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인간

 

어느 백제왕의 혁대는

비단벌레 껍질로 장식돼 있다고 한다

그 앞에 머리 조아린 문무백관과

궁녀들과 백성들이 있었을 것이나

사라져버렸고

백제왕도 사라져버렸다

 

모래인간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래가 된 인간은 많지만 모래로 된 인간은

없다. 모래는 잘 뭉쳐지지 않는다. 모래는 흩어진다.

모래는 흘러다닌다. 모래들이 물어뜯은 것 같은 움푹

한 미라는 있지만 모래로 빚은 태아는 없다. 사막에

사는 모래쥐도 그렇다. 모래가 되는 모래쥐는 많지만

모래로 빚은 모래쥐는 없다. 모래에서 끝나는 육체,

모래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모래로 흘러다니는

육체, 더 쪼갤 수 없이 잘게 쪼개져서 사막을 흘러다

니고 바람에 불려다니는,  더 이상 육체라고 부를 수 없

는 육체, 방황하는 모래들, 표류하는 모래들, 폭풍에

들려 빈 하늘에서 빈 하늘로 떼지어 날아가는 모래들,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누구의 뼈도, 그 누구의 살도

아닌,

 

남은 것은 혁대와

비단벌레 껍질에 흐르는 은하수,

4월의 황사는

고비사막에서 날아와

비단벌레 껍질과 속삭인다.

 

(최승호, 모래인간, 세계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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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1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에 잠들어

잠시 맺힌 모래인간

한 생의 침묵, 그 무게만으로도

영원을 향해 튕겨 나갈

흩날리고 바람의 춤사위에 휘감길.....

 

내 눈물이 마르고 마르고 또 말라

바닥이 갈라지면

깨어나 속삭이려나

날려가 속삭이려나



2004-04-07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시가 그려 보여주는 세계가 제 안에 비친 모습을
새겨보는 어설픈 무늬일 뿐이니까요.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래로 흩어진 그 전체 속에도 인간이 있고
인간 속에도 모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잠시 갖혀있어도...

모래-인간, 흩어지고 방황하고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는,
구심력은 사라지고 원심력만 남은 듯 하지만
아니 원심력조차 사라지고 무질서하게 휘날리는 듯하지만
실은 더큰 구심력, 지구의 구심력을 따라
더 큰 중심을 따라 모여 있는 모래.

모래인간이 있다면
예수가 흩어져 우주적 중심을 향해 휘날리는
그리스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2004-04-08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부끄러움, 어색함....걱정스러운 마음이 스칩니다. 앞으로 편한 누나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혹시 노란색 신호등이 켜진 것은 아닌지...^^::
김계호 교수님께 드렸던 반문에 놀라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또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면 제가 그 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보였었는지....^^::
어둠과 빛의 명상 성만찬 모임에 가셨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아!가고 싶어라....님의 체험기 기대해도 될까요....제가 못가는 대신 님께서 이렇게 가끔이라도 다녀오셔서 말씀해주시면 정말 기쁠 겁니다. 전 불교 참선(위빠싸나)이나 단전호습은 조금 체험해 봤지만 정작 기독교 전통의 관상을 직접 해본 적은 없어서.....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수업, 오늘 휴강했어요. 참석자들 중에 연회에 참석해야하는 분이 많았나봐요. 그 책이 정말 어렵더군요. 그렇게 어려운 책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그나마 종교론은 그 책을 번역하신 철학과 교수님께 한 학기 동안 배워서 그런대로 쫓아갈 수 있었는데....이책은....오기 충천입니다...^^
다음 주는 투표라 또 쉴 것 같아요....참 어둠과 빛의 명상 다음 주 목요일에도 하나요? 그럼 가볼 수 있을텐데...
제가 얼마나 님께 감사하는 지 모르시죠^^
님께서도 아늑한 쉼으로 충만하게 채우시는 주일되세요. 다음 주에 뵐께요...

2004-04-09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의미였군요. 다시 읽어보니 제가 님의 의문을 오해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더군요. "왜 없을까?"에 대한 의문을 "정말 없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 그만! 동문서답을...^^::
오히려 저의 모습에 대해서 제대로 보신 것 같습니다. 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향이 강한 INTP이거든요. 격한 감정이나 예민한 감수성, 혹은 다혈질적인 모습이 숨어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이성으로 그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어쩌면 그 수업 시간에 새롭게 보신 모습이 오해일지도 모르죠. 또 얼마 지나서 실은 처음에 판단하신 모습이 맞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은 저도 저를 잘 모르겠거든요.
벚꽃이라...제가 제일 좋아하는 벚꽃의 풍경은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벚꽃의 모습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시체처럼 교실에 앉아 있다가 문득 쳐다본 창밖의 풍경...벚꽃잎이 쏟아지는데 그 장면이 뭔가 신비한 빛깔로 제 뇌리에 각인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영향인 모르겠네요...
네 화요일날 뵈요....
 
예수는 누구인가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한인철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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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은 그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체험과 해석에 근거한다. 이런 '예수에 대한 믿음'은 '예수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지만 교회사 속에서 예수의 믿음은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근원인 예수의 가르침과 삶보다 '예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오강남 저, 예수는 없다 (현암사, 2001), pp. 192-195 참고) 

물론 교회의 신앙 전통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예수에 대한 믿음은 예수 당시와 초대교회의 콘텍스트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콘텍스트와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콘텍스트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삶과 믿음에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그것에 대해 직접 응답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이 예수의 신앙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성했던 것인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역사적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독특한 방법으로 연구해 나간 크로산의 책은 바로 이런 필요성을 충족시켜 준다. 그 결과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 가져다 주는 통찰력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존 도미닉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대안공동체를 통해 사회변혁을 추구한 현자

크로산은 "예수는 누구인가?"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연구 결과와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고 쉽게 설명한다. 그는 예수의 사회와 유사한 모든 사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예수가 살았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교차문화적 연구', 예수 당시의 그리스도-로마 및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연구', 신약성서 밖의 복음서까지 포함하는 '본문에 대한 연구', 이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한다.

그 방법론을 통해 재구성되는 역사적 예수는 다음과 같다. 예수는 문맹인 하층계급으로서 묵시종말적 설교가인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의 운동에 동참하지만, 후에 방향을 전환을 했다. 요한처럼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세계로 지금 여기에서 들어가야 한다고 봤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들이 실현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여 이로써 현재 삶의 구조에 도전했던 것이다. 예수는 공개된 저항과 은폐된 저항의 경계에서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식사'에 근거한 농민공동체를 의도했다. 이로써 극빈층(집없이 유랑하는)과 집이 있는 가난한 자 사이의 의존적 관계성을 형성하고 체제적인 악에 대해 비판하고 도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개자나 중보자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계속 유랑했다. 그런데 예수는 유월절이라는 긴장감이 최고조인 시기에 성전파괴 곧 정치, 종교적 억압구조에 대한 상징적 파괴를 행함으로 인해 국가사범을 다스리는 잔인한 처벌 방법인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크로산은 부활절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예수님의 뜻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고, 부활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한 경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한 가지 표현양식이고 오랜 세월을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사실 이외의 것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신앙과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을 근거로 거꾸로 조회해서 장착한 재구성이라고 본다.

3.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통찰력과 한계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C와 20C 중반까지의 연구를 통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과 발전의 측면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모습이나 객관적인 확실성을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역사적 예수의 삶과 행동의 특성과 윤곽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동안 성서학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 직면했던 한계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역사적 예수 연구와 크로산의 차이에서는 일종의 발전도 엿보인다. 예를 들면, 복음서 본문에 대한 비평방법만으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한 보어스는 예수를 중산층인 목수로 보지만, 크로산은 하층계급의 목수로 본다. 이런 차이는 크로산이 방법론으로 적용한 교차문화적 연구를 통해서 고대사회에 중산층이 없었고 농민계급은 주로 문맹이었음을 발견하고 적용한 결과가 가져온 차이였다. 크로산의 연구결과가 압도적인 우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오류를 최소화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응용해야할 주목할 만한 진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현대인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신앙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로산의 책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독자의 편지에 이런 점이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현대인들에게 상징적, 은유적, 종교적 표현들을 사실(fact)과 동일한 것으로 믿도록 강요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은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걸림돌이다. 이로 인해 교회를 떠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앙의 언어로 교리화된 예수 담론이 현대의 컨텍스트에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 새로운 담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희생양이라는 제의적 상징으로 형상화된 기독론과 이에 근거한 구원론은 현대의 컨텍스트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어렵다. 그러나 보어스의 관점에서처럼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실천으로서 약자를 돕는 예수의 실천이나 크로산의 예수처럼 개방된 식탁과 무상의 치유를 통한 대안 공동체로써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실천은 오늘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의미와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예수 담론이 형이상학적, 교리적 거대 담론의 공허함에서 일상적 실천의 담론의 생명력으로 성육화하는 역동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일상적 담론의 실천적 적용이 날카로운 체제 비판의 기능을 지닌다는 측면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의 기존 신앙에 불안감과 반감을 가져온다.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정경에 모든 신앙적 근거와 판단을 뒀던 신앙체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절대 유일의 기준은 해체되고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만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중심의 해체가 크로산이 본 예수의 사역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브로커도 인정하지 않고 직접 관계하도록 한 예수의 유랑. 정경과 그것에 대한 권위적 해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또 다른 브로커가 아닐까?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앙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근원적으로 재고하게 함으로써 그런 자유의 공간과 그 속에서 배워가는 길을 엿보게 한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교회의 전통을 근거로 삼아왔다. 하지만 '예수의 신앙'은 고통받는 민족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해서 구약을 새롭게 깨달은 신앙이었다. 그 신앙을 따르는 기독인은 역시 오늘 우리 이웃의 아픔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서 이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공간에서 각기 어울리는 해석을 추구하게 할 수 있다. 바벨탑을 허물면서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가 해체되지만 오히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 복음이 다양한 언어 세계로 침투해가듯이 고통받는 이웃을 바라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성서에 창조적 삼투압(渗透壓)을 가하게 한다.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론의 역사학적 측면의 한계가 있다. 역사학은 보편적 학문으로써 인간 이성에 의해서 설명한 가능한 것만을 객관적 진리로 허용한다. 성서와 같은 문서를 분석할 때는 사실과 의미의 긴장 관계에 직면하게 된다. 이 때 역사학적 비평은 인간 이성에 의해서 가장 높은 개연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는 사실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의미의 차원으로 모두 환원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결국 모든 의미는 가장 높은 개연성을 지닌 사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초월적 사실은 거세된다. 또 분명 객관적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크로산의 어투는 상당히 많은 부분 단정적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개연성에 기댄 역사적 재구성이다. 그러므로 "∼이다"가 아니라 "∼일 수 있다"가 가장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균형을 잃게 될 때 의미의 다양한 차원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개연성이 낮은 기적적인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성의 결여라는 이유만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되고, 결국 그런 본문들을 통해서 새롭게 열려지는 다양한 의미의 차원까지 잃게 된다. 개연성이 낮은 사실을 통한 의미의 차원에 개방적이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크로산이 기적에 대해서 논하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항상 해온 것이라는 전제를 사용한다."(p.134)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너무 내재적인 차원, 의미의 차원으로 가둬두려는 경향이다. 기적 이야기에는 의미의 차원이 있다. 하지만 기적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전제된 신념일 뿐이다. 초월적인 차원이 닫혀 있어야할 어떤 근거도 없다. 그것을 수용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모른다고 해야 객관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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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 한국인의 종교경험
차옥숭 / 서광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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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으로 자라나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관점을 지니고 자라났습니다. 특히 무교 보통 무당이라고 하는 무속에 대해서는 더욱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죠. 그러던 제가 무속을 무교로 보게 하고 무당을 새롭게 보게 된 것은 이 책을 쓰신 차옥숭 교수님을 만나 배우고 이 책을 읽으면서부터 입니다. 물론 그 교수님도 기독교인이셨죠.

이 책은 무교에 대해서 종교학자로서의 분석과 함께 무당과 굿에 참가한 사람들의 고백을 전해줌으로써 무교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줍니다. 단순히 학문적 분석을 통해 전해지는 경우에는 대부분 서구 종교학의 기준과 신학적 범주를 통해서 무교를 분석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라 해도 무교의 진면목이 은폐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무교인의 고백을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에 그런 한계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무교관련 서적과의 차별성이죠.

특히,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강신무가 되기 위해 내림굿을 받을 때 앞으로 무당이 되어서 살아가야 할 길을 일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무당들은 애초에는 무당일을 너무나 하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의 경멸하는 눈초리, 온갖 사람들의 고통과 한을 나누고 치료해줘야하는 힘겨움....  그 길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요. 어쩔 수 없이 무당의 길을 받아들이게 되고 신을 모시는 내림굿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그 길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알려주는 공수의 전통적 내용에는 원수된 자를 사랑하고 모든 백성의 아픔을 치료해줘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미신이고 이 사회의 병패라고 알고 있던 무당의 길이 그런 것을 지향할 줄이야....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기독교만의 독특한 종교성이라고들 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알고 있던 제게는 충격적이었죠.

또 다른 내용에 보면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좌우익 이념 투쟁 중에 섬전체에 엄청난 인명피해가 있었죠.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 없었던 4.3사태에 대한 비판은 우환굿이 벌어지는 굿장에서 울려퍼졌었죠. 굿장이 바로 사회 정치적 불의에 대한 비판의 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민중의 아픔이 연관된 것이라면 정치적 위협 앞에서도 폭로하고 비판하며 치유해주는 것이 무당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불의로 가득하고 약자들이 억압당하고 고통에 울부짖었던 시절 교회의 침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 모습이었죠. 

"무교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며 현세의 복에 집착한다", "무교는 비윤리적이고 사회적 관심이 결여되어있다", "미신일 따름이다." 등의 편견이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교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동안 힘없고 가난하고 억압당한 민중의 아픔을, 그 한을 함께 풀어주고 복을 함께 나눠왔던 아름다운 종교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종교 전통을 만나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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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6 0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0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옥숭 교수님과의 기억은 제게도 인상적이었죠. 잠깐 만나뵈었지만 제게는 참 좋은 스승님이셨죠. 자책감이 느껴지는 주말이라...INTP에서 P의 성향 때문인지 저는 늘 계획대로 않되고 그나마 계획도 잘 안세워서 ...님의 말씀이 오히려 경종이됩니다.
어제는 오후에 대전에 가까운 산에 가봤습니다. 벗꽃이 이제 막 피어나는 풍경, 그 조용하고 맑은 산이 저와 아내를 포근히 안아주더군요. 아내와 가능한대로 자주 가기로 했죠. 늘 그런 계획이 뜻대 잘 않이뤄지지만요^^

2004-04-06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0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시간은 MBTI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답답한 시간이었을텐데.../사실 제게도 님의 모습이 기억되어있습니다. 주로 전 장면으로 기억하는 편입니다. 헬라어 계절학기에 버스를 내려 학교로 가는데 앞에 님께서 단어장같은 것을 들고 보면서 가시는 뒷모습을 봤죠. 수업 시간에 가운데 쯤 앉으셨던 것도요..../사실 전 아이콘 얘기가 나오는 순간 긴장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과 다르면, 틀리면 어쩌나하고...다행히 안도의 한숨이 이어졌죠.^^::/열정을 쫓을 시간이 부족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제게도 깊이 이해된다면 믿으실지...저 역시 비슷한 조급함과 아쉬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무리가 되도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정도는 몇 학기만 하시면 그 바닥을 보실 것입니다. 별거 아니었음을 쉽게 발견하실거예요. 전 요즘 그런 쫓기는 마음에서 조금씩 자유스러워 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스스로가 즐거울 수 있고, 가장 진실한 제 고민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냥 오늘 하루 저를 붙드는 진실한 질문에 충실하고 제가 행복해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즐기려 애써봅니다. 그게 절 가장 행복하게 할테니까요. 목회와 영성 시간에 "저를 만들어 가는 모든 손길이 다 은사"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몇 년 앞서든 뒤지든 그건 단지 그분의 손길이 닿은 무늬일 뿐 누구의 잘남도 못남도 아니라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서평: 박일영 저, 한국 무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9)

[무교를 통해 깊어지는 기독교]

들어가면서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 전통이 바라보는 무교의 모습은 극히 부정적인 모습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던 초기부터 무교는 미개인들의 원시적 미신이자 어리석은 우상숭배로 폄하되고 적대시된 모습으로 매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속히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할 악의 뿌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그려진 무교의 모습은 오늘날 개신교 교회의 신앙 안에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박일영의 “한국 무교의 이해”는 무교에 대한 개신교의 이런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될 수 있다. 그는 무교에 대한 역사적 문헌들, 민족지 자료들 그리고 종교학, 민속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된 연구 성과들을 근거로 무교라는 종교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탐구한다. 그리고 무교가 지닌 긍정적인 모습을 회복시키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저자는 무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기독교가 무교신앙 깊이 스며있는 우리 민족의 종교성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대상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더 사랑하게 된다1)는 의미이다. 과연 이 잠언이 담고 있는 의미처럼 무교를 더욱 깊이 알게 되면 기독교가 무교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고 동시에 기독교 스스로도 더욱 깊어지게 될 수 있을까? 이제 박일영의 논지가 담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살펴봄으로써 그 가능성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몸 글


[ 깨지는 편견들 ]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교는 무속이라는 폄하된 이름으로 불리며 수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미신으로 치부된다. 계몽되지 못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극히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영락에 집착하는 이기적 욕망의 투사물로서 윤리성이 결여된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현대사회의 불안, 가치관 상실과 소외 등의 아노미적 현실에 처한 인간이 원시적 종교성으로 고착되어 버린 전근대적 병리현상 쯤으로 그려진다. 무교신앙은 미신적 방법으로 도피함으로써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실천적 해결을 상실하게 하는 병리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박일영이 분석한 한국 무교의 모습은 그런 편견들을 여지없이 깨고도 남는다. 그가 보여주는 무교는 우선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인 종교심이 아니다. 무교가 추구하는 “재수”는 단순히 금전운, 부와 행복, 건강의 의미가 아니라 “조화를 통하여 회복된 인간의 총체적 완성”(p.67)이라고 한다. 이 때 조화란 가족이나 친척 간의 관계,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 내의 관계, 인간의 살아가는 자연과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 곧 삶과 죽음의 관계에 발생하는 부조화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총체적 조화를 추구하는 무교의 종교성에는 개인적 이기심보다는 우주적 차원의 공생적 공동체 의식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무교의 종교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굿에는 이런 종교심이 잘 반영되어 있다. 대동잔치인 굿은 참여하는 공동체 모두와 함께 아픔과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치유한다. 즉, 함께 한을 풀고 복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 때 ‘함께’의 범위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저승의 죽은 자들, 신령들과 잡귀와 미물들까지 포함하는 우주적 차원이다. 무교의 세계관은 모든 사물 안에도 신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굿에서는 낮은 등급의 잡귀, 잡신들까지 함께 나누고 먹는다. 

무교는 총체적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윤리성 또한 중요시하게 된다. 저자는 무교이 대표적인 무교신화 “바리공주 무가”에 부모에 대한 효성, 나라에 대한 충성, 불쌍한 이를 도와주는 희생 등의 요소가 나타나 있다고 한다.(pp.181,182) 이외에도 무교의 윤리성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강신무가 되기 위해 치루는 내림굿에서 신어머니가 신딸에게 무당의 길을 일러주는 공수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온갖 역경 속에서도 모든 백성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오랜 가르침이 담겨있다.2) 또 제주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시왕맞이제에는 가족, 국가에서 인류보편의 영역에 이르는 윤리규범이 나타나있다.3) 무교에 윤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관점이 왜곡된 편견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들이다.

무교신앙이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치료되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 역시 왜곡된 편견임을 보여준다. 무교는 오히려 개인과 가족, 혹은 마을 공동체의 문제와 상처를 함께 공유하고 치료해주며 기쁨을 함께 나누는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무교는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전통의 종교로서 그 유구한 세월동안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치료해주었던 민중의 종교였다.

가족 중에 누군가 죽었을 때나 집안에 발생한 기타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위해 행하는 집굿, 한 지역 공동체 전체의 평화와 부귀를 기원하는 마을굿에서 이런 기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죽은 이의 넋을 위한 제의인 사령제 혹은 넋굿은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죽음이라는 사건을 가족과 공동체가 굿이라는 의례를 통해서 재체험케 한다. 이 과정은 내면에 감춰진 죄의식, 갈등, 상처 등을 안전하게 표출시키고 치료케 함으로써 그 충격을 흡수,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고, 또한 공동체와 함께 하는 치료과정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게 한다.

물론 이렇게 재해석된 무교의 긍정적인 모습 외에 부정적인 측면 역시 있을 것이다. 무교가 점이나 부적 혹은 굿을 통해서 단순히 개인적인 안락만을 추구하는 등 허황되고 미숙한 방식으로 오용된 경우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왜곡되고 미숙한 종교행태는 어느 종교에서든 존재한다. 어떤 종교에 그런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해서 그 종교 전체를 부정할 수 없듯이 무교 역시 그 안에 담긴 깊고 아름다운 종교성까지 부정되선 안될 것이다.


[ 무교와 기독교의 대화 ]

박일영이 한국 무교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하나는 우리 민족의 의식에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종교성을 이해함으로써 기독교가 한국의 토양에 더욱 깊게 뿌리내리도록 하려는 토착화이다. 저자는 우리 신앙의 뿌리인 무교신앙이나 민중종교를 미신시하거나 경멸하고 배척하게 될 때 뿌리잘린 자아상실의 미아신세를 면하기 어렵다고 강조한다.(pp. 234, 235)

토착화의 필요성은 무교가 그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해온 모습 속에서 암시되어 있다. 저자가 무교와 타종교와의 만남과 상호간의 영향을 탐구하는 과정에 이런 무교의 생명력이 잘 드러나있다. 오랜 세월 동안 무교는 국가 종교의 자리에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 자리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불교, 유교, 무교 등을 만났다. 이런 타종교와의 조우 속에서 무교는 신앙공동체의 감정이입과 공감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타종교로부터 다양한 형식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무교의 본질적인 신앙관은 유지하고 오히려 타종교를 통해 더욱 풍성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화해 왔던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한국 기독교가 정체기를 지나 감소추세에 들어선 현실 앞에서 무교의 끊임없는 생명력은 토착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바로 우리 민족의 종교성 깊이 새겨진 무교신앙의 뿌리를 찾고 그 종교성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모습으로 거듭날 때, 한국 기독교는 우리 토양에 깊이 뿌리 내리고 새로운 성장단계로 진입할 수 있음을 경고해준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정통 그리스도교 종파의 선교에 있어서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무속화 과정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선교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p. 228)

저자는 또한 신종교의 발생과 성장이 기성종교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신종교는 기성종교가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 머물면서 민중이 절박한 상황을 외면한 채, 새롭게 제기되는 인간의 절박한 물음에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할 때 생겨나는 것이고 썩은 사회와 병든 종교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시대의 산물이라(p. 210)는 것이다. 저자의 이런 분석과 진단은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종교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이 시대의 절박한 문제들에 대해 생명력있는 대답과 치유의 손길을 전해줘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토착화를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상호 보완적 ‘상호 선교’와 ‘종교 안의(intra-religious) 대화’는 종교신학4)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은 탁월한 방법론이다. 상호 보완적 상호 선교의 관계란 타종교와 만남에서 개종과 정복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를 통해 배우며 함께 성장해 가는 만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교 안의 대화는 우선 자신의 종교의 뿌리를 찾는 자신과의 깊은 대화이자 이를 기초로 대화 상대자의 종교성과 대면하는 대화5)를 말한다. 이는 종교를 객체화된 체계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차원으로부터 대면하는 것이다.

타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는 자칫 타종교를 이용하거나 정복하려는 욕망과 자기 종교의 우월성과 절대성에 대한 신념으로 인해 타종교를 도구화, 객체화하기 쉽다.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포괄적인 이런 접근 방식으로는 타종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한 종교의 신념체계가 진리와 실재의 모든 것을 독점하거나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종교 안에는 또 다른 실재의 진리가 다른 언어구조와 상징체계를 통해서 표현될 때 그것을 자기 종교의 논리로 분석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게다가 타종교의 신앙체계가 그 종교의 신앙대상이 지닌 신비를 모두 담을 수도 없는데 그 신앙체계를 객체화한 것을 통해서 타종교의 신앙을 적확히 이해할 수도 없다.

결국 타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종교도 역시 참된 진리를 담고 있는 종교임을 인정하고 타종교의 자리에서 타종교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겸허히 배우려는 인격적 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바로 ‘상호 선교’와 ‘종교 내의 대화’가 이런 인격적 대화에 기초한 타종교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 근거해서 무교와 기독교가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영역을 보여준다. 그는 “민중종교의 강한 역동성, 그 내적인 폭발력은 고등종교의 예언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의식과 조우할 때 물실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것”(p.238)이라고 한다. 즉, 기독교는 무교의 역동적 생명력으로부터 토착화의 길을 배울 수 있고, 무교는 기독교의 사회비판 의식으로부터 사회윤리적 차원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호보완성은 다양한 부분에서 나타난다. 우선 예수와 바리데기는 가장 존귀한 자가 비천해지는 자기비화 과정과 온갖 고통을 극복하여 영원한 해방을 얻는 과정을 통해서 신과 인간의 중개자가 된다는 면에서 서로 공명한다고 본다. 그러나 고난의 일시적 제거인 무교의 ‘한풀이’는 사회적 실천을 포함하는 비구원의 온갖 상황에 대한 극복으로서의 ‘그리스도 풀이’로 고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굿과 미사 사이에도 상호보완적인 측면들이 있다고 본다. 굿과 미사는 서로 공명하는 성사(聖事)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특히 굿에서의 대동음복은 기독교의 성찬식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둘 다 화해의 과정을 거쳐 한이 제거되고 공동 소속감이 형성되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 사이의 조화가 회복되어 새 인간으로 재생시키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유사성과 함께 서로가 지닌 차이점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가는 글; 대화적 대화를 향하여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박일영의 “한국무교의 이해”는 무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체시키고 무교가 지닌 생명력과 깊은 종교성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무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두 종교 서로를 보완하고 살려낼 수 있는 ‘상생(相生)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무교가 억눌린 민중의 고통과 한을 함께 짊어지고 풀어주며 복을 함께 나눠온 누 천 년의 세월 속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목격하는 듯 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려준 예수의 한 모습은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식사를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뤄가는 운동가였다. 바로 그 치료와 식사는 무교에서 한은 풀고 복은 나누는 굿의 모습과 공명하고 있었다. 누 천 년 이어져온 우리 민중의 종교적 심성 곧 무교 속에 바로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왔던게 아닌가라는 설레이는 질문이 스쳐간 것이다. 이렇게 무교와의 진실한 대화는 기독교라는 종교체계 안에서 그려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하였다.

그러나 몸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교에 대한 박일영의 이해가 깊은 통찰력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음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 스스로 ‘상호 선교’의 관점이나 ‘종교 내의 대화’를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방법론에는 그 방법이 적용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무교에 대해 연구된 문헌이나 민족지 등의 자료를 분석하는 방식에 근거하여 무교에 접근하였다. 여전히 무교를 객체화․대상화하여 분석하는 방식의 한계 안에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무교인들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본 무교의 생동감 넘치는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였다.6)  대표적인 예는 무교의 생명관인데, 무교의 생명관이 마치 기독교의 창조론의 변형인 듯 삼신이라는 초인간적 존재에 의해 주어진 생명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 전통은 신학의 모든 주제를 인간 중심으로 구성해나가는 경향이 있다. 생명 역시 인간의 생명에 주로 관심을 둔다. 그러나 무교의 생명 이해는 보다 폭넓고 다양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 모든 미물에까지 신령이 있다고 보는 우주적 생명관이 나타나고, 이승과 저승의 조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굿 속에는 죽음을 정복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과 생명이 상생적인 관계임을 바라보는 생명관이 나타난다. 이렇게 무교를 대상화하는 분석은 다양한 차원과 깊이를 지닌 생명관을 신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축소시키고 만다. 게다가 무교로부터 무교를 바라보는 관점보다 서구의 신학이나 종교학 범주를 적용해 무교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무교를 다신론 혹은 단일신론, 선택적 일신론 혹은 교체일신론 등으로 분류해서 이해하려는 관점에 이런 경향이 단적으로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는 무교가 지닌 사회 비판적 개혁의 정신을 간과하고 있다. 저자는 무교에서 우리 민중의 역동적인 종교성만을 강조하고 그런 무교는 기독교의 사회 비판적 개혁의 종교성으로부터 보완되어야 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마치 예수의 치유 행위가 그 사회의 정치 종교적 구조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예언자적 기능을 드러냈던 것처럼 무교의 우환굿에는 민중의 상처로부터 그 가해자인 억압자와 그 사회체제의 문제를 고발하고 비판하며 은폐된 역사적 진실을 폭로하는 기능이 나타난다. 우환굿은 바로 민중의 목소리로 사회를 고발하는 굿장인 것이다.7) 물론 이런 사회 비판적 기능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 상당히 축소된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은 마치 무교에 그런 사회 윤리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어서 기독교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결국 이런 한계점들을 종합해보면 ‘대화적 대화’8)를 통해 무교를 무교로부터 느끼고 이해할 때 대상화, 객관화하여 분석하는 방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가 무교를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얻는 통찰력과 긍정적인 면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것으로도 이미 기독교의 편견은 깨지고 무교를 존중하며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려진다. 그러나 인격적 대화, 대화적 대화를 통해서 무교에 대한 이해는 보다 온전해질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만날 수 있으며 기독교 스스로의 영성 역시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참고도서]

김경재 저, 해석학과 종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4)

김진 저, 종교신학 세미나 (다산글방, 2003)

김진 편저, 피할 수 없는 만남 종교 간의 대화 (한들출판사, 1999)

이수자 저, 저승, 이승의 투사물로서의 공간,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창, 2001), pp. 43~72.

차옥숭 저, 한국인의 종교경험 무교 (서광사, 1997)

최재천 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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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30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3-3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오늘은 직접 뵙고 인사를 나눴네요^^ 반가웠습니다.
제 서평에서 무교를 지극히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개신교 안에 워낙에 무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편견이 강하기 때문에 반대쪽을 강조하게 되었지요. 무교에 대한 님의 생각에 깊이 동감합니다. 무교로 인한 문제점과 피해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니까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문제점도 분명히 비판해야겠지요.
그런데 동시에 긍정적인 면이 있을 때는 정직하게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라는 책을 쓰신, 우리 시대의 큰 무당인 김금화님 같은 분들 앞에서는 마음이 숙연해지고 고개가 숙여지거든요. 차옥숭 교수님께서 쓰신 무교에 대한 책에서도 무교인의 입장에서 무교를 바라보는 면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무당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개신교에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면서도 정말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을 부끄럽게 만드는 목사님도 계시는 것처럼 무교에도 그 양쪽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짧은 소견입니다^^

kjy814 2004-03-3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사를 하게 되서 기뻤습니다.
제가 수학은 못하는 데 시야가 넓은지 그동안 형제님을 정말 많이 마주 쳤는데 아는 체 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지나갔었거든요. 이젠 맘 놓고 아는 체 하겠습니다.

차옥숭 교수님..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 소개 좀 해주세요.

어제 신학입문 시간은 그런대로 이해하기도 쉽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았었어요. 그런데 내재적 접근법이란게 구체적으로 뭔지 궁금했어요. 어제 송두율 교수 재판 기사를 읽었는데 경계인(이건 형제님의 서재 입구에도 본 글 같은데)이란 포장하에 김일성 주체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선전했다나.. 이사람이 북한에 대해 내재적 접근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서창원 교수님께서 토착화 신학 이야기하시며 야훼라는 신관의 변화 과정.. 이게 내재적 접근법이랑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

오늘 교회사 시간에 대추 때문에 웃다가 교수님께 많이 혼났지요. 교수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우리가 너무 경솔한 태도를 취한 것은 인정하는데... 부끄럽지만.. 김용이라는 중국 작가의 영웅문이라는 무협소설이 있는데 거기에도 대추만 먹으며 굴 속에서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 나오죠(너무 오래되서 그 사람이 남잔지 여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사람은 입에 대추씨를 넣고 있다가 적을 만나면 대추씨를 뱉어서 공격하는 데 그 기술을 아무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까 수업시간에 자꾸 그 무협소설의 장면 때문에 웃음이 나는데..반성 많이 했습니다.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수도원에서 평생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침묵 수도원의 수녀의 이야기가 도대체 이해가 안 됐었는데 이제 그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나, 사막으로 들어간 안토니나 방법이 어찌 되었던 그들의 선택은 "실존"에 대한 몸서리 치는 고민 후에 결정한 것이겠지요. 20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들이 대추만 먹었다고 기둥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낄낄 거린 우리의 경박함이 비판 받아야 겠지요. 비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다다음주에 종교사회학 팀 발제를 하게 됩니다 주제는 종교와 성,나이,지역인데 아이디어가 정말 떠오르지 않네요. 언제 발표하시나요?

공부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텐데 이것 저것 할일이 많네요. 이래 저래 신경 곤두서는 하루이고 2004년의 봄날들 입니다.

물무늬 2004-03-3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놓고 아는 체 하시는 거 기대하겠습니다^^ 차옥숭 교수님은 지금 한일장신대학교에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좋은 기회로 종교학과목을 배울 기회가 있었죠. 참 독특하시고 재미있는 분이셨는데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맺게 되서 저희 학교에 오시는 날에는 쌓오신 점심을 늘 같이 먹었었죠. 사실 거의 다 얻어먹는 것이었죠./ 내재적 접근법이라...불행이도 어떤 맥락에서 나온 단어인지 기억이 않나는군요. 제가 무식한 탓도 있지만 그 개념은 문맥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 역시 무식함이 이렇게 금방 탈로나는 군요.../사실 교회사 시간의 그 문제는 제겐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세계를 접해보지 않고는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변화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선 마을로 내려오셨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광야에서 마을로 돌아오셨죠.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을 이런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헌신으로 볼 수 있을지....허나 無用之大用이고 산 속 깊은 곳 홀로 피었다 사라지는 들꽃이 열매맺어 짐승과 인간의 먹이지 못한다 하여 無用하다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군요...."잘 모르겠구나"에서 멈춥니다./ 종교사회학 발표는 마지막 주입니다. 저희 할 것도 걱정됩니다. 저희 주제에 적당한 영화가 있어서 그것을 사용해볼 구상을 혼자 해보긴 했는데.../ 그나마 대전 집 앞에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서 봄의 설레임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됩니다. 님의 바쁘신 일상에 봄바람 불어와 설레임과 봄내음으로 마음의 여유와 생기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04-04-02 0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02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엠티 못갔습니다. 아는 선배 목사님께 문제가 생겨서 급히 그분을 만나뵈러가야 했거든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뭐. / 저도 어제 종교사회학 시간은 인상적있었습니다. 이젠 불만스러운 부분보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 시간을 활용할지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할 문제들도 만났죠. 이 사회가 교회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비종교적인 형태로 더 잘 해주고있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할 것이가?라는 문제요. / 숨통을 틔여주는 학자분들이 간혹 있죠. 하지만 때론 객관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 학자들의 글이 오히려 너무 어렵더군요. 대표적으로 슐라이어마허는 낭만주의적 글쓰기로 신학책을 썼는데 그 어려운 내용을 시로 쓴 것 같은 것입니다. 한 페이지 넘어가기가 어렵죠^^ / 참 어제 5시-7시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하는 마이스트 에크하르트의 영성사상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정말 바라던 바를 얻을 수을 수 있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설레임과 의욕이 충천하는군요. 에크하르트는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놓아 버린다]라는 그분의 말 속에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부정신학의 대가이시죠../ 이렇게 수업을 들으며 스쳐간 생각도 나누고 제 기쁨도 나누고 좋은 누님이 생긴 것이 확실하군요. 감사드려요^^ 깊은 쉼, 풍요로운 여백을 만끽하시는 주말되세요^^


2004-04-02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02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괴로운 여정, 저 역시 깊이 공감이 갑니다. 책읽고 글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힘든니까요^^:: 학교에서 강제적인 힘으로 밀어붙여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 그 영성 세미나는 감신대 내의 통합학문연구소에서 수업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10년 전통의 세미나라더군요. 한 학기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책을 읽어나가면서 함께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학회와 유사한데 연구소 산하 활동이라는 차이가 있죠. 인도는 이정배교수님께서 해주십니다. 워낙 어려운 내용인데 어제 보니까 이정배 교수님께서 정말 쉽고 명확하게 풀어서 가르쳐주시더군요. / 저도 에크하르트는 풍문으로, 혹은 다른 책에서 한구절씩 들어본 것이 다여서....마음에만 두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책은 다음에 참석하면 여쭤보고 알려드릴께요. 사용하는 교제는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분도출판사, 2003 입니다. 그 책 첫 장이 개론적 설명이라 그나마 좀 쉽게 개략적인 이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그 모임에 그 저희 동기 중에 수석으로 들어오신 분이 이미 두 주 전부터 참석하고 계셨더군요. 남편분이 알려주셨다고 하던데....그분도 무척 재미있다고...님께서도 관심있으시면 언제든지.../ 멋진 구멍^^ 그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감사드려요^^
님의 마음 깊은 곳에 새로운 힘이 채워지는 주일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 영화의 결에서는 시적 상징의 여백에서 베어나오는 깊은 고민과 슬픔이 느껴진다.

Gapping; 시적 상징의 여백 채우기

[물 위에 떠있는 암자] 어디에도 담은 없지만 다가갈 수 없는 곳. 암자에 있는 사람이 배를 저어 다가와 데려가지 않는한 다가갈 수 없는 단절..그러나 겨울의 매서운 냉기, 그 주검의 기운 앞에 모든 욕망과 집착이 굳어버릴 때면 단단해진 물결을 밟고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는....우리 내면 깊은 곳의 암자....

[벽없는 문] 어디로 다녀도 될 것 같지만, 어디에도 정해진 길이 없어보이지만, 그 보이지 않는 문을 통해, 길없는 길로 출입할 때 악업의 무거운 돌을 토해낼 수 있는 것일까?

[돌 먹이기] 김기덕 감독은 천진난만한 동자승의 귀여운 손이 개구리와 물고기와 뱀의 뱃속으로 밀어넣은 업보의 돌을 통해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함의 뿌리를 형상화한다.

[반가사유상처럼...] 그리고 그 악함의 뿌리를 어찌해야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부처의 반개한 명상의 그 비워진 시선으로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불교, 기독교, 혹은 희랍비극?] 이 영화는 내게 불교적 이미지에 기독교적 원죄를 투영시킨 실존적 고민의 상징으로 읽혀진다. 봄, 천진난만한 장난으로부터, 의도치 않아도 비롯되고 마는 악업. 불교에서는 욕심과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고 보는 그 관점을 희랍적 비극의 도식으로 변주한 듯 하다. "욕심이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낳는다"는 노스님의 가르침은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는 불교적 관점을 살의라는 관계적 죄의 개념으로 변주하고 있다. 그리고 첫 봄에서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몸에 실로 묶여있던 돌은 "그리고 봄"에서는 입을 통해 뱃속으로 밀어넣진다. 실로 이어진 관계적 업의 이미지가 배속에 들어있는 내적 원죄의 이미지로 변주되는 듯하다. 

이런 변주들을 통해서 김기덕 감독은 불교도 기독교도 아닌 자신의 고민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악함에 대한 실존적 고민. 겨울의 이야기에서 산 정상에 올라 반가사유상 곁에서 명상에 잠기지만, 그렇게 반가사유상의 부처처럼 악업의 고리를 초연히 바라보고 싶은 바램이 언듯 비치지만, 부처의 자리는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 먼 곳,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저 높은 곳이다. 결국 주인공은 다시 이어지는 "그리고 봄"에서 어린 동자승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또다른 집착을 품게 될 뿐이다. 닫혀진 악업의 고리 속에 계속 이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불상의 얼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겨울 이야기의 한 상징적 장면이다. 겨울에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수행중에 있던 주인공에게 아기를 안고 찾아온 여인. 보라색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는 깊은 밤 아기를 두고 암자를 몰래 빠져나가다가 주인공이 세수하기 위해 뚫어놓은 얼음 구멍에 빠져 죽고만다. 다음날 아침 시체를 꺼내 얼굴을 확인하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 집착으로 인해 살해했던 과거의 여인을 기억하게 했던 그 여인의 얼굴에서 부처의 얼굴을 본다.

이미 입적한 노스님의 사리를 넣어둔 얼음 불상이 녹아버리고,  사리를 넣어두었던 불상의 머리가 얼음 밑 물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장면에 이어서 그 시체를 건져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장면이 연결되어 있다. 노스님의 사리가 담긴 얼음불상의 머리가 흘러들어간 물 속에서 건져올린 그녀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석불의 얼굴. 녹아 사라질 얼음 불상의 머리가 또다시 무거운 돌불상의 머리로 얼어붙은 강물 위로 솟아오른다. 그 돌 불상의 머리가 자신의 배속에 무겁게 걸려버린 듯 주인공은 또다시 악업의 얼굴을 마주하고 만다. 

냉혹한 겨울의 냉기에 두껍게 얼어버린 강의 수면은 어떤 흔들림도 일렁임도 없이 욕망과 고통마져 꽁꽁 얼려버린 의식의 표면을 상징하고, 구멍으로 솟아오른 돌불상의 머리는 무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그 의식의 표면을 뚫고 솟아오른 악업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무거운 악업을 상징하던 =그 악업을 정죄하는 불상=그 악업을 정죄하던 노스님의 가르침이 맺힌 사리(돌)=얼어붙은 수면 위로 건져올려진 불상, 곧 욕망마져 얼어버린 비워진 마음도 어쩔 수 없는 악업의 순환...

주인공의 시선에 비쳐진 불상의 얼굴은 어떤 수행으로 비우고 또 비워도 해결되지 않는 악업을 비춰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봄에 장난으로 매달았던 돌맹이가 개구리, 물고기, 뱀을 죽이고 말았고 그것을 보던 노스님은 동자승의 등에 돌을 매달은 후에 만일 그 동물들이 죽었다면 일생동안 그 등에 매단 돌을 마음에 지고 살거라고 엄하게 가르쳤다. 그런데 스스로 마음의 고통과 분노를 비우려 애쓰고 있던 그 겨울에 세수하기 위해 파놓은 구멍이 누군가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수행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악업의 닫혀진 순환. 그 절망적인 실존의 현실을 비춰주는 불상의 얼굴에서 어릴적 엄한 가르침을 주던 스님의 얼굴을 마주친 것은 아닐까? 아직도 비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못한 마음 속의 돌이 부처의 가르침으로 새겨진 석불의 얼굴로 솟아오른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처의 얼굴은 해탈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듯하다. 인간이 갇혀버린 악업의 절망적 현실을 비춰는 거울인 것 같다. 이미 해탈의 세계에 들어간 부처의 존재가 그런 해탈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시선에 비친 한계 상황의 절망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마치 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드러나게 하는 절대타자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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