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여성 철학자 장밍밍{長明明)의 [고로, 철학한다 : 찌질한 철학자들의 위대한 생각 이야기]를 읽다보면 진짜 저 질문을 하게 된다. 진짜? 진짜로 그랬단 말이야? 이거 사실임?

장밍밍은 저부제(哲不解, 철학은 이해하기 어려워라는 뜻)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에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책을 쓰겠다"는 호언장담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니까, 그래? 이거 실화임? 같은 질문을 던지며 낄낄거리며 철학을 대할 수 있는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높은 조회수를 올리며 관심을 끌자, 진지하게 글을 써서 올리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쓰여진 12인의 철학자에 대한 글이 이책으로 묶였다.

 

장밍밍은 칭화대학교 철학과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석박사 학위를 받은 올해 32살의 여성 철학자인데, 이책은 작년에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라는 제목으로 이미 나온바있다. 이번에 제목이며 표지갈이를 하고 새롭게 출간되었다.

재밌는 건 2016년 버전과 각 장의 소제목이자 각 철학자들에게 붙인 네이밍이 조금씩 다르다는 건데 

나는 올해 버전보다는 작년 버전의 것이 더 흥미롭다. 예를들어, 한나 아렌트를 '아까운 사랑의 포로'라고 했는데 

'미녀, 재녀'는 비록 속물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담박에 눈에 들어오긴 한다. 

여튼 좀더 세련된 네이밍이 된것도 있고, 재미는 좀 덜하다. 

중국 철학자답게 서술체가 사기를 따라 본편, 기전체와 편년체로 구분해서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이책의 매력 중 하나다. 

기전체는 본기(왕의 업적을 서술)와 열전(세가들의 전기)으로 이뤄진 인물 중심의 종합적 역사 서술방식으로 정사체(正史)라 할 수 있는데 [고로, 철학한다]에서는 '본편'에서 12인의 철학자를 다룬다. 12인의 철학대가, 철학황제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세가급에 해당한다고 본 14인의 철학자를 '번외'편으로 다룬다.

이 '본편' 12인과 '번외편' 14인을 연대기순의 기록인 편년체로 살펴볼 수도 있다. 그게 "시간 순서와 철학 유파에 따른 차례"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재밌는 착상이다. 더 흥미로운건, 황제급 철학자 '본편'에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다음에 오는 이가 무려 한나 아렌트다. 한나 아렌트를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을 엄정하게 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니체, 스피노자 앞에 둔 것도 못마땅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의 유부남 하이데거는 본편 마지막에서 다룬다. 어뗘, 통속적이제? ㅎㅎㅎㅎ

 

장밍밍의 영웅은 카를 마르크스다. 그녀의 전공이기도 하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충만한 에너지를 선사'하고 마치 근시인 저자에게 "도수가 잘 맞는 안경 같아서 그 안경을 쓰면 갑자기 역사를 이해하게 되고 사회를 꿰뚫어보게 되며 세상의 얼굴에 난 작은 주근깨까지도 선명하게 보'이게 해준다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 대학시절에 마르크스는 나에게도 영웅이었다. ... 아니, 당시 내게 진짜 영웅은 레닌이었다. 혁명가로서의 로망을 느꼈던듯한데, 지금 생각하면 순수하고 명랑하고(그땐 비장했지만) 가벼웠던 시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레닌은 울림이 있다.

이런 생각하면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 생각이 난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소련의 공산당, 공산혁명은 영혼을 굴복시킨 파괴자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런 러시아혁명과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서방의 지식인과 인도주의자들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혐오감을 반스는 소설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쇼스타코비치같은 이에게 나같은 사람은 혐오스러운 인간인 셈이다. 아, 나 역시 러시아혁명엔 전율했을지라도 레닌 이후 스탈린부터의 소련은 더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다시 한번 레닌과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들을 보고 싶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때, 난 완전 반했다. 그의 글은 명쾌해서 아름다웠다. 그처럼 글을 쓰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만일 글을 쓴다면 마르크스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전기도 몇권을 읽었는데 장밍밍이 전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시인이었고, 시인을 꿈꾸며 시 쓴다고 낭만거리고 다니던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조언대로 본대학교에서 베를린대학교로 옮기면서 낭만시단을 떠나 본격적인 학문에 접어들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같다. 그랬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그랬던가,,,, 이거 실화임?

더 흥미로운 건 엥겔스와의 관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는 너무나 유명한데 저자가 엥겔스를 따로 다룰만큼 엥겔스의 숨겨왔던 매력이 철철 넘치게 서술하고 있다. 실화인가 묻고 싶은 사건들을 나열하면서.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집안을 돌봐주던 메이드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을 때 아내 예나에게 자신의 아이라고 쉴드쳐준 이도 엥겔스이며(이건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호방하고 과감한 글투로 옛 시와 역사의 일화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고매한 언어로 거침없이 남을 비판"한 반면, 엥겔스는 "깔끔하고 세련된 필치와 빈틈없는 논리로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글을 써냈다."

마르크스는 문과적이고 엥겔스는 이과생스러웠다는 요약인데, 문과 이과는 중국, 한국, 일본의 분류인지 세계공통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르크스에 비해 엥겔스에 대한 관심이 덜했던 과거를 생각나게 해줬다.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해석자이며 스폰서이자 그 자신도 대단한 이론가로서 엥겔스를 시간 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이제와서? 

그는 자본주의의 결혼제도를 비판했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후에 아일랜드 노동자 메리 번즈를 사랑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그녀의 여동생 리지 또한 엥겔스를 사랑했으나 요절했다고 한다.

리지는 죽음을 앞두고 결혼할 것을 요청했고 엥겔스와 둘은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식 후 몇시간 만에 리지는 죽었다고 장밍밍은 알려준다. 이거 실화임?

엥겔스 전기나 평전은 읽어본 적이 없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라는 태양을 바라보면 태양에 눈이 부셔 보이지 않는 인물같다. 그러나 엄연히 엥겔스의 퍼스낼리티도 눈부실만하지 않은가.

평생을 마르크스와 그 가족을 뒷바라지 했고 그토록 혐오하던 부르주아지 자본가로서 '잠복'해 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그 엥겔스임을 사업을 했던 사람들은 몰랐다고? 장밍밍의 말대로라면 '잠복한 채' 살아서 그의 사업 파트너들은  그가 바로 그라는 걸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라는 건데, 이거 실화임?

엥겔스를 너무 모른다.

혁명은 혁명. 혁명조직의 문제. 여기까지 생각이 번지면 굉장히 복잡해진다.

조직의 문제는 사람의 문제라서 인터내셔널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학생때도 쉽게 판단이 잘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이제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롭게 철학자와 그들의 생각, 그들의 저서를 향한 입문서로 괜찮을 듯 싶다.

다독 다음이 정독, 다음이 반복독서인듯하다.

평생을 걸쳐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일. 철학은 더더욱 그런 거잖아.

이 나이에 내 마음 한자락 걸칠만한 철학자와 철학책 한권 정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허하다는 느낌이 없지도 않다. 뭔 생각하며 살아온 걸까.

 

 

한나 아렌트, 이거 실화임? 환장하겄네. ...

 

  

고로, 철학한다 | 본편

은둔형 외톨이, 이마누엘 칸트
까다로운 불만쟁이, 게오르크 헤겔
사고뭉치 낭만 시인, 카를 마르크스
아까운 사랑의 포로, 한나 아렌트
천재 혹은 미치광이, 프리드리히 니체
괴짜 중의 괴짜, 바뤼흐 스피노자
남녀 협객,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고삐 풀린 망아지, 견유학파 철학자
나는 색마가 아니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여혐에 독설남,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유약한 겁쟁이, 르네 데카르트
개천에서 난 용, 마르틴 하이데거

고로, 철학한다 | 번외편

인민 대표와 인간 대표, 루소와 볼테르
천재 게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바람둥이 공공 지식인, 버트런드 러셀
사랑을 거부한 단독자, 쇠렌 키르케고르
오해받는 정치철학의 선구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예술을 하듯 사랑하라, 에리히 프롬
사상은 거인 행동은 소인, 프랜시스 베이컨
최초의 철학 순교자, 소크라테스
동굴을 탈출한 철학자, 플라톤
산책하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철학의 쌍두마차,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어둠 속 요염한 꽃, 미셸 푸코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1부_12인의 철학자 본편
은둔형 외톨이 칸트
처녀자리의 철학자 헤겔
혼세마왕 마르크스
미녀, 재녀才女, 정부: 한나 아렌트
천재 반, 미치광이 반: 니체
렌즈 세공 기술자 스피노자
남녀 협객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거지파 철학자: 견유학파
훌륭한 가장 프로이트
독설남 쇼펜하우어
겁쟁이 데카르트
하이데거: 농부, 연못, 밭

2부_14인의 철학자 번외편
계몽의 별: 앙숙 볼테르와 루소
키 작은 천재 부자 비트겐슈타인
공공 지식인 러셀
도망친 신랑 키르케고르
마키아벨리: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에리히 프롬: 인간, 예술을 하듯 사랑하라
부정부패범 베이컨
고대 그리스의 3대 사상가 소크라테스: 우리 집에 무서운 아내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3대 사상가 플라톤: 죄수 굴에서 탈출하다
고대 그리스의 3대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 소요파의 우두머리
기독교 철학의 쌍두마차: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악의 꽃 미셸 푸코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의 [세계철학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쓰카 에이지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한줄 요약은 '구조밖에 없는 뼈대에 DB화한 각종 이야기의 요소들을 샘플링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오쓰카의 글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저 한줄을 풀어쓴 걸로 보면 되겠다.

그래서 그렇게 쓰여진 소설은 결국 어떻게 귀결되는가. 무엇을 남기는가. 이것까지 확인하면 이책을 잘 읽게 되는 셈이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하루키 소설의 구조들을 분석할 때 꼭 나오는 이야기인데, 새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포르트(fort) - 다(da) 놀이 혹은 이론'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논했던 건지,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어제 우연히 TVN의 <알쓸신잡>을 보다가 유시민이 던진 '사람들은 왜 독서량에 집착할까'라는 질문을 듣고 뜨끔했다. 요즘 읽지도 못하는 책들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는 나로서는 이건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것처럼, '지식에 대한 초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새로나온 책들을 점검하고, 서재인들이 읽고 있거나 읽은 책들에 대한 포스팅들을 보고 나도 읽고 싶다와 읽어야 할 것 같다라는 심리를 자극받아 열심히 사들이고 있는 내 모습은 아직 읽지 못한 정보, 지식에 대한 초조감, 안달함에 다름이 아니다. 

 

오늘 장바구니를 과감히 정리했다. 

보관함으로 옮겼고 삭제할 건 삭제했다. 읽고 싶은 몇권만 추가로 구입하고 당분간은 일절 책을 사지 않기로 다짐한다. 당분간이란 게 ... 지금 목표로 하고 있는 책을 다 읽는 동안. 딴 책에 눈돌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 말줄임은 뭐지?)

초조한 마음은 뭐에든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좀더 여유를 갖자. 어차피 엎어진 참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회한을 갖지는 말자.

바보같은 결심인것도 같은데 당분간은 가지고 있는 책, 목표하고 있는 책에만 집중하자.

잔뜩 흐린 삼복더위에 다짐하는 포스팅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7-07-23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때는 ‘리스트‘를 열심히 업데이트 한 적이 있었답니다. 카테고리별로 정리도 해 보고, 신간들까지 두루 살폈죠.
‘앞으로 언젠가는 꼭 읽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이런 저런 책들은 알고는 있어야지‘ 싶었더랬습니다. 장바구니에도 수십 권씩 책을 넣었다 뺐다 했고요. 차츰 그런 일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싶더군요. 내가 이미 사 놓은 책, 혹은 오래 전부터 꼭 읽었으면 했는데 여태까지 읽지 못한 책들에 계속 주목하기 시작하니까 예전의 악습들이 차츰 없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요즘엔 계속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들의 목록‘을 자주 살펴 보게 되고, 노트에도 끄적거려 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작가와 작품들이 분명히 있어 왔는데, 그들을 너무 오랫동안 한 켠에 밀쳐두고 계속 기다리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새로 사야 할 책‘ 보다는 ‘이미 사 놓은 책들‘에 주목하게 되더군요. 그 가운데 ‘지금부터라도 당장 읽기 시작해야 마땅할 책들‘이 결코 적지 않으니까요. 누가 그 책들을 빼앗아가기라도 할라치면 손사레를 치면서 ‘내가 지금 당장 읽을 책들‘이라고 할 만한 책들을 골라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포스트잇 2017-07-23 13:11   좋아요 1 | URL
저도 oren님처럼 독서계획을 잡고 끈기있게 읽어야지 늘 생각했었더랍니다.이젠 정말 쓸데없는것들 버려가며 집중할랍니다^^ 용기주셔서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7-2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 이론보다는 프로이트 저작 자체가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일반 대중소설 저리가라입니다...

포스트잇 2017-07-23 14:54   좋아요 0 | URL
그러게말입니다. 천재여요.어떻게 그런 얘기를 생각해냈는지..저 포르트-다 놀이 얘기도 애기가 놀고 있는 모습 보고는 저런 이론을 만들어내잖아요.놀라워요 ㅎ

포스트잇 2017-07-23 14:57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곰곰발님 글 때문에 음악혐오 샀습니다.. 그리고 아, 이제 팔랑귀는 그만 접어야겠다고 맘먹었다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7-07-23 16:09   좋아요 1 | URL
생각해 보니 정말 하루키 소설은 떠났다가 돌아온다는 점에서 갓난이 실놀이 갔다리왔다리 구조 같습니다. 흥미롭겠는데요...


음악혐오 개인적으로는 끝내주는 책입니다.

cyrus 2017-07-23 19: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일 알라딘 서재의 ‘알라디너의 선택‘을 보면 실망하는 일이 많습니다. 신간도서를 샀다는 내용의 글, 신간도서에 관심이 있다는 내용의 글, 그리고 알라딘 책 소개 내용 일부를 복붙해서 신간도서를 언급한 글이 많습니다. 이런 글들은 ‘읽는 행위‘가 빠져 있어요. 그저 신간도서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 환장한 것 같습니다. 제 독서 철학은 보수적이에요. 책을 사서 천천히 읽고 리뷰든 감상문이든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글에는 글쓴이의 ‘읽는 행위‘를 알 수 있어요. 리뷰만 쓰면 주변 사람들이 글쓴이가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아 주고, 인정해줍니다.

포스트잇 2017-07-23 20:00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열심히 잘 읽어야죠

cyrus 2017-07-23 20:13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해보니 제 의견에 감정 섞인 표현이 있었습니다. 제 말에 감정이 상했다면 사과합니다.

포스트잇 2017-07-23 20:15   좋아요 0 | URL
뭘 또 사과하시기까지..ㅎ
열심히 읽는게 빠져있던거 사실인데요. 맘쓰지 마세요~
 

[기사단장 죽이기]를 막 완독한 참이다.

마지막은 하루키로서는 처음 시도해보는 결말이라서 다소 놀랄만하다. 아, 결국 이런 결말도 내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언젠가 하루키에 대해 뭐라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피곤한 편이다. 

반복되는 어린 소녀에 대한 시선도 유난히 불편함이 느껴졌고('반복이 리듬을 만든다'지만 대놓고 이러니 너무 편하게 익숙한 리듬에 올라탄거 아닌가 불만스럽기도 하다) 말했다시피 꿈을 빙자한 강간 의식은 불쾌함까지 느껴졌다. 하루키를 너무 많이 읽은겨..

어쨌든 이데아니 메타포니 이중메타포니 머리 아파가며 읽어가는데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아, 이건 아닌데.. 싶은 감이 온다.

왜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렇게 처리해야 했나. 재현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아마다 도모히코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마사히코에게까지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고 지켜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 그림은 상처받은 도모히코의 차마 발설할 수 없는 사연이, 감정이 폭발해 담겨있는 것이었는데 왜 꼭 그렇게 처리했어야 했을까.

아주 단순하게 보면 이 소설 역시 '나'의 분노, 폭력성을- 즉 내 의식 깊은 곳(이른바 지하2층)에 도사린- 우회적으로 드러냈다가 '치유' 내지는 현현화함으로써 휘발시키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지도 모른다.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지내줄 수 있어?" 나의 아내는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이혼통보를 해놓고서 짐을 챙겨 집을 나서는 '나'의 등 뒤에 '부탁이 있다'며 이런 말을 꺼낸다. ....)

어이없는 독해일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한 사내가 자신의 '분노'라는 감정을 인식하기까지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독해. 자신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현실에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감정 지체자의 글쓰기.

 

그리고 세대별로 이게 맞는건지 계산이 잘 안된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화가이자 1937년 빈으로 유학가서 1938년 일본으로 송환당해 돌아와야 했던 전쟁세대인 아마다 도모히코는 1910년~1926년생에 해당하는 다이쇼세대 아닌가? (다시보니 92세인 걸로 나온다. )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베이비붐세대는 멘시키에 해당할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대략 40대 후반에서 60세까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들인 아마다 마사히코는 '나'와 같은 36세이다. '나'는 이 일을 겪은 후 몇년 뒤에 동일본 대지진(2011)을 겪는 세대다. 그러니까 1970년대, 그것도 70년대 후반의 아이들일텐데.. 아버지 도모히코와는 한 세대를 훌쩍 넘는 나이차이가 나는 셈이다.

소설이 나오자마자 일본 우익에 의해 욕쳐먹은 하루키의 역사인식을 주의깊게 볼 이유가 우리에겐 있지 않나.

전쟁세대가 저지른 일을 하루키는 소설속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도모히코는 전범도 아니고 제 나라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제국전쟁의 피해자인건 분명하다. 

화가의 꿈을 안고 빈에 유학갔다가 맞게 된 독일의 오스트리아병합. 그로인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모든걸 잃고 독일과 일본과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송환된 채 돌아와 젊은 시절을 은둔하며 보낸다.  

도모히코는 '내'가 그 그림을 발견하기까지 함구했다. 그리고 이젠 죽음 앞에서 의식을 놓아버렸다.

([1Q84]에서 덴고의 아버지 역시 요양원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다. 치매를 앓는다. 기억을 잃어버린 걸로 설정되었다. 아마 하루키 개인사와도 관계 있을 거지만, 하루키 아버지 또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루키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과 중국에 얽힌 이야기를 남겼다고 하니 덴고의 아버지, 마사히코의 아버지 도모히코 모두, 하루키가 아버지에대해 사고하고 경험한 모든 것일 수도 있는듯하다.)

전쟁세대의 침묵. 강변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나은 것인가. 물론 예술가로서 그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남겼다. 그 그림속에 자신이 본것, 자신의 마음을 남겨놓았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후대인 '나'의 문제라는 것인가. 

그렇게 발견한 그림을 '나'는 어떻게 하는가. .......

하루키다운 방식이라는 게 맞을 듯하다. 

그의 역사인식은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태엽감는새]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다. 

일본의 진정한 반성없는 역사인식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도 볼 수 있다.

하루키에게서도 이 역시 반복되니 좀 짜증이 난다. 물론 내가 오독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마침 읽을만한 책이 나왔다.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저자 오쓰카 에이지는 문화비평가라는데 소설작법을 가르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책에서는 하루키와 하야오의 '이야기구조' 특히 신화적 구조를 분석한다. 하루키 소설의 이야기구조에 대해 좀더 아는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일듯 예전에도 많이 지적된 내용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오쓰카가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 쓴 평이다.

오쓰카는 하루키의 '피해자 사관'을 비판한다. "역사를 신화적인 '수난'의 상징으로 인용해온 행위의 반복 그 이상은 아니다'고 한다.

"죽임을 당한 입장에 서서 일본을 규탄하고 있지 않다" '죽이는 쪽의 윤리'에 서 있다, 는 것이다.

(연합뉴스, "죽이는 쪽의 윤리"…하루키 소설의 '피해자 역사관' (김계연 기자)에서 인용)

 

하야오의 작품은 본 게 몇작품 되지 않은데 이번 기회에 다뤄진 작품만이라도 읽어볼만 하겠다.

 

멘시키는 베이비붐 세대로 볼 수 있다. 그가 일으킨 엄청난 부.

그러나 하루키는 멘시키를 경계한다.

그가 더할나위 없이 굉장히 흥미로운 사내지만, 그는 거의 분명한 자신의 아이에 대한 '믿음'과 거리를 둔다.

'나'는 "그래도 멘시키처럼 되지 않는다."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단장'으로 현현시킨 분노와 응징의 힘(나는 그렇게 믿는다)으로 세상을 향한 긍정과 낙관을 밀고 나갈 것을 조용히 믿는 것.

하루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봐줘야할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오쓰카 에이지는 어떤 책을 쓰는지 몇권 더 봐도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사단장 죽이기] 2권 절반쯤 읽을 때.

'전이하는 메타포'..

이러니 하루키를 싫어할 수가 없다.

너무 웃겨.

 

 

 

 

 

 

 

 

 

 

 

 

 

 

살아있는 메타포라니...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어드벤쳐가 어김없이 나온다. ㅎㅎㅎㅎㅎ

미워하기엔 너무 귀여워 ㅎㅎ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약을 언제 했더라.. 예약 시작되고 하루이틀 후쯤?

여튼 오랜 기다림끝에 서점에 풀리고도 하루 뒤인 어제 오후에야 책을 받았다.

...... 으응?  ..... 잉? 이상하기 이를 데 없는 책 1권을 받았다.

책이 거꾸로 인쇄됐어. ....  아니 겉표지가 거꾸로 덮였구나.... 아니, 이건 뭐지? 겉표지를 책본문 방향에 맞춰 뒤집어 제대로 한 다음에 보니 하드표지가 잘못 입혀진 책이었다. 그러니까 겉표지를 제대로 하면 하드표지가 거꾸로 바뀌게 되고, 그나마 본문은 제대로 되는것이니 교환말고 그냥 읽자...로 마음을 잡았다. 재수가 없군.

 

그런데, .. 책끈이 밑쪽에 달려 책 위쪽에서 끝이 달랑거리는 책 읽어봤어?

그러니까 내가 받은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은 하드표지와 책끈이 제대로 달려있는 것에 겉표지와 책본문을 거꾸로 붙여 제본한 기괴한 책이었다. 

아, 진짜 재수없군. 표지와 책본문이 엇갈린 책을 받아받지만 또 책끈까지 제각각 노는 이런 책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지만 본문이 제대로 붙여져 있으니 기념이다 생각하고 그냥 읽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추상화와 초상화의 간격을 포착하며 전개해나가는 초반은 흥미롭다.

'얼굴없는 남자'와의 대면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박사] 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아마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메피스토펠리스를 만나는 장면일 것이다. 아주 흡사한듯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프롤로그가 끝나면 어김없이 섹스이야기가 나온다.

알려졌다시피 아내로부터 이혼통보를 받은 30대 중반 남자(하루키가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인듯)의 이야기다. 나는 혼자서 산 골짜기와 평지 사이 경계에 지어진 집에서 산 약 8개월남짓동안 두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알려준다.

뻔뻔한 자신의 유혹을 딱 잘라 거저하지 않았는지 모른다면서 '어쩌면 그 시기 내 몸에 특수한 자기磁氣같은 것이 흘렀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뭔가가 걸렸다.  

지극히 사적인 거지만, 세월이 지나고보니 나의 '어쩌면 그시기'도 내 생애 가장 좋은 운이 흘렀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도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호감있게만 봐줬던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분명. 기이하게도 일이 풀려가던 시절. 살다보면 어느새 자기 생에 써야 할 운을 다 쓴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온다. 운이 다했다는 느낌.

기괴하게 생겨먹은 책을 받아들고 문득 다시 한번 생각했다.

스무살이나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서른여섯에 과거를 그렇게 '어쩌면 그 시기'...로 회상할 것 같지않다.

 

멀고 먼길을 돌아 다시 일인칭 화자로 돌아와 초반은 마치 [태엽감는 새]를 다시 읽고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옛날보다 더 장황해졌다고 할까.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주변을 꾸리지 않고 바로 질러가는 맛, 이런 게 예전 하루키에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청년이라 할 수 없는 나이였고, 갈수록 무언가가 -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것이 - 내안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열기가 온몸을 덥히던 감촉이 점차 잊혀갔다."

 

어쩔 수 없이 하루키 자신이 개입되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열기가 온몸을 덥히던' 그런 '감촉'을 하루키는 지금도 느끼며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소설가는 늘 그렇게 쓰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