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만 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인식과 경험을 항상 구성하는 것은 아닐 지라도, 항상 인식과 경험을 매개하긴 한다.  - P202

프로이트에게 외디푸스 단계는 아이가 사랑의 대상으로서 엄마를 포기하고 아빠와 동일시하는순간을 의미한다.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이 순간이 바로 아이가 소위 "상상계"에서 빠져나와 "상징계로 진입하는 시점이다. 라캉의 상징계"란 그가 "아버지의 법"이라고 명명했던 것, 바로 상징적 "팔루스" (phallus)에 의해 지배되는 어른의 세계, 규범적이고 이성적인 가부장적 세계를 의미한다. 상징계는 자아와 타자(특히 엄마)가 분리되고, 언어를 습득하고, 욕망이 만들어지는 특징을 지닌다.
상상계는 전외디푸스 단계와 동일하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아와 타자와의 구분을 알지 못하고, 언어도 없고, 상실감도 없다.  따라서 욕망도 없다.  정체성의 형성은 언어를 습득하고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런 과정은 상상계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엄마와 하나였던 느낌, 바로 그 느낌을 억압함으로써 무의식이 함께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진입하더라도 상상계는 쉽게 극복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이들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직선적인 연속의 과정으로 보는 대신, 다른 대립쌍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 P203

 이전 장에서 보았듯이, 여성들은 엄마 관계를 포기하고 아빠와 동일시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엄마를 포기하면 아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전망을 갖게 되는 남아들과는 다르다. 엄마 관계의 무의식적 힘을 언어로 방출하는 글쓰기, 그것이 바로 여성의 차이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본질이다. - P208

그런가 하면 이리가라이는 "우리가 함께 똑같은 언어를 계속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똑같은 역사를 재생산하게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서구의 가부장 문화에서 여성의 타자화에 대한 이리가라이의 분석은 식수와 닮았다. 그러나 이리가라이가 강조하는 것은, 가부장제는 여성을 남성의 반대, 혹은 열등한 복사본으로 만들면서 (여성질의 존재보다 페니스의 부재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실제로 여성성을 남성성과 똑같은 것으로 규정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팔루스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는냐에 오로지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똑같다는 뜻이다. "잘 들어보라. 우리 주변에 남자와 여자는 모두 다 똑같다. 똑같은 토론, 똑같은 주장, 똑같은 상황, 똑같은 당김과 분리, 똑같은 어려움, 똑같은 연결 불가능성. 똑같은... 같은... 언제나 똑같다"(205). 식수는 ‘타자성‘과 ‘차이‘가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리가라이는 ‘타자성‘이 ‘같음‘
을 감추기 때문에, 여성의 차이는 문화와 상징계 속에 기입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여성으로서 여성의 부재에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211

크리스테바는 여성성을 상징계의 질서를 넘어서는 위치로 규정한다. "넘어섬"은 항상 동시에 상징계의 흔적을 지닌다. 상징계에의해 규정될 지라도 말이다. 크리스테바에겐 여성성이 전체 시스템에서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성은 그 시스템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보여주는 공간, 혹은장소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이란 세미오틱과 상징계가 만나는 가장자리에 있다. 그 곳은 "안"에 있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위치다. 육체적 차이를 언어 속으로 써넣는 작전을 사용하여 여성을 가장자리나 한계로부터 움직여 중심 무대로 가는 것, 그것이 전략이다. 그 전략은 상징계의 질서를 변경시키지 않을 것이고 다만 상징계에 의해서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앞선 인용에서 "어쩌면"이란 단어에 초점을 맞춰보면 여전히 모호함이 남아있다. 이 모호함은 다시금 성별화된 몸-생물-생리학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성별화된 여성 몸을 지닌 여성이 성별화된 남성 몸을 지닌 남성보다 여성성의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더 많을지라도, 식수와 이리가라이처럼, 크리스테바도 여성성을 생물학적 본질주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 P219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많은 논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모든 논쟁이 제1세계에서만 해당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주체의 죽음, 역사의 죽음, 형이상학의 죽음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별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서구에 사는 여성들에게는 꽤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 P278

카터의 소설이 신체적 물질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빈번하게경제적 유물론이 함께 따라 나온다. 이 점은 리찌의 분석에서 가장분명하게 드러난다. 리찌 왈, 결혼은 "많은 남자 대신에 한 남자에게 행하는 매춘" (21)이라고 정의한다. 페버스의 써커스 그네타기는 "순수하게 상징적인 교환" 인데, 이를 "생산적 노동"(85)과 비판적으로 비교한다. 또 『피가로의 결혼』을 "계급 분석을 위하여" (53)즐겨본다. 페버스가 발저와 연대함으로써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해 길게 연설하자, 이에 리찌는 떨떠름하게 대답한다. "그것보다는훨씬 복잡한 거야. 분석을 좀 제대로 해봐. 그리고 나서 얘기합시다"(286).  - P285

퀴어 이론을 페미니즘 이론에서 완전히 빼내버림으로써, 섹슈얼리티를 오로지 성적 행위로만 규정하고, 젠더는 오로지 남/여 정체성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명백하게 계속 지속되기 힘들다. 퀴어를 페미니즘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뭔가를 주장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생물학적 성(sex), 성적 귀속(ascription: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미리 정해져있는 속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경우, 역주), 젠더 정체성, 성적 취향, 성적 행위와 같은 이슈들이 서로 기동성 있게 서로 침투하는 개념들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 P296

 그래서 동성애라는 분류는 남성이 정의한 것이다. 그사실은 반동성애 법 제정이 동성애 여성보다 동성애 남성을 더욱 범법자 취급하는 데서 확인된다. 동성애 분류가 언제나 남성과 연관된다면, 레즈비안은 항상 페미니즘과 연결되었다.  - P298

이 책은 흑인 페미니즘이전통적으로 페미니즘 이론에서 차지해온 종속적인 지위를 그대로 보여 주면서,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금세기 페미니즘 이론의 궤적이 매우 백인 중심적이었음을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될것이다. 카민스키는 주장하길, "인종은 변화무쌍하고 다원적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종이 젠더와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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