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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야 생각하지
이찬수 지음 / 다산글방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생각나야 생각하지]의 마지막 장인 '답답한 종교들의 세계'를 읽고 저자인 이찬수님께 보냈던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는 영화에서 젝 니콜슨이 길을 걸어가면서 바닥의 선을 밟지 않고 걸어가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습니다. 강박증을 앓는 역할의 그는 선을 밟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엉거주춤, 우스강스런 춤을 추듯이 길을 걸어가죠. 때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선을 밟지않아야만 한다는 생각때문에 그녀와 다른 길로 가버리고 말죠.
그 모습을 보면서 웃었지만 잠시 후엔 그게 바로 나의, 우리 모두의 모습이란 깨달음 앞에서 무너져내렸죠.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자, 재미있는 자와 썰렁한 자, 흑인과 백인, 배운자와 못배운 자.....그 아름다운 틈에 넘어선 안되는 선을 긋고는 그 안에서만 춤추고 상대편을 내리누르면서 기뻐하는, 때론 상대편에 눌리면서 증오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죠. 그 때의 깨달음이 이 글을 읽는 사이 사이에 베어나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개신교 교회에서 자라나면서 품게된 신앙적 갈등들이 오히려 동양적 사유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체험을 동양의 사유로 그려가는 길에 깊은 호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은 상처난 자연이나 이름없이 죽어간 작은 사람들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짙밟고 높이 들어올려있는 모습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분의 부활이 수많은 이름없는 희생과 고통들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가득히 채워주곤 수줍은듯 말없이 사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그 이름으로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안주하려는 모습들이.
탈근대, 후기구조주의의 한계마져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하고, 한국의 자생적 사유와 실천의 맥락을 잉태하며, 그것을 기초로 자본과 경제의 논리에 의해 죽어가는 세계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모습 가운데 한국의 기독교나 다른 종교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너무나 무의미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들은 '이대로 라면 기독교를 버려야 하지 않나'라는 의문을 안겨주었죠.
그런데 이런 문제는 기독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이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이라는 왜곡되고 뒤틀린 역사의 풍토에서 자라난 종교들에만 국한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도화된 종교들은 정말 숨막히는 선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상상력이 제 삶에서 상처난 문제들을 해결해준 기억들이 너무나 강해서 그 길을 선택하려한 제게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삶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여전히 종교적인 인간이 지닌 가능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기에, 아니 그 모습의 아름다움에 붙들렸기에 그 선을 밟고 선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빵집문을 열다가 자기도 모르게 밟은 선을 멈칫바라보다가 그냥 들어가는 주인공 잭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선을 밟고 그 틈새를 느끼는 불안함이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그보다 더 좋을수는 없는 삶인데......
제안에 어리석은 [나]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부자청년의 그 망설임처럼 말입니다.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의 알몸과 마주하고 마는군요. 우선 제 안에 있는 선을 밟고 서는 일이 가장 시급한 숙제로 다가옵니다. 부자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못들어봤는데, 그 뒤의 이야기를 제가 만들어 가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