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신감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편이 없는사람들은 서로의 편이 되어주었다. ...
‘아, 그들은 서로에게 신이었겠구나."

...
곧 용산참사 10주기다. 내 몫의 싸움을 고민해야겠다. - P170

사진작가 최민식이 찍은 어떤 사진을 보고 숨이 딱 멈추어진 적이 있다. "부산, 1965" 라고 적힌 사진 속에선 한 소년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조심스럽게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뒤통수에 커다란 땜통이 있었고 윗도리를 입지 않아드러난 왜소한 등허리에 날갯죽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공손히 손을 모으기 위해 소년의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해있었다. 그토록 노골적인 구걸도, 그토록 적나라한 시선도 적이 충격적이었지만 내 시선을 더 오래 붙든 것은 사진 옆에 쓰인 작가의 말이었다.
"나는 자신의 운명과 대결하며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고독한 사람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구걸하는 소년에게서 ‘굴복‘이 아니라 ‘대결‘을 읽어내는 일, 그것은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해본 사람만이 할 수있는 일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최민식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재난 위에 태어난 가난한 소년이 자신의 운명과싸우는 치열한 현장에 몇 푼의 동전을 던지는 일은 온당치않다 여겼던 것 같다. 그는 소년의 준엄한 대결을 사진으로 기록했고, 그것이 그가 자기 시대와 대결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 P176

‘대결‘이라는 단어 때문에 나는 땅바닥에 코가닿아 있을 소년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소년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 사회가 기아를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고 고도성장을 이루었던 그 세월을 소년도 무사히 함께 통과했을까. 부랑아 수용소 선감학원‘
의 피해자들을 만난 뒤 나는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난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가난한사람들을 없애는 손쉬운 길을 택한 국가가 ‘명랑한 사회건설‘을 위해 거리의 소년들을 쓰레기처럼 청소하는 동안,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이 당하는 폭력에 눈감았다. 먹고사는 일이 죽기 살기로 힘들었던 시절, 사람들은 그렇게 가난에 투항하고 말았다. - P177

죽음은 압도적인 경험이지만, 그 일이 닥쳐온다 해서 모두가 그것을 ‘제대로‘ 겪는 것은 아니다. 가족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죽음에 대해 무지한가를 깨닫게 되고, 장례가 끝나면그 이유를 곧 알게 된다. 죽음은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금기인 것이다. 금기된 것은 배울 수 없다.
세월호참사 희생자 신호성 군의 어머니를 인터뷰했던건 2014년 11월이었다.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그렇게 울다간 그녀의 애(창자)가 정말로 다 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세시간 동안 쉬지도 않은 채 애끓는 사랑과 그리움, 분노를 토해냈다. 변변한 질문도 못한 채 엉엉 울면서도 나는어쩐지 그녀의 통곡소리가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녹음파일을 듣고 또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짐승의 소리 그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도 이렇게 울었을까, 이렇게 울었어도 마음이 아팠고이렇게 울지 못했어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그 녹음파일을 꺼내 들었다. - P181

...그들을 버티게 하는 것은 배에 대한 애정도, 회사에 대한 애정도 아니었다. 오직 개같이 번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한다는 자부심뿐이었는데, 사고 후 산재를 신청하자 공짜로 나랏돈 바라는 기생충 취급을 받으며 그마저도짓밟히고 말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구조의 비열함에한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지고 말았다. 이 문명의 성과물은 취하면서 어째서 이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에는 이토록 무지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준 ‘진짜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 뒤 돌아갔다.
"용접은 이제 안 하려고요. 그 일은 몸과 시간을 갈아서돈으로 바꾸는 일이에요."
세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읽고쓴다는 일이 말할 수 없이 부당하게 느껴진다. 부끄러움을 견디면서 쓴다. - P192

김영조 씨가 말했다.
"우리나라엔 성역이 세 가지 있습니다. 유재석과 김연아, 그리고 소방관이요. 우리는 영웅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의용소방대에서 탈퇴했고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났다. 세월호와 완벽하게 닮았지만 절묘하게 다른 어려움에 나는 작게 탄식했다. 그는 밤마다 불타는 건물 앞에 서서 살려달라는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처벌받지않았으므로 매일 밤 그는 힘없는 부모인 자신을 벌한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위로만 넘치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폐만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라도 충청북도는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고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 P196

어떤 앎은 내 안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지만 어떤 앎은 평생 쌓아온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리며 온다. 혁명 같은 그런 얇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작은 고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란 걸, 나는 동물적으로 알았다. - P204

세월호 가족의 이야기를듣고 기록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면 힘들지 않나요?"
기록하는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분명한것은 이 일이 힘이 드는 동시에 힘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떤 장면들은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언젠가 내 마음이 힘들 때, 남들은 참 쉽게 하는 일들이 나에게만 어려운 것처럼 느껴질 때 꺼내볼 수 있도록. - P210

미경 씨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읽어준 것은 머리를 밀어주던 여성이었다. 그가 미경 씨를 뒤에서 안아주며 "어머니,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미경 씨의 눈에서 눈물이왈칵 쏟아졌다. 뉴스에서 엄마의 삭발 소식을 듣고 한참울던 아들은 늦은 밤 만난 엄마의 민머리를 보며 말했다.
"엄마, 예뻐요."
나는 이 장면을 아주 사랑한다.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여기는천국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나 전태일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기록하는 마음은 광장에서 미경 씨의 머리를 밀어주며 "죄송해요"라고 말했던 여성의 마음과 비슷할 것 같다. 바라는 것은 그가 나에게 안심하고 자기의 슬픔을 맡겨주는것이고, 나는 되도록 그의 떨림과 두려움을 ‘예쁘게 기록해주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 P213

나는 ‘짐승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러나 요즘의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 좋은 비장애인이나 좋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이제 나는 좋은 동물이 되고 싶어졌다. 40년을 살면서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그것이 앞으로 살아갈 생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2019, 12. 2.3) - P221

《고기로 태어나서》를 쓴 작가 한승태는 우연히 축산 농가에 취업했다가 그 실상에 놀라 보름 만에 도망쳐 나오며이렇게 썼다.
"내가 축사 안에서 본 것들 가운데 모르던 것은 하나도없었다. 닭장이 있었고 닭이 있었고 똥이 있었고 알이 있었다. 하지만 축사 속에 내가 예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았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내가 우연히 노들장애인야학 교사가 되었을 때의마음도 그랬다. 내가 야학에서 본 것들 가운데 모르던 것은 없었다. 장애인들은 듣던 대로 차별받았고 멸시당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이는 20년 동안 한 번도 집 바깥을 나가지 못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언니의 결혼식에도 부모의 환갑잔치에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했다. 장애인의 삶은 충격적이었지만 그 충격은장애인의 열악한 삶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그것을 온통 ‘문제‘라고 말했던 것에서 나는 더 큰 충격을받았다.
내가 자라온 세상에선 누구도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지않았다. 어떤 문제를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현실을 바꾸거나 최소한 직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끝인 줄 알았던 거기가 최전선이었다. 나는 그런 이들의 저항이 세상의 지평을 넓혀왔다고 믿는다. 〈도미니언>을 보면 인간의 끝을 보는 것 같다.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을까,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쇠사슬을 목에 건 채 도축을 중단하고 동물을 해방하라고 외치며 경찰에 체포되는 모습을보았을 때 나는 질문을 바꾸게 되었다. 인간은 어디까지공감할 수 있고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삼시 세끼 고기나 달걀, 우유를 먹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내가 숨 쉬는 모든 자리가 최전선처럼 느껴진다. - P277

그가 모은 2천만 원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지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2천만 원을 받아 가장 가까운 은행으로 걸어갔다.
스쳐 가는 모든 사람이 강도처럼 느껴져 가슴 속 돈봉투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한번이라도 꽃님 씨를 이돈뭉치처럼 귀하게 여긴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자눈물 나게 부끄러워서, 이것은 꽃님 씨의 복수가 분명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 복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목이 메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거리에서 싸웠잖아. 그 싸움 덕분에 내가 살수 있었는데 집에 누워 있는 게 항상 미안했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싸운 거다."
어떤 사람은 당연히 받는 선물을 어떤 사람은 평생 싸워서 얻는다. 자기 자신에게 권리를 선물한다는 일,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나는 꽃님 씨에게서 배웠다.
- P244

그해 겨울 임용시험이 있던 날, 시험장이 아니라 야학으로 갔다. 나는 그렇게 아무도 이기지 않은 채로 교사가 되었다.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들 옆에 서자 세계가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여서 나는 정말로 충격받았다. 내가 타고 온 버스도, 지하철도, 내가 다닌 학교도 모두 문제였다. 나는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건 경쟁하는 세계에서 연대하는 세계로, 적응하는 세계에서 저항하는 세계로, 냉소나 냉담보다는 희망을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공동체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가장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나자신일 것이다. - P247

사람들은 말했다. 차별이 사라져서 노들이 더 이상 필요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말에 힘껏 저항하고 싶었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사회라고 말할 때, 노들은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같은 구호는 수십년간 집 안에 갇혀 살아온 사람이 외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버스란 그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풍경의 일부일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항하는 인간들이 ‘발명‘ 해낸 말이다. 그 저항이란 해와 달의질서에 맞서는 일처럼 아득한 것이지만 그 어려운 일을 기어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마지막에 누군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건 좋은 사회의 증거가 아니라 그 사회의 수명이 다했다는 징조인 것이다. (2020. 6, 8) - P248

은전의 관심이 ‘동물‘로 이어져 사로잡힌 것은 자연스러의 보인다. 그는 고양이 카라를 만나 함께 살게 된 일이 "왜인지 굴욕적"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굴욕은 남이 나를업신여기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스있는 일이 없음을 자각할 때 찾아온다. 인간의 혐오는 제 몫의굴욕을 남에게 돌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굴욕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혁명을 배울 수 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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