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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서인석 지음 / 분도출판사 / 1979년 5월
평점 :
어릴적부터 나를 길들여온 교회의 가르침, 그것은 내게 자유보다는 무거운 짐을 주었다. 그리고 내 삶을 채워주지 못하는 환영임을 차츰 알게 되었다. 사영리는 자유케하는 진리를 이 땅의 살과 피는 모두 발라내고 죽음의 뼈다귀만으로 일축해버린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를 드러낸다고들 한다. 죄와 대속, 그리고 영원한 생명. 그러나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너무나 아름답게 치장한 것은 아닌지. 구약성서의 모든 내용도 바로 이런 욕망으로 획일화해 버린다. 이런 자기 집착이 삶의 현실 속에서 맺는 모순들, 분열들 앞에서 당황하고 머리를 저으려하면 ‘의심하지말고 믿어라, 너는 이미 구원받았다’라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내 몸과 일상은 변하지 않는 삶의 문제들로 썩어가고 서로를 상처내는 일에 허둥대고만 있다. 다시 회개로, 하지만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나의 혼란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성서가 지닌, 거칠하지만 포근하고 따스한 피가 흐르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 목소리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우리의 형제들을 향해 위로하고 희망을 안겨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임을 알려준다. 성서는 그런 삶의 자리에서 태어난 진리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렇게 그 삶의 자리를 명확하게 드러내줌으로써 구약의 이야기들, 출애굽, 율법, 예수의 삶과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결국 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이 지닌 영원한 삶에 대한 자기 집착을 충족시켜주는 자학적이고 자기기만적인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무엇인지도.
우린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서로의 것을 빼앗고, 누군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집착한다. 그리고 뭔가 아름다운 미래, 향유할 뭔가가 이 세상에 가득하다고 믿고 그것들만이 나의 구원이고 가치인 듯 살아간다. 이것은 구약의 때와 지금이 동일한 부분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현란한 소비 대상들이 우리의 고독과 죽음의 현실을 망각하게 하고 있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바쁘게 일하고 그렇게 바쁜 일상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자기 소외를 가져온다. 그리고 문득 발견하는 자화상은 가족을 사랑해서 출발한 것임에도 가족의 아픔이나 상처에서 분리되어 단지 그 고통을 무감각하게 해줄 마취제만을 공급하는 자판기의 부품일 뿐이다. 당황, 절망, 분노와 증오...가난한 사람들은 바로 이런 집단적 신경 발작증으로 달려가는 무리에서 뒤쳐진 사람들이다. 이 사회가 쌓아올리는 성공를 향한 바벨탑의 아랫돌이 되어 눌리는 사람들이다.
이 책을 통해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현대의 이런 집단적인 신경발작증의 실상을 비춰준다.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고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방랑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이다. 그리고 광야에서 홀로 하나님을 만난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것은 자기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직면하는 체험이었을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지닌 심각한 오해와 착각을 불태워버린다. 결국 우린 하나님 앞에서 삶의 진실과 진리를 발견한다. 우리 모두가 한 몸이고 그런 우리를 사랑하여 먹이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그 깨달음 앞에서 소유와 소비의 환상을 깨닫는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해방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쫓았던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진리를 몸으로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다. 이 진리는 예언자와 현자, 시인, 그리고 예수에게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진리를 살아내고 전하여 눌리고 착취당하면서 어떤 삶의 기회도 지녀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려한 것이 성서가 전하는 목소리에 담긴 뜻과 마음이다. 내 영혼을 깊이 울리는 이 투박한 음성은 두렵지만 하나님 앞에 죽음과 광야의 삶을 꿈꾸게 한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게 한다. 이제 몸을 낮춰 그 삶의 자리를 기웃거려야 할 때다.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소유욕과 무관심을 조금씩이라고 깍아내고 내 안에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품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해방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