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테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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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아손을 혐오한다. 그래서 아르고 호의 아야기가 나오는 순간 이아손이 떠올랐다. 그는 순수하지 못하기에 ‘낙하’할 자격도 없다.

어떤 이야기를 듣거나 상상할 때 혐오하는 대상을 먼저 떠올리다니, 슬픈 일이다.

‘유퀴즈’에 나온 물리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우주에서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생명’이 오히려 특이한 것이라는. 부테스는 태초의 소리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뛰어내렸다.’ 새의 얼굴을 한 세이렌의 소리는 자연이며 날 것이다. 형식적이고 작위적인 오르페우스의 소리와 대척점에 있는. 금기를 어긴, 돌아보지 말라는 페르세포네의 말을 어긴 그는 -이유야 무엇이든. 시의 완성이든, 에우리디케의 선택이든, 미친듯이 보고 싶어서든-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에게 찢기고 머리가 뽑힌다.

이 책은 새와 낙하와 죽음이 곳곳에서 흘러넘친다. 세이렌의 소리는 과연 파멸의 소리인가?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 <와호장룡>의 마지막 장면 역시 ‘낙하’이다. 고요한 표정으로 아득한 저 밑으로 뛰어내리는 옥교령은 어찌보면 부테스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일까?

부테스는 갑판으로 올라가 뛰어내린다.
음악은 사고思考가 두려움을 느끼는 곳에서 사고한다.
음악에 앞서 여기 있는 음악, ‘길을 잃을 줄 아는 음악은 고통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파멸‘에 노련한 음악은 이미지나 명제로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도, 환영이나 몽상으로 자신을 기만할 필요도 없다.
음악이 고통의 밑바닥에 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분절된 언어에 앞서 존재하는 노랫소리는 애도에 잠긴
‘길 잃은 본성 la Perdue‘으로 다이빙한다. 무조건 뛰어내린다. 부테스가 뛰어내리듯 그저 뛰어내릴 뿐이다. - P21

파에스툼에서는 티레니아 해의 곶이 곳이 없는 로마에서는 타르페이아 바위가 그런 장소이다. 아들 세네카는 죽음의 본성과 동시에 무작위로 선택된 파르마코스‘의 머리부터 떨어지는 죽음의 다이빙에 관해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글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허공에 몸을 던진다는 단순한 사실은 뛰어내림으로써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낙하는 육체의 어떠한 후퇴 가능성도 배제함으로써 내면의 미련을 모조리 제거한다(irrevocabilis praecipitatio absciditpoenitentiam). 그가 가지 못했을 수 있는 곳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non licet eo non pervenire quo non ire licuisset)."
시간이란 육식동물들의 시간의 감산에 의한 조급함이며, 격렬한 죽음에 소요되는 시간의 감산에 의한 서두름이다. 죽음에는 그들 자신의 운동성이 뒤섞여 있다.
죽음과 뛰어내림은 같은 것이다.
(pp.56-57)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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