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 단편
이지환 지음 / 청어람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흔하디 흔한 설정이다. 대기업 후계자인 남주와 뼈가 시리도록 가난한 여주의 이야기. 이 둘의 사랑을 극도로 방해하는 남주의 가족들과 여주를 멸시하는 주위의 시선들, 오갈데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하는 여주, 그런 여주를 끝까지 쫓아가 찾아내는 남주. 수많은 오해와 엇갈림 속에서 드디어 사랑을 일궈내는 두 사람을 그린 소설.

한성무는 어릴 때 비행기 사고로 부모님과 동생을 잃었다. 그에게 남은 혈육은 오직 할아버지 뿐. 대기업 회장인 할아버지는 그런 성무가 안타깝고 애달프기만 하다. 게다가 남은 피붙이가 손자인 성무 뿐이니 집착이 도를 넘어설 지경으로 성무를 아끼고 또 아꼈다. 가족을 잃은 성무는 그저 시체마냥 하루 하루 살아가다 요양차 온 시골에서 해인을 만난다. 왠지 눈이 가던 소녀. 딱 보기에도 촌티가 줄줄 흐르지만 해맑은 웃음만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학교에서 혹은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던 횟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늘 보이는 근사한 별장. 그곳에서 수려한 용모의 소년이 늘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해인은 그런 그가 못견디게 부러웠다. 너무나 가난하던 그녀에게 그 소년과 별장은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그녀가 가진 목표였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 반드시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릴거라 굳게 다짐하게 했다. 돈 많이 벌면, 그 땐 저런 별장에서 바이올린을 배울테야 다짐하는 그녀였다. 그러면서 하얀 얼굴의 소년을 살포시 가슴에 담아보는 소녀였다.

해인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 온 성무는 늘 해인 곁을 맴돌며 그녀의 웃음이 자신에게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둘의 격차가 너무나 컸던 차라 해인은 언감생심 그저 마음을 감추고 성무를 대했다. 성무 역시 사랑할 줄 몰랐기에 해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인기가 많았던 성무는 일부러 다른 여자애와 사귀기도 하고, 그 여자애에게 해인이 사귀지 말랬다며 거짓말을 하여 그 여자애가 해인을 괴롭히도록 만들기도 했다. 애들에게 돈을 줘서 구타를 하게 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따돌리게도 했다. 괜히 헛소문을 퍼뜨려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하면서, 해인이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를 바랬다. 힘드니까 도와달라 한마디만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해인이 자신의 여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러나 해인은 그러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괴롭혀도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가난하여도, 그녀에게는 자존심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된다면, 그래서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릴 수 있다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외에 성무에 대한 감정 같은 것은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게다가 성무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자, 그녀는 성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능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마침내 해인은 성무에게 애원했다. 수능을 못치게 하겠다는 성무의 말에 해인은 어쩔 수가 없었던 거다.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수능을 못치게 하겠다는 성무의 말에, 해인은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성무는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성무의 호적에 해인을 배우자로 올려둔 후,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에 모셔둔 채 말이다.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믿고 그녀를 맡겼다. 그러나 그렇게 인자하던 할아버지는 성무가 영국으로 가고 한 달도 안 되어 교활한 수를 써서 그녀를 유산시키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게 한 뒤 집에서 내쫓았다. 5년 후 모든 사실을 알고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성무가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해인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거부하는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게나 사랑하면서도 표현이 서툴렀던 성무는 여전히 해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그래도 먼 길을 돌아왔지만, 성무의 마음은 해인에게 전달되었고, 해인 역시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잣대에 맞추어 판단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성무의 할아버지는 성무가 가난한 해인과 결혼하면 불행해 질거라고 판단해 성무를 위한답시고 해인에게 죽도록 상처를 줬다. 성무는 해인이 부자인 자기 곁에서 풍족하게 살면 행복해 할 거라고 혼자 판단해 그녀의 긍지와 날개를 꺾어버렸다. 결국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이 한 여자의 소중한 8년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러니 그 이후의 삶은 부디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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