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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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어린이용 약병과도 같다. 아귀가 맞춰지지 않으면 뱅글 뱅글 헛바퀴만 돌 뿐 잘 열리지 않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멀리 느껴지는 거리에 이런 모습의 그가 있다. ‘몸이 느껴지지 않아야 건강한 겁니다.(p259)’ 관계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나의 시선은 그를 향한다. 그가 느껴지는 걸 보면 우리의 관계, 아직 건강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몇 번을 망설이다 다시 시도 해보아야지 하며 슬쩍 마개를 돌린다. 다가간 거리만큼의 탄성이 작용하면 되돌아온 공간은 텅 빈 공기로 가득하다. 가끔 두려웠다. 돌리고 돌리다 지쳐 어느 순간 돌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될까봐.

 

따뜻한 봄 같은 사람이라 좋아.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스웨터가 따듯한 이유는 털실의 보푸라기들이 틈 사이에 온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p46)’ 그렇게 수북하던 털실들이 끈끈한 일상에 묻어 한 올 한 올 빠져나간 걸까. 점점 온기가 그리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때부터였을까, 아님 그 후였던가. 그 때는 늦지 않았던 걸까. 골조만 남아있는 빈 집의 이미지가 겹쳐질 때면 종종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시작도 기억나지 않는 어긋남을 바라보는 일은 매번 오한이 느껴지는 슬픔이다. 한 때 열기를 뿜어내던 관계의 끄트머리가 이렇게 투명해질 수도 있다니. 이런 생각이 온몸에 열기로 퍼질 때면 매번 마음은 감기를 앓았다.

 

책날개로 펼쳐지는 첫 문장에 시선이 꽂힌다.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 요즘 자주 떠올리는 생각이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간혹 나를 힘겹게 했던 것은 관계였지만 잠시 몸을 기대 위안을 받은 것 역시 관계였다. 관계의 여집합은 관계가 아닌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인 걸까.

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작가다. ‘관계는 빛이 아니라 열에 가깝다.(p115)’ 열이 이동하듯 관계는 계속 변하니까.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려면 무언가를 태우는 희생이 필요하듯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니까. 고온에서 저온으로 열이 이동하듯 관계에서도 내가 따뜻한 열기를 유지해야 타인의 체온을 함부로 빼앗는 일이 없(p116)’어지는 것이니.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시선을 먼저 돌린 것은 나였다. 그의 무심함을 탓했던 많은 날들은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였다. 내가 먼저 등을 보였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것도, 마음을 냉동실에 집어넣어 딱딱하게 얼린 것도 내 자신이었다. 서운함은 켜켜이 쌓여 빙하처럼 단단한 벽이 되어버렸다.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아.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잘해준대도 내가 싫어. 굳어진 관계를 확신하며 가까운 친구에게 무덤덤하게 말하곤 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나. 관계에 대한 확신을 내린다는 것은. 며칠 전, 브라스 공연 중 연주되던 캐논을 듣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그가 좋아하던 음악이다. 여러 악기 버전으로 나온 이 곡을 내내 듣던 때도 있었지. 나도 모르는 새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나. 얼어붙은 마음의 끄트머리가 살짝 녹아 눈물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음악을 듣던 순간들을 안고 흘러나왔다. ‘캐논이 담고 있던 봄날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라는 낱말은 관계의 사전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고기를 먹을 때 파인애플을 구워서 제일 먼저 내 접시에 올려주었을 때, 출근복도 못 갈아입고 널브러져 잠든 방의 불을 슬며시 꺼주었을 때, 분리수거를 내놓고 티셔츠를 손빨래하고 스스로 밥을 차려먹었을 때부터.

글에 마음을 실어 조금씩 덜어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둘 다 변한 건지 모르지만 관계의 색채가 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켜켜이 쌓여 꽉 들어차있던 감정들이 마음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왔던 걸까.

마음은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비워두는 무의 공간이다.(p244)’ 빈 공간으로 새로운 공기가 조금씩 스며드는 것 같다. 계속 덜어내려 한다. 이 공간에 온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관계가 이라면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언젠가 나의 온기를 나누어줄 수 있을 정도로.

 

진정한 관계란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미는 힘으로 서로의 확장을 돕는 일이다.(p38)’ 지금까지는 단지 확장을 위해 밀어내는 시기였을 뿐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외로울 때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간만큼 나는 확실히 넓어진 것 같으니까. 그리움의 시간이 길었을 뿐이라고.

첫 장에 실린 능소화의 꽃말처럼 그리움이 가득한 책이었다. 강아지풀을 한 올 한 올 쓸어내리듯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리움의 꽃가루가 손끝에 묻어나는 듯했다.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책을 만난다면, 아마도 나는 다시 그를 떠올리며 그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오랫동안 묻어두던 마음이 심장을 할퀴며 쓰라리겠지만 그믐달의 모습으로 있는 관계가 초승달을 지나 보름을 향할 수 있도록 느린 걸음을 내밀어보려고 한다.

 

서로 마음에 난 길이 관계다.(p7)’ 참 멋진 문장인데 눈이 시큰하다. 마음이 맞는다면 서로를 향한 감정들은 고속도로를 달릴 테지만, 어긋난 관계의 길은 뚝 끊어진 낭떠러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거대한 낭떠러지. 건너편까지의 간극은 아득하고 바닥은 보이지도 않는. 주인공은 눈을 질끈 감고 한 발을 내딛는다. 순간, 신기루처럼 길이 나타난다. 제목도, 주인공의 얼굴도, 그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이 장면만은 또렷하다. 공간을 툭 건드린 발바닥이 마법의 봉이라도 된 양 순식간에 이어지던 길. 관계를 향하는 걸음을 생각하며 이 장면을 떠올린다. 아직은 종종 아득해도 한 발씩 내딛다보면 점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그에게로 가는 길, 끊어진 듯 보이는 아득함을 향해 나는 계속 한 걸음을 내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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