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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 국내 유일의 라틴어 완역본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구영철 옮김 / 가이드포스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그대로 비추는 거울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디카 기종들은 주로 결과물이 멋지게 나오는 것들이다. 현실보다 빛깔도 곱고 분위기 있게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에 가깝게 나오는 기종들은 너무 사실적이라는 불만을 사며 판매량이 상대적으로 낮다. 이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첫 느낌은 후자에 속한다. 좀 무미건조하고 흥미를 끌지 못하는 퍽퍽함이랄까. 감동적인 예화나 친절하고 재미있는 표현 같은 것들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건조하게 핵심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불친절함과 퍽퍽함으로 한 호흡에 길게 읽기도 쉽지 않다. 오히려 한 번에 조금씩 읽고 음미하며 긴 호흡으로 읽어야할 책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쉬엄쉬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책의 행간에 마음을 빼앗긴다. 헤어나기 어려운 자기 내적 대화에 젖어든다. 이 책에서 뭔가 이용할 것을 찾으려던 마음은 길을 읽는다. 감동적인 예화나 이야기 꺼리, 남의 마음을 감동시킬 설교꺼리를 욕망하던 마음이 어느새 사라진다. 오히려 그런 자신의 욕망을 알몸 그대로 비춰준다. 원치 않던 뜻밖의 조우!
소위 ‘뽀사시’하게 나오는 디카를 선호한다 해도 거울만큼은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을 사용할 것이다. 거울이 이쁘고 멋지게 비춰주면 오히려 문제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디카라기 보다는 거울이다. 껍질의 아름다움을 꾸며 선보이려는 전시욕을 채워주지 않는다. 오히려 뽀사시한 겉모습 속에 감춰진 전시욕까지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고 고치고 싶은 마음을 깨워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부끄러워도 보게 하는, 부끄러움 너머에 숨겨진 깊은 아름다움을 보고 또 보며 가꾸게 하는 거울.
하나되는 따름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제목 그대로를 오직 그것만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다. 헛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그대로 따라가는 신앙의 길을 갈망한다. 하나님께 어떤 평강이나 위로나 기쁨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고난 그대로를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만으로 충분한 신앙의 길을 치열하게 쫓는다. 스스로에게 소중한 마지막 것까지, 결국엔 자신까지 철저하게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려 몸부림친다.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려 한걸음 한걸음 따라간다.
“만일 그대가 즐거이 십자가를 진다면, 십자가가 그대를 질 것이며, 그대를 고대하던 목표, 즉 고난이 끝나는 곳으로 이끌 것입니다. … 만일 그대가 마지못해 십자가를 진다면 그대에게 짐이 될 뿐이며 그대 자신을 더 무겁게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져야 합니다. 그대가 어떤 십자가를 내던진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아마 더 무거운 다른 십자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거룩한 십자가의 길 이외의 다른 길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온 삶은 십자가와 순교였건만, 그대는 어찌 고요와 기쁨을 찾고 있다는 말입니까.”(102)
토마스의 철저한 따름이 읽는 이의 욕망을 비춘다. 사랑한다고, 찬양한다고, 감사한다고 고백하던 그 아름다운 말과 노래 뒤에 숨겨진 욕망을. “비록 하나님을 맛보지 못한다 해도 언제나 그를 믿고 소망”(118)하려는 그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한 푯대이다. 따르고 또 따라갈 유일한 푯대로서 그에게 그리스도는 ‘따름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준다. ‘믿습니다’가 실은 무엇인가를 ‘원합니다’라는 뜻의 주문으로 전락한 현실을 비춰준다. 그 부끄러움에 무너진 마음의 여백 속에 토마스의 기도가 들려온다. 철저하게 복종하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은총을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토마스의 기도가 어느새 자신의 기도가 되고 소망이 된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늘 가까이 두고 틈틈이 내면을 그대로 비춰보고 싶은 영적 소원을 일깨운다. 십자가의 흔적, 그 상흔에 맞춰 내 마음을 다듬으며 그와 함께 기도하고 싶게 한다.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멀리서 더 가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수도원의 수도자를 위해 기록한 책이다. 하지만 수도자의 관점에서 쓰인 이 글들이 그럼에도 세속을 너무나 정확히 보여준다. 범인들의 욕망과 두려움과 감정들, 그 변덕스러움과 연약함까지도 그대로 비춘다. 세속의 두려움이나 욕망과는 거리를 둔 삶 속에서, 수도적 삶을 위해 기록된 글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세밀한 감정의 움직임까지 포착해 내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깨닫는다.
화장실 안에서 시간이 흐르면 그 냄새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욕망과 두려움에 붙들려 생존의 현장에 뒤엉켜 살아가는 이들은 오히려 감각을 잃는다. 자신이 무엇에 붙들려 있고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이고 얼마나 죽어가고 있는지. 세상에 무슨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어떤 놀라운 사건이나 지식이 나타나고 있는지는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를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은 언제 발견하는가? 모든 것이 무너져 멈출 수밖에 없을 때, 세속에서 벗어난 곳에서 홀로 가만히 바라볼 때가 아닌가. 너무 가까우면 빠져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멀리서 볼 때 더 깊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수도자의 삶이 오히려 세속의 삶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적절한 삶의 자리일 수 있다. 멀리서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삶, 그것이 바로 수도자의 삶이다. 물론 세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바란다 해도 너무 먼 이야기일 수도 있고 원치 않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속 안에서도 그 욕망과 두려움의 분주함 사이로 작은 균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의 분주함 사이에 틈을 만들고 잠깐씩이라도 영적 독서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것, 그것만으로도 영혼의 생명은 두근거리기 시작하리라.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일상의 틈으로 영혼의 있는 그대로를 비춰주고 두근거리게 할 훌륭한 거울임에 틀림없다.
참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국내 번역본은 다양하다. 그 중에 라틴어를 완역한 것은 가이드 포스트의 구영철 역과 두란노의 박동순 역(2010) 두 가지가 있다. 그 중에 구영철 역을 선택한 이유는, 번역자의 전문성과 원전 번역의 충실성, 그리고 휴대성에 있다. 독일에서 신학을 전공한 구영철은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 했다. 문단을 나누고 번호를 다는 것도 다른 번역본들과 차별된다. 원문에 임의로 단 번호와 문단 구분을 제외했다. 그리고 번역에 있어서도 원문의 댓구적 표현 등을 그대로 살리려 했다. 그리고 가이드포스트판은 약간 작은 하드커버로 편집되었다. 글자가 조금 작다는 단점이 있지만 휴대하며 언제 어디서든 잠깐씩이라도 읽고 묵상할 수 있다는 더 큰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