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ooni > 천개하고도 하룻밤
아라비안 나이트 1 범우 세계 문예 신서 14
리처드 F.버턴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2년 12월
평점 :
품절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은 것은 고 3 가을이었다. 친구에게서 빌려 본, 조잡한 번역본이었지만 거의 완역본이기도 했다. (나중에 새로 나온 아라비안 나이트 완역을 보니 내가 예전에 본 그 책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정확하게 권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빌려준 친구네 집에 왜 그런 책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애가 자기네 식구들은 누구도 그 책을 단 한 장도 읽지 않았다고 했던 것만은 생각난다. 그런데도 그애는 내게 책을 돌려받는 것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그래서 천일야화가 내게 가장 강하게 남긴 것은 그 책을 실제로―종이책을 손닿는 서가에 꽂아두고 가끔 열어볼 권리를 갖는 상태―소유하고 싶다는 물리적인 아쉬움이었다. 그것은 좀 이상한 느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천일야화가 전혀 재미없었던 것이다.

갇힌 공주. 아름다운 왕자. 사랑과 음모. 추한 노파. 수간을 하는 마신들, 정령이 깃든 사물, 왕과 부자. 사막과 섬의 숨겨진 보물. 괴이한 생물들과 마법, 저주. 기괴한 우연과 멋진 행운. 그리고 당연한 듯한 축복과 권선징악의 해피앤딩

그 모든게 지루했다. 괴로울 정도로 지겨웠다. 첫장부터 끝장까지 다. 그런데도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갖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그것도 첫권의 첫페이지를 읽으면서부터 그랬다. 갖고 싶었지만 평생을 벌어도 천하루나 되는 아라비아의 밤들을 살만한 돈을 벌 수 없을 것같았다. 혹은 천하루나 되는 밤을 아라비아에서 보낼 여가를 마련할 수 없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읽어두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석과 맨투맨영문법 밑에다 천일야화를 깔아두고 맹렬하게 읽어댔었다.

그것은 진정한 <결여>의 느낌이었다. 부재했던 것은 종이로서의 책이 아니라, 그 내용으로서의 천 하룻밤을 채워줄 이야기, 그것이었지만.

원래 욕구란 건, 결여이다. 없으니까 구하는 것이고, 있는 것은 욕망되지 않는다. 그래서 있는 것, 진실, 사실로서의 실체가 모자람과 결핍, 욕망의 형태를 결정짓는다. <그것이 아닌> 이라는 의미로. 욕망은 영원한 불만족이며, 끝없는 현실부정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욕망이야말로 훌륭한, 아름다운, 살아있는, 지옥이다. 현실이 있는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이 없다는, 일체의 무상을 깨닫게 되면, 욕망이 사라지므로 지옥에서도 벗어난다는 득도의 이야기에 나는 이제 감명받지 않기로 했다.) 

현실. 말하자면 천일야화에서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를 뺀 천하고도 하루의 밤. 그것 말이다. 새까만 사막. 그 끔찍한 평면성. 어둠과 모래만이 끝없이 반복되는 세계. 거기엔 잔혹한 왕이 산다. 배신당해 사랑을 잃고, 세계에 대한 모든 믿음을 상실해 사막처럼 지루해진 왕은, 그런데 슬프게도 발기해 있다. 그는 매일매일 정말 너무나도 확실하게 발기한다. 넌더리가 난다고 하면서도 그는 매일 여자를 원한다. 그야 당연하다. 발기는 신체현상이므로 마음이나, 이성,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정욕엔 아무런 드라마도 없다. 모래와 바람처럼 그것은 자연이다. 냉혹하고 무덤덤하고, 단순하게 지겹다. 섹스를 하는데 애무도 필요없고, 선물도, 사랑의 시도, 대화도 구애도 약혼과 결혼의 의식도 필요 없다. 왕은 길고도 지루한 밤에 찰나의 오르가즘을 지나쳐 아침이 되면 같이 잔 여자의 더는 필요 없어진 목을 벤다. 목이 베어지는 순간이 지나면 그리고 밤처럼 무료하고 권태로운 낮이 이어진다. 왕의 하루는 밤에는 정액냄새로, 아침의 피비린내로 채워진다. 고독한 왕의 현실이란 더럽고, 추악하고, 무의미한, 권태의 지옥이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속셈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녀는 천날 하고도 하룻밤 동안 세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왕의 추악하게 실재하는 지옥을 자신의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지옥으로 포장했다. 그녀는 왕의 사막에 보물과 오아시스, 아름다운 처녀와 용감한 청년들을 채워 넣었다. 모래 알갱이에 신의 섭리가, 사막의 밤 저편에 천국의 영광이 있다고 왕을 꼬드겨, 그의 칼을 빼앗았다. 천하고도 하룻밤이 지나서 이야기가 다한 뒤에 그녀는 왕 앞에 아이들을 내놓는다. 이야기가 아이들을 태어날 수 있게 했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그녀의 현실은 이러하다. 남편인 왕은 더할나위없이 교양이 없고―그에겐 그녀에게 들려줄 이야기거리가 없다―, 잔악한 성미에 그녀를 향한 사랑조차 없다. (실제로 왕은 세헤라자드에게는 관심이 없다. 왕이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나 목소리, 그녀의 질이나 자궁, 출산의 가능성, 그녀의 인격이나 성격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자신이 구체화시키지 못한 욕망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서였다. 결국 왕은 자신의 욕망만을 욕망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매일 그런 남자와 잔다. 그런 남자의 아이를 낳으면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왕이 죽이려고 들면 아무도 그녀를 구해주지 못한다. 그게 세헤라자드의 현실이다. 왕의 섹스와 살인처럼, 그녀의 섹스와 결혼, 임신, 출산에도 아무런 드라마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왕이 그러하듯이 그녀도 지루하게 고독하니까.

이건 마치 DNA의 이중나선 구조같다. 현실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현실을 지탱한다. 비비꼬인 두 개의 서로 다른 지옥이 스스로를 복제한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현실과 욕망이 뒤섞인 복잡한 지옥이다.

(그런데 도대체 천국은 어디에?)

 

매일매일 밤이 온다. 매일매일 아침이 된다. 어제의 오늘은 내일의 오늘로 이어진다.

천일야화를 읽고 싶진 않은데 달리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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