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론
앞의 내용을 전제로 내놓은 두 번째 결론은 사치스러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사치스러움이란 낭비하는 것이며, 낭비란 필요한 한계를 넘어서서 물자를 취하는 일이다. 낭비야말로 풍요로움의 조건이라고도 말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낭비가 방해받는다. 사람들은 낭비가가 아니고 소비자가 되기를 강요당한다. 물자를 취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끝나지않는 관념의 소비 게임을 지속한다.
낭비는 물자를 과잉으로 취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디쯤에서는 반드시 멈춘다. 그때 나타나는 상태가 만족이다.
이에 비해 소비는 물건이 아니라 관념을 대상으로 하기에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으며 만족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에 소비는 계속되고 점차 과격해진다. 만족하고 싶은데도 소비할수록만족으로부터 멀어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지루함이 똬리를 튼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소비사회에서 일어나는 지루함의 양상이며, 이 책에서는 소외라고 했다.
이 상태를 어떻게 피하면 좋을까? 인간은 소비라는 행동을 통해서는물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비가 계속 지속된다. 그렇다면 물건을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물건을 있는 그대로 취하는 것이야말로 사치스러움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 P313

즐기기 위한 훈련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물건을 취하는 것‘이란 그물건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의식주를 즐기는 것, 예술과 예능과 오락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즐기기는 결코 쉽지 않다. 쉽지 않으므로 소비사회가 그 점을이용하고 만다.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교육이란 다분히 즐기는 능력을 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언급의 전제는 즐기기 위해서는반드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음식을 예로 들어보자.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하다. 복잡한 맛을 입속에서 분류하여 여러 가지 감각이나 신체 부위(입, 혀는 물론, 목, 코, 눈과 귀, 경우에 따라서는 손을 포함한 전신)로 받아들이는 것은 훈련을 통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러한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사람은 특정한 맛만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먹고 마신다. 그러나 진정으로 먹지 않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또는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들 맛있다고 말하는 것을 자신도 맛있다고 말하기 위해 우물거리며 씹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먹는다는 행위가 가능해지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252 - P314

소비사회와 지루함의 제2형식인간이라는 존재는 대개 지루함의 제2형식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 지루함과 기분 전환이 특수한 방식으로 얽혀 있는 삶을 영위한다. 그리고무언가를 계기로 그 속에 잠재하던 지루함이 얼굴을 내밀었을 때, 지루함의 제3형식=제1형식으로 도망쳐 숨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사치스러움의 회복이란 지루함의 제2형식 속에 존재하는 기분 전환을 마음껏 누리는 태도, 즉 인간임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지루함의 제2형식은 하이데거의 지루함론이 찾아낸 실로 뛰어난 발견이며,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우리는 지금 하이데거가 권했던 결단주의와는 다른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새로운 결론이 가능한 이유는 하이데거가 지루함의 제2형식을 발견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지루함의 제2형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소비사회에 대해서도 매우 다르게 정의 내릴 수 있다. 즉, 소비사회란 지루함의 제2형식의구조를 악용하고 기분전환과 지루함의 악순환을 격화시킨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 P317

로 지루함에 빠지지 않도록 기분전환을 지향하며 살아왔다. 소비사회는이 구조를 노리고 기분 전환이 지향하는 자리에 있어야 할 구체적인 물건(대상)을 기호나 관념으로 몰래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그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던 우리는 어떤 대상을 누리며 만족을 얻어야 하는데도 ‘어딘지 이상하네……… 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끝나지 않는 소비 게임의 수행자가 되고 말았다. 낭비가가 되려고 했는데 소비자가 되어버린셈이다.
인류는 기분전환이라는 즐거움을 창조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문화나 문명이라고 부르는 행위도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러한행위는 지루함의 제2형식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런데 소비사회는 이 점을악용해서 기분전환을 할수록 지루함이 증대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소비사회 때문에 인류의 지혜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 P318

기다리는 것앞서 스피노자가 말한 ‘반성적 인식‘에 대해 언급했다. 사람은 세상사를 이해하면서 과연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즐거움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근사한 것이 있어도 모든 사람이 압도당할 리는없다. 사람은 즐기면서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에 압도당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을 배운다.
사고는 강요되는 것이라고 서술했던 질 들뢰즈는 영화나 그림을 좋아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는 영화론이나 미술론도 많다. 들뢰즈는 "당신은왜 주말이 되면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찾나요? 그런 노력이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나는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들뢰즈는 자신이 압도당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물이 되는 것‘
이 발생하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디에 가야 그 상황이 일어나기 쉬운지 잘 알고 있었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미술관이나 영화관이 바로 ‘동물이 되는‘ 순간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그가 사용했던 ‘기다린다(ètre aux aguets)‘라는 표현은 동물이 먹잇감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동물은 어디에 가면 먹잇감을 얻기 쉬운지 알고 있다. 본능에 의해, 그리고 경험에 의해 안다. 인간의 경우에는 그런 본능을 기대할 수 없기에 조금씩 배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제2의 결론에서 서술했던 대로 즐기는 훈련은 일상생활 속에서 할 수있다.
무엇이 자신을 압도할 대상인지 곧바로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그냥 내버려두면 사고하길 귀찮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이상, 그러한 대상을스스로 거부하는 상황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에게 사고하기를 강요하는 대상이나 사건이 넘쳐난다. 즐기는 것을 배우고 강제로 사고하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인간은그 대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인간인 것‘을 즐김으로써 ‘동물 되기‘
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 책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 내린 결론이다. - P324

(옮긴 이의 글 중에서)
누차 이야기했듯이, 그 실천이란 지루함과 즐거움이 뒤얽힌 각자의 삶을 두려움 없이 낭비하는 일이다. 동시에 실천은 다음 과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삶, 즉 지루함과 마주하는 삶조차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 세상에 ‘한가함의 왕국‘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
윌리엄 모리스의 멋진 말을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한 답안에서 다시금 마주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바라자. 삶을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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