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박일영 저, 한국 무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9)
들어가면서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 전통이 바라보는 무교의 모습은 극히 부정적인 모습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던 초기부터 무교는 미개인들의 원시적 미신이자 어리석은 우상숭배로 폄하되고 적대시된 모습으로 매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속히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할 악의 뿌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그려진 무교의 모습은 오늘날 개신교 교회의 신앙 안에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박일영의 “한국 무교의 이해”는 무교에 대한 개신교의 이런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될 수 있다. 그는 무교에 대한 역사적 문헌들, 민족지 자료들 그리고 종교학, 민속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된 연구 성과들을 근거로 무교라는 종교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탐구한다. 그리고 무교가 지닌 긍정적인 모습을 회복시키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저자는 무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기독교가 무교신앙 깊이 스며있는 우리 민족의 종교성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대상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더 사랑하게 된다1)는 의미이다. 과연 이 잠언이 담고 있는 의미처럼 무교를 더욱 깊이 알게 되면 기독교가 무교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고 동시에 기독교 스스로도 더욱 깊어지게 될 수 있을까? 이제 박일영의 논지가 담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살펴봄으로써 그 가능성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몸 글
[ 깨지는 편견들 ]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교는 무속이라는 폄하된 이름으로 불리며 수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미신으로 치부된다. 계몽되지 못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극히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영락에 집착하는 이기적 욕망의 투사물로서 윤리성이 결여된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현대사회의 불안, 가치관 상실과 소외 등의 아노미적 현실에 처한 인간이 원시적 종교성으로 고착되어 버린 전근대적 병리현상 쯤으로 그려진다. 무교신앙은 미신적 방법으로 도피함으로써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실천적 해결을 상실하게 하는 병리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박일영이 분석한 한국 무교의 모습은 그런 편견들을 여지없이 깨고도 남는다. 그가 보여주는 무교는 우선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인 종교심이 아니다. 무교가 추구하는 “재수”는 단순히 금전운, 부와 행복, 건강의 의미가 아니라 “조화를 통하여 회복된 인간의 총체적 완성”(p.67)이라고 한다. 이 때 조화란 가족이나 친척 간의 관계,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 내의 관계, 인간의 살아가는 자연과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 곧 삶과 죽음의 관계에 발생하는 부조화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총체적 조화를 추구하는 무교의 종교성에는 개인적 이기심보다는 우주적 차원의 공생적 공동체 의식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무교의 종교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굿에는 이런 종교심이 잘 반영되어 있다. 대동잔치인 굿은 참여하는 공동체 모두와 함께 아픔과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치유한다. 즉, 함께 한을 풀고 복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 때 ‘함께’의 범위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저승의 죽은 자들, 신령들과 잡귀와 미물들까지 포함하는 우주적 차원이다. 무교의 세계관은 모든 사물 안에도 신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굿에서는 낮은 등급의 잡귀, 잡신들까지 함께 나누고 먹는다.
무교는 총체적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윤리성 또한 중요시하게 된다. 저자는 무교이 대표적인 무교신화 “바리공주 무가”에 부모에 대한 효성, 나라에 대한 충성, 불쌍한 이를 도와주는 희생 등의 요소가 나타나 있다고 한다.(pp.181,182) 이외에도 무교의 윤리성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강신무가 되기 위해 치루는 내림굿에서 신어머니가 신딸에게 무당의 길을 일러주는 공수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온갖 역경 속에서도 모든 백성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오랜 가르침이 담겨있다.2) 또 제주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시왕맞이제에는 가족, 국가에서 인류보편의 영역에 이르는 윤리규범이 나타나있다.3) 무교에 윤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관점이 왜곡된 편견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들이다.
무교신앙이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치료되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 역시 왜곡된 편견임을 보여준다. 무교는 오히려 개인과 가족, 혹은 마을 공동체의 문제와 상처를 함께 공유하고 치료해주며 기쁨을 함께 나누는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무교는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전통의 종교로서 그 유구한 세월동안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치료해주었던 민중의 종교였다.
가족 중에 누군가 죽었을 때나 집안에 발생한 기타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위해 행하는 집굿, 한 지역 공동체 전체의 평화와 부귀를 기원하는 마을굿에서 이런 기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죽은 이의 넋을 위한 제의인 사령제 혹은 넋굿은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죽음이라는 사건을 가족과 공동체가 굿이라는 의례를 통해서 재체험케 한다. 이 과정은 내면에 감춰진 죄의식, 갈등, 상처 등을 안전하게 표출시키고 치료케 함으로써 그 충격을 흡수,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고, 또한 공동체와 함께 하는 치료과정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게 한다.
물론 이렇게 재해석된 무교의 긍정적인 모습 외에 부정적인 측면 역시 있을 것이다. 무교가 점이나 부적 혹은 굿을 통해서 단순히 개인적인 안락만을 추구하는 등 허황되고 미숙한 방식으로 오용된 경우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왜곡되고 미숙한 종교행태는 어느 종교에서든 존재한다. 어떤 종교에 그런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해서 그 종교 전체를 부정할 수 없듯이 무교 역시 그 안에 담긴 깊고 아름다운 종교성까지 부정되선 안될 것이다.
[ 무교와 기독교의 대화 ]
박일영이 한국 무교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하나는 우리 민족의 의식에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종교성을 이해함으로써 기독교가 한국의 토양에 더욱 깊게 뿌리내리도록 하려는 토착화이다. 저자는 우리 신앙의 뿌리인 무교신앙이나 민중종교를 미신시하거나 경멸하고 배척하게 될 때 뿌리잘린 자아상실의 미아신세를 면하기 어렵다고 강조한다.(pp. 234, 235)
토착화의 필요성은 무교가 그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해온 모습 속에서 암시되어 있다. 저자가 무교와 타종교와의 만남과 상호간의 영향을 탐구하는 과정에 이런 무교의 생명력이 잘 드러나있다. 오랜 세월 동안 무교는 국가 종교의 자리에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 자리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불교, 유교, 무교 등을 만났다. 이런 타종교와의 조우 속에서 무교는 신앙공동체의 감정이입과 공감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타종교로부터 다양한 형식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무교의 본질적인 신앙관은 유지하고 오히려 타종교를 통해 더욱 풍성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화해 왔던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한국 기독교가 정체기를 지나 감소추세에 들어선 현실 앞에서 무교의 끊임없는 생명력은 토착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바로 우리 민족의 종교성 깊이 새겨진 무교신앙의 뿌리를 찾고 그 종교성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모습으로 거듭날 때, 한국 기독교는 우리 토양에 깊이 뿌리 내리고 새로운 성장단계로 진입할 수 있음을 경고해준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정통 그리스도교 종파의 선교에 있어서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무속화 과정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선교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p. 228)
저자는 또한 신종교의 발생과 성장이 기성종교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신종교는 기성종교가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 머물면서 민중이 절박한 상황을 외면한 채, 새롭게 제기되는 인간의 절박한 물음에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할 때 생겨나는 것이고 썩은 사회와 병든 종교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시대의 산물이라(p. 210)는 것이다. 저자의 이런 분석과 진단은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종교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이 시대의 절박한 문제들에 대해 생명력있는 대답과 치유의 손길을 전해줘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토착화를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상호 보완적 ‘상호 선교’와 ‘종교 안의(intra-religious) 대화’는 종교신학4)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은 탁월한 방법론이다. 상호 보완적 상호 선교의 관계란 타종교와 만남에서 개종과 정복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를 통해 배우며 함께 성장해 가는 만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교 안의 대화는 우선 자신의 종교의 뿌리를 찾는 자신과의 깊은 대화이자 이를 기초로 대화 상대자의 종교성과 대면하는 대화5)를 말한다. 이는 종교를 객체화된 체계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차원으로부터 대면하는 것이다.
타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는 자칫 타종교를 이용하거나 정복하려는 욕망과 자기 종교의 우월성과 절대성에 대한 신념으로 인해 타종교를 도구화, 객체화하기 쉽다.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포괄적인 이런 접근 방식으로는 타종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한 종교의 신념체계가 진리와 실재의 모든 것을 독점하거나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종교 안에는 또 다른 실재의 진리가 다른 언어구조와 상징체계를 통해서 표현될 때 그것을 자기 종교의 논리로 분석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게다가 타종교의 신앙체계가 그 종교의 신앙대상이 지닌 신비를 모두 담을 수도 없는데 그 신앙체계를 객체화한 것을 통해서 타종교의 신앙을 적확히 이해할 수도 없다.
결국 타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종교도 역시 참된 진리를 담고 있는 종교임을 인정하고 타종교의 자리에서 타종교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겸허히 배우려는 인격적 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바로 ‘상호 선교’와 ‘종교 내의 대화’가 이런 인격적 대화에 기초한 타종교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 근거해서 무교와 기독교가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영역을 보여준다. 그는 “민중종교의 강한 역동성, 그 내적인 폭발력은 고등종교의 예언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의식과 조우할 때 물실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것”(p.238)이라고 한다. 즉, 기독교는 무교의 역동적 생명력으로부터 토착화의 길을 배울 수 있고, 무교는 기독교의 사회비판 의식으로부터 사회윤리적 차원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호보완성은 다양한 부분에서 나타난다. 우선 예수와 바리데기는 가장 존귀한 자가 비천해지는 자기비화 과정과 온갖 고통을 극복하여 영원한 해방을 얻는 과정을 통해서 신과 인간의 중개자가 된다는 면에서 서로 공명한다고 본다. 그러나 고난의 일시적 제거인 무교의 ‘한풀이’는 사회적 실천을 포함하는 비구원의 온갖 상황에 대한 극복으로서의 ‘그리스도 풀이’로 고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굿과 미사 사이에도 상호보완적인 측면들이 있다고 본다. 굿과 미사는 서로 공명하는 성사(聖事)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특히 굿에서의 대동음복은 기독교의 성찬식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둘 다 화해의 과정을 거쳐 한이 제거되고 공동 소속감이 형성되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 사이의 조화가 회복되어 새 인간으로 재생시키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유사성과 함께 서로가 지닌 차이점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가는 글; 대화적 대화를 향하여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박일영의 “한국무교의 이해”는 무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체시키고 무교가 지닌 생명력과 깊은 종교성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무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두 종교 서로를 보완하고 살려낼 수 있는 ‘상생(相生)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무교가 억눌린 민중의 고통과 한을 함께 짊어지고 풀어주며 복을 함께 나눠온 누 천 년의 세월 속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목격하는 듯 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려준 예수의 한 모습은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식사를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뤄가는 운동가였다. 바로 그 치료와 식사는 무교에서 한은 풀고 복은 나누는 굿의 모습과 공명하고 있었다. 누 천 년 이어져온 우리 민중의 종교적 심성 곧 무교 속에 바로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왔던게 아닌가라는 설레이는 질문이 스쳐간 것이다. 이렇게 무교와의 진실한 대화는 기독교라는 종교체계 안에서 그려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하였다.
그러나 몸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교에 대한 박일영의 이해가 깊은 통찰력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음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 스스로 ‘상호 선교’의 관점이나 ‘종교 내의 대화’를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방법론에는 그 방법이 적용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무교에 대해 연구된 문헌이나 민족지 등의 자료를 분석하는 방식에 근거하여 무교에 접근하였다. 여전히 무교를 객체화․대상화하여 분석하는 방식의 한계 안에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무교인들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본 무교의 생동감 넘치는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였다.6) 대표적인 예는 무교의 생명관인데, 무교의 생명관이 마치 기독교의 창조론의 변형인 듯 삼신이라는 초인간적 존재에 의해 주어진 생명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 전통은 신학의 모든 주제를 인간 중심으로 구성해나가는 경향이 있다. 생명 역시 인간의 생명에 주로 관심을 둔다. 그러나 무교의 생명 이해는 보다 폭넓고 다양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 모든 미물에까지 신령이 있다고 보는 우주적 생명관이 나타나고, 이승과 저승의 조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굿 속에는 죽음을 정복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과 생명이 상생적인 관계임을 바라보는 생명관이 나타난다. 이렇게 무교를 대상화하는 분석은 다양한 차원과 깊이를 지닌 생명관을 신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축소시키고 만다. 게다가 무교로부터 무교를 바라보는 관점보다 서구의 신학이나 종교학 범주를 적용해 무교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무교를 다신론 혹은 단일신론, 선택적 일신론 혹은 교체일신론 등으로 분류해서 이해하려는 관점에 이런 경향이 단적으로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는 무교가 지닌 사회 비판적 개혁의 정신을 간과하고 있다. 저자는 무교에서 우리 민중의 역동적인 종교성만을 강조하고 그런 무교는 기독교의 사회 비판적 개혁의 종교성으로부터 보완되어야 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마치 예수의 치유 행위가 그 사회의 정치 종교적 구조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예언자적 기능을 드러냈던 것처럼 무교의 우환굿에는 민중의 상처로부터 그 가해자인 억압자와 그 사회체제의 문제를 고발하고 비판하며 은폐된 역사적 진실을 폭로하는 기능이 나타난다. 우환굿은 바로 민중의 목소리로 사회를 고발하는 굿장인 것이다.7) 물론 이런 사회 비판적 기능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 상당히 축소된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은 마치 무교에 그런 사회 윤리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어서 기독교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결국 이런 한계점들을 종합해보면 ‘대화적 대화’8)를 통해 무교를 무교로부터 느끼고 이해할 때 대상화, 객관화하여 분석하는 방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가 무교를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얻는 통찰력과 긍정적인 면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것으로도 이미 기독교의 편견은 깨지고 무교를 존중하며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려진다. 그러나 인격적 대화, 대화적 대화를 통해서 무교에 대한 이해는 보다 온전해질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만날 수 있으며 기독교 스스로의 영성 역시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참고도서]
김경재 저, 해석학과 종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4)
김진 저, 종교신학 세미나 (다산글방, 2003)
김진 편저, 피할 수 없는 만남 종교 간의 대화 (한들출판사, 1999)
이수자 저, 저승, 이승의 투사물로서의 공간,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창, 2001), pp. 43~72.
차옥숭 저, 한국인의 종교경험 무교 (서광사, 1997)
최재천 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