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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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마음의 가벼움, 그 비릿한 변덕을 그대로 비춰주는 제목이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환상과 동경의 불꽃이 쉼없이 타오른다. 그러나 그 애틋한 불꽃도 내 주머니에 넣고나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곤 한다. 주머니 속에 넣었던 것도 다시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언제 시들했냐는 듯 다시 소중해진다. 단, 내 손아귀에 다시 들어오기 전까지만, 꼭 그때까지만. 
   
   저자인 박완서님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래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25)      

   우리시대의 소설가로서 존경받는 저자에게도 결국 누리고 있는 현실보다는 갈 수 없었던 길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현실은 그 누구도 쉽게 갈 수 없는 길이다. 많은 이들에게 그녀의 삶은 못 가본, 못 가볼 동경의 대상이기 쉽다. 그런데 내가 가보지 못한 그녀의 길에서 우연히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다. 잃었다는 것조차 잊었던 소중한 것들을. 

    그녀의 길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내가 서있는 이 초라한 길을 새롭게 발견한다.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 직접 지은 밥에 담긴 정성, 보통사람들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어있는 인간의 아름다움, 삶의 스승에 대한 애틋한 정....' 그녀의 삶에서 밑줄을 그은 그 소중한 이야기들은 잊혀진 내 삶의 이야기들을 일깨운다. 저자의 길에서 엿본 귀중한 것들이 지금 내가 서있는 이 길의 잊혀진 보물을 그대로 비춰준 것이다. 못가본 비단길 앞에서 초라하게 구겨져 버렸던, 지금 이 길에도 보물이 널려있었다. 단지 가지못한 길을 동경하느라 무심했고, 이미 소유했다고 여기는 순간 흥미를 잃고 방치시켰던 것 뿐이다. 그렇게 잊혀졌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내 안에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가고 있다고 여겼던 이 길을 난 충분히 가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발 밑은 잘 살피지 않는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어떤 깊이와 너비와 향기를 지녔는지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실은 못 가본 그 길과 다르지 않았다. 못 가본 그 길, 저자의 길이 내가 가고 있는 길의 그 신비를 드러내줬다. 그렇게 잊혀진 분실물들을 되찾아준 것이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다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러나 때론 다시 돌아올 때 그 일상은 전혀 다른 일상으로 탈바꿈된다. 잊혀졌던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맛보기 때문이다. 익숙해져 무덤덤해졌던 삶의 의미가 날카롭게 되살아난다. 그렇게 여행은 새로움으로 돌아오려는 '낯설게 하기'가 아니던가? 

   박완서님의 이 책은 바로 낯설게 하는 여행이다. 새로운 일상으로 충만하게 되돌아오려는 떠남이다. 저자의 길, 가보지 못한 삶의 여정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못 가본 그 길이 내 삶의 길과 이어져있다. 그 순간 내 삶의 길이 다 가볼 수 없는, 못 가본, 바로 그 아름다운 길이었음을 문득 발견한다. 동경하고 질투하던 그 길이 제 발 아래 숨겨져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못 가본 길에 대한 동경과 질투는 고마움으로 바뀌고, 초라해 보였던 내 길에 대한 무관심은 동경과 사랑으로 바뀐다. 그렇게 책을 덮자 내가 걸어온 길을, 걸어갈 길을, 내 발 밑을 다시 찬찬히 살핀다. 늘 함께 하였지만, 처음보는 낯선 아름다움에 설레는 눈맞춤으로 첫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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