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철학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경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인간소외의 문제 등 이전 시기와는 또다른 ‘인간의 문제’에 대해 사유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비판이론”을 통해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적 사유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선구적 역할과 발터 벤야민 등 주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지적 교류를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며, 21세기 들어서도 그 지적 전통은 하버마스와 그 제자(대표적으로 악셀 호네트)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이들의 사상적 맹아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제1세대를 대표하는 호르크하아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처음 발표된 개념 “도구적 이성”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삶이 자신의 주체적 사유나 실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거대한 사회 전체 속에서 독자적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되어버린 소외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바로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 - 아도르노의 체취가 그대로 드러나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유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아도르노의 글쓰기는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해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우리들에게 의사소통의 지름길을 하나 남겨두고 갔다. 그것이 바로 『미니마 모랄리아』이다.
이 책은 그가 나치 집권의 박해에서 벗어나 미국 체류기간에 쓴 에세이 형식의 글로 153개의 단상(斷想)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인간실존의 위태로움을 직접 목도하면서 쓴,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 아무런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울러 이 책은 아도르노 자신이 헌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계몽의 변증법』의 후속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두 책은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다만 아도르노 스스로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미니마 모랄리아』는 난삽하고 지루한 이론적 천착보다는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아무런 꾸밈장치 없이 자유분방하게 써내려간 책으로 우리에게 난해한 사상가로만 알려진 아도르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뒤틀린 현대자본주의 산업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이 책에서 아도르노는 인간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개인이든 인류 전체든 “삶” 때문에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발버둥치고 처절하게 살아가지만, “삶”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터부시된 세상에서 아도르노는 “삶” 자체를 진지한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우리의 “삶”이란 예전의 철학자들이 말한 바와 같은 자율성과 독자적 실체로서의 삶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물질적 생산과정(즉 현대자본주의 체제)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사적(私的)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변해버린 “뒤틀린 양상”으로 파악한다.
153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목차만 보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삶의 본질에 대해 그가 얼마나 많이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즉 『계몽의 변증법』이 이론화 작업을 통해 현대자본주의 사회를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파악하였다면, 『미니마 모랄리아』는 바로 그러한 현실이 우리 “삶”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아도르노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견실한 관계설정 속에서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치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주체”였던 예전의 개인이 현대산업사회에 들어서 무력화되고 불구화된 모습 그 자체이다.
『미니아 모랄리아』에서 이러한 점은 철저히 “개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체계”의 그물망(속물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의미함)이 더욱 촘촘히 인간 개개인을 옥죄어가는 양상을 드러내는데 확실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현대인의 고민이 바로 이 지점에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율적 주체”를 갈구하지만, 이미 도구적 이성으로 변해버린 현실의 “인간”들이 꽉 들어찬 세계임을 자각하는 순간, 그 탈주를 꿈꾸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대한 성찰 요구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적 사고방식과 조야한 낙관주의, 근시안적 비판, 사유보다는 이미지에 길들여지고, 실상을 파고들기보다는 소통에 중점을 두는 문화상품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고통스럽지만 진지한 내적 “성찰”을 요구한다.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여전히 시(詩)를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비록 그가 나치 집권 아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성찰적 아포리즘으로 남긴 말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유효한 말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의 진행속도와 맞물려 더욱 거세지는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보이듯이 세상의 틈과 균열을 폭로하고 왜곡된 실상을 파헤친 다음 그러한 세상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슬픈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기에는, 그래서 새로운 구원을 희구하기에는 어쩌면 21세기는 너무 엄혹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아도르노의 성찰을 통해 우리 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음은 하나의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즘―문화비평과 사회』는 섬세하고 날카로우며 비판적인 깊이를 지닌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서 비판이론의 정초를 마련한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문화비평 에세이집이다. 193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저술, 발표해온 열두 편의 에세이를 모은 이 책에는 체계를 거부하고 동시적, 불연속적,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그의 언어와 철저한 변증법적 사유가 생생하게 녹아들어 있다. 아도르노는 사회연구의 입장에서 문화비평, 유토피아에 관한 사유, 음악에 관련된 현상들, 동시대의 철학과 문학을 비판하고 있다.
철저한 변증법적 시각으로 문화 전반을 분석하는 탁월한 에세이들
이 책의 간판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비평과 사회」에서 아도르노는 문화와 문화비평이 비판적 의미를 상실하고 현실 개입을 포기하며 소비재가 되어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타락해온 현상에 주목한다. "문화비평 전반은 정작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린 총체적인 야만상태"이며, "문화비평가는 삶 자체의 사물화가 과도한 계몽보다는 계몽의 부족에 근거한다는 점, 현재의 편협한 합리성에 의해 인류가 당하는 훼손들은 총체적 비합리성의 상흔이라는 점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 전체가 옥외감옥으로 변해 그 속에서 무엇이 무엇에 종속되느냐가 전혀 문제시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경향을 지적한다. 아울러 문화비평의 여러 방향을 분석, 검토한 후 이에 맞서는 것으로 변증법적 문화비평(가)을 내세우고 있다.
"문화가 일단 전체로서 받아들여질 경우, 이미 문화 자체의 진리 요소, 곧 부정은 소멸한다"는 것은, 아도르노의 핵심 명제인 "전체는 비진리다"와도 상통한다. 기존 지배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여러 형태의 사고방식에 대한 아도르노의 단호한 거부태세 또한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다.
각각 만하임, 슈펭글러, 베블런을 다루고 있는 「지식사회학의 의식」 「몰락 이후의 슈펭글러」 「문화에 대한 베블런의 공격」은 바로 아도르노의 이러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에세이다. 여기에서는 "아무 탈출구도 찾지 못하는 자유주의자가 독재적인 사회조직에 자신은 반대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의 대변자가 되는" 사례로서의 만하임, 언론의 위력, 대중의 노예화, 독재정치 등과 관련해 뛰어난 예견력을 보이면서도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한 것이다'라는 공식만으로 추상해버리는" 폭력을 가하는 "환멸의 역사철학자"로서의 슈펭글러에 비판의 초점이 맞춰진다. 또 "상품 소비는 약탈의 원칙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의 초기 단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진정한 욕구 충족이나 베블런이 즐겨 삶의 풍요라고 칭하는 것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특권, 지위에 복무한다"면서 베블런의 과시소비설을 비판한다. 「올더스 헉슬리와 유토피아」에서는 지배체제에 의해 욕구가 만들어지고 조작되는 메커니즘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올더스 헉슬리에 대한 아도르노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물질문명을 야유하며 정신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헉슬리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아도르노는 철학자, 사회학자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지만 쇤베르크의 현대음악에 영향을 받은 음악가요 작곡가이기도 했다. 또한 음악비평가로서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가리지 않고 음악의 모든 면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써왔다. 이 책에도 세 편의 음악비평 에세이가 실려 있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의 핵심이 담겨 있는 「초시대적 유행」에서는 재즈를, "사실상 현재의 전체 이데올로기와 모든 문화산업에 귀속되는 메커니즘들이 두드러지게 표면화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재즈는 유행과 마찬가지로 "사태 자체가 아니라 내보이는 것이 중요"하며 변형 속에서도 규격화되어 있는 컨베이어벨트 방식, 규범화된 즉흥성, 일탈의 제거, 사이비 개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실내에 어울리게 깨끗이 잘 세척되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제도로서의 재즈, 그 안에 담겨 있는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의 계기를 비판하고 있다.
「바흐 애호가들에 맞선 바흐 옹호」는 종교적으로 채색함으로써 바흐를 "중립화된 문화재" "잘 보존된 바로크 식 도시를 위한 오르간 축제극의 작곡자"로 만든 바흐 애호가들에게 이 또한 한 토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신랄한 일격을 가한다. 아도르노는 그의 음악을 교회의 영역에 묶어놓는 데 반대하며 당시 매뉴팩처를 통해 진행되던 물질적 생산의 합리화 과정과 유사하게 합리적으로 구성된 작품의 이념을 최초로 구체화했다는 데서 바흐의 음악사적 의의를 평가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현대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2음기법의 창시자이자, 아도르노가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의 자세를 방해하는 진정한 현대예술의 전범으로 꼽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관한 논의이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듣는 사람의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동참을 요구한다. "다수의 동시적인 것에 예민하게 주목하고, 무엇이 나올지 항상 이미 알고 있는 관습적 청취지침을 포기하며, 일회적이고 고유한 것을 긴장하며 지각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수용자에게 일종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음악은 즐거움을 준다는 식의 상투적 관념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쇤베르크의 음악 못지않게 카프카의 작품 또한 독자의 관조를 방해한다. 「카프카 소묘」에서 아도르노는 『성』 『심판』 「변신」 등의 작품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감상자의 관조적 거리감을 깨면서 끝없이 재해석을 요구하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극히 미미한 일탈조차 허용하지 않는 체계(이를테면 자본주의)를 "음화상태로 그만큼 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데서 카프카 문학의 본질을 찾고 있다.
그밖에도 호프만슈탈과 게오르게의 상징주의가 소재신앙과 지나친 알레고리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유미주의에서 반사회적 저항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게오르게와 호프만슈탈」, 박물관 혹은 예술의 생명력에 대한 발레리와 프루스트의 상이한 입장을 대비시키고 있는 「발레리 프루스트 박물관」이 실려 있다. 말미에 실린 「발터 벤야민 초상」은 '비동일자' '짜임관계' 등 아도르노 이론의 핵심이 되는 개념을 제시하며 그의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에세이다. 이 에세이에서 아도르노는 최소한의 객체 혹은 초라한 객체들에 대한 벤야민의 편애("영원한 것은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이다")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벤야민이 풍기는 유대교 신비주의와 권력 지향성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
수동적인 독자들에게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견고한 사상체계,
그 안에 담긴 폭발적인 비판의 에너지!
기존의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여러 가지 사고에 대한 비판, 그 순응에 거부하는 진정한 현대예술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이 책은 풍부한 지적 자극을 제공한다. 하지만 아도르노를 읽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도르노 독일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특별한 그의 언어는 한순간도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철저한 반성적 사유를 담고 있어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각각의 문장은 '나를 해석하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어느 문장도 해석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그의 저술은 그러나, 수동적인 독자가 노력 없이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도록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감상자의 관조뿐 아니라 실천을 요구하는 쇤베르크의 음악처럼.

 생전에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 인정받았고(37세 때 말러는 빈 궁정 오페라단의 예술 감독이 된다), 타계 후에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그 음악이 ‘불온한 음악’으로 금지되었으며, 음악사에서는 후기 낭만주의자로 평가받았던 말러(1860~1911)가 20세기 신음악의 선구자이자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 자리 매김된 것은 불과 50여 년 전이다.
1960년 말러 탄생 100주년에 출간된 아도르노의《말러―음악적 인상학》은 말러 음악을 재조명하고, 말러 음악의 연주사와 연구사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철학자로 활동하기 이전에 음악 비평가로 인정받았으며 또한《신음악의 철학》을 집필하기도 한 아도르노는 말러에 대해 히틀러 정권이 내린 판결과 그의 사후 50년 동안의 음악사가 내린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며, 말러의 음악을 통해 신음악의 진정한 의의를 밝히고 있다.
한 음악가와 한 철학자, 예술과 사유의 만남이 이뤄낸 결실인《말러―음악적 인상학》은 새로운 음악의 길을 연 작곡가에게 바치는 헌사이면서, 말러라는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기술적인 논의와 임의적인 분석의 대립을 넘어선 총체적인 상을 드러내준다.
이 책의 부제 ‘음악적 인상학’은 19세기 들어 의학, 생물학과 접목되어 유사 과학으로 크게 유행했던 인상학에서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나치가 인종적 편견을 고착시키기 위해 인상학을 이용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도르노는 음악적 인상학을 통해 말러에게 드리워진 유태인이라는 인종적 편견을 걷어버리고 말러의 음악 자체를 통해 말러의 ‘얼굴’을 새로이 그리고자 했다.
일체의 편견 없이 오직 음악을 통해서 말러의 음악을 설명하고자 하는 아도르노의 의지가 함축된 음악적 인상학은, 사전에 정해지고 주어진 특정한 입장 혹은 관점에서 말러의 음악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따라가며 그 인상과 특징을 그대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어떠한 직선적인 역사적 경로를 따르지 않았으며, 고전주의 시대의 통일된 세계관의 ‘파현’을 보여주었던 말러 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음악적 인상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러한 분열과 파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후기 시민 사회, 그 공허한 세계 운행의 파현
아도르노가 파악하는 말러 음악의 의의는 ‘파현(破顯, Durchbruch)’이라는 낱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말러 음악의 형식적 이념의 핵심을 파현이라는 말로 지칭하면서 아도르노는, 말러의 음악은 공허하고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 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후기 시민 사회의 맹목적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현은 기존의 억압적이고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뚫고 나오면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파현은 제3장 첫머리에서 아도르노가 언급하고 있듯이, ‘계류Suspension’, ‘충전Erfullung’이라는 다른 형식적 이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말러의 음악은 후기 시민 사회의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파현’을 통해 뚫고 나와서는 ‘계류’를 통해 잠시 중단시키기도 하며, 파현에 의해 뻥 뚫린 자리를 ‘충전’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 넣기도 한다. 아도르노는 말러의 이러한 음악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말러의 교향악은 세계 운행에 대한 반대 변론을 펼친다······그 곡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체와 객체가 단절된 자리를 때워서 가리지 않으며, 화해에 도달했다고 속이느니 차라리 자폭하고 만다.”
옮긴이가 ‘파현’으로 옮기고 있는 독일어 Durchbruch는 기존 음악학계에서 ‘개파(改破)’라는 어색한 조어로 번역ㆍ소개돼왔다. 그러나 옮긴이는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뚫고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개시라는, 아도르노가 사용한 본래의 함의를 살려 ‘파현’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다.

 대표적인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가 중 한 사람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로 호르크하이머와 공동집필한 '계몽의 변증법'과 함께 20세기의 고전으로 꼽히는 저작이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나치즘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개인을 전체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이념과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부정한다. 또한 그는 '헤겔의 주장처럼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될 수 없다'며 '한번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부정변증법'을 주창했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 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라는 진술로 시작되는 이 책은 아도르노 최후의 저작이자 아도르노 이론의 총결산으로서,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예술 이론에 걸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심오한 변증법적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현대의 산업 사회는 고도의 합리적 수단을 이용한 비합리적 지배 관계를 그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관리되는 사회'로서, 부자유가 영속화된 사회, 가속적으로 비인간화되고 야만화되는 세계, 따라서 근본적으로 변해야 하는 세계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문화 산업의 산물들은 그 방향성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지배의 도구라는 점에서, 즉 '관리되는 사회'의 현실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동일할 뿐이며, 이와는 달리 진정한 예술은 이 '관리되는 사회'에 대해 총체적 부정의 자리에 선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난해하면서도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예술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천착하는 이 책은 미, 추, 예술의 자율성 등 미학의 중심적 카테고리들을 사회적 기반 위에서 변증법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이러한 쟁점적인 물음들에 답하고 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두 망명 지식인이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해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한 저서이다.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서는-심미적 차원이 아닌-그러한 야만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불빛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이 책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런 절망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총체적 파국뿐만 아니라, '문화 산업'에 관한 논의를 통해 미국적 상황 또한 구세계의 파시즘적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명제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술진보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가공할 야만상태를 빚어낸 현대는 어떤 시대이며 인류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해명하는 하나의 '이론'을 이 책은 세우고 있다. 오늘날 학문과 사상은 기술적, 실증주의적 정신에 지배되어 끝없는 핵분열을 계속하고 있거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잊어버리기와 벗어나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런 물화나 죽음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유의 저항'이 이 책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삶과 사회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추구하는 이 책의 곳곳에서 삶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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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3-0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의 진지한 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이 드네요. 추천드려요 ^^

물만두 2006-03-0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님 저 안진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