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으로부터의 확장 : 기적의 일상화, 내면화
스티그마타, 성흔은 누미노제나 성현의 종교적 체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두렵고 떨리는 경험으로 인간 전존재가 변하는 경험.
그러나 스티그마타와 같은 기적은 압도하는 외적이고 절대적인 권위이다. 이런 체험에 근거한 신앙은 외적 힘에 눌리고, 그 힘으로 자아는 짓이겨진다. 오히려 그런 자기 학대에서 더 큰 종교적 격정과 감격을 느낀다. 어떤 절대적 힘, 절대적 기준(로고스), 절대적 경전에 근원하는 신앙은 주체와 객체간의 거리를 주체의 삭제를 통해 지워버린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오히려 외적인 절대성이 모두 허물어진 폐허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부터 온 우주로 확장되는 신앙이 있다. 이 때는 자아의 벽이 허물어져 모든 존재와 하나됨으로써 주객의 분리가 극복된다. 이 경우에는 어떤 절대적 힘에 의지해서 혼란과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치않다. 혼돈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속에 진득허니 머물면서 일상의 우연하고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 기적을 발견하고 전존재자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
전자는 서양의 종교성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흔히들 말하고, 후자는 동양의 종교성이라고들 말한다. 사실 그런 양태들은 양 쪽에 다 혼재해있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던 예수의 말씀에 의한 신앙은 분명 후자에 가깝다.
외적 권위에 종속되는 종교성은 비판적 자기 수용이 자리할 곳이 없다. 오히려 앞못보는 격정적 열정이 극단적인 잘못을 범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고통과 고난을 피해 절대적 행복 속으로만 도피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오히려 고통과 혼란이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생명의 싹을 발견하고, 안정과 불안의 이분법적 분별지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지니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기적인 진정 사실인가? 허나 후자의 경우에는 우연하고 평범한 사실이 자기 안에서 특별한 사건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주변에 널려있는 우연한 사실들을 생명의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이웃에게 생명을 전한다.
2. 밖으로부터의 침투: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
이 영화에서는 성흔이 불신앙인의 몸에 나타난다. 캐톨릭 교회의 절대적 권위에 반하는 사건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속에 샘솟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흔폐하려는 도마복음을 인용해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나무를 쪼개도, 돌을 들어올려도 그 모든 곳에 내가 있다"는 말씀을 통해 조직과 체제의 권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무신론자의 몸에 나타나는 성흔의 고통, 그 고통 속에 성육하는 예수의 모습은 가난한 자와 고통 받는 자의 삶과 몸 속에 함께 계신 사랑을 연상하게 한다. 그렇게 교회의 벽을 허물고 드러나는 예수의 사랑, 그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주교는 그 계시의 몸을 죽이려한다. 이것도 현재 교리와 교권, 절대적 권위를 스스로 움켜쥔 교회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 속에 함께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더욱 고통을 가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마지막 성흔으로 죽어가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그 몸을 품에 안은 신부의 모습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아련히 사라지는 길을 배경으로 우리 함께 걸어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이 영화에서 좀 이상한 부분은 메신져로 사용되는 사람을 중요시 하지 않는 죽은 신부의 영혼이 마치 사탄이나 악마처럼 묘사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한계로 보거나 혹은 도마복음에 담긴 예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교회 밖의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가는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후자의 경우에는 진리가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교회의 잘못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하나님은 영화에서 묘사는 것처럼 악마로 보인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