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화면에 '북스토어' 글자가 자꾸 눈에 거슬린다. store...store.... 알라딘 책 판매에 일조를 하라는 눈짓으로 읽혀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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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을 1993년에 읽었다. 나는 아직도 저 수많은 인도여행기의 고전의 반열에 주저없이 이 책을 올려놓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기억나는 구절은 없지만, 그 누구에게도 빌려주고 싶지 않은 책이기에 늘 옆에 두고 있는 책이지만, 다시 읽지는 않았다. 그저 아련한 향수 같은 여운이 남아있을 뿐, 그런대도 이 책은 여전히 내게는 고전중의 고전이다.

 

그후 후지와라 신야라는 이름을 기억 속에 되뇌이고 되뇌이고는 했다. 그만큼 <인도방랑>의 영향력이 컸다. 근래에 들어 그의 책들이 여러 권 번역되어 읽어보기는 했지만, 글쎄 애정이 식어서 그런지, 워낙 여행기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지난 여름에는 그의 <아메리카기행>을 도서관에서 읽다가 다른 책에 밀려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그러다 이 책 <황천의 개>를 읽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도서신청을 받는다기에 그동안 눈으로 점찍어두었던 70여 권의 책을 신청했는데 그중에 이 책이 들어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0년대에 떠났던 그의 인도여행은 한세대를 대표하는 여행이면서 진짜 여행다운 여행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세대의 인도여행은 그저 아류에 불과한 여행이라는 쓸쓸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삶 자체가 여행이었던 그에 비하면 나 같은 부류의 여행은 그저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확인사살하는 셈이었다.

 

이 책의 내용을 말하기에는 내 눈과 머리가 벅차다. 내가 좀 더 친절한 성격이라면 좀 더 수다스러운 성격이라면 좋으련만...나의 한계다.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을 그저 옮길 따름이다.

 

p96...이 부유 감각은 현실의 무게에서 해방된 것 같은 감각이다. 디즈니랜드를 궁극형으로 삼고 있는 가상현실 공간에의 지향성이 미국 문화의 가자아 큰 특색인데,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저 근세 유렵의 인습으로 가득한 무거운 현실의 탈출구로 만들어진 가상 국가이기 때문이다. 건국 역사가 200여년에 불과한 미국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에서의 이탈이라는 역사적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지상에서는 디즈니랜드와 같은 풍요로운 낙원을 구축하고, 공중에서는 우주 공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미국에서 발생한 가상현실 공간이 20세기 문화의 주체로 자부하며 일본에 침투했다. 그 공간을 향수하는 어린이들의 정신과 신체가 미국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새롭게 등장한 환경이나 미디어의 소통 방식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무의식적으로 지향해온 가상화가 깔려 있다...나는 이렇게 등장한 환경이나 미디어와 접촉할 때마다 새로운 종교에 접근하는 것 같은 경계심이 작용하곤 하는데, 눈앞의 복합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p127...오늘날의 미국 영화들은 대체로 파괴를 주제로 삼고 있다. 미국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동차, 혹은 빌딩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조형물이 무너지는 장면과 조우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1970년대 말부터 현저해졌고, 1980년대에는 그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미국 영화를 관통하는 이 같은 파괴적인 잠재의식이야말로 미국 영화가 20세기 말의 젊은 층을 열광시키는 가장 큰 요소라고 할 것이다. 그 같은 파괴적 잠재의식의 확대는 폐색으로 일관하는 현실과 점차 심화되는 관리 시스템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일종의 카타스트로프 같은 소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구축과 파괴를 경쟁적으로 되풀이하는 미국 영화의 구도는 생산과 소비를 경쟁적으로 되풀이하는 미국형 자본주의를 닮았다. 그리고 이 끝없는 순환은 무간지옥을 연상시킨다. 현대인의 의식은 구축과 탕진의 무간지옥을 순례하도록 철저하게 개조되었다.

 

인용이 너무 길어져서 더는 못쓰지만, 이 책은 한때 일본을 경악하게 했던 옴진리교 교주에 대한 얘기가 길게 나와있다. 읽다보면 옴진리교 문제가 일본만의 문제로 그칠 것이 아니며, 앞으로 사회가 발전할수록 더욱 더 진화(혹은 퇴화)된 여러가지 해결 불능의 상활이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인도방랑>에서는 미처 언급되지 않았던 인도여행의 진수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흥미진진하지만 약간은 괴기한.

 

오늘, 몇시간 전 영화관에서 동료들과 함께 보았던 <미션 임파서블>의 잔영이 남아있는 지금, 다시 윗부분에 인용한 미국 영화 얘기를 고개를 끄덕이며 되새김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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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황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성석제의 이전 산문집도 여럿 읽었는데, 확실히 이 책은 더 재밌다. 잡다한 지식으로 잘 버무려진 왕수다 같은 느낌에 연륜이 더해졌다고나 할까.

 

칼과 황홀. 칼은 음식을 조리하는 도구일테고 황홀은 '매일 먹고 힘을 얻으며, 마셔서 기갈을 풀고 도취경'에 드는 황홀을 말함이다. 지은이 말마따나 '나라는 인간이 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어지간히 황홀하게 돌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국내는 물론 해외도 열심히 드나들며 많은 이야깃거리를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밑에 깔린 기본 토대는 단연 음식이었다. 읽다보면 참 어지간히 돌아다니고 어지간히 먹는 걸 즐기고 있다.

 

아니다. 그게 작가라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들의 '작가수첩'같은 글들을 읽다보면 그들의 머릿속에는 늘 글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어서 순간 순간의 아이디어나 경험들을 흘러가는대로 그냥 두는 법이 없어보인다. 개그맨 김병만의 온갖 아이디어나 광고 천재 이제석의 천재적이고 기발한 착상들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또한 세상을 읽어내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글로써, 개그맨은 개그 프로그램으로써, 광고쟁이는 광고로써 세상을 읽고 세상을 해석한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번 킥키거리며 유쾌하게 읽었다. 혼자 알고 있기가 아까워 남편과 딸아이에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마 옆에 중학교 동창들이라도 있었으면 더 크게 더 유쾌하게 떠들어댔을 게다. 왜냐면 나도 이 책의 저자와 동년배로서 같은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의 해박하고 잡다한 지식에 저자의 능청맞은 필력이 더해져 어느 때는 빌 브라이슨의 글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몇 문장을 보라.

 

p269... 술꾼은 다음 날 아침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전날의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런저런 걸 묻지 않는다. 그게 예의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왔다면? "나도 기억이 하나도 없어.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말하는 게 예의다. 그러나저러나 술값은 누가 냈는지, 비싼 것 같던데...

 

p342...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쇼핑몰에서)너는 네가 소비하는 것의 총화이다...(화장품 가게에서)나는 내가 바르고 뿌려대는 것의 결과물이다...(보석가게 앞에서)당신은 당신이 갖기를 바라는 것의 집합체이다...네가 욕망하는 것이 너를 만든다...네가 생각하면 그 생각이 네 운명을 바꿀 것이다...네가 지금처럼 말장난으로 헛되이 시간을 보낸다면 네 인생은 바로 그 헛된 시간의 말장난이 될 것이다...

 

넉살좋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어떻게 음식이라는 주제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조금씩 풀린다.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황홀하게 취해있으니 어찌 배가 고프지 않을까. 그렇게 세상을 맛있게 먹고 있으니 글이 어찌 나오지 않을까.

 

성석제의 왕수다가 금방 그리워질 것 같다.

 

하나 빼먹을 뻔했다. 이 책에는 김 먹는 방법에 대한 얘기도 있어서 마침 냉장고에서 썩기 직전인 일 년이 다되어가는 김을 드디어 해치웠다. 이름하여 김조림. 김을 이렇게도 먹을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일었다. 친구들과의 왕수다에서도 뭔가 얻어 들을 게 있듯 이 책도 곳곳에 '생활의 지혜'가 숨어있어서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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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얼마나 기다리던 2011년의 마지막 달인가.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좋고 까짓 흰머리 나부껴도 괜찮다. 세월아 어서 가거라. 마지막 달을 밀쳐내는 간절한 심정이었지만 신간 에세이 분야를 훑어보는 눈길은 "오늘도 무사히"를 외치며 하루를 고단하게 보낸 자의 텅 빈 눈동자였음을 고백하며...   

 

유니언 신학대 현경교수의 이슬람 17개국 순례기이다.(사실 나는 유니언 신학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궁금하지도 않다.) 몇년 전 한겨레 신문에 실렸던 이 순례기를 의미심장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종교의 편식현상이 극도로 심한 우리나라에서 이런 작업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어느 시립도서관에서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전시회를 본 적이 있다. 유쾌했다. 아마도 이 책에는 그 전시회에 나왔던 그림들이 많이 실려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더 보고 싶다. 그림은 쉬워야 한다, 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이 분야에 넣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냥 읽어보고 싶다. 읽어야 될 것 같은 책이다. 

 

 

 

 

한대수. 잘 모른다. 노래는 몇 곡 들어보았다. "한 끼"하는 인물로 알고있다. 역시 이 책도 읽어야 될 것 같은 책이다.

 

 

 

숙제로 하는 책읽기라면 매우 독하거나 매우 자극적이거나 매우 통렬한 아픔을 주는 책이라면 더 좋겠다. 아무래도 올해의 악동같은 아이들이 내게 독기를 품게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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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이런 책은 질색이다. 음식에 관한 책이라는 것, 여러 사람이 한 꼭지씩 썼다는 것,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라는 것이 그 이유일 터.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 또한 내 영혼을 위로해주는 음식 한 가지 쯤은 있다는 것, 여러 사람이 썼지만 그 꼭지마다 글쓴이의 인생이 녹아있다는 것, TV 프로그램 중에 요리 관련 프로그램을 병적으로 싫어하지만 그래도 책으로 읽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책을 즐겁게 그리고 부담없이 읽었다. 

읽으면서, 나도 나만의 소울푸드를 떠올리면서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음 글을 만났다. 박찬일씨의 글이다. 

p142. 한때 이탈리아 중부지역에서 동숙하던 칼라브리아(이탈리아 남부 지방으로 매우 가난한 지역이다) 출신의 친구가 먹던 요리가 생각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고향 칼라브리아에서 노모를 비롯한 온 가족이 올라왔다. 나는 그들의 점심식사 자리에 우연히 끼게 되었는데, 정말 그 메뉴는 오래도록 내 뇌리에 남아버렸다. 변변한 농사나 목축이 잘 되지 않는 칼라브리아 지방 사람들은 정식 식사나 간식으로 오직 마른 빵 한 조각을 먹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 음식이 막 우리가 살던 집의 식탁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오직 마른 빵과 오레가노 가루만 놓여 있었다. 이탈리아에선 너무도 흔해 허브 대접도 못 받는 오레가노. 맵고 떫은 맛의 그 가루를 빵 위에 술술 뿌리고, 싱크대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수돗물을 틀어 빵을 적셨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 전부 맞다. 2000년대의 이탈리아에서도 누군가는 이런 악식을 먹고 있었던 거다. 마른 빵을 부드럽게 먹기 위해 물에 적셨고, 밋밋한 맛에 포인트를 주는 건 오직 약간의 오레가노 가루일 뿐이었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잠시 가슴이 울컥했다. 예전에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엄마가 끓여주시던 '두부새우젓국찌개'가 생각나서였다. 라면 1.5인분에 해당하는 물을 넣은 냄비에 두부 한 모를 썰어넣고, 매운 고추 두어 개를 잘게 썰어 넣은 다음에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어 끓이면 되는 아주 간단한 끼개였다. 이북을 고향으로 둔 아버지는 그 찌개가 고향 음식이라며 아주 좋아하셨는데 나는 그저 매콤한 고추를 씹는 맛에 그 찌개를 먹곤 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썰지않은 두부를 통놈으로 접시에 담아 간장이나 볶은 김치와 함께 먹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 두부 한 모 마저도 여러 식구가 함께 먹어야했던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었다. 언젠가 그 찌게가 그리워 한 번 만들어보았지만 옛날의 그 맛은 도저히 되살아나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이런 음식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가족이 떠오르고 가족이 떠오르면 편치않은 가족사에 목이 메이기 때문이다. 우울해진다. 그래서인지  

p.166. ...대부분은 농민들의 거친 손만 눈에 가득 담고 돌아온다. 그들에게 소울푸드를 물으면 웃으며 되물을 것이다. '소가 울면 주는 푸드인가요?' 의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꼭지의 글은 또 이렇게 끝난다. p.168 ..경의선 객차에서 바닷내가 나는 밤이면, 기차가 수십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할 때의 그 고요를 담고 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환상을 만든다. 거기 가서, 굶주림의 동포들에게 소울푸드를 묻는 만행은 하지 못할 것이다, 차마. 

위에서 '나 또한 내 영혼을 위로해주는 음식 한 가지 쯤은 있다는 것' 을 말했다. 있긴 있다. 들어는 보셨을라나. 이름하여 '꿀꿀이죽'. 미군부대를 배경(?)으로 한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던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 희한한 음식이 내 영혼에는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미군들이 먹고 난 온갖 음식을 마치 돼지죽처럼 끓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그만 손수레에 실린 꿀꿀이죽을 파는 장사치가 동네에 나타나면 그날은 별식을 먹는 행복한 날이었다. 온갖 음식을 잡탕으로 끓인 음식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러가지 야채와 큼직큼직한 고깃덩어리가 듬뿍 담겨있어서 골라먹는 재미도 한 몫 했다. 물론 재수가 없으면 담배꽁초도 나왔지만. 

이런 눈물겹고 보잘것 없는 음식이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 음식이 그리워진다. 부모님과 4남매가 온전히 함께 보냈던 '행복한 유년시절'이었던 것이다, 내게는.   

음식 얘기는 그만. 배 고픈 사람들, 아픈 사람들이 자꾸 생각나서다. 그리고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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