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강의에서 오랜만에 다시 읽은 김에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 대해 적었다...

















한겨레(21. 05. 14) 사랑, 황홀한 기쁨에서 두려운 열정까지


이반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은 <아버지와 아들>을 포함한 몇권의 사회소설이지만,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로는 <첫사랑>(1860)이 유력하다. ‘첫사랑’이라는 제목의 기대치 덕분이겠다. 하지만 작품에서 첫사랑이 갖는 비중은 절반쯤이고, 나머지 절반은 치명적 사랑, 곧 열정에 할애된다. 소설에서 첫사랑의 주인공은 화자인 블라디미르이지만, 열정의 주체는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이다. 두 부자의 사랑 이야기를 나열하면 ‘아버지의 열정과 아들의 첫사랑'이 된다고 할까. 문제는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사랑한 데 있다.


발단은 블라디미르가 열여섯 살 때인 1833년 여름에 벌어진 일이다. 여느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별장(다차)에서 여름을 나던 무렵 새 이웃이 등장한다. 가세가 기운 공작부인과 그 딸이다. 스물한 살의 매력적인 처녀 지나이다는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초면부터 블라디미르를 압도한다. 아직 미성숙한 소년에 불과했지만 블라디미르는 곧장 지나이다에 대한 사랑에 빠지며 첫사랑의 달콤한 감정에 빠져든다. “감동받은 영혼의 상냥한 마음과 부드러운 소리, 선량함과 평안” 등이 그가 경험하게 된 “첫사랑의 감동이 주는 황홀한 기쁨”이다.


사실 이러한 사랑과 평행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관계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암시적으로만 전달된다. 아직 어수룩한 블라디미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그는 그들의 관계를 보고도 보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의 행동과 지나이나의 심리 변화를 관찰하지만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밀회 장면을 목격하고 비로소 그들의 관계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인 것이군, 이것이 열정이야!”라는 발견은 더불어 “그런 사랑 앞에서 나의 설렘과 사랑의 고통은 너무나 어린애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블라디미르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은 첫사랑의 설렘과 흥분으로 시작하여 그것이 열정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사랑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경우는 어떨까. 실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는 연상의 어머니와 정략결혼한 사이다(실제로는 여섯 살, 소설에서는 열 살 연상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이 밖으로만 돌았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질투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의지였다. 인간에게는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하지만 그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의지다. 무언가를 원하는 능력을 갖게 되면 자유를 얻고 다른 사람들도 이끌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믿음이자 교훈이었다.


그렇지만 지나이다와의 사랑은 아버지의 생각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던 날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거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기 때문이다. 아들 블라디미르가 겪은 사랑이 풋풋한 첫사랑이었다면 중년의 아버지가 같은 상대와 경험한 사랑은 두려운 사랑으로서의 열정이었다고 할까. 짐작하건대 그 두려움은 자기 의지의 한계와 직면할 때 느끼게 되는 두려움일 것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언제까지 읽힐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첫사랑의 성격과 의미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 읽을 거리가 된다면 첫사랑에서 치명적 사랑에 이르는 사랑의 스펙트럼을 여실하게 보여주어서가 아닐까 싶다.
















P.S. 투르게네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레너드 샤피로의 평전 <투르게네프>가 가장 자세하다. 올랜도 파이지스의 <유러피언>은 투르게네프와 그의 평생의 연인 폴린 비아르도 부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강의중에 언급한 책으로 이샤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도 투르게네프에 관한 유익한 평문을 포함하고있다. 벌린은 투르게네프 문학의 애독자이자 옹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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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5년 전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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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4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 공지다. 제주 한라도서관에서 6월 8일부터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전(10시-12시)에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을 진행한다. 비대면 줌강의로 진행하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신청은 도서관 홈피를 통해서 하실 수 있다 https://www.jeju.go.kr/lib/event/program/add.htm?act=view&program=4730).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1강 6월 08일_ 최인훈, <광장>



2강 6월 15일_ 김승옥, <무진기행>



3강 6월 22일_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4강 6월 29일_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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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42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번째 산>에 대해서 적었다. 브룩스의 책은 전작 <인간의 품격>을 인상적으로 읽어서 마저 읽게 된 책이다. '두번째 산'은 에드먼드 버크와 밀턴 프리드먼의 세례를 받은 저자가(정치적 보수주의+경제적 자유주의)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안으로 읽힌다...
















주간경향(21. 05. 17) 함께할 때 맛볼 수 있는 기쁨의 세계


‘두 번째 산’이라는 제목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인생에는 두 개의 산이 있다”라는 저자의 비유를 받아들이면 두 번째 산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첫 번째 산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인생의 목표와 지향이라면, 두 번째 산의 무게중심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라는 구분이 그 차이를 잘 짚어준다. <두 번째 산>에서는 두 번째 산의 의미를 체계화하고 다양한 실례를 통해 ‘두 번째 산 오르기’를 보여준다. 물론 그의 의도는 많은 독자가 그의 견해에 공감하고 ‘두 번째 산’ 등정에 동행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차이가 좀 있겠지만, 저자가 진단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초개인주의 문화의 팽배에 있다. 그의 판단에, 초개인주의 문화의 발흥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바로 전시대까지 미국사회는 여전히 권위에 대한 존중이 강요됐으며, 개인보다는 조직과 집단이 우선시됐다. 하지만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두한 새로운 반문화(카운터컬처) 운동은 “나는 자유다”를 새로운 도덕 생태계의 구호로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개인과 개인주의 라이프 스타일이 칭송됐다. 그렇게 반세기를 거치면서 개인주의 문화는 초개인주의 문화로까지 진화했는데,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하려 한다. 개인주의 문화가 그토록 예찬하는 자유가 과연 인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치명적인 결함은 그것이 아무런 방향성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치적 자유는 위대하지만, 그 확장판으로서 개인적·사회적·정서적 자유는 “완전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유주의와 함께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능력주의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능력주의는 공동체를 각 개인이 서로 경쟁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 개인의 권리가 공동체적 가치나 덕목보다 우선하며, 자연스레 공동체적 유대는 파괴된다. 서로가 남들보다 더 잘나고 싶어 경쟁에 몰두하지만, 이 경쟁은 어느 순간 무의미해진다. ‘개인의 해방’은 한편으로 우리를 공동의 삶으로부터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저자 브룩스는 이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반란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 문화가 전시대의 획일주의에 대한 반란이었다면, 두 번째 산으로 비유되는 두 번째 반란은 이 ‘반란에 대한 반란’이다. 개인주의가 행복의 추구를 지상의 가치로 간주한다면 두 번째 산에 오르는 이들은 인생의 의미와 도덕적 기쁨을 추구한다. 행복이 자기만족의 상태라면 기쁨은 자기 초월의 상태와 연관된다. 자기만의 관심에 갇혀 있다면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두 번째 산의 세계는 자기도취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타인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기쁨의 세계다.

첫 번째 산이 개인주의적 세계관과 연결된다면 두 번째 산은 관계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다. 개인주의와 그 진화적 형태로서 초개인주의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삶에 이르게 할 뿐더러 타인과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약화시킨다. 브룩스가 제안하는 관계주의는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간에 지속가능하면서 더 나은 문명으로 나아가려는 희망을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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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4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로쟈 > 아룬다티 로이가 말하는 자본주의

3년 전에 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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