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철학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경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인간소외의 문제 등 이전 시기와는 또다른 ‘인간의 문제’에 대해 사유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비판이론”을 통해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적 사유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선구적 역할과 발터 벤야민 등 주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지적 교류를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며, 21세기 들어서도 그 지적 전통은 하버마스와 그 제자(대표적으로 악셀 호네트)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이들의 사상적 맹아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제1세대를 대표하는 호르크하아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처음 발표된 개념 “도구적 이성”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삶이 자신의 주체적 사유나 실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거대한 사회 전체 속에서 독자적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되어버린 소외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바로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 - 아도르노의 체취가 그대로 드러나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유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아도르노의 글쓰기는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해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우리들에게 의사소통의 지름길을 하나 남겨두고 갔다. 그것이 바로 『미니마 모랄리아』이다.
이 책은 그가 나치 집권의 박해에서 벗어나 미국 체류기간에 쓴 에세이 형식의 글로 153개의 단상(斷想)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인간실존의 위태로움을 직접 목도하면서 쓴,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 아무런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울러 이 책은 아도르노 자신이 헌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계몽의 변증법』의 후속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두 책은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다만 아도르노 스스로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미니마 모랄리아』는 난삽하고 지루한 이론적 천착보다는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아무런 꾸밈장치 없이 자유분방하게 써내려간 책으로 우리에게 난해한 사상가로만 알려진 아도르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뒤틀린 현대자본주의 산업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이 책에서 아도르노는 인간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개인이든 인류 전체든 “삶” 때문에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발버둥치고 처절하게 살아가지만, “삶”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터부시된 세상에서 아도르노는 “삶” 자체를 진지한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우리의 “삶”이란 예전의 철학자들이 말한 바와 같은 자율성과 독자적 실체로서의 삶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물질적 생산과정(즉 현대자본주의 체제)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사적(私的)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변해버린 “뒤틀린 양상”으로 파악한다.
153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목차만 보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삶의 본질에 대해 그가 얼마나 많이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즉 『계몽의 변증법』이 이론화 작업을 통해 현대자본주의 사회를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파악하였다면, 『미니마 모랄리아』는 바로 그러한 현실이 우리 “삶”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아도르노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견실한 관계설정 속에서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치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주체”였던 예전의 개인이 현대산업사회에 들어서 무력화되고 불구화된 모습 그 자체이다.
『미니아 모랄리아』에서 이러한 점은 철저히 “개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체계”의 그물망(속물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의미함)이 더욱 촘촘히 인간 개개인을 옥죄어가는 양상을 드러내는데 확실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현대인의 고민이 바로 이 지점에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율적 주체”를 갈구하지만, 이미 도구적 이성으로 변해버린 현실의 “인간”들이 꽉 들어찬 세계임을 자각하는 순간, 그 탈주를 꿈꾸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대한 성찰 요구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적 사고방식과 조야한 낙관주의, 근시안적 비판, 사유보다는 이미지에 길들여지고, 실상을 파고들기보다는 소통에 중점을 두는 문화상품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고통스럽지만 진지한 내적 “성찰”을 요구한다.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여전히 시(詩)를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비록 그가 나치 집권 아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성찰적 아포리즘으로 남긴 말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유효한 말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의 진행속도와 맞물려 더욱 거세지는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보이듯이 세상의 틈과 균열을 폭로하고 왜곡된 실상을 파헤친 다음 그러한 세상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슬픈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기에는, 그래서 새로운 구원을 희구하기에는 어쩌면 21세기는 너무 엄혹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아도르노의 성찰을 통해 우리 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음은 하나의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즘―문화비평과 사회』는 섬세하고 날카로우며 비판적인 깊이를 지닌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서 비판이론의 정초를 마련한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문화비평 에세이집이다. 193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저술, 발표해온 열두 편의 에세이를 모은 이 책에는 체계를 거부하고 동시적, 불연속적,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그의 언어와 철저한 변증법적 사유가 생생하게 녹아들어 있다. 아도르노는 사회연구의 입장에서 문화비평, 유토피아에 관한 사유, 음악에 관련된 현상들, 동시대의 철학과 문학을 비판하고 있다.
철저한 변증법적 시각으로 문화 전반을 분석하는 탁월한 에세이들
이 책의 간판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비평과 사회」에서 아도르노는 문화와 문화비평이 비판적 의미를 상실하고 현실 개입을 포기하며 소비재가 되어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타락해온 현상에 주목한다. "문화비평 전반은 정작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린 총체적인 야만상태"이며, "문화비평가는 삶 자체의 사물화가 과도한 계몽보다는 계몽의 부족에 근거한다는 점, 현재의 편협한 합리성에 의해 인류가 당하는 훼손들은 총체적 비합리성의 상흔이라는 점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 전체가 옥외감옥으로 변해 그 속에서 무엇이 무엇에 종속되느냐가 전혀 문제시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경향을 지적한다. 아울러 문화비평의 여러 방향을 분석, 검토한 후 이에 맞서는 것으로 변증법적 문화비평(가)을 내세우고 있다.
"문화가 일단 전체로서 받아들여질 경우, 이미 문화 자체의 진리 요소, 곧 부정은 소멸한다"는 것은, 아도르노의 핵심 명제인 "전체는 비진리다"와도 상통한다. 기존 지배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여러 형태의 사고방식에 대한 아도르노의 단호한 거부태세 또한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다.
각각 만하임, 슈펭글러, 베블런을 다루고 있는 「지식사회학의 의식」 「몰락 이후의 슈펭글러」 「문화에 대한 베블런의 공격」은 바로 아도르노의 이러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에세이다. 여기에서는 "아무 탈출구도 찾지 못하는 자유주의자가 독재적인 사회조직에 자신은 반대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의 대변자가 되는" 사례로서의 만하임, 언론의 위력, 대중의 노예화, 독재정치 등과 관련해 뛰어난 예견력을 보이면서도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한 것이다'라는 공식만으로 추상해버리는" 폭력을 가하는 "환멸의 역사철학자"로서의 슈펭글러에 비판의 초점이 맞춰진다. 또 "상품 소비는 약탈의 원칙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의 초기 단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진정한 욕구 충족이나 베블런이 즐겨 삶의 풍요라고 칭하는 것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특권, 지위에 복무한다"면서 베블런의 과시소비설을 비판한다. 「올더스 헉슬리와 유토피아」에서는 지배체제에 의해 욕구가 만들어지고 조작되는 메커니즘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올더스 헉슬리에 대한 아도르노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물질문명을 야유하며 정신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헉슬리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아도르노는 철학자, 사회학자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지만 쇤베르크의 현대음악에 영향을 받은 음악가요 작곡가이기도 했다. 또한 음악비평가로서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가리지 않고 음악의 모든 면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써왔다. 이 책에도 세 편의 음악비평 에세이가 실려 있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의 핵심이 담겨 있는 「초시대적 유행」에서는 재즈를, "사실상 현재의 전체 이데올로기와 모든 문화산업에 귀속되는 메커니즘들이 두드러지게 표면화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재즈는 유행과 마찬가지로 "사태 자체가 아니라 내보이는 것이 중요"하며 변형 속에서도 규격화되어 있는 컨베이어벨트 방식, 규범화된 즉흥성, 일탈의 제거, 사이비 개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실내에 어울리게 깨끗이 잘 세척되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제도로서의 재즈, 그 안에 담겨 있는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의 계기를 비판하고 있다.
「바흐 애호가들에 맞선 바흐 옹호」는 종교적으로 채색함으로써 바흐를 "중립화된 문화재" "잘 보존된 바로크 식 도시를 위한 오르간 축제극의 작곡자"로 만든 바흐 애호가들에게 이 또한 한 토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신랄한 일격을 가한다. 아도르노는 그의 음악을 교회의 영역에 묶어놓는 데 반대하며 당시 매뉴팩처를 통해 진행되던 물질적 생산의 합리화 과정과 유사하게 합리적으로 구성된 작품의 이념을 최초로 구체화했다는 데서 바흐의 음악사적 의의를 평가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현대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2음기법의 창시자이자, 아도르노가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의 자세를 방해하는 진정한 현대예술의 전범으로 꼽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관한 논의이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듣는 사람의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동참을 요구한다. "다수의 동시적인 것에 예민하게 주목하고, 무엇이 나올지 항상 이미 알고 있는 관습적 청취지침을 포기하며, 일회적이고 고유한 것을 긴장하며 지각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수용자에게 일종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음악은 즐거움을 준다는 식의 상투적 관념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쇤베르크의 음악 못지않게 카프카의 작품 또한 독자의 관조를 방해한다. 「카프카 소묘」에서 아도르노는 『성』 『심판』 「변신」 등의 작품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감상자의 관조적 거리감을 깨면서 끝없이 재해석을 요구하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극히 미미한 일탈조차 허용하지 않는 체계(이를테면 자본주의)를 "음화상태로 그만큼 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데서 카프카 문학의 본질을 찾고 있다.
그밖에도 호프만슈탈과 게오르게의 상징주의가 소재신앙과 지나친 알레고리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유미주의에서 반사회적 저항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게오르게와 호프만슈탈」, 박물관 혹은 예술의 생명력에 대한 발레리와 프루스트의 상이한 입장을 대비시키고 있는 「발레리 프루스트 박물관」이 실려 있다. 말미에 실린 「발터 벤야민 초상」은 '비동일자' '짜임관계' 등 아도르노 이론의 핵심이 되는 개념을 제시하며 그의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에세이다. 이 에세이에서 아도르노는 최소한의 객체 혹은 초라한 객체들에 대한 벤야민의 편애("영원한 것은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이다")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벤야민이 풍기는 유대교 신비주의와 권력 지향성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
수동적인 독자들에게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견고한 사상체계,
그 안에 담긴 폭발적인 비판의 에너지!
기존의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여러 가지 사고에 대한 비판, 그 순응에 거부하는 진정한 현대예술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이 책은 풍부한 지적 자극을 제공한다. 하지만 아도르노를 읽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도르노 독일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특별한 그의 언어는 한순간도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철저한 반성적 사유를 담고 있어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각각의 문장은 '나를 해석하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어느 문장도 해석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그의 저술은 그러나, 수동적인 독자가 노력 없이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도록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감상자의 관조뿐 아니라 실천을 요구하는 쇤베르크의 음악처럼.

 생전에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 인정받았고(37세 때 말러는 빈 궁정 오페라단의 예술 감독이 된다), 타계 후에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그 음악이 ‘불온한 음악’으로 금지되었으며, 음악사에서는 후기 낭만주의자로 평가받았던 말러(1860~1911)가 20세기 신음악의 선구자이자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 자리 매김된 것은 불과 50여 년 전이다.
1960년 말러 탄생 100주년에 출간된 아도르노의《말러―음악적 인상학》은 말러 음악을 재조명하고, 말러 음악의 연주사와 연구사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철학자로 활동하기 이전에 음악 비평가로 인정받았으며 또한《신음악의 철학》을 집필하기도 한 아도르노는 말러에 대해 히틀러 정권이 내린 판결과 그의 사후 50년 동안의 음악사가 내린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며, 말러의 음악을 통해 신음악의 진정한 의의를 밝히고 있다.
한 음악가와 한 철학자, 예술과 사유의 만남이 이뤄낸 결실인《말러―음악적 인상학》은 새로운 음악의 길을 연 작곡가에게 바치는 헌사이면서, 말러라는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기술적인 논의와 임의적인 분석의 대립을 넘어선 총체적인 상을 드러내준다.
이 책의 부제 ‘음악적 인상학’은 19세기 들어 의학, 생물학과 접목되어 유사 과학으로 크게 유행했던 인상학에서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나치가 인종적 편견을 고착시키기 위해 인상학을 이용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도르노는 음악적 인상학을 통해 말러에게 드리워진 유태인이라는 인종적 편견을 걷어버리고 말러의 음악 자체를 통해 말러의 ‘얼굴’을 새로이 그리고자 했다.
일체의 편견 없이 오직 음악을 통해서 말러의 음악을 설명하고자 하는 아도르노의 의지가 함축된 음악적 인상학은, 사전에 정해지고 주어진 특정한 입장 혹은 관점에서 말러의 음악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따라가며 그 인상과 특징을 그대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어떠한 직선적인 역사적 경로를 따르지 않았으며, 고전주의 시대의 통일된 세계관의 ‘파현’을 보여주었던 말러 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음악적 인상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러한 분열과 파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후기 시민 사회, 그 공허한 세계 운행의 파현
아도르노가 파악하는 말러 음악의 의의는 ‘파현(破顯, Durchbruch)’이라는 낱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말러 음악의 형식적 이념의 핵심을 파현이라는 말로 지칭하면서 아도르노는, 말러의 음악은 공허하고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 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후기 시민 사회의 맹목적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현은 기존의 억압적이고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뚫고 나오면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파현은 제3장 첫머리에서 아도르노가 언급하고 있듯이, ‘계류Suspension’, ‘충전Erfullung’이라는 다른 형식적 이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말러의 음악은 후기 시민 사회의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파현’을 통해 뚫고 나와서는 ‘계류’를 통해 잠시 중단시키기도 하며, 파현에 의해 뻥 뚫린 자리를 ‘충전’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 넣기도 한다. 아도르노는 말러의 이러한 음악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말러의 교향악은 세계 운행에 대한 반대 변론을 펼친다······그 곡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체와 객체가 단절된 자리를 때워서 가리지 않으며, 화해에 도달했다고 속이느니 차라리 자폭하고 만다.”
옮긴이가 ‘파현’으로 옮기고 있는 독일어 Durchbruch는 기존 음악학계에서 ‘개파(改破)’라는 어색한 조어로 번역ㆍ소개돼왔다. 그러나 옮긴이는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뚫고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개시라는, 아도르노가 사용한 본래의 함의를 살려 ‘파현’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다.

 대표적인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가 중 한 사람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로 호르크하이머와 공동집필한 '계몽의 변증법'과 함께 20세기의 고전으로 꼽히는 저작이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나치즘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개인을 전체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이념과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부정한다. 또한 그는 '헤겔의 주장처럼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될 수 없다'며 '한번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부정변증법'을 주창했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 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라는 진술로 시작되는 이 책은 아도르노 최후의 저작이자 아도르노 이론의 총결산으로서,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예술 이론에 걸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심오한 변증법적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현대의 산업 사회는 고도의 합리적 수단을 이용한 비합리적 지배 관계를 그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관리되는 사회'로서, 부자유가 영속화된 사회, 가속적으로 비인간화되고 야만화되는 세계, 따라서 근본적으로 변해야 하는 세계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문화 산업의 산물들은 그 방향성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지배의 도구라는 점에서, 즉 '관리되는 사회'의 현실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동일할 뿐이며, 이와는 달리 진정한 예술은 이 '관리되는 사회'에 대해 총체적 부정의 자리에 선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난해하면서도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예술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천착하는 이 책은 미, 추, 예술의 자율성 등 미학의 중심적 카테고리들을 사회적 기반 위에서 변증법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이러한 쟁점적인 물음들에 답하고 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두 망명 지식인이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해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한 저서이다.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서는-심미적 차원이 아닌-그러한 야만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불빛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이 책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런 절망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총체적 파국뿐만 아니라, '문화 산업'에 관한 논의를 통해 미국적 상황 또한 구세계의 파시즘적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명제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술진보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가공할 야만상태를 빚어낸 현대는 어떤 시대이며 인류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해명하는 하나의 '이론'을 이 책은 세우고 있다. 오늘날 학문과 사상은 기술적, 실증주의적 정신에 지배되어 끝없는 핵분열을 계속하고 있거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잊어버리기와 벗어나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런 물화나 죽음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유의 저항'이 이 책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삶과 사회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추구하는 이 책의 곳곳에서 삶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만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르헤스 2006-03-0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의 진지한 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이 드네요. 추천드려요 ^^

물만두 2006-03-0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님 저 안진지해요^^;;;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이다
“나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특징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한 이 유명한 말은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웅변적으로 잘 드러내준다. 플라톤! 철학에는 관심도 없거나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플라톤’ 하면, ‘이데아’, ‘동굴의 비유’ 등등 그에 관한 ‘상식’을 쉽사리 떠올린다. 그러나 플라톤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다. 그건 바로 우리가 그의 이름만 알 뿐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플라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플라톤이 누구인지, 그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책은 흔치 않다. 우리가 서양정신사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만나는 서양철학의 원류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우리 인간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물음들을 2500년 전에 다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학문을 하든 하지 않든 한번쯤은 플라톤을 짚고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쉽게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문 철학도를 제외하고 인접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나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입문서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손에 쏙 들어오는 이 책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을 열어준다. 플라톤에 대한 수많은 입문서가 있는 독일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플라톤 학도가 최근에 ‘새롭게 써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이 책은 우리를 곧장 플라톤에게로 안내한다.
이 책과 함께 플라톤이라는 높고 가파른 고개를 가뿐하게 넘는다
이 책은 먼저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게 한 배경을 간략히 다루고, 그의 철학이 특정한 맥락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 다음에는 플라톤의 초기, 중기, 후기 대화편들의 특징을 개괄하고, 이어 그가 왜 ‘대화편’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플라톤 철학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주요 대화편들의 핵심 물음들과 함께 좋음, 육체와 영혼, 이데아론, 선험적인 앎과 상기, 앎의 개념 등 플라톤의 중요 사상들이 설명된다. 특히 그 유명한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 책은 플라톤의 사유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묻고 있다. 즉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참된 것을 찾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플라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책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교조적인 이해 방식을 벗어나 플라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 즉 인간적인 삶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며, 그 이전에 인간의 본질은 원래 무엇이냐 하는 오늘날까지도 논의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 보르트는 플라톤 철학을 관통하는 물음과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을 사로잡았던 물음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쉽게 논함으로써 우리가 플라톤이라는 철학의 높고 가파른 고개를 한결 가뿐하게 넘어가게 해준다.
한 손에 쏙 잡히는 플라톤
누군가를, 누군가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저작을 독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나 무엇인가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이 그런데도 플라톤과 그의 철학에 대한 ‘제대로 된’ 입문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플라톤에 관한 책들이야 많지만, 어떤 것들은 전문 연구자들만을 위한 것이어서 초심자에게는 과도한 부담감만 안기고, 또 다른 것들은 너무 소략해서 철학적인 ‘영양가’가 부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 '철학자 플라톤'은 ‘보편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목표에 성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플라톤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여 플라톤 철학의 전반을 꿰뚫게 하고,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플라톤에 대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와 그에 대한 연구 상황을 알려주어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젊은 연구자가 새롭게 쓴 ‘제대로 된’ 플라톤 입문서이다. 또한 이 책은 독자의 손에 쏙 잡히는 판형과 읽기 쉬운 편집으로 되어 있어 언제든지 간편하게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다. 우리 곁에 편안하게 함께 있어 언제나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플라톤― <철학자 플라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시간. - 실천으로서의 철학(<파이드로스>)

 서양 사상의 뿌리인 헬라스 사상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이다. 헬라스인들의 무속적 '신들림' 현상의 극복과 구원 사상의 전개에 대한 정신사적 고찰, 그들의 면면히 이어진 중용 사상, 기능의 관점에서 본 사상사, 존재론적, 인식론적 탐구와 삶의 이론의 접합, 헬라스 비극이 말하고 있는 것 등을 다루고, 플라톤의 형상 이론의 체계적 조망과 좋음(善)의 원리, 적도 및 균형의 사상,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존재론, 자연법 사상, 글과 직관의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다룬다. 또한 서양 철학사를 통해 2,300년이 넘도록 영향력을 미쳐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요 비판 내용들을 장장 100쪽에 걸쳐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해 나간다. - 제7장 대화편<파이드로스>의 특이성

 1. 국내 학자에 의해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이 복원되다
고대 의학 연구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오랫동안 고독하게 히포크라테스 연구에 전념해온 학자 반덕진 선생! ‘오직 저술로만 말한다’는 신념을 갖고 홀로 20여 년 동안 히포크라테스와 나눈 우정의 기록인 《히포크라테스의 발견》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연재물이나 논문 모음집이 아니라 오랜 구상과 집필 계획에 의해 나온 것으로 그의 깊이 있고 집요한 히포크라테스 연구의 첫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인해 ‘미지의 세계’인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이 복원되었으며, 이제 우리도 히포크라테스 정본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약 2500년 동안 서양 지성사와 과학사의 한 축을 담당해온 히포크라테스 사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담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대에 오면서 과학적 의학의 무기 앞에 히포크라테스가 가진 의학적 왕홀(王笏)은 부러졌지만 결코 의심받은 적 없는 그의 ‘인문주의적 정신’과 ‘통합적 사유방식’은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교양서
《히포크라테스의 발견》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히포크라테스 전집》과 철학서, 역사서, 서사시, 비극 등 그리스의 다양한 사료를 재구성하여 신비한 인물로 비치던 히포크라테스를 책 속에 살아 있는 실존 인물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재현하려면 대상을 보여주어야 하고, 보여진 대상을 잘 묘사해야만 한다. 저자는 20여 년 동안 모아온 그림들과 여러 문헌들을 살피면서 알게 된 지적 체험들을 상세하게 주석으로 묘사했다. 인문학자들과 그리스 문화 애호가들(Hellenists)들을 위해 전거주석을 충실히 달라보니, 약 1천개의 주석이 붙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은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전기》, 철학서, 역사서, 서사시, 비극 등 그리스의 방대한 사료와 로마의 고전을 바탕으로 의학 혁명가로서의 히포크라테스 상과 고전기 그리스의 문화를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특히 히포크라테스 사유의 혁명성, 즉 서양적 사유의 히포크라테스적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합리주의, 자연주의, 인본주의를 재검토하면서 그 현재적 의미를 살피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 히포크라테스 사유의 혁명성
① 인문주의 정신: 히포크라테스는 철학자, 역사가, 비극 작가들에 앞서 ‘인간’을 학문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인간학’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② 합리주의 정신:질병의 원인을 신벌설이 아닌 자연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③ 자연주의 정신:투약, 절개, 소작과 같은 치료의학보다 음식과 운동이라는 섭생을 통한 자연치유력 증진에 관심. 자연을 진정한 의사로 보고 의사는 자연을 돕는 보조자로 자리매김한다.
④ 인도주의 정신:의사는 의료 자본가가가 아닌 의료 전문가로서 명예를 생각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구한다.
3. 왜 그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히포크라테스는 ‘선서’가 아니고서는 연상키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서만으로 그의 아우라(aura)에 취하기에 그의 향기는 감미롭기만 하다. 히포크라테스를 ‘마음씨 좋은 의사’로만 알게 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선서’에 가려 있는 그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전집에 관심을 갖고 그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발견할 필요가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고전기 그리스를 이해하는 새로운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인문학이 접속해야 할 문화 코드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일정 부분 서양적 사유의 발원이 된 히포크라테스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탐색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그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가? 비록 히포크라테스의 의술은 오래 전에 퇴색했어도 그의 사유가 의심받은 적은 없다. 히포크라테스 사유의 매력은 ‘휴머니즘’ 정신이 ‘통합적’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가 의학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인문학적 사유가 주로 의학 분야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전집에는 인문주의자(humanist)로서의 히포크라테스가 도처에 향기를 발하고 있다. 그는 병을 앓는 환자는 물론 그를 둘러싼 자연 환경과 인문 환경과의 상호작용까지 고려하면서 이것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본 인문의학자였다. 그는 풍토학, 지리학, 천문학과 같은 자연학에서부터 민족학, 인류학, 수사학, 철학과 같은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 속에서 인간을 파악하고자 했다. 즉 당시에는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때 현재보다 훨씬 많은 요소들을 고려했으며, 이 각각의 요소들을 유기적인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4. 우리 곁에 다가온 히포크라테스
저자는 현전하는 고대 문헌들을 재구성하여 우리에게 신비스런 존재로만 인식되던 히포크라테스를 방대한 시간차를 훌쩍 넘어 책 속에서 생생하게 걸어 나오는 실존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상세한 주석과 도판으로 고전기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 교양인들이 이 책을 완독할 수 있도록 해설주석을 풍부하게 달았고, 아직 국내 연구가 미흡한 점을 감안하여 인문학자들과 그리스 문화 애호가들을 위해 전거 주석을 충실하게 달았다.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인 코스 섬의 풍광에서부터 히포크라테스 문제에 대해 극단적 회의주의를 주창한 20세기 에델스타인의 사진까지. 이 책의 상징적 장면들은 물론 본문 내용을 보완해줄 수 있는 도판들을 풍부하게 실었다. 또한 다양한 부록을 첨부하여 히포크라테스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시공간의 지도를 그려냈다.
① 히포크라테스 연표:히포크라테스에 관한 외국의 어떤 자료에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히포크라테스 관련 연표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② 히포크라테스 전집 목록:그리스어, 영어, 한국어 표기를 병기하여 그간 국내에서 동일한 제목에 대해 다양하게 사용되던 표현들을 바로 잡고자 했다. 그리고 전집의 대표적 판본들인 리트레 판과 러브 판에 해당 논문이 수록된 권수를 표시했다.
③ 히포크라테스 4대 전기 번역:히포크라테스의 생애가 기록된 전기들 중에서도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4대 전기를 우리말로 번역했고, 이 자료들은 영어권에서도 1992년에야 번역된 것이다.
④ 사전식 찾아보기: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이 이 책을 완독할 수 있도록 표제어마다 간략한 설명을 붙였다. - ≪고르기아스 (Gorgias)≫와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수사학에 대한 반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다.에서 히포크라테스를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즉 철학과 정치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배심원의 자세로 소크라테스 재판을 분석하는 책이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는 전쟁 패배 이후 쇠락해가는 국가 안보를 다잡아야 했고, 안으로는 팽배해진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가치관과 신념을 공격하는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를 단순히 전제적 국가에게 짓밟힌 무고한 개인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하며,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면 아테네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독자들을 위해 소크라테스 재판 전후의 시대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소개하면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을 중심으로 수많은 자료를 광범위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 속에 담겨진 민주주의의 본질, 국가의 이상, 시민 불복종, 정치 참여 거부 등을 다각도로 살피고 있다.『소크라테스의 재판 Scorates against Athens』은 기원전 399년에 열린 철학과 정치 사이의 비극적 대결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면밀히 재현하면서, 이 재판의 의의와 더불어 재판이 제기한 국가와 개인, 민주주의와 법치, 법정의正義와 법사상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마디마디 짚어나간 책이다.
아테네와 한 개인 철학자의 가치관 충돌이었던 소크라테스 재판은 세계사의 유명한 재판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도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의와 극명한 이슈를 던져주는 재판이었다. 저자 제임스 A. 콜라이아코는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사이의 대결을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인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국가권위의 조화라는 시점에서 조명하면서 개인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 신에 대한 의무가 국가에 복종해야 할 의무보다 우선이라고 주장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그를 체제에 따르지 않고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반국가적 개인으로 규정하여 엄중히 벌한 국가를 공평한 시각으로 꿰뚫어보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일컬어 “철학자에 대한 국가의 재판”이라 하였으며, 재판 이후 ‘철학과 정치가 양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두고 인류는 팽팽한 논란을 계속해왔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은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법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또 양심에 어긋나는 법과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정치적 의무의 근거는 무엇이며 어디까지 그 의무를 지켜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불러온 논란의 불씨는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다.
국가의 잘못된 체제와 사회관습을 끊임없이 비판했던 소크라테스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철학적 사명과 신념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인류사에 ‘시민 불복종’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며 그 첫 씨앗을 뿌렸다. 17세기의 존 밀턴에서 19세기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20세기의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 2세에 이르기까지 도덕적인 자연법에 거스르는 국가의 법에 맞서 대항한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하는 국가와 양심적 개인 사이의 갈등을 심층적으로 고찰해낸 이 책은 오늘날의 시민 불복종을 둘러싼 논란에 큰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철학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초상
기원전 399년, 그리스 세계의 지도국가 아테네는 밖으로는 전쟁 패배 이후 쇠락해가는 국가 안보를 다잡아야 하고, 안으로는 팽배해진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해야 했다. 그런 흔들리는 분위기 속에서 반국가적이고 반정치적 활동으로 국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혐의를 받은 한 철학자가 국가 권력자들에 의해 기소돼 재판정에 선다. 그리고 이 고희를 넘긴 노쇠한 철학자는 국가보다 우선하는 신의 도덕적 법칙을 버리느니 차라리 국가에 불복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함으로써 죽음을 맞는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 민주주의의 효시라 불리는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서 벌어진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과 그것이 일으킨 정치사회적 파장을 심층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 재판 전후의 시대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앞서 소개하면서 플라톤의 두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을 중심으로 수많은 논문과 저서, 정통 학자들의 연구 사례를 광범위하게 분석하여, 이 세계사의 유례없는 극적 재판에서 불거진 민주주의의 본질, 국가의 이상, 시민 불복종, 정치 참여 거부 등을 다각도로 펼쳐 보여준다.
저자는 아테네라는 국가가 소크라테스를 처형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적 가치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율적인 개인을 전제적으로 억압한 상징이 되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자에게 명확한 사고와 올바른 행동으로 영혼을 향상시키는 삶을, 맹목적으로 전통을 추종하는 자에게 기존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다시 생각할 것을, 국가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에게 자율적 양심에 따라 국가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신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도망치라는 권유도, 철학을 포기하라는 법정의 조건부 타협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원칙대로 권력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신을 신이 보낸 쇠파리에 비유하며 배심원들을 도발하는 등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9시간 30분 동안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결국 죽음을 자초한다. 저자는 모든 사회, 특히 민주사회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타협이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이 지점이 대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지닌 약점이자, 악법 논란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민 불복종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즉 철학과 정치, 양측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잣대를 가진 배심원의 자세로 소크라테스 재판을 분석한다. 저자는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를 단순히 전제적 국가에게 짓밟힌 무고한 개인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면 당시 아테네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즉 현대 자유주의 관점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우월성이 한층 더 크게 보일 테지만, 아테네처럼 사회 전체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근본적인 가치관과 신념을 공격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현대인들 중에도 소크라테스가 유죄라는 데 표를 던질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도덕적 양심의 철학으로 국가의 권위에 맞선 한 시민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직격탄과도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퍼붓는다고 말한다. 즉,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가 시민에게 세례한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국가가 침해할 수 있는지, 도덕적 자연법에 거스르는 국가의 법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정치적 의무인지 묻는다. - 『크리톤』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식으로 작성된 연설을 하는데, 이는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그의 연설과 상당히 흡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톤의「향연」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는 삶의 방식을 탐구함에 있어, '완전한 것, 이상적인 것에로 상승하려는 인간 영혼의 기본적 욕구'를 사랑이라 규정하고, 그런 사랑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며 그런 인식을 구체적 행위로 옮기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원동력이 됨을 밝힌 책이다.
저작 연대를 B.C. 385년 이후일 것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추측하는「향연」은 플라톤의 35편의 대화록 중,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영향에서 서서히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펼치기 시작하는 원숙기에 남긴 작품이다. 플라톤은 이 작품에서, 그의 형이상학적 이론인 이데아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과 진리인식, 현실개혁 정신의 근원이 되는 사랑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명제를 인식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중세 초기,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은 점차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해부학의 유행을 부르기도 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들에 비해 현대의 죽음은 (비교적) 아름답던 죽음이 사라지고, 끔찍하고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것으로 변모돼 갔다. 이렇듯 죽음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고 인간을 찾아왔다.
이 책은『사생활의 역사』의 저자가 탐구한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료들을 통해 보다 생생한 죽음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 변화는 근대성과 현대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이던 시대에 우리들은 내일의 삶을 걱정하기 보다는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데 더욱 주력하였다. 그것은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앞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겠다는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반면 현대성은 세계를 합리적이고 의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르친다. 이것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당연시되던 죽음을, 그것이 닥쳐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처럼 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 실려 있는 많은 죽음들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로 ‘건강’이 떠올랐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도 끝없이 장수의 비결을 찾고,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스포츠 센터나 공원 등은 운동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소위 ‘웰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선도자처럼 되었다. 이렇게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애써 잊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신문이나 뉴스 보도 등을 통해 늘 죽음의 소식을 접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죽음의 장면은 넘쳐난다. 이렇듯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죽음을 일상으로 접하는 오늘날이지만 삶에서 죽음을 가장 멀리 떼어놓고 있는 것이 또한 오늘날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죽음은 죽음에서 현실성을 제거하고, 그리하여 TV나 신문에서 전달되는 죽음도 마치 픽션처럼 느끼게 된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도 우리는 실제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난과 실업 등으로 부쩍 자살 소식이 많은 요즘이지만, 자살이든 타살이든 혹은 사고사이든 죽음은 언제나 끔찍한 어떤 것이다. 죽음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이며, 생의 종말이다. 예전에는 제 수명을 다한 사람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 부르며 좋은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좀더 오래’를 외치는 오늘날 더 이상 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때라도 죽음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런 죽음의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인해 우리는 죽음을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죽음을 애써 잊는다.
죽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 혹은 죽어가는 사람도 우리 사회의 바깥으로 내몰려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을 가문의 중대한 업으로 생각해온 우리이지만 그 조상의 묘지는 먼 시골 벽지에 (물론 명당을 찾아서라는 좋은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다. 명절만 되면 성묘객들의 발길이 길게 늘어서 지극한 마음을 보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죽은 이들은 우리의 생활이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중세의 유럽의 경우 묘지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을 이어나가는 공공장소로서 늘 그들의 곁에 있었고, 고인의 묘는 성당 안에서 그곳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도록 방치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오늘날처럼 사방이 막힌 병원 침대에서 쓸쓸히 임종을 맞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 심지어 임종을 맞는 순간 그 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이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쯤 되면 현대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일종의 결벽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금기시하는 이러한 태도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을 읽으며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1,120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에서 저자는 죽음에도 역사가 있어 매 시대마다 사람들은 죽음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또한 다르게 죽어갔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출간과 함께 ‘아리에스 쇼크’를 불러일으킨 <아동의 탄생>(새물결, 2003), 조르주 뒤비와 함께 편집한 5권의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2)를 통해 익히 알려진 필립 아리에스는 공적 영역의 그늘에 가려졌던 사생활이나,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명된 아동 등 지금까지 역사에서 다루어오지 않았던 주제에 천착하여 인간의 삶과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역사 연구의 주제뿐 아니라 방법에서도 그는 개인 서신, 가정 일지, 판화나 그림 같은 도상 등 그 동안 역사 연구 대상에서 배제되어온 사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록들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역사학의 자료를 확대시켰다.
<죽음 앞의 인간> 역시 기존에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았을뿐더러 모두가 두려워하고 금기시해온 ‘죽음’이라는 화두를 주제로 삼은 아리에스의 역작으로,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 역시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료들을 통해 중세 초기에서부터 현대까지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고찰한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죽음은 다섯 가지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변천해왔다. 그것은 중세 초기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명제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죽음, 중세가 끝나갈 무렵 개인주의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죽음’, 바로크 시대 죽음을 거부하면서도 시체의 관능성에 빠져들던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던 낭만주의 시대 ‘타인의 죽음’, 전 시대에 그토록 아름답던 죽음이 갑작스레 끔찍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역전된’ 오늘날의 죽음 등이다. 이렇게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역시 ―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니라 ― 이 다섯 가지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서 변천 가능한 패러다임일 뿐임을 보여준다. 

 노발리스는 18세기말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 대표적 시인이요 작가였다.
그는 불행히도 2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795년 대학을 마친 후 23세에 '조피'라는 소녀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져서 약혼까지 했지만, 2년후 그녀가 돌연 병사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그녀의 무덤 앞에 엎드려 아침부터 밤까지, 때론 밤을 새워가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현실의 절망을 체험해야만 했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절절한 추모의 정을 이 책에 실린 <밤의 찬가>에서 그는 장시로 노래하고 있다.
노발리스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애독하곤 했든데, 이 작품이 시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에 불만을 갖고 <푸른 꽃>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한 시적 세계는 동화 속에 있으며 주인공을 통해 푸른 꽃을 찾으며 편력하여 갖가지 체험을 쌓아 점차 마술적인 동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서구 현대시의 시조 보들레르, 그리고 『악의 꽃』
낭만주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었던,
이후 오게 될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보들레르 유일의 시집
보들레르는 많은 시집을 남긴 시인이 아니다. 소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을 제외하고는 단 한 권의 시집, 『악의 꽃』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단 한 권의 시집 속에 그의 삶의 경험의 정수를 쏟아놓았고, 이 시집으로 후에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악의 꽃』은 삶의 어느 특정한 시기에 씌어진 것도, 짧은 시간의 산물도 아니다. 『악의 꽃』의 역사는 보들레르의 삶의 역사와 겹쳐진다. 오랜 시간에 걸쳐 끈질긴 인내와 정성으로 갈고 닦여졌다는 점에서나, 한 인간의 삶의 역사를 동반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다. 문학 활동이 지속되었던 근 이십오 년 내내 그는 이 한 권의 시집에 집착하며, 그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857년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발표했을 때 그 시대의 누구도 이 시집의 놀라운 독창성을 주목하지 못했다. 이 책에 담긴 기이하고 대담한 주제들, 빅토르 위고가 말한 ‘새로운 떨림’과도 같은 신선하고 파격적인 감수성,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영혼의 전율, 그리고 매혹적인 음악성……
그 시대는 이 모든 감동을 같이할 감각을 갖추지 못했다. 시대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악의 꽃』의 시인은 한 세기를 앞질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보들레르는 실로 오랜 세월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불행을 벗어나지 못했고, 『악의 꽃』은 열광적인 소수의 독자들에게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여곡절을 거친 후 『악의 꽃』은 ‘소수의 행복한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채 독자층을 한껏 넓혀갔고, 후세는 이 책을 ‘현대시의 복음서’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악의 꽃』은 연금술사가 용광로에 집어넣은 수많은 재료로부터 귀중한 금속을 추출해낸 것처럼,
그가 문학과 예술의 세계로부터 얻은 풍부한 체험으로부터 정수만을 뽑아낸 것이다.

 『스트레스 받는 사람을 위한 괴테』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이 책은 독일 인젤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괴테를 어려워하는 독일인을 위해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 가운데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러나 작품성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모아 놓은 이 작은 책은 한국인들에게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권말에 붙어있는 작품 해설은 친절하게 작품의 출전을 알려주고, 간단한 설명도 해준다. 사소한 것 같아도 독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이다.
<삶 속에 행복하게 머물러라!>라는 제목 아래 추려놓은 20편 가량의 시들은 괴테의 방대한 시세계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초기시에서 후기시까지 두루 아우르려는 편집자의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머리와 가슴이 혼란할 때면>이란 제목과 <성격이 아니라 성품을 가꾸십시오>라는 제목 아래 선별한 잠언들은 대시인의 노년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촌철살인의 구절들이다. 잠언까지가 책 전체의 절반을 이루고 나머지 부분은 괴테의 작품 여기저기서 뽑은 몇 편의 단편과 『파우스트』의 <천상의 서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   축복받은 동경

 그저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인 트리스탄과 이즈(이졸데)가 프랑스 중세문학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속의 많은 의미에 대해 후세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정리하고 분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들은 공부의 수고를 많이 덜은 대신 쉽게 감동의 열매만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죠제프 베디에는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문학사가로서 이야기를 통해 의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인습타파를 위한 투쟁이라는 해설은 특히 고전에 적용하기엔 너무 진부하지만 근친상간적 정염이라는 소재로 인해 약점을 많이 덜었다.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어야 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사랑의 미약'이라는 것을 내세워 필연성을 부여했다는 것은 참신할 정도이다.

바그너의 오페라로 이름을 얻었지만 시작이 그러했을 뿐, 트리스탄과 이즈(이졸데)라는 자체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읽혀질 책.


■ 작품의 기원과 특징

『트리스탄과 이즈』는 중세의 장중하고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후세의 시인이나 작가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극과 이야기 등으로 널리 쓰였다.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 이야기는 간절하되 고요하며, 뜨겁되 악착스럽지 않은, 한 편의 긴 노래로, 기사도 소설이나 무훈 서사시, 풍자 소설, 성자전 등이 거센 주류를 이루던 12세기 중엽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켈트인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12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이야기로 엮어졌는데, 그 사랑과 죽음의 강렬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거의 전(全)유럽에 보급되어 서구 연애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또 처음 노래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야기 속에 아서 왕이 등장하고, 또 그와 마크 왕이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 점을 볼 때, 남부 스코틀랜드의 여러 켈트 부족을 규합하여, 앵글로색슨 족에게 저항하였다는 아서 왕의 치세기(대략 4-5세기) 이야기로 추측될 뿐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문학사가(文學史家)로 유명한 죠제프 베디에가 토마스, 베룰, 아일하르트 등 12세기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 이야기 중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편린들을 모아 현대 프랑스어로 재구성했는데, 중세시인들의 정감을 가장 생생하게 되살려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작품의 줄거리

로누아의 왕자 트리스탄은 태어나기 이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상심한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코온월의 왕인 백부 마크 밑에서 지용(智勇)을 겸비한 젊은 기사로 성장한 그는 아일랜드의 거인 모르홀트를 쓰러뜨리고 나라를 구했다. 백부의 아내가 될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아일랜드에 가서 용을 퇴치하고 왕녀 이즈를 데리고 개선하는 도중, 배 위에서 시녀의 실수로 마크와 이즈가 마셔야 할 '사랑의 음료'를 마심으로써 트리스탄과 이즈는 불꽃 같은 사랑에 빠진다. 이즈는 마크왕의 왕비가 되었으나 연인인 트리스탄과 남몰래 계속 만나게 된다.

어느 날 그들의 사랑이 마크왕에게 발각된 후 두 사람은 처형을 피하여 깊은 숲속으로 도망쳤으나 3년 뒤에 왕과 화해를 하고 이즈는 궁정으로 돌아오고 트리스탄은 추방된다. 트리스탄은 이즈를 사모하여 브르따뉴에서 이즈와 같은 이름의 아내(흰손의 이즈)를 얻었으나, 연인을 잊을 수 없어 병상에 눕게 되며, 연인을 데리고 올 사자(使者)를 보내놓고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직후에 이즈는 도착하지만 그녀도 슬퍼한 나머지 곁에서 죽고 만다.

■ 오페라, 소설…… 다른 장르로 되살아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트리스탄이 이즈를 데리고 오도록 보내는 과정에서 이즈를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하면 흰 돛을 달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검은 돛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마침내 이즈를 태운 흰 돛의 배가 들어오는데, 브르따뉴 공주인 하얀 손의 이즈는 절망적으로 금발의 이즈를 기다리는 트리스탄에게 배에 검은 돛이 달려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순간 트리스탄은 절명하고 트리스탄의 시신을 마주한 이즈는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눕히고 그와 입을 맞춘 뒤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 장면은 가장 비극적인 사랑의 종말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유명한 가수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도 이 장면을 두고 <검은 돛배>라는 제목의 애절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바그너의 오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중세의 시인 스트라스부르크가 노래한 서사시를 소재로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쓴 이 작품은 오로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이 그려나가는 내면의 자취를 음악으로 진지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뇌가 전편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 작품에 나타나는 문학적 상징

"아름다운 여인이여, 우리의 운명 역시 그러하니, 나 없이 그대 없고, 그대 없이 나 또한 없도다!", "이즈 나의 연인, 이즈 나의 사랑, 그대 속에 나의 죽음 있고, 그대 속에 나의 삶 있나니!" 이상 두 구절이 집약하고 있는 트리스탄과 이즈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전설에는. 각박한 나무람이나 영악스러운 풍자가 없다. 오직 다정함과 섬세함, 자애로움과 슬픔, 그리움 등이 이야기의 전편에 끊임없이 감돌며, 슬픔과 아쉬움의 절정에서 표출되는 죽음 저 너머를 향한 몽상이 펼쳐질 뿐이다.

이들의 전설은 정염과 인습 간의 투쟁에서 정염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승리는 죽음을 수반하며,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확인된다. 또한 인습 혹은 세속과의 불가피한 갈등관계에 처하여 고통을 감내해야 하니, 두 연인의 몽상은 필연적으로 미지의 세계를 지향한다.

아름다운 연인은 서로의 품에 안겨 영원히 늙지 않고, 어떠한 적도 그 성벽을 깨뜨리지 못하는 곳,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곧 죽음의 나라이다. 트리스탄과 이즈의 전설은 삶과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동시에 죽음의 노래이다. 또한 그 죽음은,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심정에서 영원한 숙명적 사랑의 불가피한 귀결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험한 이방인
이언 매큐언 지음 / 프레스21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일탈을 꿈꾼다. 여행은 그런 일탈 가운데 하나다. 일상생활의 무료함, 답답함, 지루함을 달래고 다시 일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행은 존재한다. 여기 그런 여행을 온 남녀가 있다. 그들은 여행지에서도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낸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섹스를 해도 허전한 그런 것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관광지에서 그렇듯 먹을 곳을 찾다 길을 잃게 되는데 마침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순수하게 여행객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더러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이런 일을 겪는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고 내렸는데 늘 나오던 출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해질 무렵이었는데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내가 사는 서울 한곳, 그리고 바로 길 건너를 돌면 내가 나오는 출구가 있었음에도 낯설다는 것 하나로 공포에 떨었었다. 잠깐이었지만. 또 어린 시절 뒷산에 친구들과 올랐다가 늘 내려오던 길이 아닐 다른 곳으로 내려와서 우리 동네가 아닌 다른 모르는 곳임을 알았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공포는 커다란 것이었다. 아이들이 집을 나와 순식간에 길을 잃고 미아가 되는 것은 이런 공포와 당황 때문이다.

자신의 생활이라는 안전함속에서도 우린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며 당황하게 되는데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모르는 사람이 이끄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건 대단히 심리적인 공포를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짧은 내용 속에 이런 공포를 서서히 풀어내고 있다.

이언 맥완의 글쓰기가 탁월하다는 것을 이 작품을 보고 진짜로 느끼게 되었다. 절제된 마지막까지의 호흡은 도리어 주인공이 아닌 나를 숨 막히게 했고 그 끈적끈적함은 지금까지 나를 오싹하게 만들고 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당신을 죽이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게 되죠. 필요하다면 말예요."

이 의미를 나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어쩜 끔찍한 공포일지 모른다는 것은 느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공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등등...

일탈이 그저 일탈로만 끝날 수 있다면... 일상이 무료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풍요로울 텐데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고 사랑도, 일탈도 적당히 하기를... 세상에 목숨 걸 무언가가 있다는 건 좋은 거지만 막상 걸고 나서 후회하게 된다면 얼마나 허망할지...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2006-03-0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탈을 꿈꾸지만 점차 '변화'가 싫어지기도 해요. 이 무슨 부조화란 말인지...ㅡ.ㅜ

물만두 2006-03-0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탈도 변화도 무지 싫어해요.

돌바람 2006-03-0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옙! 적당히.

물만두 2006-03-0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요, 적당히가 제일입니다~

Mephistopheles 2006-03-0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 읽어 보세요..공포가 스멀스멀 올라 옵니다.

물만두 2006-03-0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피스토님 봤어요. 그 작가의 공포는 으... 이런 현실적인 것이 아닌 비현실적이며 초현실적인 것이죠.

Mephistopheles 2006-03-0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욕이 무서워 졌어요..그책 보고..

물만두 2006-03-08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하철이 얼마나 겁났는데요...

moonnight 2006-03-08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언 매큐언 책들. 절판된 거 다 나왔으면 좋겠어요. ㅠㅠ;;; 그, 그런데 클라이브 바커 책 그렇게 무섭나요? 두근두근 +_+;;;;

물만두 2006-03-0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것만 나오면 되나요? 아닌가요? 암스테르담도 절판이던가요? 팔려야 나오죠 ㅠ.ㅠ
그나저나 피의 책 한번 보세요. 밤에~ 잠못이루실겁니다^^;;;

pachi 2006-03-0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의 책이 초반 단편이 죽여주는 거 같아요. (저도 그날 저녁 지하철 타고 오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ㅠㅜ)
그에 비해 요괴 렉스는 좀 환상소설 느낌이 강하더군요

물만두 2006-03-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치님 아무래도 피의 책이 강하죠^^;;;
 

* Novels

Other Voices, Other Rooms (1948)
The Grass Harp (1951)
Breakfast At Tiffany's (1958)  티파니에서 아침을
Answered Prayers (1986)

* Collections

A Tree of Night: And Other Stories (1949)
Three By Truman Capote (1985)
Collected Stories of Truman Capote (2004)

* Non fiction

In Cold Blood (1966)  인 콜드 블러드
The Dogs Bark: Public People And Private Places (1972)

* Anthologies containing stories by Truman Capote

Stories Strange and Sinister (1965)
Points of View: An Anthology of Short Stories (1966)
The 6th Fontana Book of Great Horror Stories (1971)
The Giant Book of Horror Stories (1981)
Supernatural Stories (1994)

* Short stories

 Miriam (1944)  
 My Side of the Matter (1945)  
 Shut a Final Door (1947)
 Jug of Silver (1952)

* Books about Truman Capote

Lost Friendships: Memoir of Truman Capote, Tennessee Williams And Others (1983) by Donald Windham
Literary Reflections: Michener On Michener, Hemingway, Capote, And Others (1993) by James A Michen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