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부산 인디고유스북페어에서 '문학은 자유다'를 주제로 강연을 가졌는데, 그 강연과 질의응답이 정리돼 '인디고잉' 가을호에 실렸다. 일부 내용을 옮겨놓는다(약간 수정했다). 인디고잉은 부산의 인디고서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드는 인문교양지이다.  



인디고잉(18년 가을호) 세계와 문학과 나


(...)

세계문학을 통해 문학의 책임과 관련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계문학'이라는 말에는 저작권자가 있습니다.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1827년의 괴테입니다. 통상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세계 각국 문학의 총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의 세계문학은 괴테 이전에도 있었어요. 괴테가 이야기한 세계문학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개념적으로 달라요. 괴테가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라는 말을 씁니다. , 존재하던 문학이 아닙니다. 이건 앞으로 도래할 문학이고 요청된 문학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괴테가 자세하게, 충분하게 얘기하진 않았어요. 이건 이제 화두로 던져진 거고 그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살을 붙이고 하는 일은 후대 몫으로 남겼습니다.

괴테가 말한 세계문학이란 말의 의미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세계문학이 세계 각지의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데, 가장 먼저 '세계'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논리론적으로 나 그다음에 우리 가족, 그다음에 지역, 국가 이런 식으로 확장되어 갑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게 그런 차원으로 가닿은 개별 국민문학입니다한국문학미국문. 일본문학, 프랑스문학 등이죠. 세계문학은 여기 없어요. 국가는 있지만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아직 우리의 관심이나 시야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경험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전 세계가 폭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런 문제는 개별적인 국민 국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황사, 미세먼지 같은 것도 다 마찬가지죠. 전 지구적 문제입니다. 전 지구적 차원에 있는 세계적 문제들이 있어요.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야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필요한데, 이게 세계인이 되어야 해요. 한국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세계인, 혹은 세계시민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국민문학과 세계문학

국민문학을 가지고 세계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그걸 다루려면 다른 문학이 있어야 해요. 중간 단계에 있는 것도 있습니다. 국제문학(International Literatur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많이 쓰이는 개념은 아닌데 저는 많이 안 쓰이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국민문학(National Literature)이라는 말은 많이 쓰는 데 그것보다 시야를 더 확장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문제들이 글로벌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준해서 인문학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문학이라는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같은 대작을 대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연합군인 프랑스 군대 대략 육십만 정도가 러시아에 쳐들어왔었고 거기에 러시아인들이 맞서 싸우는 그런 내용입니다. 톨스토이는 그 전쟁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작품 속에서 러시아인들이 프랑스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깨닫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작품을 국민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러시아국민문학입니다. 그런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국민문학은 춘향전같은 작품이 있겠지요.

이 작품들이 그 자체로 세계문학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민문학이 올바른 세계문학이라 공표하기는 어렵습니다. 조금 다른 층위이고, 뭔가 다른 요건이 더 충족되어. 근데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수준이 다릅니다. 전작인 톰 소여의 모험에서 어떤 도약이 있어요. 톰 소여의 모험에서는 두 소년의 우정을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두 사람의 인류애를 그리죠. 주인공인 헉핀은 모험을 하던 중 흑인 노예인 ''을 만나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나이로 보면 부자(父子)관계에요. 만약 짐이란 흑인이 백인이었다고 한다면 부자관계 비슷하게 됐을 거예요. 그런데 흑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격 없이, 동등한 관계로서 동료가 됩니다. 우정이 쌓이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짐이 도망간 노예였다는 겁니다. 소설의 배경 당시는 노예 해방 이전입니다. 도망 노예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소유물이에요. 헉핀은 그 주인에게 짐의 행방을 알려줘야 해요. 알려주지 않으면 범죄행위고 헉핀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요. 짐의 주인인 백인 아줌마를 잘 알기 때문에, 심지어 그 아줌마가 자기한테 잘해줬기 때문에 짐의 소재를 알려주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헉핀이 굉장한 고민에 빠집니다. 짐과의 우정을 지킬 것인가 법을 따를 것인가 굉장히 고심하다가 마지막에 결단을 내리게 돼요. "그래 좋다, 지옥에 가겠다." 

지옥에 가겠다는 건 뭔가요, 짐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에 의하면 짐의 편에 선다는 것은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이고 속인 것이니, 지옥에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매장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지옥에 떨어지는, 큰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옥에 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대목 때문에 이 작품이 세계문학이 됩니다. 짐과 헉핀의 뗏목은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세계라 하는 것은 나와 타자가 있어야 합니다. ''가 확장되는 게 아닙니다. 나의 확장으로서 가족, 우리로서 국가라는 공식처럼 항상 거기에는 반대편에 대립이 있어야 해요. 그런 외부가 없는 게 세계입니다. 허클베리 핀과 짐이 만났는데 인종적인 타자예요. 신분상의 차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정을 통해서 하나가 돼요. 그럼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세계문학은 그런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런 세계관이 우리에게 부족하죠이게 더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문화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 그게 문학의 과제입니다. 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거는 기대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만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면 없어져도 됩니다근대문학이 한때 대단한 역할을 했지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는 '근대문학의 종언'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문학에 대해서 더 기대하는 게 없다고 그 종말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어요하지만 그렇게 끝낼 것이 아니라근대문학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세계문학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세계문학의 징후들은 있어요몇 가지 표본들이 있고 또 시범들도 있습니다다만 그게 더 많아져야 되겠죠그것이 문학의 과제입니다. 

세계시대를 위한 문학

두 가지의 감각이 다 있어야 합니다.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 한국인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트럼프처럼 되는 겁니다. 인간의 지적능력은 너무나 많이 발전했습니다. 얼마 전에 태양탐사선도 보낼 만큼이죠. 그런데 인간의 도덕적 능력, 양심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지적능력에 걸맞을 정도로 성장해왔는가, 진화해왔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회의적입니다. 세계가 점점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제 초연결 시대라 그러죠, 점점 좁아지고 있어요. 점점 밀착되어있고 그래서 서로 가까워지다 보니까 서로 이제 영향을 너무 많이 주고받아요.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이제 기후문제까지도 주고받습니다. 근데 그런 현실에 다룰 수 있는 우리의 능력, 혹은 책임감은 그에 상응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 능력을 향상할 수 있을까요? 책이나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이란 문화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 몸이 진화하는 걸 기다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체가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 20만 년 정도 걸렸습니다. 과거의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 우리와 다른 것은 조금 못생겼다는 것 정도입니다. 큰 차이는 없어요. 그러니까 몸의 진화를 통해서 무엇바뀌어야 해요. 책을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의식을 바꾸는 것. 그게 유일한 선택지가 아닌가, 그런 인가 바뀌기를 기대하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화가 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은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할 만큼 굉장히 심각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이기도 합니다. 철학자들은 종말의 시대라고 이야기해요. 지구가 이미 끝난 것 아닌가,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설사 그런 비관론이 있다고 한들 여러분에게 권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책임의식,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민이 바로 세계문학의 도래와 연결이 될 것입니다.

18. 09. 25.

P.S. 이어지는 질의응답은 분량이 길어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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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중 가장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새로나온 책들을 둘러보다가 <황인숙인 끄집어낸 고종석의 속엣말>(삼인)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고종석의 독자라면 '인숙낭자'를 기억할 텐데, 바로 절친인 황인숙 시인이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책으로 묶였다. 



"세상에 척진 것도 모난 것도 없는 '고양이 시인' 황인숙과 세상에 까탈스럽고 문제 많은 고종석은 동년배에 성별을 넘어선 삼십년지기다. 맨 무릎을 맞대고 앉은 채 뇌출혈 후유증 이야기와 담배 끊으라는 잔소리가 오가고, 어린 시절 소년잡지 이야기에 순간 그 시절로 함께 돌아가는 영락없는 절친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두 사람의 자잘한 일상과 관심사를 따라가다 보면 편안한 친구들의 평범한 수다를 듣는 것 같다."


밑줄긋기를 읽다 보니 그간에 뇌출혈로 큰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라 한다. 언젠가 들은 듯싶기도 하다. 알려진 대로 고종석은 트위터리언으로도 이름을 날렸고 많은 안티(적)를 만들기도 했다. 인숙 낭자의 질문과그에 답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황인숙: 윤필이는 네가 정치적 포부로 그리는 그림이 보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 네가 펼치고자 하는 정치 프로그램이 획기적으로 가치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궁금해 했어. 자꾸 망상, 망상, 그러지 마. 그저 돈이 없어서 망상이 되고 만 빛나는 신념이 세상엔 얼마나 많을까. 그때 진지하게 편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는 자꾸 농담으로 돌리려 했지…. 

너는 아마 트위터로 가장 크게 망한 사람일 거야. ‘망한’을 ‘망가진’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꽤 될 거야. 숱한 적을 만들고 친구도 여럿 잃었지. 트럼프도 망 트위터리언의 하나인데, 그에게는 지지 댓글도 많을 거야. 나는 네 트위터 글에 구십 분 동의했는데, 나 같은 사람도 적지 않을 거라고 짐작해. 그런데 네겐 악플만 벌떼처럼 따라다녔지. 그 차이는 트럼프에게는 있고 고종석에게는 없는 것, ‘권력’이 만든 거라고 생각해. 상처 많이 받았지? 


 

고종석: 상처를 아예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정도는 아닐 거야. 나는 소셜미디어에다 글을 쓸 때 논쟁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내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무시해 버리는 스타일이니까. 내가 그렇게 적을 많이 만든 것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직함 때문이기도 했어. 예컨대 이런 거야. 몇 년 전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였어. 나는 그 때 트위터에 ‘선생을 20년 이상 가둬놓은 파시스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내가 선생의 책에서 배운 것은 거의 없다.’고 썼거든. 정확한 워딩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암튼 그런 요지의 글을 썼어. 그와 동시에 내 댓글창이 소위 ‘깨어있는 시민’들과 자칭 ‘좌파’들의 욕설로 난리가 났지.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후회하지 않아. 나는 신영복 선생의 책을 다 읽어봤는데, 그냥 세속의 지혜를 단편적으로 모아놓은 거야. 시인 류시화 씨의 번역서나 라즈니쉬의 책이 그렇듯. 사실 그 책들만 못하지. 신영복 선생에 대한 그 트윗 때문에, 당시에 경향신문 지면에 연재하던 〈고종석의 편지〉에서 신영복 선생 비판이 다루어지게 될까 봐 경향신문 편집진은 즉시 〈고종석의 편지〉를 중단해 버렸지. 사실 내가 그 비판을 예고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영복 선생께 보내는 편지를 탈고하기까지 했는데, 마감 직전에 경향이 나를 필자에서 자르더군.



아마도 못 부친 편지까지 포함해 <고종석의 편지>도 책으로 묶여 나오지 않을까 싶다. 황인숙 시인도 올해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시 '간발'을 포함한 새 시집을 나올 만한다. 검색해보니 <꽃사과 꽃이 피었다>(문학세계사)라는 시선집도 2013년에 나왔었다. 못 들어본 꽃소식이다. 뭐, 시집이 나온다고 내게 통지가 오는 건 아니니...


18.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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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닥 재미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의무감으로 읽는 책이 ‘인류세‘를 주제로 한 책들이다. 최근에 나온 건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이상북스).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이 부제. 올여름에 실감하기도 했고, 지구촌의 이상기후는 앞으로 상시화 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미 접하고 있다. 극지방의 빙하가 심각하게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 시스템에 뭔가 근본적인 균열(변화)이 일어난 것인데 이를 가리키는 말이 ‘인류세‘다(인류세에 진입함으로써 5만년후에 도래할 예정이었던 빙하기가 13만년 뒤로 늦춰졌다고 한다). 재미없다고 방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인류세라는 말은 인간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라는 뜻으로 폭넓게 쓰이기도 하는데 <인류세>의 강점은 매우 엄밀하게 정의하면서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성찰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은 45억 년 된 지구에 현생인류가 등장해 살아온 지 20만 년이 지나 역사상 현 시점, 즉 ‘인류세’(Anthropocene)에 도달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암중모색하는 책이다.˝

인류세를 다룬 책은 가이아 빈스의 <인류세의 모험>(곰출판)이나 다이앤 애커먼의 <휴먼 에이지>(문학동네) 등이 나와있고 기후변화를 다룬 몇몇 책들도 관련서로 분류할 수 있다. 조금 딱딱하게 쓰이긴 했지만 해밀턴의 <인류세>가 기본 개념과 문제에 대한 압축적인 소개를 제공하고 있어서 출발점으로 유용한다(예상컨대 관련서는 계속 나올 것이다). 지구 시스템 학자들은 현재의 추이가 비가역적이라는 데 생각이 일치하지만, 향후 몇십년간의 인류의 선택이 그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그 책임을 떠안게 되는 시대다. 과연 그 책임을 제때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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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댁에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가벼운 책을 하나 빼들었다. 이동중에나 잠시 카페에 들러 읽을까 해서인데, 책장에서 손에 집힌 책이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21세기북스)이다. 대학에서 ‘행복의 과학‘이라는 인기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는 저자의 행복학을 기대하게끔 하는 책. 30년간 이루어진 행복 분야의 연구를 갈무리하여 ˝굵직한 결론들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생존과 맞물려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성과 본능 사이의 갈등과 줄다리기가 인간의 모습이라고 지적하면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경험이기에 의식이나 생각으로부터 분리시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의 일부만 행복과 연관되기에 생각을 바꿈으로써 행복해진다는 건 극히 제한적으로만 옳다. 착각에 가깝다는 것이다. 행복을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로 전환한 것은 타당하며 동의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저자의 서술이 정연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강의로서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 책의 서술로는 비약과 공백이 많다. 게다가 이성과 의식, 본능과 감정 등의 개념을 별다른 정의 없이 혼용하고 있어서 독서의 어려움이 가중된다. 참지 못하고 이런 지적을 하게 만든 대목이다.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 데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 보다 중요한 원인을 못 보게 만들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주술사의 현란한 기우제 춤 때문에 비가 온다고 믿었다. 춤은 눈에 띄지만, 비의 원인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여러 번 읽었는데, 저자는 이성적 능력을 기우제 춤에 비유한 것으로 읽힌다. 옛사람들이 기우제 춤을 믿음으로써 비의 진짜 원인에 대한 이해에는 이르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이성적 능력을 신뢰한다면 행복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지. 나로서는 기우제 춤 같은 주술적 행위를 이성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도 특이하게 여겨지면서(그런 주술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반이성적 활동이 되는가?) 동시에 저자는 ‘이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비를 행복이라고 해보자. 이 비가 언제, 왜 내리는지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습도나 풍향 같은 자연 요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주술사의 춤이나 기우제 음식 같은 가시적인 것에 현혹돼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단비(행복)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습도나 풍향)을 말해주는 것이 아마도 저자가 소개하려는 행복의 ‘과학‘인 듯싶다. 그런데 그 과학은 이성적 사고와 무관한 것인지. 이성적 사고를 주술사의 춤에 비유하면 과학은 대체 어떤 능력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가. 가시적인 것에 현혹되어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고 했는데, 그때 행복은 가시적인 것인가, 비가시적인 것인가. 행복을 본다는 것은 볼 수 없는 것(보여질 수 없는 것)을 본다는 뜻인가.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행복을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는 인간의 뇌다.˝

나는 이런 비유(우회)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행복은 뇌의 문제이고 뇌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바로 주장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실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의 과학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뇌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뇌과학의 성과를 통해서 행복에 대해 재고해볼 수 있는 것. 그런데 저자가 분리시키려고 하는 사고(생각)도 뇌의 활동이다. 이성 역시 뇌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행복을 ‘뇌=본능=동물‘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성을 그 대척점에 놓고 있는데 이는 무리한 단순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술사의 춤만 보고 있어서 저자의 논의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주장을 매끈하게 이해하는 독자들의 뇌가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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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추석 연휴의 첫날이다. 가까이에 양가 부모님이 사시기 때문에 특별한 이동이 필요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기에 단촐한 식사모임으로(올해는 동생들의 근무가 엇갈려서 모두 모여 식사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모든 명절행사가 종료된다. 오늘 같은 날 송편을 만들던 때도 있었으나 기억에 가물하다. 음식도 최소화해 가는 중이고 올해는 갈비찜도 줄이셨다. 하기야 부모님과 식사하는 일 자체가 일년에 몇회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설이나 추석이면 가족이 화두다. 가족들끼리 모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마 가족을 떠나 있어도 그렇지 않을까.

추석의 독서거리로 가족을 떠올린 것은 전혀 새롭지 않다. 그래도 며칠 전부터 어떤 책을 고를까 궁리했다(기껏해야 일이분 머리를 쓴 것도 궁리라고 한다면). 그래서 고른 책이 사회학자 김찬호의 <한국인의 생애>(문학과지성사)다.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부제. 2009년에 나왔던 책의 개정판이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한국인의 평균치적 삶의 경로를 열다섯 개의 장면으로 구성했다. 대략 그렇게들 살았지, 라거나 이렇게들 사는구나, 라는 감상을 끌어내는 책이다.

사회학자 노명우의 <인생극장>(사계절)은 한 편집자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기하게 된 책이다. 저자가 돌아가신 부모의 생애를 객관적 시점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아들이 대신해서 쓴 부모의 자서전이다. <생애의 발견>에 견주면, 평균인이 아닌 고유명으로서의 한국인의 삶을 그려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나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야 한다.

그리고 역시 사회학자 조은주의 <가족과 통치>(창비)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정리한 것으로 ‘한국의 정상가족 만들기 프로젝트‘를 실증적으로 짚어본 책이다. 김이경의 <이상한 정상가족>(동아시아)을 읽은 독자가 추가적으로 손에 들 만하다.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가 부제. 산아제한부터 출산장려까지 지난 시대 국가의 가족정책의 변모는 그대로 한국의 가족사를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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