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 없는 여행 - 환타 전명윤 여행 에세이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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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겉만 훑는 여행을 해온지라 늘 궁금한 게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그중 몇 가지를 해소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1552)

 

2007년에 적었던 글을 소환해본다. 마카오 여행기의 일부이다.

 

https://blog.aladin.co.kr/nama/1113975

 

<<<풍경 셋-길을 찾는 사나이, 프란시스 자비에르
프란시스 자비에르. 16세기 초 스페인 태생의 Jesuit 파 수행자. 아시아 지역 포교활동을 위해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 10여 년 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1552년 중국의 Sancian에서 사망. 그의 유골이 고아로 옮겨질 것에 대비하여 살을 빨리 썩게 하기위해 석회를 4포대나 뿌렸는데도 살이 썩지 않았다는 것. 2개월 후에 말라카에서도 그대로였고 1554년 고아로 이전되기 위해 무덤에서 나왔을 때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것. 1614년 선교의 목적으로 오른팔을 잘라 일본과 로마로 분배되었고 1636년에는 내장의 기관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졌단다. 이런 연유로 생전 보다 생후에 더 주목 받게 된 자비에르. 지금은 유리관에 시신을 보관하여 고아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있다. 나는 바로 그 유리관에 안치된 시신을 보았었다. 2005년 1월이었다.
마카오의 남단에 있는 콜로안 섬의 콜로안 마을에서 한가로이 동네를 둘러보다 마주친 예쁜 예배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너무나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고 그곳을 벗어나기도 못내 아쉬웠다. 이 마을은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지만 정작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예쁜 성당이 그 드라마에 나온 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여행 3일째라 긴장이 풀렸던지 그동안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자료들을 호텔에 두고나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나오는 바람에 그 이름을 보고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성당이 바로 <프란시스 자비에르 예배당>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둔함이란. 처음엔 동명이인쯤으로 여겼다. 고아의 자비에르가 이곳에서도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한참 추리 끝에 파악하였다. 1928년에 자비에르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이 예배당은 특히 일본의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자비에르가 일본에 처음으로 카톨릭을 전파해서일까.
보물찾기 같았던 프란시스 자비에르. 400여 년 전 태어나서 새 길을 개척하고자했던 사나이. 썩지 않는 시체 덕에 지금도 기억되고 추앙 받고 있는 사나이.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와 세월을 함께 달린 자비에르는 지금도 길을 개척하고 있는지,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엽기적이기까지 한 일들에 열광적일까?>>>

 

2012년에 썼던 글도 불러본다. 말레이시아 여행기의 일부이다.

 

https://blog.aladin.co.kr/nama/5455153

 

<<<말라카의 유명한 유적지 중에 역시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이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이곳은 동방의 사도 자비에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1849년에 지은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이다.'라고. 경내에는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자비에르 동상이 서있고 그 옆에는 일본에서 그를 모셨던 일본 신부의 동상이 나란히 있었다. 마카오의 자비에르 성당에는 일본 순례자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곳도 아마 그럴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2005년 인도 고아에서 충격으로 다가왔던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시신 관람후, 마카오의 유적지를 거쳐 말라카의 유적지까지, 나는 뜻하지 않게 프란시스 자비에르 순례를 하게된 셈이다. 마카오기행문에서 '엽기적'이라고 썼던 표현을 수정해야겠다. 나의 순례행위를 엽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정리하면, 나와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인연(?)은 2005년 남인도 고아 → 2007년 마카오 → 2012년 말레이시아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 궁금했으나 더 이상 파고들지는 못했다. 그걸 몰라도 사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었으므로.

 

 

그런데 가이드북 저자인 전명윤의 이 책에서 드디어 사비에르를 만났다. 그 반가움이라니. 이 양반도 분명 가는 곳마다 사비에르를 만났을 테고 적잖이 탐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에르가 일본에서 포교를 시작했는데 왜 일본에서는 카톨릭이 영향력을 잃고 마카오나 말라카, 인도에서는 받아들여졌을까...하는 의문이 풀렸다. 아울러 사비에르 소속의 예수회가 중국 포교에도 나섰으나 일본에서처럼 경쟁 단체인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가 '중국에서도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제사를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으로 인정해주는 카톨릭을 개신교보다 훨씬 너그럽다고 여겼는데 여기에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 종교도 결국은 인간이 만든 것. 제사 허용 문제를 놓고 식구들끼리 골 깊은 갈등을 일으켰던 과거의 어느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 편의 코미디와 다름 없었다.

 

 

▶일본 음식은 왜 달까?

 

오키나와 사탕수수에서 뽑아낸 흑당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됐다. 조선 후기까지도 신하가 아프면 왕이 특별히 설탕을 하사했을 정도니 당시 설탕의 가격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오늘날 일본 요리는 짜고 단 게 특징인데, 오키나와에서 흑당을 대량 생산하기 전까지는 그저 짜기만 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수탈의 결과가 바로 단맛이고, 그로 인해 일본 요리도 달콤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탕수수의 대규모 재배가 물가능했다. 설탕의 가격도 훨씬 비쌌기에 한식은 20세기가 넘어서야 단맛을 내기 시작했다.   -268쪽

 

 

일본 음식의 단맛이 오키나와 수탈의 결과라니... 난 도대체 오키나와까지 가서 뭘 보고 온거야?

 

 

 

▶그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하라.

 

나는 한국에서는 꽤 까칠한 편이지만 여행을 할 때는 눈치껏 행동한다. 외국인 여행객은 낯선 여행지에서 자칫하면 사면초가 신세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행지의 주민에게 친근히 다가가는 일이 중요하다. 나는 가끔 외국 공항에서 북한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북한'이 아니라 '공화국'이라고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예상 밖의 호의를 돌려받기도 했다. 외국의 북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종업원이 쓱 하고 다가와 대동강 맥주 한 병을 주고 간 적도 있다.     -218

 

 

반공 → 승공 → 멸공으로 이어지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나로서는 순간 '그래도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부지불식간에 새마을 노래를 입 속으로 흥얼거리다가 마치 뭐라도 밟은 것처럼 깜짝 놀라곤 하는데, 한번 철저하게 세뇌당한 것은 몸 속 깊숙히 박히기 마련인지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공화국' 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으려면 나의 뇌가 얼마나 부드러워져야 할까?

 

 

여행 고수는 다르구나 싶다. 인도 관련 이야기는, 나도 내 딴에는 인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새롭고 흥미로웠다. 역시 인도는 스토리가 강해. 직접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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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이게 뭐라고 어느새 이것의 노예가 되었다.

 

 

 

책은? 물론 책도 매일 꾸준히 읽었는데, 뭐랄까.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처럼 이순신 독서라고나 할까. '내가 뭘 읽는지 알리지 말라.'는 내면의 소리에 따랐다. 내가 무얼 읽든, 혹은 남이 무얼 읽든 시시각각 알릴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다. 알라딘 서재에 올라온 서평이나 리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퇴직이후 이렇게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게 그저 행복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책 읽을래? 걸을래? 묻는다면 아직은 '걸을래'다.

 

 

 

 

 

M도서관 가는 길. 집에서 출발하여 도서관 일반자료실2 까지 걸어가면 딱 만 보가 나오는데 7천 보쯤 가면 나오는 굴다리이다. 약간 지저분하고 인적이 드물지만 이런 풍경에 빠져들 수 있어 좋다. 저 담쟁이의 생명력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오고 삶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그러던 것이....

 

 

 

 

누군가의 노력이 들어가긴 했는데, 저 생뚱한 노란 모과라니. 뭐 으스스한 뒷골목 분위기는 확실히 나아졌다. 어쨌거나 이 길은 나에게는 산티아고 길. 친구같은 길. 책을 만나러, 혹은 떠나보내는 길.

 

독보적. 10월을 보내며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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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a 2019-11-03 10:26   좋아요 0 | URL
싫으나 좋으나 스마트폰을 늘 들여다보는 행위는 노예와 다르지 않아요. <독보적>도 역시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서 책 한 권 더 보게 하고, 한 걸음 더 걷게 하지요. 읽건 걷건 그건 내 의지로 해야지요. 사람을 좀 더 의존적으로, 왜소하게 만드는 게 스마트폰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한번 사용하면 끊을 수도 없는 마약같은 것...
 

 

밀양에 갔다. 그곳은 밀양 송전탑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는 나 살기가 바빠서 마음 한 켠으로만 품고 있던 곳이고, 교단을 떠나 활동가로 활약하는 이계삼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그 전에 표충사와 얼음골이 볼 만하다하여 언젠가는 가보리라 마음 먹은 지 오래된 곳이기도 하다.

 

 

어느 한 구절 소홀히 할 수 없었던 이계삼의 책들. 내 안의 거품을 제거해준 고마운 책들이다.

 

 

 

 

 

 

 

 

 

 

 

 

 

 

 

 

 

 

서쪽 끝 인천에 사는지라 동쪽 끝 강름이 제일 멀겠거니 했는데 밀양은 동쪽 끝보다 더 멀었다. 마음 먹지 않으면 좀체로 가기 힘든 곳이다. 어디 밀양뿐이랴. 밀린 숙제마냥 시간 되는대로 한곳씩 답사하기로 했다. 썩 괜찮은 생각이지 싶다.

 

 

구도심에 있는 영남루를 둘러보고 가까이 있는 전통시장으로 갔다.

 

 

전국3대 전통시장이라는데 인적마저 드문 거리는 깨끗했다.

 

 

 

 

 

 

연이은 참기름집. 쇠락한 기운이 감돌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천 원짜리 보리밥. 산초가 들어간 겉절이가 특히 맛있었는데 주인 할머니가 그러신다. "서울 사람이나 충청도 사람은 산초 들어간 음식 못 먹어요." 헤헤. 나는 서울 사람도 충청도 사람도 아니라서 잘 먹는구나. 그런데 내 말투는 서울말이다. 맛깔스러운 경상도 사투리에 섞이니 듣기에도 말하기에도 아주 밋밋해져버린다. 내 말투가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초 같은 짜릿함을 섞어서 말할 수는 없을까.

 

 

 

승효상의 <묵상>에서 읽었던 명례성지로 향했다.

 

 

 

 

 

 

 

 

 

 

 

 

 

 

 

 

80년 된 옛 한옥 성당. 남녀의 영역을 가르는 기둥이 있는 작고 소박한 곳이다. 견진성사까지 받은 몸이지만 마음이 떠난 지 오래. 절에 가면 오체투지, 교회에 가면 아멘, 성당에선 성수 찍어 성호를 긋는다.

 

 

 

승효상이 설계한 순교자 기념 성당.

 

 

 

 

 

 

 

 

 

 

 

 

 

 

 

 

 

 

 

 

 

 

 

계단의 사각형 구조물을 통해 외부의 빛이 내부로 들어간다.

 

 

 

임옥상의 순교자 조상

 

 

뜻대로만 된다면, 이 명례성지는 우리가 지금 찾는 수도원 순례 여행지처럼 세계의 순례자들이 목적하며 찾는 리스트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좋은 장소가 되어, 결국 그들이 살면서 부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429쪽

 

 

 

 

 

다정한 모녀

 

 

다음 날. 이른 아침의 표충비각.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린다는데...관심이 없다. 表忠. . .  충의를 드러내기도 싫다.

 

 

 

 

 

 

경내에 있는 '밀양 무안리 향나무'. 약 300년 된 향나무. 이렇게 큰 향나무는 처음 본다.

 

 

 

 

둘러보면 예쁜 담장도 있다.

 

 

 

 

다음은 청도 운문사.

 

 

 

운문사는 승가대학이 있는 비구니절이다. 유홍준이 <산사순례>에서 이 절의 명물은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이라고 했는데 접할 기회는 없었다. 여기보다는 100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사리암이 더 인상적이었다.

 

 

사리암은 기도발이 좋은 곳이라고...  젖은 마음을 햇볕에 말리는 것 같은 정경.

 

 

 

밀양 시내의 모텔 얘기. 영남루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다보니 (그나마 좋아보이는) 낡은 모텔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담배냄새가 어찌나 심하던지 밤새 냄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토까지 날 정도였다. 험한 숙소에 익숙한 편인데 이 모텔만큼은 지금까지의 내 여행경력에 최악의 곳으로 남을 것 같다. 위정자들이여 이런 곳에서 하룻밤 묵어보시라. 민초들의 고단함이 말 그대로 폐부에 깊숙하게 박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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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갔다가 무심코 제목에 끌려 데리고 온 책이 있었다. 오영욱의 <중국인은 왜 시끄러운가>. 충칭, 청두, 베이징 등을 여행한 기행기인데 그중 관심이 있는 상하이 편을 먼저 읽었다.

 

 

 

 

 

 

 

 

 

 

 

 

 

 

 

 

 

길지 않은 내용 중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하고 친구들과 남편에게 퍼 날랐다. ‘저명한 학자였던 그가 가정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남긴 명언으로 100년 전에 확립했다고 한다. 여기서 는 후스(胡適 1891~1962).

 

 

후스의 34

 

부인이 외출할 때 꼭 모시고 다녀라.

부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라.

부인이 아무리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도 맹종해라.

 

부인이 화장할 때 불평하지 말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부인의 생일을 절대 까먹지 마라.

부인에게 야단맞을 때 쓸데없이 말대꾸하지 마라.

부인이 쓰는 돈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중 다른 건 몰라도 첫 번째와 일곱 번째를 어느 정도 실현하는 남자가 내 남편이지만 이 분 따라가려면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다.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진리의 말씀을 남긴 이 분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글의 원전을 급히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다. 30여 분을 단숨에 걸어가서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1>을 데리고 왔다. 다른 건 제쳐두고 후스가 실린 부분부터(부분만!) 읽었다.

 

 

 

 

 

 

 

 

 

 

 

 

 

 

 

 

 

 

후스는 국민당의 주구라며 손가락질을 당했지만 혁명가들처럼 불공대천의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언론의 자유와 민주헌정, 인권의 보장을 죽는 날까지 장제스에게 요구했다. 투기성이 다분한 지식인들처럼 곡학아세로 관직을 탐하지도 않았다. 장제스가 수많은 자리를 제의했지만 베이징대학 교장과 중앙연구원 원장 등 교육과 관련된 것 외에는 거절하며 최고 권력자의 쟁우를 견지했다. 관직은 중·일전쟁 기간 주미대사로 봉직한 것이 유일했다. 장세스도 오만상을 찌푸릴 때가 많았지만 쟁우의 신랄한 비판을 견디며 평생관계를 유지했다.  -167

 

  

후스의 부인 장둥슈는 전족에 문맹이었지만 집안은 장제스나 쑹메이링과는 비교도 안 되게 번듯했다고 한다. 이들의 결혼은 미소년의 후스를 본 장둥슈의 어머니의 성화와 추진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사주보는 사람들을 전부 매수한 뒤 제발 부탁이니 사주팔자라도 한번 맞춰보자며 후씨 집안사람들을 2년간 설득했다나.

 

전족에 문맹의 장둥슈였지만 기질은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던가 보다. 민국 4대 미남의 한 사람을 남편으로 두었고, 조강지처를 버리고 신여성과 결혼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시절에 끝까지 결혼을 유지했으니 말이다. 후스가 단 한 번 이혼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좋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며 주방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와서는 아이들도 죽여버려야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다며 두 아들이 자는 방을 향했다고 한다. 기겁을 한 후스가 그만 기겁을 하고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나.

 

후스가 주미대사로 나갈 때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렇게 쑤군댔다고 한다.

장둥슈가 대사부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 의전은커녕 영어와 중국어도 구분 못한다. 미국 상류사회 사람들 앞에서 중국 망신 톡톡히 시킬 테니 두고 봐라.”

평소 후스의 월급봉투를 거의 음식에 쏟아부었던 장동슈는 주방에 있는 날이 밖에 있는 날보다 많았다고 하는데 덕분에 미 국무부의 고급관원과 각국 대사들의 입맛을 휘어잡았단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입맛을 다시며 속으로 후스를 부러워했다나.

 

정사正史 보다 야사野史가 재밌는 법. 후스라는 사람, 파고들수록 흥미가 당겼다. 이번엔 걸어서 1시간 30분 걸리는 또 다른 도서관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그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궁금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책이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사상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맛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목소리를 내던 시절을 감안해야 하니 계몽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말씀이 대부분이어서 크게 감흥은 없지만 그의 근본 기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다.

 

후실로 들어간 후스의 어머니는 정실의 두 며느리보다 나이가 어렸는데 이 며느리들이 늘 의견이 달라 다투었다고 한다. 화를 내는 일도 많았는데 이를 통해서 후스는 어떤 통찰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그걸 잘 몰랐지만, 나중에는 나도 점점 남의 안색을 살필 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사람의 화난 얼굴이며, 세상에서 제일 수준 낮은 일은 옆 사람을 향해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임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것은 대놓고 욕하는 것보다 더 참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51~52쪽  

 

 

어떤 고상한 이론이나 사상보다 실천하기 힘든 게 이런 게 아닐까싶다. 아마도 후스는 평생 이 깨달음을 놓치지 않고 살았을 성싶다. 기질이 강한 부인과 끝까지 해로했으니 말이다.

 

 

 나는 네가 당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나의 효자가 될 필요는 없다.“

 

  

 

내 부모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분명 앞서갔다는 얘기다. 이분이 아직 살아계신다면 지금은 어떤 말씀을 하실까? 이 생각을 뛰어넘는 생각엔 어떤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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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책과 길의 공통점. 지난번 강화도 전등사에 갔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유리에 붙어있는 강화도 지도를 보게 되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또 하나의 섬, 교동도.

익히 들어본 지명이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가봐야지.

 

 

 

교동도에 들어가려면 교동도 방향 초소에서 간단한 신고를 하고 출입증을 받는다.

 

 

 

 

교동도 선착장. 멀리 강화도와 연결된 다리가 보인다.

 

 

 

 

이른 시간인데도 할머니 한 분이 고구마, 호박 등을 노상에서 팔고 계시기에 '속노랑 고구마' 한 상자를 구입, 오늘 개시했다고 흐뭇해하신다. 그런데 저건 뭐꼬? 분명 판매용인데. 불쏘시개? (정답은 이 페이퍼 끝에. ㅎ)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대룡시장.

 

 

 

골목 풍경

 

 

 

 

 

 

 

 

 

 

 

 

 

 

 

커피도 한 잔. 초입에서 먹은 찹쌀 꽈배기에 놀랐는데 이 카페에서 마신 커피에는 더 진하게 놀란다. 뜨내기 맛이 아니었다. 사장님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맛이다.

 

 

 

 

이곳의 콘셉, 제비.

 

 

 

 

 

 

 

한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는 호떡, 가히 명물이라 할 만하다. 주인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망향대와 연산군 유배지를 찾아간다.

 

 

 

 

저분들 모습이 내 모습. 북한이 바로 코앞에 있다.

 

 

 

 

연산군 유배지.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싼 작디작은 오두막. 유배문화관에 전시된 설명에 의하면,

 

 

유배 가운데 가장 가혹한 것은 배가 아니면 육지와의 연결이 차단되는 절도 絶島 안치이며, 집 주위를  둘러싸고 담장을 설치하여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위리안치圍籬安置이다.

 

유배지역은 함경도, 평안도와 같은 국경지역과 제주도, 남해도, 진도, 거제도, 흑산도와 같은 섬으로 배정되었다. 그 중 '강화'는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저 오두막 유배는 절도 안치이자 위리안치로 가장 가혹한 형벌인데, 글쎄 오래 살려두기라도 하면 다행이었을 거다.

 

흑산도-최익현, 정약전

강진-정약용

나주-정도전

화순-조광조

      .

      .

      .

 

추자도 - 윤선도

함경도 - 윤선도

 

윤선도는 무슨 미운 털이 박혀서 여러 번이나 유배를 갔는지 급궁금해졌다.

 

 

 

 

 

 

 

 

 

 

 

 

 

 

 

 

 

윤선도는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고 가정 생활이 볼 만한 것이 없었으며, 부귀와 사치가 도를 넘고 행실이 방종하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젊어서 청요직을 역임한 뒤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해 해남에 물러가 살았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에 끝내 어려움을 같이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았으므로 난이 끝난 뒤 대간으로부터 무거운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인조가 승하하셨을 때 시골로 물러나 어렵게 지내던 사대부들이 모두들 달려와 곡을 했으나 윤선도만은 시골집에 버젓이 누워 분곡하지 않아 대신이 붙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었다.

- 《효종실록》                                   - 218쪽

 

 

 

30대 초반에 시작된 그의 정치 역정은 이렇듯 유배로 시작하여 유배로 마감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공교롭게도 초년에 <병진소>로 인해 귀양을 갔을 때도 약 7년이었고, 말년에 예송논쟁으로 귀양 갔을 때도 7년여의 시간이었다. 마치 수미쌍관법을 취하듯 앞뒤가 맞물려 있다.   -256

 

 

 

언제나 그러하듯이 정치적 검열은 사실 한 걸음만 벗어나서 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억압하는 무서운 힘으로 작용한다.   - 55

 

 

 

그의 <오우가>, <어부사시사> 는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교동도로 바람 쐬러 갔다가 윤선도 평전까지 손에 잡아봤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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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효자손( 저 옥수수 알갱이는 입으로 먹었을까, 손으로 떼어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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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9-25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도 못한 정답이네요.
교동. 예전에 교동마님이라는 연속극이 있었던 기억이 나요.

nama 2019-09-25 19:18   좋아요 0 | URL
강를 교동짬뽕도 있지요.^^

나와같다면 2019-09-25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멈춘 공간 같아요

nama 2019-09-26 10:21   좋아요 0 | URL
교동도라는 섬에 어울리는 공간을 살린 셈이지요. 그곳 역시 삶의 현장이라서 먹고 사는 고민은 오히려 도시보다 더한 것 같아요.

sabina 2019-09-2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 모습을 이정도로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있는게 놀랍네요.
그 효자손, 엄청 시원할 것 같아요.ㅎㅎ

nama 2019-09-30 09:23   좋아요 0 | URL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오늘도 누군가는 그것을 지켜내려고 애쓰고 있지요.
저 효자손을 과연 사는 사람이 있을까, 가 몹시 궁금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