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글들. 물론 일기같은 지극히 사적인 글일지라도 누군가가 본다는 시점을 상정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지만, 어쨌든 일기나 에세이, 편지 등 그런 글들을 좀 읽어볼까 계획했는데 역시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그저 소설을 몇권 읽었을 뿐이다.

 

사라 핀보로의 [비하인드 허 아이즈]에 이어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었고, 그 뒤를 이어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둑신부]를 읽기 시작했다.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은 [리플리]와 이번에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었고, [낯선 승객]([열차안의 낯선자들]), [캐롤]은 어찌하다보니 읽다가 중도에 잠시 덮어둔 상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은 [눈먼 암살자]와 [시녀이야기]를 읽은 게 고작이다.

애트우드의 [도둑신부]는 역사학자(전공이 전쟁학)인 토니와 사업가 로즈, 텃밭 가꾸기와 점술을 즐기는 몽상가 캐리스. 이 세 여자는 지니아라는 '인생의 참변'을 겪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친구가 되었다. 지니아는 죽었고 세 여자는 한달에 한번씩 점심을 먹는 모임을 갖는데 죽었던 지니아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

지니아가 '인생의 참변'인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교묘하게 접근해서 그들을 이용하고, 애인이나 남편을 재미로 뺏고, 뺏어간 남자들과 그들의 삶을 갈가리 찢어놓은 여자로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정체와 진의를 알 수 없는 섬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씻을 수 없는 고통과 공포를 주었던 지니아가 다시 세 여자 앞에 나타났다.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이고 왜 그녀는 돌아왔는가......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언감생심 전작주의자를 꿈꾸지도 못하고 그저 힘닿는대로 찾아서 보고자 하는데 [도둑신부]의 줄거리만으로도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뭘 찾을 수 있을런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시작은 토니라는 역사학자로부터 전개된다. 그녀는 전쟁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중세 말기에 일어난 전술상의 실수>, <유물의 시각에서 바라본 전쟁사> 같은 주제로 수업을 한다. 옷을 사입는 것보다는 돈 모아 전쟁 유적지 답사에 필요한 비행기 표를 사는 걸 더 선호하며, 각 유적지에서 꽃을 한송이씩 꺾어 말린다음 간직하는 것을 은근한 즐거움으로 알고 있는 여자다.

아쟁쿠르, 아우스터리츠, 벙커힐, 카르카손, 됭케르크(!!!!). 격전의 전투지 답사 후 스크랩을 해두는 여자.

토니는 '불면 날아갈듯한 몸집을 가진 여자'다. 지하철을 타면 셔츠단추와 허리띠 버클이 보이는 키의 여자.

 

"전반적으로 그녀는 남자들과 더 잘 지내는 편". 남자들은 그녀를 "꼬맹이 아가씨"라고 부르거나 그렇게 여성스러운 사람인 줄 몰랐다는 소리만 하지 않으면 된다.

토니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체구가 아담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만큼 순탄하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키가 180센티미터쯤 되고 덩치가 산만했다면, 골반이 넓적했다면 협박에 시달리며 아마존 전사처럼 살았을 것이다. 외모와 관심의 부조화가 통행 허가증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불면 날아가겠구먼. 사람들은 내려다보고 씩 웃으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럴 것 같지? 토니는 따라 웃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많이들 불어봤거든?(45~46)

 

아주 흥미로운 단락이다. 아주 흥미로워...

 

토니와 함께 살게 된 웨스트라는 남자. 하룻밤 사이에 금발이 백발로 변해버린 음악학자.

"그녀는 항상 그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가 얼마나 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이다."(24) ...........

토니, 웨스트, 그리고 지니아 사이의 관계 한자락 깔고 시작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굉장히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두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그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사랑에 강력하게 빠져든다. 사랑이 그들을 구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나는 아직 애트우드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읽는 이에게 무얼 전달하고 싶은 건지 알지 못한다.

 

 

 

 

 

 

 

 

 

 

 

 

 

 

 

얼마전에 문득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많은 분량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읽기 시작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졌다.

박경리의 [토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무라사키 사키부의 [겐지 이야기] ...

 

스완네 집쪽으로 가다가 중단하고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책이 나왔다. 그러니까 정작 원 소설은 읽지 않고 주변부 관련 책들만 주워들이고 있는 형국.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 여름]. 제목은 이러해도 여름은 다 갔는데 가을에 읽으면 안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게 단지 프루스트만이 아니라 몽테뉴, 보들레르, 위고, 마키아벨리, 호메로스 등 "~와 함께 하는 여름"이라는 테마로 매년 여름 내내 프랑스 국영 라디오 채널에서 했던 프로그램이 바탕이된 책 시리즈의 하나라고 한다.

바캉스 특별 기획 "~와 함께 하는 여름"인데 저런 인물들과 함께 하는 바캉스, 뭐 이런 거다.

몽테뉴와 함께 한 여름은 [인생의 맛 : 몽테뉴와 함께 하는 마흔번의 철학 산책](책세상)으로 번역되어 있다. 몽테뉴라...

 

흐르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사랑한다는것은 왜 고통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 수 있는가? 라는 프루스트의 근원적 질문에 프루스트 전문가 8명 나름의 답이 전개된다는 것이지.

흐르는 시간을 꼭 붙잡아야 하는건지 잘 모르겠고, 사랑한다는 것은 왜 고통스러운지.. 그걸 꼭 말로해야 하나,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만큼은 어떤 대답을 하는지 궁금하다.

여기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일찌기 발터 벤야민은 "누군가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런 희망없이 그를 사랑하는 것"(일방통행로)이라고 답했다.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이 너무 야박하게 들린다.

진정으로 알 수 있기 위해선 진정으로 온갖 것 속에서 뒹굴어봐야 알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온갖 것 속에서 뒹굴수는 없는 것이다. 저마다의 영역안에서 겪게 되는 것인데 그만큼만 아는 것 아닐까.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시간이 결코 알려주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알게 되는 경우, 그땐 어떡할 것인가. 그것이 아주 치명적인 것이라면. ...나는 이것이 항상 무서웠던 것 같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장이브 타디에.. 등등. 흥미로운 견해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스완의 집쪽으로 일단 가는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텐데.

 

 

 

 

 

 

 

 

 

 

 

 

 

 

 

 

 

 

 

 

그리고, 이 비슷한 프로젝트. 물론 전혀 다른 성격의 주제지만 한가지 주제를 놓고 여러 선수들이 나와 저마다의 수를 보여주는 쉽지 않은 프로젝트가 여기 또 하나 있다. [빛 혹은 그림자].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그림을 모티브 삼아 창작된 단편집.

스티븐 킹을 비롯하여 일급 선수들의 작품인데 사실 이런 기획된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자신의 기획하에 자신이 쓰고 싶은 작품을 마음속의 데드라인은 있더라도 더이상 고칠 수 없다고 할때까지 마무리하여 완성한 작품이 아닌 기획하에 프로젝트처럼 쓰여진 작품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워낙 장르계의 한 살수 하는 작가들이 참여한 거니 이들은 이런 던져진 주제를 살려서 글을 쓰는지 살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17점의 그림과 17명의 작가가 만났는데 18번(!!!!)째 작품 <케이프코드의 아침>만이 운나쁘게 작가와 인연이 없었던 모양인데 바로 이 그림을 영감삼아 원고지 30매 분량(A4 3매)의 소설공모전이 진행중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끝이 날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의 메모들도 해뒀다. 이야기가 나올런지 모르겠다.

그림을 본 순간 내가 최근에 생각거리로 삼았던 것이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전해 보려고 한다.

17 작품 중 한 작품을 읽어봤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알라딘 사이트 렉이 걸린 건지 버벅거린다. 알라딘의 습관적 게으름.

스티그 라르손의 유작이 된 [밀레니엄]이 놀랍게도 작가의 죽음으로 미완의 임무를 이어갈 새작가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를 임명하고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문학동네가 판권을 산 모양이다.

오 이런 일도 있군.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는 스티그 라르손처럼 기자이자 작가.

범죄사건 전문기자이자 97년에 작가로 데뷔한 인물이기도 하다니 밀레니엄을 새로운 시리즈로 이어가기엔 적합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꼭 연장선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독립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나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계속 나온다. 스티그 라르손이 손댄 마지막에서 리스베트는 미카엘의 품에 안겼던걸로 엔딩을 맞았던 것 같은데(기억이...) 나는 그런 결말이 별로였다. 그래도 마가릿 애트우드보다는 낫잖아. 사랑밖에 난 몰라 식의 여성 캐릭터는 딱 질색이라서. 왜 여성 캐릭터에만 그런 요구를 하냐고 뭐라할 수도 있겠다. 여성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소비되는 거 싫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손에서 리스베트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반 걱정반.

새 시리즈로는 6권까지 출간된 예정이라 한다. 우선 4권이 먼저 새롭게 나왔다. 새롭게 나왔다지만 [거미줄에 걸린 소녀]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권은 스티그 라르손의 작품을 문학동네판으로 단장해서 내놓은 것.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영화로도 제작되는데 벌써부터 리스베트 역을 누가 맡느냐를 놓고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고.

 

9월 하순에 출간예정이니 아, 또 이 책 읽을 때쯤이면 9월도 다 보내고 추석준비 해야 할 날들이겠다.

집중력도 떨어졌을 뿐 아니라 집안일이 많아져서 도대체 내가 책을 읽고 나만의 시간을 얼마나 보내는지 측정을 좀 해보겠다고 수험생들이 한다는 초시계공부법에 힌트를 얻어 순수하게 책을 읽고 뭐 그딴 거 하는 시간을 재보았다. 첫날이었던 그제는 4시간 조금, 어제는 2시간... 좀 너무한듯. 집안일 외에 주로 하게되는 게 인터넷 서핑질인 듯.

나도 강박적으로 초단위로 일상을 재보는 그런 얼척없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해보니 내가 하루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일의 단위별로 시간을 재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러지 말자, 접었다. 자투리 시간을 잘 보내는 게 결국 시간을 확보하는 최선의 길일 듯싶다.

 

요즘 유투브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레전드라고 명명된 동영상을 찾아서 보고 있는데 세상에 참으로 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구나 소름끼치고 겁이 난다.

'신정동 엽기토끼' 사건은 어쩜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평범한 시민이 어느날 갑자기 한순간에 피해를 당한 사건들이라서 더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공포를 느꼈다. 범인이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지하철에서, 택시에서 내려 길을 가다가, 병원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여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

정말 용케도 운좋게 나는 살아남아 있는거구나를 느낄만큼 끔찍했다.

그렇다. 정말 그저 운이 좋았을 뿐 나 자신도 모르게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가 포기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조금 실망스러운 현시국을 보면서도 걱정이고.

날씨가 선선해져서인지 어째 마음이 스산하다. 성공하길 바란다.

 

길냥이 어미는 영영 오지 않을 모양이다. 새끼들에게 영역을 물려주고 어미는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뭉클했다. ....  대신 새끼들을 어찌해야할지 고민을 대신 짊어지고 전전반측했다.

좀더 자랄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추석지나고나서까지 여기를 들락거릴 지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의 동물보호단체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사료줄 때면 조심스럽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여전히 곁을 허락하지 않고 있고 나 역시 무리하게 녀석들을 만져보려 애쓰지 않는다. 나는 역시 생각이 먼저인 사람인듯. .....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은 반전만 가지고는 안되는 것 같다. 쓰리콤보 반전쯤은 뒤집어줘야 대단한걸, 인정하며 한번 봐줄만할듯.

처음 들어보는 사라 핀보로의 [비하인드 허 아이즈]는 그야말로 작가의 조종대로 읽게 되어 있는 소설이다.

기어이 이 작가가 뭘 어떻게 뒤집고 뜨악한 걸 들이밀지 끝을 봐야겠어, 라는 오기와 호기심으로 똘똘뭉친 독자일수록 작가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따라 작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어디든지 가는' '[작가의] 조그만 태엽인형'이 되어 홀딱 빠져들게 되어 있다.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반전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읽다보면 그 인물들의 각각의 진실들 '비하인드'에 빤히 보이는 것과 다른 진실이 있을 것임을 생각하기에 진실을 의심하면서 읽게 된다. 어쩌면 독자가 일차적으로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주요 인물을 다룬 처음 서술에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심플한 정답을 이미 세울 수 있다. 30페이지 정도 읽으면서 나는 메모를 해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생각한대로였다. 초반에 이미 세워졌음에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비하인드가 있을 거야.

.....

 

한번의 반전은 그럭저럭, 두번째 반전은 완전 뒤통수를 친다. 

두번째 반전의 중요한 키는 이미 앞에서 암시된 바가 있기에 의심하면서 읽었지만 이렇게 반전을 삼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점에서 작가에게 한수 접었다.

그러나 소설에서 중요한 방법으로 쓰인 그것이 독자와 정당한 게임이 되는 것인지, 다소 맥빠진 점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 날 정도는 아니다.

 

카프카가 그랬다지.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모른다." 바보같은 선.

 

사실 이 소설을 읽어봐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이윤 따로 있지만 다 읽고 나서 보니 뭐 건질만한 게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엔딩장면은 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의 마지막만큼이나 짜릿(소름이 더 맞겠다)하다고 할까.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 작가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어떨지 얼른 그책도 집어들어야겠다.

 

 

 

 

 

 

 

 

 

 

 

 

 

 

 

 

 

르레 클레망,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1960)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 <태양은 가득히>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이 포스팅을 하면서 문득 든다. 소설과 영화 모두로부터... . 판타지 버전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 달력 9월의 작가는 토니 모리슨이다. 1931년생이니 올해 86세 할머니.

 

"당신이 정말로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아직 그런 책이 없다면

당신이 직접 써야 한다."

 

 

 

할머니, 만세!!!

 

지쳐서인가.... 장르소설이 당긴다.

집나간 집중력은 돌아올줄 모르고 밤이 되면 눈마저 침침해져서 잠자기 전 책읽기의 재미를 잃은지 오래다.

 

대신 팟캐스트를 듣는데 이어폰줄을 얼굴로 밟고 자는 바람에 얼굴에 긴 줄자국이 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

 

앤 후드, [내 인생 최고의 책], .... 지루해하고 있음.

사라 핀보로, [비하인드 허 아이즈] ... 평점이 좋은데 대단한 반전이 있는 모양. 책속의 밑줄긋기 몇 문장들을 봤을 때는.. 한숨이 나왔는데 어쨌든 읽어보기로 결정.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이토록 달콤한 고통]... 일단 인물이 범상치 않잖아.

조금씩 읽고 있는 저부제(장밍밍), [고로,철학한다]... 난 이 여자 맘에 들어.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그녀의 결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철학이 비트겐슈타인 때부터 몰락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몰락... 그녀의 말대로 철학이 시대정신의 정수라면 철학의 몰락은 무림의 고수들이 안전하게 어딘가로 속해버린 뒤의 일과 함께 온 것인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이어서 다룬 버트란트 러셀에 대한 그녀의 애정.

"내게 러셀은 한 번도 모호한 철학자였던 적이 없다. 물론 그에게는 단점이 많다.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에 돈을 벌기 위해 수준이 떨어지는 원고를 쓰기도 했고(어떤 거지?)그의 저서 [서양철학사]는 오류투성이다(오 마이 갓. 나 이책 샀잖아..). 하지만 이런 단점들도 러셀에 대한 나의 애정을 꺾을 수는 없다. 그는 진실하고 인간적이며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오류투성이라고 했지만 [서양철학사]가 그녀에게 철학을 시작하던 때의 계몽서였다는 고백.)

비트겐슈타인에게 강의를 듣기도 했고 친구로 지냈던 미국 철학자 노먼 맬컴의 회상이 들어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추억]을 읽다보면 한치의 어긋남이나 허술함도 그냥 넘어가지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칼같은 성격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사적인 글들을 읽어보려 한다.

일기, 에세이들. 특히 여성작가들의. 

 

 

 

 

 

 

 

 

 

 

 

 

 

 

 

 

 

 

 

 

 

 

 

 

 

 

 

 

 

늘어난 근심 하나 더. 냥이들. ... 어미는 나타나지 않고 새끼들 세 마리가 남았는데 스치듯 지나갔으면 좋으려만,

아직은 TNR도 어려운 단계라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떠나지 않고 계속 여기 머문다면... 겨울오기전에 결단해야 할 것 같다.

나 혼자만이었다면 이렇게 어렵지 않았을텐데 함께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9월도 잘 나보자꾸나, 나비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9-0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읽고 싶은 책이 없어서 직접 쓴다면 결국 저 혼자만 읽는 책을 만드는 일이 되겠군요. ^^

포스트잇 2017-09-01 17:07   좋아요 0 | URL
설마 혼자만 읽게될까요..만은, 그것도 좋구요 ㅎㅎ
 

경로는 대충 이렇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고 나서도, 왜 하루키는 메타포를 들고 나왔을까, 이데아는 뭐고, 메타포는 뭐며, 이 둘의 관계는 소설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결국 하루키는 뭘 말하고자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부제까지 달아가며 이런 소설을 썼는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저부제(장밍밍)의 [고로, 철학한다]를 읽는데 하이데거장에서 크게 감명받았다.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한나 아렌트의 유부남 애인, 나치에 협력했던 철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는 장밍밍의 글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하이데거 철학의 요지는 차치하고, 우선 그가 지닌 스토리 자체가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자연인으로서 하이데거는 철저히 루저였다. 그가 나치의 품에 안긴 순간 그의 비참한 말로가 결정된 셈이었다. (172)

 

그런데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 하이데거가 이익을 위해 나치에 협조했으며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유대인 스승 후설과 유대인 연인 한나 아렌트, 친구 야스퍼스를 내팽개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인격적으로 고상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한 치의 에누리도 없는 소인배였다. (172~173)

 

반전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자연인으로서의 하이데거는 그리 떳떳한 사람이 아니지만 철학자 하이데거에게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젊은 시절 신학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철학을 연구했고, 나치에게 버려진 후에는 낭만파 시인 횔덜린의 시와 사랑에 빠졌으며, 말년에는 아무도 모르는 숲속에 파묻혀 노자의 『도덕경』을 연구했다. 어느 단계에서든 그는 사색가로서 찬연한 지혜를 발산했다. (173)

 

재승박덕(才勝薄德).

 

나는 하에데거의 철학을 읽으면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어떤 힘같은 것이 느껴진다.(173)

 

[존재와 시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글을 읽고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지적 능력과 감수성.

하이데거는 나치와의 전력 때문에 말년을 깊은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횔덜린의 시를 연구했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본 저작도 저작이지만 나는 그가 참담한 말년을 대지와 접하면서 읽었을 횔덜린의 시가 궁금했다.

하이데거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이미 횔덜린을 연구해왔다지만 신상에 어려움이 생긴 이후 매달린 연구가 어떠했을지.

횔덜린의 시.

시는 어떻게 읽는가. 시를 어떻게 감상하는가. 다시 난제.

 

메타포와 시. 생각은 그렇게 흘러 '시인수업' 시리즈로 나온 엄경희의 [은유]에서 딱 멈췄다.

엄경희는 처음 접해보는 저자다.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된 바 있고 미당 서정주 시를 연구한 저서도 있다. 근데 또 예전에 민주노동당 지지선언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바 있다.

정치분야가 아니더라도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학을 떼는 사람이라 어쨌든 이 신문에 기고한다든가 하는 사람을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도 하는데 엄경희의 경우는 조선일보와 미당, 두가지에서 벌써 경고등이 켜졌었다.  

난 조선일보는 ㅈ자도 쳐다보기 싫다. 지 아무리 상식과 정보에 도움이 된다해도.

조심스럽게 시작한 [은유]를 읽고 난 지금은 엄경희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

시리즈 제목답게 '시인수업'을 더 받아보고 싶다. 은유의 세상인 시.

 

포켓북 형태의 작고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곱씹어 읽어볼만한 문장들과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다.

은유의 전복적인 의미부터 은유가 문학에서 차지해온 위상의 변화와 이론의 변화까지.

 

은유metaphor는 그리스어 metaphora에서 온 것인데 '넘어로'라는 의미의 meta와 '가져가다'라는 의미의 pherein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옮겨감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란 부적절한 명사를 옮겨서 붙이는 것인데 이는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혹은 유추의 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 라고 정의내렸다.

여기서 전이(轉移 transference)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시인은 사전속에 결박된 단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13) "여기에는 시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야심이 담겨 있다."

은유는 남에게서 빌릴 수 없는 것이며, 타고난 천품을 길러내는 징표라고 말함으로써 은유란 언어의 일상적인 양상에서 일탈될 것이며 은유적 표현은 특별한 정신행위라는 시각을 드러낸다.

은유가 단순히 수사법의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의미의 상호작용까지 나아가는 극도의 고급을 지향해나가는 단계를 설명하는 데서는 오랫만에 감탄이라는 감정을 기억해내야 했다.

예시처럼 다루고 있는 몇편의 시의 해석, 은유의 해석은 고차원적 사색과 잘 벼려진 감수성의 향연을 보여준다.

시를 읽고 싶게 한다. 더 많은 시를.

 

은유란 한 마디로 말해 사유의 층위가 움직여 의미의 양을 풍부하게 만드는 언어운용방식이라 할 수 있다. 원관념 A가 B로, C 로, D로 움직여갈 때 하나의 고립된 세계의 문이 열리고 섞이는 것이다.

 

 

왜 하루키는 '현현하는 이데아', '전이하는 메타포'같은 부제를 따로 단 소설을 쓰게 됐을까.

왜 부제를 만들었나

이를 통해 하루키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이 놀이는 움직이는 사유의 유희라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층위변동도 확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키는 인터넷시대 짧은 글, 짧은 사유에 대항하는 작업으로서 소설을 자신의 역할이자 임무로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움직이는 사유의 놀이(유희)

 

하루키의 [기사단장죽이기] 2권 '전이하는 메타포' 에서는 내가 메타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무엇이 움직였는가, 어디에서(A) 어디로(B) 전이되었는가, 어떤 층위인가.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이데아는 기사단장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모차르트의 <돈죠반니>에서 기사단장은 초반에 나왔다가 돈 후안에 의해 칼에 찔려 죽음을 당한다. 초반에 죽어버린 기사단장은 극 후반에 석상으로 나타나 돈 후안을 초대하고 그를 지옥으로 떨어트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이 모티프는 모차르트와 아버지와의 관계선상에서 극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가면을 쓴(얼굴없는) 남자가 의뢰한 레퀴엠의 작곡과 더불어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이 모든 게 버무려져 있는 느낌이다. 오쓰카 에이지식대로 말하자면 '샘플링'.

 

요양원에 누워있는 도모히코 앞에서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과 같은 행동을 재현함으로써 '나'는 기사단장의 외피를 쓴 이데아를 죽이고 메타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견 지옥으로 떨어짐. 이데아를 죽이자 메타포의 세계가 열린다. 메타포의 세계는 모든 연관성의 세계에서 오로지 '나'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화가이다. 추상화로 시작해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한다. 아내의 갑작스런 이혼 통보로 집을 나와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오랫만에 '나'는 추상화의 세계를 다시 불러내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다. 일종의 블록현상(writer's block)을 겪는다. 이 무렵 어디선가 나는 소리에 이끌려 다락방의 숨겨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한다.

이후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 이상한 일들의 절정은 마리에의 실종이다. 마리에의 실종은 이데아를 죽이고 '메타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 그곳에서 '나'는 메타포의 강을 건넌다.  

 

'전이하는 메타포'. 이제 A는 무엇이고 B는 무엇으로 전이되었는가. 이데아를 죽이고 비로소 창작의 뮤즈를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하면 어떤가.

메타포의 세계 이쪽에서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가는 이유는 사라져버린 마리에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내'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하루키는 어쩌면 작가로서의 어려움과 동시에 그럼에도 건너야 하는 운명같은 임무를 은유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현재 이야기, 소설가가 처한 상황, '흑백을 구분짓는 인터넷'과 '단편적 사고, 짧은 문장'의 시대와 대면하고 있다는 작가로서의 자각을 은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작가의 어려움. 작가의 블록.

[하이퍼그라피아](앨리스 플래허티)라는 책을 떠올리고 찾아봤더니 그책의 마지막 장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도 '은유, 내부목소리, 뮤즈'이다.

 

이책을 읽었던 때가 까마득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찾아봐야 할 것 같다.

하이퍼그라피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생각들을 써대는 창작자의 상태이고 반대로 블록현상은 쓸 수 없는 상태다.

소설가의 임무가 재고되어야 할 지금, 하루키는 소설가가 겪는 블록현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강을 건너게 해주는 '얼굴없는 남자'. '나'는 '얼굴없는 남자'의 배에 올라타 강을 건넌다.

그전에 강을 건너게 해줄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대가'는 마리에의 '펭귄 부적'이다. 그 '펭귄 부적'을 대가로 주고 나는 강을 건넌다.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데스의 강',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작가로서는 죽음의 도하(渡河)일지도 모르는. 죽음같은 도하를 이룬 뒤에야 작가는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속에 와타루 멘시키의 와타루는 '건너다'이다. 와타루를 '건너야'만 한다. 와타루가 은유 혹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은유의 필연적 과정에 있는 남자이다. '믿음'이라는 키워드와 관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포스팅은 머리속에서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계속 읽기 연장선에 있다.

이데아를 죽이고 열리는 메타포의 세계에서 일종의 죽음의 도하를 하는 이야기작가 하루키.. 오늘 내가 떠올린 하루키.

 

 

 

 

 

 

 

 

 

 

 

 

 

 

 

 

 

폴 리쾨르 사상의 연구서 정기철의 저 책을 엄경희는 어려운 리쾨르의 은유이론을 매우 친절하고도 상세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유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참고문헌'이라고 한 반면 이런 책 소개에서 반드시 만나야하는 로쟈님의 2006년 페이퍼에는 조금 읽어보고 도서관에 반납한 책이라고 되어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손꼽힐만하지만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최근 은유관련 소개서에 다시 이 책이 들어있는데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신 것은 아닌지.

 

폴 리쾨르의 은유까지 아우르는 은유의 이론에 대해서는 보다 전문적이고 깊이있는 독서를 원한다면 관련 도서까지 읽어보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괜찮다.

 

엄경희는 마지막에 은유는 궁극적으로 고착된 것, 소멸된 것에 활력을 불어넣고 보다 가치있는 세계를 향해 사유의 움직임을 열어놓는 풍요의 지평이다고 찬미한다.

A에서 B로 건너가는 순간이동의 긴 여정은 놀이의 즐거움과 삶의 진지함이 갈마드는 영역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한 위대한 예술가가 구현해낸 정교한 사유와 미감을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고 끝맺는다.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한 책이었다.

시를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도구를 하나 쥐게 된듯한 느낌. 각 다른 저자들이 다른 주제들을 다룬다. [패러디]와 [제유]가 이미 나와있고 앞으로 [직유](유성호), [환유](권혁웅)가 계속 나올 예정인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