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늘 수단으로 존재했다. 어딘가로 급히 가기 위해, 늦지 않으려고, 상대 팀 선수보다 더 빨리 골문으로 닿기 위해. 그렇게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야 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달리기가 목적의 왕좌에 앉았다. 달리며 요동치는몸과 마음을 난생처음 세심히 관찰한 날이었고, 달리기의 본질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내가 알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경험임을 알아차렸다. 달리며 나눈 몸과의 대화는 끔찍하게 힘겨웠지만 동시에 눈물겹게 짜릿했다. 무기력 속에 헤엄치던일상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 삶의 생기였다. 무엇보다 온종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이별의 잔여물이적어도 달릴 때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 P12
반대로 한밤의 달리기는 하루를 매듭짓는 일이다. 아침 달리기가 막 깨어난 생기와의 조우라면 한밤의 달리기는 숨죽인 듯 고요한 레이스다. 아침 러너가 다가올 하루를 낙관의 물감으로 물들일 때, 밤의 러너는 이미 과거가 된 하루를 차분히 쓸어담고 정리한다. 일상에 치여 기진맥진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고 삶이 남긴 근심과 아쉬움을 날숨으로 내뱉는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든다. 하루 종일 괴롭히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동시에 내일의 희망을 빼꼼히 엿본다. 다시 『해리 포터의 세계관을 빌려오면 이들은 슬리데린형이다. 음(陰)의 기운을 드리우며 차분히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고 위로하는 영혼들. 그래서인지 한밤의 러닝은 조금 더 처절한 모습을 띤다. ‘달리기‘ 보단 ‘뜀박질‘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다. - P17
자존감의 회복은 위대한 성과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미성취가 금 간 마음의 빈틈을 메우고, 그런 성취들이모여 단단한 삶의 방파제가 되어준다. 짧은 거리라할지라도, 혹은 빠른 속도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세운목표를 어떻게든 달성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애를 손에 쥐었다. 일상의 끄트머리에서 움켜쥔 그 성취를이불 삼아 불안에 떠는 몸을 녹이고 유독 길었던 하루에 마침표를 찍곤 했다. 이벤트로 시작한 달리기가 이제 막 일상으로 뿌리내렸다면, 머지않아 나와 같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일 것이다. 선택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서로 다른 두 달리기를 비교하며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의하면 그만이다. 아침 달리기가 상쾌한 시작이라면 밤의 뜀박질은 처연한 마무리다. 아침 달리기가 생기로운 계절의 소리를 듣는 일이라면 밤의 뜀박질은 내 발자국과 숨소리로만 공간을 채우는 경험이다. 아침 달리기가 활기 넘치는 바깥세상과의 만남이라면 밤의 뜀박질은 텅 빈 길 위에서 스스로 나누는깊은 대화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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