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인간
어느 백제왕의 혁대는
비단벌레 껍질로 장식돼 있다고 한다
그 앞에 머리 조아린 문무백관과
궁녀들과 백성들이 있었을 것이나
사라져버렸고
백제왕도 사라져버렸다
모래인간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래가 된 인간은 많지만 모래로 된 인간은
없다. 모래는 잘 뭉쳐지지 않는다. 모래는 흩어진다.
모래는 흘러다닌다. 모래들이 물어뜯은 것 같은 움푹
한 미라는 있지만 모래로 빚은 태아는 없다. 사막에
사는 모래쥐도 그렇다. 모래가 되는 모래쥐는 많지만
모래로 빚은 모래쥐는 없다. 모래에서 끝나는 육체,
모래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모래로 흘러다니는
육체, 더 쪼갤 수 없이 잘게 쪼개져서 사막을 흘러다
니고 바람에 불려다니는, 더 이상 육체라고 부를 수 없
는 육체, 방황하는 모래들, 표류하는 모래들, 폭풍에
들려 빈 하늘에서 빈 하늘로 떼지어 날아가는 모래들,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누구의 뼈도, 그 누구의 살도
아닌,
남은 것은 혁대와
비단벌레 껍질에 흐르는 은하수,
4월의 황사는
고비사막에서 날아와
비단벌레 껍질과 속삭인다.
(최승호, 모래인간, 세계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