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으련만 기억이 없다. 그러나 싫고 좋고를 떠나서 공부는 해야 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그래서였나. 중고로 나왔던 이 책을 덥석 구입하긴 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에서 한참 머물다가 감정상 폐기처분에 가까운 서재 구석 책장으로 옮겨갔는데 어제 불현듯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무릇 예술이라는 게 심심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제 내 독서도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나?
처음에는 풋내가 나는 듯 싶었지만 읽다보면 뉴욕의 예술가 집단에 대해서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게 되고 뉴욕의 예술적인 분위기에 푹 젖어들기도 한다. 예술가인 지은이의 싱그러운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책을 읽기 전의 선입견이나 지레짐작들이 하나 둘씩 꼬리를 감추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 이런 예술가들이 있구나, 하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사랑스럽다.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비록 그 특정한 장소가 내가 선호하는 곳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들에게서 어떤 열정과 깊은 사랑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것을 감지한다. 그들이 기꺼이 보여주려는 것은 결국 그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어떤 장소에 대한, 그 장소에 배어있는 냄새,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 사랑으로 세상은 , 내가 가 보지 못한 세상은 한결 가깝고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지구라는 곳에 발붙어 있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뉴욕. 다소 개인적이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지은이의 소소한 뉴욕이야기가 그래도 읽을 만한 것은, 지은이의 뉴욕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 깊다면 깊은 열정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중 쌍둥이 빌딩을 건넌 필립 프티 이야기는, 언젠가 접한 이야기인데도 새삼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110쪽...어찌됐거나 필립 프티가 줄 위에서 걷는 것 자체만을, 그것도 아름답게 걷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때 내 머리는 잠시 띵해질 정도였다. 공중에 줄을 놓고 걸을 때만큼 걸음에 집중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한 발자국에 생사가 달려 있는 걸음걸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베르메르의 그림들. 이 부분은 직접 읽어보아야 맛을 아는데...
![](http://i2.search.daumcdn.net/image03.search/02/6.32.92.BL_tkcks_19_6.jpg)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얘기.
178쪽...호퍼의 그림은 호퍼 자신의 세상을 닮아 있다. 그의 그림은 주로 미국인, 또는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에 관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나에게 그의 그림은 고독이라기보다 고독이라 묘사되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것처럼 보인다....호퍼가 가진 역설에 의거해서 스트랜드가 이 책을 써나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퍼의 그림에서 역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트랜드의 책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는 호퍼의 역설은 떠남과 머무름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을 보관함에 담는다.
이 책을 읽으며 뉴욕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의 아들 녀석이 내내 떠올랐다. 생의 한 시절을 예술적인 분위기에 푹 젖어서 살아보는 것, 참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