 손잡이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잔고장 없이 17년 간 사용했다는 말에 난,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전에 사용하던 세탁기는 10년은 커녕 구입 몇 년만에 거금 들여 모터를 갈고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서 결국 새 것을 사야해서 무조건 오래 견디는 세탁기라는 말에 앞뒤 따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국산이면 좋겠지만 외제면 어떠랴. 세탁기 고장 때문에 마음 상한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외제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거기다가 85만 원 하는 이것을 구입하면 5만 원짜리 상품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 5만 원의 상품권이 뭘 의미하는 지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헤헤 웃었다. 옆에 있던 남편과 함께. 인기 있는 상품이라면 상품권을 주면서까지 이 상품을 팔지는 않을 터, 창고 어느 구석에 있었거나 매장 한 구석을 차지한 채 팔려나가지 않았던 것을 눈 먼 고객에게 팔아볼 요량으로 미끼를 던진 셈인데, 평소 사은품에 약한 내가 넘어갔던 것이다.

 

이 세탁기는 존재감 하나는 끝내준다. 특히 탈수과정에 들어가면 비행기 이착륙 소리를 낸다. 비행기는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제일 위험해서 그 순간만 되면 숨을 죽이면서 나도 모르게 기도가  새어나오는 버릇이 있다. 비행기 사고로 공중에서 산화되는 죽음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느님 아직은 아니옵니다. 딸도 아직 대학에 못 들어갔고 어머니도 살아계시고, 제가 여행을 자주 나가지만 아직 아프리카도 아메리카 대륙도 남극과 북극도 못가봤는데요...하면서 마음 속으로 얼마나 벌벌 떠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세탁기가 꼭 그 이착륙 소리를 내는 거다. 물론 비행기를 탄 건 아니지만 순간 삶이 겸허해진다고나 할까. 빨래를 하면서 삶을 경건하게 만드는 이 물건 대단하지 않은가?

 

이 세탁기는 기다림의 미학...진부하지만 멋진 표현을 자랑하기도 한다. 탈수과정까지 모두 끝났다고해서 세탁기의 둥근 문을 열고 세탁물을 바로 꺼내서는 절대 안 된다. 세탁기가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인 2분을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 예외 없는 '절대'와 '반드시'를 지키지 않는 자, 이 세탁기를 부릴 수 없다. 결국은 사람인 내가 얘를 부리는 게 아니라 이 세탁기라는 기계가 인간인 나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10년 넘게 지극 정성으로 매번 2분간의 명상에 빠질 수 있었다. 세탁기의 존엄성을 기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이 녀석도 수명을 다해 한 10분 후면 어디론가 실려나가고 새 세탁기가 들어온다. 주문한 지 일 주일 만이다. 그간 손빨래하느라고 입던 옷 또 입고, 어떤 날은 딸아이 브래지어도 남편이 빨아주고 그랬는데...손목터널증후군만 아니었어도 한 두어 달 견뎌보는 건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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