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톤으로 일관된 화면, 검은 물결 위로 먹구름 가득한 하늘로 우뚝 솟은 해골과 오버랩된 유령선. 영화 고스트쉽의 포스터는 중심에 우뚝 솟은 유령선을 보여준다. 그 유령선은 인간의 통제 밖에, 아니 인간이 통제를 에워싼 망망대해에 떠 다니는 죽음, 고통, 분노, 절규와 한의 맺힘을 그려준다.

인간은 나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무의식의 표면 위에 살짝 비치는 '나'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으리란 오해 속에 살아간다. 이성, 합리성, 논리성이란 도구로 무장한 자아는 그러나 끝모를 망망대해에 뒤덮인 작은 섬처럼 무의식의 검은 물결 위를 떠돌 뿐이다. 깊이 뿌리내린 무의식의 욕망을 따라 휘둘릴 뿐이다.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는 바램들은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던져졌을 뿐, 그 욕망에 끌려서 허겁지겁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뤘다는 성취감에 도취되는 자기기만.

그러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무의식의 심해로부터 뜻밖의 욕망과 마주칠 때, 유령이니 악이니 하며 타자화한다. 고스트쉽에서도 유령선에서 만난 악의 화신은 타자로 투영된 자기 얼굴이다. 실은 황금을 독차지하려는 욕망에 눈이 어두운 인간 내면의 집착이 투영된 현현일 뿐이다. 자신의 무의식에 도사린 욕망의 맺힘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 저 밖의 악마, 유령이라고 타자화하며 밖으로 밖으로 도망친다.

고스트쉽은 이런 악순화의 구조를 살짝 보여준다. 그러나 무의식의 심해에서 떠오르는 것이 과연 악마성일 뿐인가? 무의식의 심해에 떠도는 것은 오히려 의식 표면에 의해서 감춰진 상처와 문제를 경고하는 부표가 아닐까? 오히려 무의식은 의식이 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막아주는 안전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상처가 곪아서 죽을 지경에 이르면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무의식의 생명력을 파괴하고 무너뜨릴 때, 자아와 타아를 차별하고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욕망의 독약을 삼켜댈 때, 토악질해낸 결과가 유령선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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