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향연」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는 삶의 방식을 탐구함에 있어, '완전한 것, 이상적인 것에로 상승하려는 인간 영혼의 기본적 욕구'를 사랑이라 규정하고, 그런 사랑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며 그런 인식을 구체적 행위로 옮기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원동력이 됨을 밝힌 책이다.
저작 연대를 B.C. 385년 이후일 것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추측하는「향연」은 플라톤의 35편의 대화록 중,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영향에서 서서히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펼치기 시작하는 원숙기에 남긴 작품이다. 플라톤은 이 작품에서, 그의 형이상학적 이론인 이데아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과 진리인식, 현실개혁 정신의 근원이 되는 사랑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명제를 인식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중세 초기,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은 점차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해부학의 유행을 부르기도 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들에 비해 현대의 죽음은 (비교적) 아름답던 죽음이 사라지고, 끔찍하고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것으로 변모돼 갔다. 이렇듯 죽음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고 인간을 찾아왔다.
이 책은『사생활의 역사』의 저자가 탐구한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료들을 통해 보다 생생한 죽음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 변화는 근대성과 현대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이던 시대에 우리들은 내일의 삶을 걱정하기 보다는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데 더욱 주력하였다. 그것은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앞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겠다는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반면 현대성은 세계를 합리적이고 의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르친다. 이것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당연시되던 죽음을, 그것이 닥쳐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처럼 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 실려 있는 많은 죽음들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로 ‘건강’이 떠올랐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도 끝없이 장수의 비결을 찾고,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스포츠 센터나 공원 등은 운동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소위 ‘웰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선도자처럼 되었다. 이렇게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애써 잊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신문이나 뉴스 보도 등을 통해 늘 죽음의 소식을 접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죽음의 장면은 넘쳐난다. 이렇듯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죽음을 일상으로 접하는 오늘날이지만 삶에서 죽음을 가장 멀리 떼어놓고 있는 것이 또한 오늘날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죽음은 죽음에서 현실성을 제거하고, 그리하여 TV나 신문에서 전달되는 죽음도 마치 픽션처럼 느끼게 된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도 우리는 실제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난과 실업 등으로 부쩍 자살 소식이 많은 요즘이지만, 자살이든 타살이든 혹은 사고사이든 죽음은 언제나 끔찍한 어떤 것이다. 죽음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이며, 생의 종말이다. 예전에는 제 수명을 다한 사람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 부르며 좋은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좀더 오래’를 외치는 오늘날 더 이상 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때라도 죽음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런 죽음의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인해 우리는 죽음을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죽음을 애써 잊는다.
죽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 혹은 죽어가는 사람도 우리 사회의 바깥으로 내몰려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을 가문의 중대한 업으로 생각해온 우리이지만 그 조상의 묘지는 먼 시골 벽지에 (물론 명당을 찾아서라는 좋은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다. 명절만 되면 성묘객들의 발길이 길게 늘어서 지극한 마음을 보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죽은 이들은 우리의 생활이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중세의 유럽의 경우 묘지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을 이어나가는 공공장소로서 늘 그들의 곁에 있었고, 고인의 묘는 성당 안에서 그곳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도록 방치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오늘날처럼 사방이 막힌 병원 침대에서 쓸쓸히 임종을 맞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 심지어 임종을 맞는 순간 그 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이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쯤 되면 현대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일종의 결벽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금기시하는 이러한 태도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을 읽으며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1,120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에서 저자는 죽음에도 역사가 있어 매 시대마다 사람들은 죽음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또한 다르게 죽어갔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출간과 함께 ‘아리에스 쇼크’를 불러일으킨 <아동의 탄생>(새물결, 2003), 조르주 뒤비와 함께 편집한 5권의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2)를 통해 익히 알려진 필립 아리에스는 공적 영역의 그늘에 가려졌던 사생활이나,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명된 아동 등 지금까지 역사에서 다루어오지 않았던 주제에 천착하여 인간의 삶과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역사 연구의 주제뿐 아니라 방법에서도 그는 개인 서신, 가정 일지, 판화나 그림 같은 도상 등 그 동안 역사 연구 대상에서 배제되어온 사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록들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역사학의 자료를 확대시켰다.
<죽음 앞의 인간> 역시 기존에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았을뿐더러 모두가 두려워하고 금기시해온 ‘죽음’이라는 화두를 주제로 삼은 아리에스의 역작으로,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 역시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료들을 통해 중세 초기에서부터 현대까지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고찰한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죽음은 다섯 가지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변천해왔다. 그것은 중세 초기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명제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죽음, 중세가 끝나갈 무렵 개인주의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죽음’, 바로크 시대 죽음을 거부하면서도 시체의 관능성에 빠져들던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던 낭만주의 시대 ‘타인의 죽음’, 전 시대에 그토록 아름답던 죽음이 갑작스레 끔찍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역전된’ 오늘날의 죽음 등이다. 이렇게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역시 ―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니라 ― 이 다섯 가지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서 변천 가능한 패러다임일 뿐임을 보여준다. 

 노발리스는 18세기말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 대표적 시인이요 작가였다.
그는 불행히도 2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795년 대학을 마친 후 23세에 '조피'라는 소녀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져서 약혼까지 했지만, 2년후 그녀가 돌연 병사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그녀의 무덤 앞에 엎드려 아침부터 밤까지, 때론 밤을 새워가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현실의 절망을 체험해야만 했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절절한 추모의 정을 이 책에 실린 <밤의 찬가>에서 그는 장시로 노래하고 있다.
노발리스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애독하곤 했든데, 이 작품이 시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에 불만을 갖고 <푸른 꽃>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한 시적 세계는 동화 속에 있으며 주인공을 통해 푸른 꽃을 찾으며 편력하여 갖가지 체험을 쌓아 점차 마술적인 동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서구 현대시의 시조 보들레르, 그리고 『악의 꽃』
낭만주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었던,
이후 오게 될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보들레르 유일의 시집
보들레르는 많은 시집을 남긴 시인이 아니다. 소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을 제외하고는 단 한 권의 시집, 『악의 꽃』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단 한 권의 시집 속에 그의 삶의 경험의 정수를 쏟아놓았고, 이 시집으로 후에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악의 꽃』은 삶의 어느 특정한 시기에 씌어진 것도, 짧은 시간의 산물도 아니다. 『악의 꽃』의 역사는 보들레르의 삶의 역사와 겹쳐진다. 오랜 시간에 걸쳐 끈질긴 인내와 정성으로 갈고 닦여졌다는 점에서나, 한 인간의 삶의 역사를 동반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다. 문학 활동이 지속되었던 근 이십오 년 내내 그는 이 한 권의 시집에 집착하며, 그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857년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발표했을 때 그 시대의 누구도 이 시집의 놀라운 독창성을 주목하지 못했다. 이 책에 담긴 기이하고 대담한 주제들, 빅토르 위고가 말한 ‘새로운 떨림’과도 같은 신선하고 파격적인 감수성,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영혼의 전율, 그리고 매혹적인 음악성……
그 시대는 이 모든 감동을 같이할 감각을 갖추지 못했다. 시대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악의 꽃』의 시인은 한 세기를 앞질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보들레르는 실로 오랜 세월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불행을 벗어나지 못했고, 『악의 꽃』은 열광적인 소수의 독자들에게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여곡절을 거친 후 『악의 꽃』은 ‘소수의 행복한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채 독자층을 한껏 넓혀갔고, 후세는 이 책을 ‘현대시의 복음서’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악의 꽃』은 연금술사가 용광로에 집어넣은 수많은 재료로부터 귀중한 금속을 추출해낸 것처럼,
그가 문학과 예술의 세계로부터 얻은 풍부한 체험으로부터 정수만을 뽑아낸 것이다.

 『스트레스 받는 사람을 위한 괴테』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이 책은 독일 인젤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괴테를 어려워하는 독일인을 위해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 가운데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러나 작품성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모아 놓은 이 작은 책은 한국인들에게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권말에 붙어있는 작품 해설은 친절하게 작품의 출전을 알려주고, 간단한 설명도 해준다. 사소한 것 같아도 독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이다.
<삶 속에 행복하게 머물러라!>라는 제목 아래 추려놓은 20편 가량의 시들은 괴테의 방대한 시세계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초기시에서 후기시까지 두루 아우르려는 편집자의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머리와 가슴이 혼란할 때면>이란 제목과 <성격이 아니라 성품을 가꾸십시오>라는 제목 아래 선별한 잠언들은 대시인의 노년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촌철살인의 구절들이다. 잠언까지가 책 전체의 절반을 이루고 나머지 부분은 괴테의 작품 여기저기서 뽑은 몇 편의 단편과 『파우스트』의 <천상의 서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   축복받은 동경

 그저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인 트리스탄과 이즈(이졸데)가 프랑스 중세문학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속의 많은 의미에 대해 후세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정리하고 분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들은 공부의 수고를 많이 덜은 대신 쉽게 감동의 열매만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죠제프 베디에는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문학사가로서 이야기를 통해 의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인습타파를 위한 투쟁이라는 해설은 특히 고전에 적용하기엔 너무 진부하지만 근친상간적 정염이라는 소재로 인해 약점을 많이 덜었다.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어야 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사랑의 미약'이라는 것을 내세워 필연성을 부여했다는 것은 참신할 정도이다.

바그너의 오페라로 이름을 얻었지만 시작이 그러했을 뿐, 트리스탄과 이즈(이졸데)라는 자체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읽혀질 책.


■ 작품의 기원과 특징

『트리스탄과 이즈』는 중세의 장중하고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후세의 시인이나 작가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극과 이야기 등으로 널리 쓰였다.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 이야기는 간절하되 고요하며, 뜨겁되 악착스럽지 않은, 한 편의 긴 노래로, 기사도 소설이나 무훈 서사시, 풍자 소설, 성자전 등이 거센 주류를 이루던 12세기 중엽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켈트인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12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이야기로 엮어졌는데, 그 사랑과 죽음의 강렬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거의 전(全)유럽에 보급되어 서구 연애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또 처음 노래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야기 속에 아서 왕이 등장하고, 또 그와 마크 왕이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 점을 볼 때, 남부 스코틀랜드의 여러 켈트 부족을 규합하여, 앵글로색슨 족에게 저항하였다는 아서 왕의 치세기(대략 4-5세기) 이야기로 추측될 뿐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문학사가(文學史家)로 유명한 죠제프 베디에가 토마스, 베룰, 아일하르트 등 12세기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 이야기 중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편린들을 모아 현대 프랑스어로 재구성했는데, 중세시인들의 정감을 가장 생생하게 되살려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작품의 줄거리

로누아의 왕자 트리스탄은 태어나기 이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상심한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코온월의 왕인 백부 마크 밑에서 지용(智勇)을 겸비한 젊은 기사로 성장한 그는 아일랜드의 거인 모르홀트를 쓰러뜨리고 나라를 구했다. 백부의 아내가 될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아일랜드에 가서 용을 퇴치하고 왕녀 이즈를 데리고 개선하는 도중, 배 위에서 시녀의 실수로 마크와 이즈가 마셔야 할 '사랑의 음료'를 마심으로써 트리스탄과 이즈는 불꽃 같은 사랑에 빠진다. 이즈는 마크왕의 왕비가 되었으나 연인인 트리스탄과 남몰래 계속 만나게 된다.

어느 날 그들의 사랑이 마크왕에게 발각된 후 두 사람은 처형을 피하여 깊은 숲속으로 도망쳤으나 3년 뒤에 왕과 화해를 하고 이즈는 궁정으로 돌아오고 트리스탄은 추방된다. 트리스탄은 이즈를 사모하여 브르따뉴에서 이즈와 같은 이름의 아내(흰손의 이즈)를 얻었으나, 연인을 잊을 수 없어 병상에 눕게 되며, 연인을 데리고 올 사자(使者)를 보내놓고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직후에 이즈는 도착하지만 그녀도 슬퍼한 나머지 곁에서 죽고 만다.

■ 오페라, 소설…… 다른 장르로 되살아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트리스탄이 이즈를 데리고 오도록 보내는 과정에서 이즈를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하면 흰 돛을 달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검은 돛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마침내 이즈를 태운 흰 돛의 배가 들어오는데, 브르따뉴 공주인 하얀 손의 이즈는 절망적으로 금발의 이즈를 기다리는 트리스탄에게 배에 검은 돛이 달려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순간 트리스탄은 절명하고 트리스탄의 시신을 마주한 이즈는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눕히고 그와 입을 맞춘 뒤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 장면은 가장 비극적인 사랑의 종말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유명한 가수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도 이 장면을 두고 <검은 돛배>라는 제목의 애절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바그너의 오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중세의 시인 스트라스부르크가 노래한 서사시를 소재로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쓴 이 작품은 오로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이 그려나가는 내면의 자취를 음악으로 진지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뇌가 전편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 작품에 나타나는 문학적 상징

"아름다운 여인이여, 우리의 운명 역시 그러하니, 나 없이 그대 없고, 그대 없이 나 또한 없도다!", "이즈 나의 연인, 이즈 나의 사랑, 그대 속에 나의 죽음 있고, 그대 속에 나의 삶 있나니!" 이상 두 구절이 집약하고 있는 트리스탄과 이즈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전설에는. 각박한 나무람이나 영악스러운 풍자가 없다. 오직 다정함과 섬세함, 자애로움과 슬픔, 그리움 등이 이야기의 전편에 끊임없이 감돌며, 슬픔과 아쉬움의 절정에서 표출되는 죽음 저 너머를 향한 몽상이 펼쳐질 뿐이다.

이들의 전설은 정염과 인습 간의 투쟁에서 정염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승리는 죽음을 수반하며,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확인된다. 또한 인습 혹은 세속과의 불가피한 갈등관계에 처하여 고통을 감내해야 하니, 두 연인의 몽상은 필연적으로 미지의 세계를 지향한다.

아름다운 연인은 서로의 품에 안겨 영원히 늙지 않고, 어떠한 적도 그 성벽을 깨뜨리지 못하는 곳,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곧 죽음의 나라이다. 트리스탄과 이즈의 전설은 삶과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동시에 죽음의 노래이다. 또한 그 죽음은,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심정에서 영원한 숙명적 사랑의 불가피한 귀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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