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
이명옥 지음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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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교회에 종속되어 천국으로 가기 위한 삶을 살던 중세인들에게 이런 사랑이 허락되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금기에 대한 반동은 극단으로 치닫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드러내놓고 불륜을 칭송하고, 그 사랑을 영웅시하는 분위기... 물론 그건 모두 상류계층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작가는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잘 구성했다. 처음 우리는 맞이하는 이들은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시오노 나나미나 단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몰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단테와 같은 시대 사람들이며, 정략결혼의 희생자이자 세속적이고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다 비참하게 죽은 로맨티스트들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알려준 건 단테 알리기에리. 이야기는 신곡에서 시작한다. 지옥에서 같이 붙어있는 영혼들을 본 단테는 그들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감동에 겨워 실신하고 만다. 형수와 시동생이었으나 서로를 이해하고 그리워하던 그들은 결국 파울로의 형이자 프란체스카의 남편인 지안치오토에 의해 처형된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에 불을 붙인 건 갈레오토의 책 중 귀네비어와 란슬롯의 키스 장면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이야기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한 아름다운 귀네비어와 용맹한 란슬롯의 사랑이 이어진다.

기사도 정신, 귀부인 숭배, 성배 전설 등이 융합된 흥미진진한 이야기,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그들은 멋진 연인이다. 아더 왕은 빛이 나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귀네비어가 란슬롯을 선택한 이유는 귀네비어가 모계 사회를 이끌던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더 왕 전설은 종교와 가부장제의 확립을 나타내는 이야기인 것이다. 모계 사회의 수장 귀네비어가 선택한 다음 왕은 란슬롯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부계상속으로 바뀌어버린 사회 속에서 불륜으로 치부되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다 빼고 둘의 사랑만을 부각시켜 놓았지만, 사실 그들의 사랑을 사랑만으로 보기엔 함축된 의미가 지닌 농도는 너무 짙다. 그래도 서로를 그리다 그리다 신에게 참회하고자 각각 수녀와 수도사가 되었으나 그리움에 몸부림치다 결국 죽어버린 사랑에 가슴이 아프다.

다음 이야기는 여전히 아더 왕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아더 왕의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었던, 란슬롯과 비교하여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용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트리스탄.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라 불리는 이 이야기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아더 왕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때문이었으니. 사랑의 묘약 때문에 삼촌의 아내가 될 여자를 사랑하게 된 트리스탄과 원수이자 시조카인 트리스탄을 사랑하게 된 이졸데. 그들의 운명은 실로 아이러니였다. 둘이 사랑하게 되면 절대 안 되는 거였으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던 사촌오빠를 죽이고 자신의 나라를 모욕한 트리스탄을, 사촌동생으로서 한 나라의 공주로서 용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팔려가다시피 마크 왕과 결혼해야 하는 데, 그 치욕적인 결혼을 성사시키러 온 사람이 트리스탄인데... 어떻게 둘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사랑의 묘약이 등장했나 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랑은 위대한가 보다. 깊은 증오를 환희로 바꾸어 놓았으니. 그러나 둘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불멸의 사랑을 한 그들은 결국 죽음으로써 같이 있게 되었다.

자, 이제 마지막이다. 마지막은 단테와 베아트리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 않은가. 평생을 베아트리체 단 한 명만을 사랑하였고, 그 사랑으로 그녀를 신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은 단테의 순애보. 평생에 걸쳐 두 번 만난 여인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짝사랑도 이런 짝사랑이 없다. 첫사랑도 이런 첫사랑이 없다. 사랑... 그것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의 생애를 뒤흔들어 놓았을까. 이야기는 신곡에서 시작하여 신곡으로 끝이 난다.

중세시대 교회에서는 사랑을 위험한 감정으로 보고 금기시했다. 개인적인 감정인 사랑을 허용했다간 공동체적 사랑을 강조하고 내세를 준비하도록 이끄는, 획일적인 가치 체계를 장악하고 있던 교회세력이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에서는 사랑의 가치가 상당히 높다. 개인의 삶을 살고자 한 노력이자, 사랑을 신의 뜻이 아닌 개인의 마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주적인 그들의 노력 덕분이다. 

이 책에 나오는 갖가지 그림들을 감상하는 일 또한 즐거움이었다. 사랑 이야기도 네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화가들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도 나오고, 그 시대의 문화도 간접 체험할 수 있어 기뻤다. 볼 거리, 읽을 거리가 다양한 책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치열하게 살다 간 이들의 사랑이 내 감수성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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