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싹을 틔운 어린나무가 생장을 마다하는 이유는 땅속의 뿌리때문이다. 작은 잎에서 만들어 낸 소량의 영양분을 자라는 데 쓰지않고 오직 뿌리를 키우는 데 쓴다. 눈에 보이는 생장보다는 자기 안의 힘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시기, 뿌리에 온 힘을 쏟는 어린 시절을 ‘유형기‘라고 한다.나무는 유형기를 보내는 동안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따뜻한 햇볕이 아무리 유혹해도, 주변 나무들이 보란 듯이 쑥쑥 자라나도 결코 하늘을 향해 몸집을 키우지 않는다. 땅속 어딘가에 있을 물길을 찾아 더 깊이 뿌리를 내릴 뿐이다.그렇게 어두운 땅속에서 길을 트고 자리를 잡는 동안 실타래처럼가는 뿌리는 튼튼하게 골격을 만들고 웬만한 가뭄은 너끈히 이겨낼 근성을 갖춘다. 나무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보내는 유형기가 평균 잡아 5년. 나무는 유형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짧지 않은 시간 뿌리에 힘을 쏟은 덕분에 세찬바람과 폭우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성목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 P32
누구에게나 오로지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의 무게가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저마다 생의 대가로 무언가를 책임지고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 백창우 시인이 표현했듯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나서는‘ 것이 인생일지 모른다. 때로 넘어지고 때로 좌절하는 쉽지않은 일상에서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고 마음을 오롯이 나눌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인생은 살 만한 것일 게다. - P7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을 희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한 번쯤청계산의 소나무를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소나무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치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어야 하면 미련 없이 바꾸었고, 그 결과 소나무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덕분에 사람들 눈에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지만 그럼 어떤가. 소나무가 왜 ㄷ자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나면 그 지독하고도 무서운 결단력에 혀를 내두르게 될 뿐이다. 내일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오늘 이 순간의 선택에 최선을 다해 온 소나무.천수천형천가지 나무에 천 가지 모양이 있다는 뜻이다.한 그루의 나무가 가진 유일무이한 모양새는 매 순간을 생의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다. 수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무의 선택은 늘 ‘오늘‘이었다. - P21
지리산 종주를 마친 뒤에도 한동안 나는 목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됐지만 전처럼 높은바위를 오르거나 경사진 곳에서 내달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수술을 받기 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척도는내게 달렸고, 정말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 보는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최소한 나를 옥죄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고,옮겨 간 곳에서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된다는 것이다. - P27
나는 소박하고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 P45
땅바닥이 옴폭옴폭파인 곳마다 물이 말라붙어서 소금 결정이 되어 있었다. 어떤 결정은 장미 융단 같았고, 어떤 결정은 볏짚더미 같았고, 어떤 결정은 눈송이가 쌓인 것 같았고, 모두 소금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내가 연갈색 장미들을 조금 가져가려고 한 덩어리를 작게 떼어냈더니 갑자기 장미들이 덜 아름다워 보였다. 세상의 어떤 것은영영 잃어버린 상태일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멀리 있는 한 우리가 영영 잃지 않는다. - P68
건강과 질병은 아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팠지만가장 좋았던 순간들에 나는 온전했다. 건강했지만 가장 나빴던 순간들에 나는 아팠다. 어느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건강과 질병, 좋은 몸 상태와 나쁜 몸 상태는 끊임없이 번갈아가며 전경이 되었다가 후경이 되었다가 한다. 하나는 다른하나 때문에 존재하며 계속 서로 자리를 바꾸게 되어 있다.어느 쪽의 단어에도 맘 편한 휴식은 없다. ‘건강‘이라는 말은질병에 대한 공포로 채워질 수도 있고, ‘질병‘이라는 말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불만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회복 중인 사람으로 살면서 내가 좇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반대말이 없는말, 오로지 그 자체인 말이다. 그리고 내가 좇는 회복의 의미이자 질병이 주는 기회를 나는 ‘덤으로 얻은 삶‘이라고 부른다. - P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