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 노트 - 2009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오제은 지음 / 샨티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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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시들어서 죽은 줄 알았던 화분의 나무가 다시 새싹을 돋우는 놀라움을 만난 적이 있다. 다 시들어도 뿌리만 살아있다면 다시 자란다. 다 무너져도 삶의 뿌리만 살아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부모, 형제, 자녀, 친구… 그리고 하나님, 사랑의 근원은 절대 뿌리 뽑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뿌리와 잘 잇닿은 생명력이다. 그렇게 결국은 사랑 때문이고 결국은 사랑이다.

이해인 수녀도 메마름, 불안, 외로움, 불평 속에서 사랑의 부재를 봤다.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메마르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메마르고 차가운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불안하고 답답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이해인 時,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보이면 사랑의 부재는 허상으로 드러난다. 다만 보지 못할 뿐이다. 어떻게 늘 사랑과 이어져서 사랑으로 숨 쉴 것인가? 기도, 영성, 섬김, 연대와 참여… 수많은 길이 있지만 그 모든 길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길이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니.

오제은 교수의 『자기사랑노트』(샨티, 2009)는 자기와 화해하고 사랑하게 된 삶의 이야기다. 3년 반 동안 자살 충동에 시달린, 대인기피증 환자였던 저자, 너무나 미워서 죽이고 싶었던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도 사랑하며 서로를 치유하게 된 여정을 조심스레 고백한다. 사랑이 이끄는 치유의 길을 책에 담긴 한 이야기를 통해 나누고 싶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만큼은 내 감정이 절제되지 않는다. 아내와는 알 수 없는 대화의 장벽이 있다. 심지어 나의 행동이 항상 아내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그런데 그룹의 인도자는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그분의 말씀이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내 아버지의 이미지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너무도 억울했고,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통곡했다. 일 년 전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도 소리 내어 울어보지 못한 내가…”(140)

그는 다른 이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곤 그녀를 껴안고 통곡한다. 자기 안의 바윗덩이를 치울 방법을 구하자 그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방법을 듣는다. 그날 저녁 숙소에서 그 방법대로 아내에게 고백한다.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보!’ 처음으로 ‘여보’라는 말을 건네자 그 한마디에 바윗덩어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사랑이 선사한 새 세상을 만난다.

“아내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내가 그렇게 자랑스럽고 행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밤새도록 ‘여보’라고 불렀다. 17년 동안 못해본 ‘여보’를 그 밤에 다 불러버린 것 같다. 행복한 아내의 모습 속에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보였다. 그날 밤 이후로 나의 모습이 확 달라졌다.”(141)

절대로 아빠처럼, 엄마처럼 안살거야! 하지만 어느새 그렇게도 싫었던 그 모습 그대로, 그 표정, 그 성격과 똑같이 살아가는 자신을 만난다. 내가 증오하던 그 누군가를 뛰어넘지 못하면, 누군가를 증오하는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면, 내 마음도 내 삶도, 내가 믿는 하나님도 그 상처 안에 갇히고 만다. 하나님도, 믿음도 상처를 주는 가시가 되기 쉽다. 물과 불이 함께 일 수 없듯, 증오하는 마음 안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없고, 독 한 방울이 맑은 물을 독으로 물들이듯, 온전한 사랑과 증오는 함께일 수 없다. 마지막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때에야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이끄는 회복과 치유의 길은 늘 우리 곁에 열려 있다. 이 책에 담긴 치유와 회복의 사연들이 사랑의 손잡고 길 떠날 설렘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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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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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어디선가 이 책에 대한 안내글을 접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 중에 하나로, 이 어려운 시대를 초인되어 이겨내야 한다는 식의 등떠밀기가 아닐까, 하며 스쳐지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니체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찾아서 별 기대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자기계발서로 봤던 의심이 정확히 틀렸다. 흥미진진하게 마음을 사로잡아 니체의 시선으로 삶의 역경과 절망을 바라보는 매력을 맛보게 해주었다.

니체 자신도 천재적인 재능으로 일찍 교수가 되었지만, 질병으로 교수직을 떠나 홀로 글을 쓰며 여생을 초라하게 지냈다고 한다. 책을 썼지만 스스로 출판비를 지불해야할 만큼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한 불운한 천재 철학자. 그런 그가 삶의 역경과 어려움들을 어떻게 만나는지 이야기할 때, 그것은 살아있는 삶의 철학이었다. 힘에의 의지, 초인... 그 근원적인 지향성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우리 시대에 돌파구를 보여준다.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는 글이 더 읽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고, 더 길게 맛보고 싶어 하루 하루 아껴 읽었다. 이제 박찬국 교수를 통해 소개받은 니체를 그의 저작들을 통해 더 만나보고려 한다. 니체의 세계를 만나는 예고편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역경을 보다 당당히 맞서고 싶은 의지를 되살리고 싶을 때 다시 읽고 싶다.

 

[밑줄 묵상]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그런 물음이 제기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삶을 재미있는 유희처럼 살아갈 때에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해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주목해주십시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어떤 이론적인 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고, 그런 물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만 해결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그런 물음은 그것 자체가 해소되어서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_박찬국의 "초인수업" 60, 61.

몸이 약하면 
등산이 힘겨운 문제이지만
몸이 건강하면
등산이 즐거운 유희입니다.
맘이 약하면
삶의 오르막 힘겨운 문제이지만
맘이 건강하면
삶의 오르막도 즐거운 유희입니다.

문제를 만나는 두 가지 길
문제를 해결하는 길과 해소하는 길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
문제도 아니게 만들 때
문제는 사라지고 답은 불필요해집니다.
때론 문제를 풀려고만 하기 보다
문제로 보고 풀려고만 하는 
나를 먼저 풀어줘야 풀립니다.

그러니
삶의 오르막과 문제들 앞에서
문제도 아니게 맘은 강건하게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눈은 맑게!

해오름편지197. 해결과 해소
하태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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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All 예수로 충분합니다
튤리안 차비진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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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1, 2년 사이에 신앙의 기초와 본질에 대한 책들이 개신교계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래디컬"이나 "펜인가 제자인가"... 그와 맥을 같이 한다고 알리고 싶었는지 검은 바탕에 제목만 흰 글씨, 펜인가 제자인가라는 책과 동일한 디자인이다. 사실 그래서 시선이 갔고 펼쳐 보게 되었다.

2. 한국의 개신교회가 기복적인 신앙과 교회의 외적 성장에 치우친 문제점은 오래도록 지적 받아왔다. '그건 아니다!'라는 목소리들이 들끓었고 끊임없는 추문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았기 때문에 그럼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했던 것일까. 개신교 서점가에서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책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뿌리를 튼튼히 하고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거대한 물음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그 대답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을 수 있다. 바로 나 자신이 그 대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JESUS ALL, 원제 Jesus+Nothing=Everything 이 책도 믿음과 신앙의 본질을 묻고 있다. 정말 예수님이면 충분한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참 신앙인가? 목회로 승승장구하던 저자 튤리안 차비진 목사가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믿음의 본질을 새롭게 깨닫는다. 실패의 위기, 사람들의 비난 등 일생일대의 난관을 속에서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예수님이면 그것으로 족하고 충분하다고, 그리고 예수님+something은 은밀하고 교묘한 우상숭배일 뿐이라고.

4. 차비진 목사는 그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믿음을 나타낸다. Jesus+0=Everything이라고. 예수님+부흥, 예수님+성과, 예수님+성공, 예수님+평안... 이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정의롭고 가치 있어 보여도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율법주의 역시 예수님+도덕주의, 예수님+성과주의일 뿐이라고 본다. 이런 신선한 표현은 믿음의 본질을 다시 곱씹어 보게 한다. 자신의 믿음이 혹시 + 뒤에 붙은 무엇인가를 위해 + 앞에 있는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또한 우상숭배라는 것이 지극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5. 예수님이면 그것으로 충분한 믿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귀에는 낯설지 않은 믿음일 수 있다. 하지만 삶에는 너무나 낯선, 삶과는 아찔한 괴리가 있는 믿음이다. 감동적인 찬양으로 고백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찬양은 찬양일 뿐 삶에서도 가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 삶에서 가능하지 묻기 전에 삶에서 가능하기를 기대하기는 하는 것일까? 어쩌면 삶과의 그 아찔한 괴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기 보다는 가능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6. 펜인가 제자인가 처럼 재치 있고 번뜩이는 비유나 예화 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는 않는다. 정말 예수님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처럼 주로 성경말씀을 찬찬히 풀어간다. 그래서 좀 읽어나가는 과정이 퍽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난 예수님으로 충분한 믿음 안에 있는가? 왜 그런 믿음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예수님이면 충분할 수 있는가? 물론 차비진이 이런 물음들에 대해 대답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직하게 이 질문 앞에서 서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만의 정직한 대답과 삶의 열매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책은 적어도 내겐 성공적이다. 그 물음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7. 기억해두고 싶은 화두가 있다. 저자의 관점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책을 읽어나가다가 떠오른 화두다. 우선 예수님으로 충분한 믿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나 하나만을 바라보면 충분하다고 자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에 착취당하며 고통 당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도 예수님이면 족하다고, 그러니 그들도 족하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8. 또 한 가지는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자칫 더 교묘하고 은밀한 자아집착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예수님 안에 온 우주의 충만함이 깃들어 있으니 다른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만 선택하면 결국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읽힌 부분들이 있다. 만일 이것이 예수님으로 족한 믿음이라면 결국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 예수님을 택하는 자아의 욕망은 그대로가 아닐까? 아니 더욱 강력해지고 견고해지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을 택할 때,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통해 충만함을 누릴 수 없다 해도 충분할 때, 정녕 자신은 죽는 참 믿음이 깨어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 대답은 내 신앙의 현실 속에서 드러나고 확인되어야할 것이다. 예수님이면 충분한 그 사랑이 내 안에 두근거릴 때 진실은 분명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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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는 연습- 티베트불교의 영적 스승 나로파의 삶과 깨달음
초걈 트룽파 지음, 진우기 옮김 / 솔바람 / 2007년 9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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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르쉬 저작 전집- 개정판
바가반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지음, 아서 오즈번 엮음, 대성 옮김 / 탐구사 / 2001년 3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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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닦는다는 것- 중국 화산파 23대 장문인 곽종인 대사의 선도 이야기
곽종인 지음 / 정신세계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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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 국내 유일의 라틴어 완역본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구영철 옮김 / 가이드포스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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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비추는 거울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디카 기종들은 주로 결과물이 멋지게 나오는 것들이다. 현실보다 빛깔도 곱고 분위기 있게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에 가깝게 나오는 기종들은 너무 사실적이라는 불만을 사며 판매량이 상대적으로 낮다. 이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첫 느낌은 후자에 속한다. 좀 무미건조하고 흥미를 끌지 못하는 퍽퍽함이랄까. 감동적인 예화나 친절하고 재미있는 표현 같은 것들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건조하게 핵심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불친절함과 퍽퍽함으로 한 호흡에 길게 읽기도 쉽지 않다. 오히려 한 번에 조금씩 읽고 음미하며 긴 호흡으로 읽어야할 책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쉬엄쉬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책의 행간에 마음을 빼앗긴다. 헤어나기 어려운 자기 내적 대화에 젖어든다. 이 책에서 뭔가 이용할 것을 찾으려던 마음은 길을 읽는다. 감동적인 예화나 이야기 꺼리, 남의 마음을 감동시킬 설교꺼리를 욕망하던 마음이 어느새 사라진다. 오히려 그런 자신의 욕망을 알몸 그대로 비춰준다. 원치 않던 뜻밖의 조우!
소위 ‘뽀사시’하게 나오는 디카를 선호한다 해도 거울만큼은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을 사용할 것이다. 거울이 이쁘고 멋지게 비춰주면 오히려 문제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디카라기 보다는 거울이다. 껍질의 아름다움을 꾸며 선보이려는 전시욕을 채워주지 않는다. 오히려 뽀사시한 겉모습 속에 감춰진 전시욕까지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고 고치고 싶은 마음을 깨워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부끄러워도 보게 하는, 부끄러움 너머에 숨겨진 깊은 아름다움을 보고 또 보며 가꾸게 하는 거울.

하나되는 따름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제목 그대로를 오직 그것만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다. 헛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그대로 따라가는 신앙의 길을 갈망한다. 하나님께 어떤 평강이나 위로나 기쁨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고난 그대로를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만으로 충분한 신앙의 길을 치열하게 쫓는다. 스스로에게 소중한 마지막 것까지, 결국엔 자신까지 철저하게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려 몸부림친다.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려 한걸음 한걸음 따라간다.

“만일 그대가 즐거이 십자가를 진다면, 십자가가 그대를 질 것이며, 그대를 고대하던 목표, 즉 고난이 끝나는 곳으로 이끌 것입니다. … 만일 그대가 마지못해 십자가를 진다면 그대에게 짐이 될 뿐이며 그대 자신을 더 무겁게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져야 합니다. 그대가 어떤 십자가를 내던진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아마 더 무거운 다른 십자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거룩한 십자가의 길 이외의 다른 길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온 삶은 십자가와 순교였건만, 그대는 어찌 고요와 기쁨을 찾고 있다는 말입니까.”(102)

토마스의 철저한 따름이 읽는 이의 욕망을 비춘다. 사랑한다고, 찬양한다고, 감사한다고 고백하던 그 아름다운 말과 노래 뒤에 숨겨진 욕망을. “비록 하나님을 맛보지 못한다 해도 언제나 그를 믿고 소망”(118)하려는 그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한 푯대이다. 따르고 또 따라갈 유일한 푯대로서 그에게 그리스도는 ‘따름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준다. ‘믿습니다’가 실은 무엇인가를 ‘원합니다’라는 뜻의 주문으로 전락한 현실을 비춰준다. 그 부끄러움에 무너진 마음의 여백 속에 토마스의 기도가 들려온다. 철저하게 복종하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은총을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토마스의 기도가 어느새 자신의 기도가 되고 소망이 된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늘 가까이 두고 틈틈이 내면을 그대로 비춰보고 싶은 영적 소원을 일깨운다. 십자가의 흔적, 그 상흔에 맞춰 내 마음을 다듬으며 그와 함께 기도하고 싶게 한다.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멀리서 더 가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수도원의 수도자를 위해 기록한 책이다. 하지만 수도자의 관점에서 쓰인 이 글들이 그럼에도 세속을 너무나 정확히 보여준다. 범인들의 욕망과 두려움과 감정들, 그 변덕스러움과 연약함까지도 그대로 비춘다. 세속의 두려움이나 욕망과는 거리를 둔 삶 속에서, 수도적 삶을 위해 기록된 글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세밀한 감정의 움직임까지 포착해 내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깨닫는다.
화장실 안에서 시간이 흐르면 그 냄새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욕망과 두려움에 붙들려 생존의 현장에 뒤엉켜 살아가는 이들은 오히려 감각을 잃는다. 자신이 무엇에 붙들려 있고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이고 얼마나 죽어가고 있는지. 세상에 무슨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어떤 놀라운 사건이나 지식이 나타나고 있는지는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를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은 언제 발견하는가? 모든 것이 무너져 멈출 수밖에 없을 때, 세속에서 벗어난 곳에서 홀로 가만히 바라볼 때가 아닌가. 너무 가까우면 빠져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멀리서 볼 때 더 깊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수도자의 삶이 오히려 세속의 삶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적절한 삶의 자리일 수 있다. 멀리서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삶, 그것이 바로 수도자의 삶이다. 물론 세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바란다 해도 너무 먼 이야기일 수도 있고 원치 않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속 안에서도 그 욕망과 두려움의 분주함 사이로 작은 균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의 분주함 사이에 틈을 만들고 잠깐씩이라도 영적 독서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것, 그것만으로도 영혼의 생명은 두근거리기 시작하리라.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일상의 틈으로 영혼의 있는 그대로를 비춰주고 두근거리게 할 훌륭한 거울임에 틀림없다.


참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국내 번역본은 다양하다. 그 중에 라틴어를 완역한 것은 가이드 포스트의 구영철 역과 두란노의 박동순 역(2010) 두 가지가 있다. 그 중에 구영철 역을 선택한 이유는, 번역자의 전문성과 원전 번역의 충실성, 그리고 휴대성에 있다. 독일에서 신학을 전공한 구영철은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 했다. 문단을 나누고 번호를 다는 것도 다른 번역본들과 차별된다. 원문에 임의로 단 번호와 문단 구분을 제외했다. 그리고 번역에 있어서도 원문의 댓구적 표현 등을 그대로 살리려 했다. 그리고 가이드포스트판은 약간 작은 하드커버로 편집되었다. 글자가 조금 작다는 단점이 있지만 휴대하며 언제 어디서든 잠깐씩이라도 읽고 묵상할 수 있다는 더 큰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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