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영화로 회자되고 있는 [살인의 추억].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시종일관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곽찬 구성, 코미디보다 더 웃낀 현실을 통해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자연스러움, 한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 전체와 그 속에 살아간 사람들 모두를 한 번에 보여주고 있는 주제의식....오랜만에 흠잡을 데없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영화를 보기 전에 누군가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면서 끝이 이상하다고 했다. 범인이 누구냐고.....
나와 함께 영화를 본 동행도 끝나고 나오면서 범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해본 나는 아마 "그 시대 전체"를 표현하는 어떤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연쇄살인의 욕망을 잉태하게 한 그 시대의 정자가 단지 어느 한 육체를 숙주로 삼았을 뿐이다. 그 살인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싹도 피워볼 수 없었던 그 시대의 척박한 현실이 공범이다. 그 현실은 분노와 폭력을 무력하게 하고, 이성과 합리성은 절망과 광기로 물들게 했다.
영화의 시작은 시골 소년이 메뚜기를 잡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장난에 죽어가는 메뚜기처럼 살인이 자행되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의 통제는 소년의 말장난으로 인해 웃음꺼리로 미끄러져 나간다. 장난거리로 농락당하고 변질되는 상황은 그 뒤로 이어지는 모든 수사와 진지한 접근도 웃음꺼리로 변해버린다. 놀이같은 죽임과 수사에 대한 농락은 시종일관 계속된다.
이런 연쇄살인이 자행되고 경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불구였던 시대의 터널 속이었기에 가능했다. 첫번째 시체가 발견된 곳은 농수로에 덮개가 씌여져 있는 굴이었고, 범인이라고 확신했던 청년을 놓아줘야 했던 곳은 기차 터널이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긴장 속에 놓인 터널, 전쟁으로 짙밟힌 이 땅의 전근대적 상황이 근대화의 가면을 뒤짚어쓰려던 순간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바로 그 터널의 입구에 서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시대의 살인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누가 살인범이냐 혹은 지금이라도 잡아야되지 않느냐는 질문은 중요한 장면을 놓치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계열의 역동적 구조를 통해서 보여준다. 한 사건은 복잡한 여러 계열의 연결 구조 속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그 사건은 그 사건 자체만으로 의미가 발생할 수 없다. 그 관계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범인을 잡으면 좋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범인이란 비바람 부는 날 자동차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하나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 범인이 맺히기 위해서 불었던 바람과 달리는 자동차의 속력과 흔들림, 유리창의 미세한 결, 떨어진 물발울의 양...이 모두가 하나의 계열을 이룬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1980년대의 그 모든 계열을 살며시 비춰주는 우발적 빈자리를 보여준 것이다. 어떤 한 범인이란 잡힐 수 없는 우발적 빈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